[pkmn] 글

10개월간의 밀회 8 (중단)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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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열심히 노인분들을 도와드리며 숨어지내던 와중에 손녀가 할머니네에 놀러왔고 그 때 둘이 처음 만났다는 것이다. 피오니는 여자친구가 너무나 좋단다. 그 피오니가 사랑을? 순무는 약간 과장스럽게 놀리는 척을 해보였다.

"누가 먼저 고백했냐? 너지?"

왼손으로 턱을 괸 상태에서 턱짓을 하면 피오니는 고개를 저었다. 순무는 낄낄 웃고, 자세를 바르게 한 뒤 컵을 들고서 차를 마셨다.

"네가 누군진 알아?"

"평생 숨길 수도 없으니 말해버렸지. 엄청 놀라긴 했지만 왜 내가 도망쳤는지는 묻지 않더라구. 그런 점도 마음에 들었어. 다 각오했다는 느낌이랄까……."

아마 피오니의 여자친구는 피오니가 짊고 있는 마음의 짐을 함께 덜어가기로 한 모양이다. 피오니가 가진 걸 모두 내려놓고 조용한 곳에서 느지막한 새 인생을 시작한 것을 이해해 줘서 다행이다.

단순무식하고 엉뚱해 보여도 피오니는 현역 때 팬이 꽤 있는 편이었다. 지금도 가끔 피오니를 대장이라 부르며 행방을 쫓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사히 살아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겠냐고 권유하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한다. 피오니는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엔 다녀야 하지 않아? 숨어지내려면 많은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쬐끔이긴 하지만 퇴직 연금이 나오고 있어. 형이 날 싫어하긴 해도 굶어죽게 하진 않을 건가 봐."

복잡한 문제를 태평하게 입에 올리고는 현재 자신은 마을의 농삿일을 도우며, 그 곳의 촌장님에게서 보수를 받으면서 지낸다고 덧붙인다. 그리고는 촌장님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마을에서 피오니 다음으로 젊은 오십대의 촌장님(연로한 주민들 대신 잡일을 도맡기 때문에 촌장이다)은 굉장히 좋으신 분이지만 마을의 부흥을 위해 하는 일들이 지나친 욕심에 가깝다고 한다. 마을에 전해져오는 전설을 이용해 기념품도 구상 중이고 어떻게 하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을지 늘 고민한다고 말했다.

순무는 미래에 자신이 용암체육관의 관장이 된다면 같은 고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암마을도 고령층이 많지만 그곳은 오래 전부터 온천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기에 관광객이 끊이지 않지만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피오니가 머물고 있는 프리즈마을은 용암마을과 달리, 안타깝게도 딱히 내세울 게 없어 보였다.

"하루종일 촌장님만 따라다니면서 일을 하고 계획을 들어 주고 있는데, 암만 생각해도 추운 설원을 관광지로 만드는 건 어려울 거란 말이지."

스키장이라도 세우면 몰라! 그렇게 말한 피오니는 남아 있던 차를 후루룩 다 마시고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 너무 오래 자릴 비우면 마을이 걱정되거든."

다음에 또 보자, 하고 피오니는 순무의 아파트를 나섰다. 순무는 만감이 교차했다. 이 사태에 대해 선생님에게 말해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순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가는 피오니는 종종 프리즈마을에서 나와 순무네 아파트로 찾아왔다. 순무는 그것을 비밀로 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따라붙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곤 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난 뒤라 그럴 일은 없었다.

순무는 여분 열쇠를 주고는 언제든지 집에 와 있어도 된다고 허락을 해 주었다.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머나먼 곳으로 달아나버린 피오니의 유일한 친구였기에 쉽게 관계를 떨쳐낼 수가 없었고, 떨쳐낼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지 가끔 피오니는 프리즈마을에서 재배한 식재료들을 들고 왔다. 손재주가 뛰어난 그답게 그것들로 솜씨좋게 요리를 하곤 했다. 그러면 순무는 돌아오는 길에 술병을 사들고 왔고 둘은 밤늦도록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면서도 순무는 한 번도 피오니의 여자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딱히 별 상관은 없었기에, 섭섭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피오니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순무뿐일 것이고 그 사실은 약간의 고양감을 느끼게 했다. 피오니 또한 순무에게는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로지 둘만의 시간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피오니가 순무네 아파트로 찾아오는 일이 줄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놀러오더니 이제는 연락조차 없었다. 순무는 피오니 본인 혹은 프리즈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본인에게 물어볼 수 없었고,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피오니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피오니를 기다리는 동안 권수가 한 번 가라르로 찾아왔다. 권수는 당분간 가라르에 오지 못 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서 호연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권수가 머물 동안 열과 성을 다해 그를 대접했다. 그러나 권수도 오십이 훌쩍 넘은데다 젊을 때부터 몸을 혹사한 탓에 귀국일에는 영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휴일날 집에서 쉬던 순무는 드디어 피오니의 전화를 받았다. 당연히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듣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피오니는 침착하게 그간 쌓인 이야기를 꺼냈고 순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기가 생겼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순무는 방금 들은 게 맞는지 되물었다. 피오니와 여자친구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고? 너무 놀란 나머지 손까지 떨려왔다. 피오니는 자신도 믿을 수 없다면서 그동안 여자친구를 챙기느라 찾아갈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피오니의 여자친구는 다른 마을에 살았기에 여유가 있을 때마다 순무네 아파트 대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 그 분의 부모님은 아신대?"

갑자기 생긴 아이인 건 아닐지, 걱정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피오니는 밝은 목소리로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순무는 손톱으로 턱을 긁으며 혼전…… 결혼식도 안 올렸는데 정말 괜찮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읽은 피오니는 가라르에선 사실혼까지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된다며 최대한 빠르게 혼인 신고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선은 초기였기에 여자친구를 돌보는 것이 먼저라고. 열심히 설명하는 피오니의 말을 듣던 순무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행이라며 그와 그의 여자친구와 새로운 생명에 축복을 보내주었다.

얼마 후에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피오니가 순무네 아파트를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이지만 피오니는 언제나와 같은 밝은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또 품에 한가득 채소를 안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면 순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피오니는 오랜만에 신선한 재료들로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순무는 식탁에 앉아 그것들을 다듬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눈에 띄고 싶지 않아 결혼식은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도 아쉽지 않아?"

"당장은 괜찮아. 나중에 니아가 크면 의상을 맞춰서 다같이 해 볼 생각이야."

"니아?"

"얘기 안 했나? 우리 애 이름이야. 아직 딸일지 아들일진 모르겠지만, 내 이름 끝자랑 여자친구 이름 끝자를 땄어. 그래도 중성적인 이름이라 괜찮지?"

"좋은 이름이네. 의미 있기도 하고."

세간에는 리마인드 웨딩이라는 문화가 있다. 니아가 성인이 될 즈음 셋이서 오붓하게 턱시도나 드레스를 갖춰 입고 추억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늘 개구쟁이같던 피오니가 철든 것 같아서 순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피오니가 손수 차린 음식을 먹으며 회포를 풀었다. 여자친구가 순무를 한 번 만나고 싶어한다든가, 요즘 로즈의 행태라든가, 마스터드의 근황이라든가, 프리즈마을 촌장님의 변함없는 마을 부흥 계획이라든가, 남들에겐 시시콜콜하지만 둘에겐 중요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피오니는 오랜만에 하룻밤 묵기로 했다. 순무가 스타디움에 나가야 했기에 둘은 일찍 잠들었고, 다음날 오후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피오니는 벌써 떠나고 없었다.

피오니의 여자친구는 당분간 일을 쉬고 그녀의 부모님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며, 피오니는 전처럼 순무네 아파트를 찾아왔다. 마을의 일손을 돕다가 여유가 생기면 또 잘 키운 싱싱한 식재료들을 품에 안고 왔다. 순무 또한 당분간 권수를 만날 수 없다는 외로움을 다시 피오니와의 시간으로 채워갔다. 집구석의 어딘가가 고장나면 금방 고쳐주고, 청소도 빨래도 다 해놓으며, 순무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저녁도 차려놓고서 객식구로서의 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가끔 그는 여자친구네 부모님의 집에 찾아가 여자친구와 아이의 상태를 보고 왔다. 그럴 때마다 둘 다 건강해서 다행이라며 얼굴에선 하루종일 밝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피오니가 짓는 미소는 보는 사람마저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미소였기에 순무는 늘 그를 보면 미소가 지어졌다.

그 어느날은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신 날이었다. 먼저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식탁 뒷정리와 설거지를 하자는 다소 유치한 내기를 한 둘은 거침없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방광을 비우고, 다시 먹고 마시기를 반복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들이라 이상한 데서 불타오른 둘은 위장이 한계까지 차오르자 잠시 쉬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주제는 젊음과 활기 같은 것으로 흘러갔다.

"이렇게 많이 마실 수 있는 것도 아직 젊으니까 가능한 거지."

안 그래? 하고, 피오니는 물을 마셨다. 순무는 열이 오를대로 오른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나이 먹어도 건강이 최고인 것 같아. 난 그래서 마을 일을 노동이 아니라 운동이라 생각하면서 하는 중이야."

"굉장히 긍정적이구나, 너."

피오니다운 말에 순무는 피식 웃었다.

"배가 나오면 정력이 감퇴된다는 얘기도 못 들어봤어?"

그 말에 순무는 깜짝 놀라고 무슨 얘길 하냐며 큰소리를 쳤다.

"이거 되게 중요한 거야. 만족하지 못해서 갈라서는 부부가 많대."

꽤 진지한 피오니를 본 순무는 권수를 떠올렸다. 선생님도 이제 옛날 같지 않기는 하지…….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난 늙어서도 실망시키지 않는 남편이 될 거야."

"그러다가 리그팀 하나 만들겠는데?"

농담으로 받아치긴 했지만 방금 들은 말이 거슬렸다. 권수와 나이차가 있는 순무는 서로가 늙어서도 잠자리에 만족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빠진다. 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피오니는 지금 당장 그럴 수가 없다며 술 냄새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도 아직 젊어서인지 들끓는 욕구를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더라고."

순무는 음식을 씹어먹으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사귀었던 기간에 비해 아이가 빨리 생겼달까……."

"그런 고충이 있구나. 그, 혼자 하면 되지 않냐?"

뭐라 말하기 어려워진 순무는 검지로 턱을 긁으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피오니는 주먹으로 식탁을 가볍게 탕 내리쳤다.

"그거랑은 틀려! 상대방의 체온이 없잖아. 이렇게 마주보고 서로 만져야 좋은 거지."

작게 볼멘소리로 궁시렁대는 것을 무시한 순무는 늘 권수와의 잠자리에서 받던 애정어린 동작들을 떠올렸다. 격정이 찾아오기 전에 어루만져주던 손길, 매료되는 눈빛, 낮지만 확실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목소리. 머릿속에 그것들이 떠오르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음… 그렇긴 해."

"넌 여자친구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술김에 발끈한 순무는 대신 자신에게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 말을 들은 피오니는 몇번이나 눈을 끔뻑댔다. 밝은 녹색 눈동자가 계속해서 자신을 쳐다보자 순무는 그 시선을 피했지만 결국엔 말해버리기로 했다. 피오니도 형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알려주었는데 순무라고 말 못 할 것이 없었다.

"내가 여기 가라르에 오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자 이유라고 하면 되려나."

순무는 미리 썰어놓았던 나무열매 조각을 집어먹으며 운을 뗐다. 피오니도 술을 마시며 잠자코 이야기를 듣는다. 권수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린시절의 사소한 거짓말로부터 시작된 인연에 대해 말해주자 피오니는 지금과 달리 겁많은 꼬맹이였냐며 웃었다. 함께 웃은 순무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선생님네 집에서 살게 됐어. 선생님은 정말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할 정도로 혹독하게 교육을 시키셨어. 별명이 미친 보만다였다 하니 말 다 했지. 하지만 덕분에 나는 많은 걸 배웠어. 기본도 안 잡혀 있었는데 선생님 밑에 있으면서 리그에 나갈 만큼 실력을 쌓았어."

"넌 엄청나게 노력하는 성격이니 당연했겠네."

피오니는 감탄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도 많이 부족했어. 선생님은 아직 이르다고 하셨는데 내가 마음대로 신청서를 넣었어. 당연히, 바로 떨어져서 집으로 돌아갔어. 지금 생각해도 웃긴 일이야."

"맞아,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 게다가 어렸으니 뭐……."

"그게 당연한 건데 난 그 때에도 그냥 철없이 생각했지. 그래도 운좋게 다음해는 리그 배틀 방식이 바뀌었고, 나는 친하던 친구랑 팀을 짜서 둘이서 특훈을 했어. 아쉽게도 호연 리그에서는 챔피언과 맞붙었다가 떨어졌지만."

"아, 그래. 옛날에 여러 지방에서 트레이너들을 스카웃해오곤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너였구나."

순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시에 어떻게 스카웃되었는지 설명을 해주었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서 튀어나오는 젊은 권수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제멋대로 짧게 깎은 머리, 맹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는 눈, 짧은 콧수염, 날렵한 얼굴형. 지금과 꽤 다르다.

"그러고보니 그 때 온 사람들도 지금은 별로 안 남았겠지? 많이들 고향으로 돌아갔을 거야."

"아마 그럴 거야. 난… 선생님과 한 약속이 있어서 당장은 돌아갈 수 없어."

"선생님이라는 분을 엄청 좋아하는구나."

피오니가 놀리듯이 웃자 순무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좋아했어. 나를 이끌어주시는 모습이 멋있었거든. 리그장에서 배틀하는 걸 보면 누구든 반할 수밖에 없어."

피오니는 나중에 찾아봐야겠다고 말한 뒤 허리를 펴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과 무슨 약속을 했냐고 물었다.

"실력을 쌓고 가라르에서 유명해지면 호연으로 돌아가서 불꽃타입 체육관 관장을 할 거야. 그렇게 약속했어. 거기가 내가 나고 자란 용암마을이라는 곳인데……."

순무가 그리운 고향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는데 피오니가 손을 들어 말을 끊는다.

"저기, 순무."

"왜?"

"너… 선생님이랑 자기도 했어?"

당황한 순무는 잠깐 입을 닫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찰나의 침묵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진다. 진정하려는 것처럼 컵에 있던 물을 마신 순무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모두 성인이고 피오니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였기에 대답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지금은 선생님이 워낙 바쁘셔서 가라르에 안 오신지 엄청 오래됐긴 했지만, 가끔 국제전화로 안부를 묻고 있어."

왠지 조금 더 뜨거워진 것 같은 얼굴에 컵을 갖다대고 대답해도 뺨에 오른 열은 쉽게 가라않지 않는다. 피오니의 표정을 살피면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있다. 무얼 고민하는 건지, 언짢은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럼 너…… 남자랑 하는 거에 거부감 없겠네?"

꽤나 단순무식한 질문에 김이 샌 순무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친구가 이런 취향이면 알고 싶은 것도, 묻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많겠지. 그래도 피오니가 경멸하는 반응 없이 애써 조심스럽게 묻는 태도가 나쁘지 않게 다가왔다. 순무는 대답을 정리하기 위해 뒤통수를 두세번 긁적였다.

"글쎄… 나는 선생님이 첫사랑이라서. 어차피 사랑에 성별은 관계 없는 거잖아?"

대답을 마치자마자 피오니가 얼굴을 들이대길래 순무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었다.

"순무! 나 부탁이 있어."

"뭐, 뭐야, 갑자기……! 놀랐잖아."

피오니가 말하길, 어찌 됐든 좋으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자신의 성욕 해소에 어울려 달라는 것이다. 분명 가라르어로 말하고 있고 다 이해했는데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니아가 태어날 때까지, 열 달만 나랑 어울려줘!"

너무나 간절해보이는 피오니에게 순무는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성욕 해소라면 그, 그런, 그런 짓을...

"그럼… 너랑 '그걸' 해야된다는 소리야? 미쳤어?"

놀란 순무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피오니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그런 게 아냐! 그냥 어… 서로 몸만 만져주고… 그런 거랄까……."

체온이 그리워, 순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피오니의 마지막 말에 한편으로는 동의하고 있었다. 벌써 권수를 만난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혼자 외로움을 달래는 것에도 지친 것이다. 성별을 떠나 같은 인간으로서 피오니의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연인 사이에 있어서 최고의 애정 표현일 터인데 할 수 없으니 괴로운 것이다.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서로 윈-윈 아닐까. 피오니가 그렇게까지 나쁜 놈도 아니고.

술김에 한 결정이었지만, 순무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뒷내용이 떠오르지 않기도 했고 피오니의 캐릭터를 너무 파괴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음. 피오니는 이런 캐릭터가 아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기다린 분이 있다면 죄송할 뿐.

아무튼 그래서 둘이 한 달에 몇 번씩 만나면서 20번이 안 되게 만났을 거라는 됴님의 한 마디

10개월 후 니아가 건강하게 세상에 나오고 둘은 그동안의 일을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정말 깔끔하게 거기서 끝남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은 노장 순무는 호연에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을 따르고 있는 단-소-금-두를 떠올리고는 가라르에 남아 권수가 자신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계속 이어가기로 하며 이야기는 끝납니다.

진행도는 거의 막바지였지만 역량부족으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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