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10개월간의 밀회 7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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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을 뜨겁게 보낸 이후 둘은 서로에게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권수가 호연으로 돌아가고나서 순무는 다시 삶의 활기를 되찾았다. 더 열심히 훈련을 하고 더 열심히 공부를 하며 가라르에서 이뤄지고 있는 다이맥스 현상 연구와 홍보에 일조했다. 불꽃이라는 뜻을 풀어낸 187번의 등번호를 뜨겁게 빛내기 위해, 권수와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휴일에도 밖으로 나가서 포켓몬들과 뛰어다니곤 했다.

가장 최후의 목표는 관장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전에 다시 선생님과 맞붙어보고 싶어졌다. 가끔, 리그에서 느꼈던 감동을 떠올리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의 환호와 옆에 선 아단, 앞을 지키고 있는 포켓몬, 그 너머에서 둘을 기다리던 챔피언과 권수…….

십여년동안 계약을 연장하며 가라르에서 지내는동안 권수와는 계속 간지러운 내용이 담긴 엽서를 주고받고, 새로 나온 휴대기기인 포켓내비를 구매하여 교체하였고, 아단은 호연에서 코디네이터로 데뷔했다. 가라르의 계획도시인 슛시티도 완공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삼십대에 접어든 순무는 가라르에서 어느정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언제나 포기하지 않고 항상 노력했고 연구와 실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태도가 좋다며 다들 칭찬을 해주었다. 처음엔 언어도 잘 몰랐는데 지금은 유창하게 현지인들과 대화도 가능했고 적은 인원이지만 그를 지지해주는 팬들도 생겼다. 그래도 아직은 치열한 이 세계에선 무명에 가까웠다.

권수는 가라르에 몇번 방문하고서 호연리그에 무엇을 보완해야할지, 개선할 점이 어떠한지에 대한 객관적인 감상을 담은 기행문을 썼다. 그냥 취미로 쓰던 것을 누군가가 협회에 전했고, 협회의 반응은 썩 나쁘지 않았다. 그리하여 권수는 단순한 사천왕의 일원에서 리그협회의 간부일까지 맡게 되었다. 순무만큼 바빠진 것은 권수도 마찬가지였기에 아쉽게도 슛시티 완공 기념식에는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권수는 텔레비전으로 가라르의 소식을 접했다며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가라르 최북부에 위치한 계획도시 슛시티는 개방하자마자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피어나는 꽃의 형상을 한 슛스타디움에 관해서도 호평이 쏟아지며 도시 자체가 온통 화젯거리였다. 100층짜리 빌딩 내부에는 가라르 리그 본부와 강철타입 체육관이 있었고 관장은 매크로 코스모스의 우수사원인 로즈라는 사람이 임명되었다.

엔진시티 마이너리그 소속 트레이너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순무는 슛시티 완공기념식에서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미소를 지으면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서글서글한 사람이었다. 로즈는 순무의 활약을 언제나 잘 듣고 있으며 다음에는 메이저리그 소속 선수로서 만나자며 그를 격려해주었다. 로즈가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자 순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유명한 로즈 씨, 아니, 로즈 님이 응원해주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엔진시티에서 진행되던 가라르 토너먼트 리그를 앞으로 슛시티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지만, 개최식만큼은 여전히 유서깊은 엔진시티에서 열린다고 하였다. 슛시티의 개방에 힘입어 가라르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왔고 그덕분에 지방 곳곳도 발전을 꾀했다. 엔진 스타디움은 바로 옆에 비즈니스 호텔까지 짓게 되었다. 엔진시티는 이동이 용이한 중부에 위치했기 때문에 타지방에서 업무차 오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객실은 도시의 컨셉을 따서 온통 붉은색 계열로 꾸며졌다.

얼마 후, 순무는 슛시티 완공을 기념하여 개최된 배틀에 출전하게 되었다. 대표로 나온 트레이너들은 관중들에게 처음으로 다이맥스를 이용한 배틀을 선보였다. 그동안 꾸준히 훈련했기에 다이맥스를 하는 것 자체는 낯설지 않았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다 녹화까지 되고 있다고 생각하자 긴장이 되면서 떨렸다.

대전표를 보면 순무의 상대는 강철타입 전문 트레이너였다. 둘의 상성은 불타입이 유리했기에 순무는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고 말았다. 지긴 했어도 너무나 열광적이었기에 모두들 격려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어찌나 열광적이었는지 배틀 필드 곳곳이 불에 탔고 강철에 찍혀서 푹 파여있었다.

자만심이 불러온 패배인 걸까? 아니면 그의 홈 그라운드여서 그랬던 걸까? 알고보니, 그 트레이너는 '강철 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실력이 훌륭한 베테랑 트레이너였다. 자신이 물타입에 꺼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 만큼 그도 불타입에 녹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온 것이다. 순무는 곧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고, 아단 이후로 오랜만에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순무가 피오니와 친해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철 대장 피오니는 유쾌하고 사교성도 좋았으며 조금 엉뚱하고 의리있는 성격이었다. 모두들 순무에게 '미스터'와 같은 존칭을 붙이며 예의를 차렸지만, 피오니는 먼저 말을 낮추고 순무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둘은 누구보다 친한 사이가 되었고 권수를 만날 수 없는 쓸쓸함은 곧 피오니와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피오니는 집에서 거의 내놓은 자식이었다. 순무는 가라르에 처음 왔을 때 느낀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피오니가 가진 어두운 일면에도 공감했다. 피오니는 어릴 때부터 뭐든 잘한 형과 비교당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어릴 때는 그걸 몰랐지만 점점 크면서 그것을 깨닫게 되어 사춘기 무렵부터 지금까지 형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사고뭉치였긴 했지만 형의 무관심때문에 혼자서 놀거나 일을 해결하던 피오니는 덕분에 손재주가 굉장히 뛰어났다. 가끔 순무의 집에 보수할 것이 생기면 공구를 갖추고 와서 뚝딱뚝딱 고쳐줄 정도였다. 트레이너가 아니었으면 무언가의 장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그는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탐사하는 것이 취미였다. 혼자뿐이지만 탐험대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장비를 챙긴 후 가라르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다녔다. 몇년 전에 숲에서 길을 잃고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포켓기어로 지금 어디에 있냐는 형의 전화를 받고서 엄청 웃었다고 한다. 현대 문명까지 잊을 만큼 탐험하는 행위에 매료된 것이다.

순무는 그런 피오니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피오니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외로움을 만들기와 탐험으로 승화시켰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형에 대해 함께 험담을 하고 자주 서로의 아파트로 놀러가서 술을 마시다가 자고 오기도 했다. 가끔 날이 좋을 때면 와일드에리어에서 캠핑도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권수에게서 빨리 우편물이나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던 기대감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권수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있긴 했지만 지금은 피오니와 새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이 더욱 즐겁게 느껴졌다. 점점 그의 세계에 변화가 오고 있었다.

가라르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로즈는 너무나 바쁜 사람이었다. 체육관 관장, 슛시티의 행정 총괄, 매크로 코스모스의 업무까지. 결국은 가라르 리그 위원회(슛시티 개방과 함께 협회에서 위원회로 변경되었다)의 간부 자리까지 맡게 되었다. 자신은 '아는 사람'처럼 날뛰는 체질이 아니라며, 슛시티의 발전에 집중하기 위해 관장직을 그 '아는 사람'에게 넘겼다. 피오니는 그렇게 강철타입 체육관의 관장이 되었다.

당시 가라르의 챔피언이던 노장 마스터드는 로즈보다 피오니를 더욱 마음에 들어했다. 순무가 본 로즈는 항상 좋은 사람이었는데 챔피언마저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내자 의아해했다. 그러던 어느날, 로즈가 바로 자신의 형이라는 피오니의 고백에 굉장히 놀라고 말았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은 분이, 피오니가 그렇게나 미워하던 형이었다니…. 그제서야 마스터드의 태도도 이해할 수 있었다.

피오니가 체육관 관장이 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로즈를 비롯해 가라르 리그 위원회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마스터드는 돌연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은퇴를 하겠다'는 한 마디만을 꺼냈다. 엔진 스타디움의 선수 휴게실에 모든 트레이너가 모여 넋을 놓고 텔레비전 화면만을 보았다. 크게 충격받은 것은 순무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터드는 늘 입던 헐렁한 운동복 대신 정장까지 갖춰 입고 슛시티의 리그장 앞에 서서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위원장이 승부 조작을 제의하였고 저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기에 오늘부로 챔피언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마지막 말을 남긴 그는 자리를 떠났고 수많은 기자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미리 대기 중이던 포켓몬 택시에 올라탄 마스터드는 재빨리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어서 카메라가 꺼지고, 긴급 속보를 알리기 위한 스튜디오로 화면이 바뀌었다. 앵커들은 당황한 것을 감추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슛시티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엔진 트레이너들이 웅성거리며 저런 리그 위원장은 싫다며 마스터드처럼 선수 자격을 버릴 거라고 울분을 토했다. 순무는 당장 휴게실에서 뛰쳐나와 복도로 나갔다. 스타디움 곳곳에서 절망적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수선한 복도의 구석에 서서 포켓내비로 피오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순무는 목소리를 낮추고 너의 형 로즈가 위원회에 있지 않냐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따졌다. 그러나 피오니도 당황한 목소리로 지금 처음 안 사실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형이랑은 연락도 일년에 한두번 할까 말까 한 사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분노를 느낀 순무는 주먹을 쥐었다. 다 버리고 호연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충격에 휩싸인 스타디움이 일찍 폐관하자 순무는 곧장 슛시티로 향했다. 도착하면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기웃거리고 있었고 그것에 화가 난 주민들과 말다툼도 하고 있었다. 지방 전체가 혼돈 그 자체였다. 십여년 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가라르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만났던 협회장-위원회장이 떠올랐다. 다이맥스 기술을 도입하여 가라르 지방을 특색있는 지방으로 부흥시키고 싶다던 포부는 어디로 간 걸까.

순무의 연락을 받고 슛시티의 공원으로 달려온 피오니는 자기가 관련된 일도 아닌데 순무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해왔다. 너무 충격적이라 호연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 피오니는 순무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작 이런 일로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고, 이럴 때 모두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열심히 설득을 했다. 그래, 트레이너들이 합심해서 잘못된 것을 고쳐야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수십분의 설득 끝에 결국 순무는 가라르에 남겠다고 대답했다.

타지방까지 소식이 퍼졌는지 권수도 국제전화를 걸어서 순무에게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 남아서 끝장을 보겠다고 대답하자 권수는 여전히 고집센 녀석이라며 웃었다. 선생님이 강조하던 올바른 마음가짐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마스터드가 현역에서 물러나자 챔피언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동시에 위원장도 파면당해 새로운 인물이 있어야 했다. 슛스타디움에서는 급히 새로운 챔피언을 뽑는 챔피언전을 개최했다. 본격적인 시작 전에, 가라르 리그 위원회는 순수하게 배틀을 통한 배움과 지식을 추구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가치있는 땀을 흘리고 경쟁을 통해 발전하기를 바란다는 위원회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관중들은 크게 야유하며 관중석에 방어막이 쳐져있음에도 생수병이나 신발 등을 던지곤 했다.

순무는 아직 마이너리그에 소속된 트레이너였기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배틀을 보며 누가 챔피언이 될지 추측해보았다. 관장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포플러 관장일 수도, 최근 무섭게 치고 올라오며 호평을 받는 멜론 선수일 수도 있다. 멜론은 출산과 육아를 위해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가 얼마 전에 복귀한 트레이너였다. 금방 다이맥스 기술을 배워서 적응하고는 순식간에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격상해서 화제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고전악투 끝에 피오니가 챔피언이 된 것이다. 순무는 입을 쩍 벌리고 빛나는 트로피에 연신 입을 맞추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모든 소란이 끝나고 가라르 지방이 안정기에 들어갔을 즈음, 피오니는 순무에게 살짝 비밀을 알려주었다. 은퇴한 마스터드가 지금 가라르를 떠나 여러지방을 여행 중이라는 것이다. 피오니를 아끼던 그는 피오니가 챔피언이 됐다는 소식에 먼저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무섭고 딱딱한 분이셨는데 점점 말랑한 성격이 되시는 것 같아."

피오니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피오니가 챔피언이 되고나서부터, 가라르 지방은 부흥하기 시작했다. 엔진시티에서 리그 개최식을 하고 본 경기들은 슛시티에서 진행되었다. 경력을 쌓은 순무는 엔진 스타디움의 리그 보조 스태프가 되었다. 리그 챌린지 시즌이 오기 전에는 불꽃타입 포켓몬들을 잡으러 와일드에리어를 뛰어다녔고, 알을 까기 위해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내달렸다. 1차 시험이 바로 챌린저들이 포켓몬을 잡거나 쓰러뜨리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엔진 스타디움의 관장은 너그럽고 유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트레이너들이 불꽃타입 포켓몬과 대결하여 대비책을 세우라는 뜻을 담아 그가 직접 설계한 시험이었다. 순무는 그의 밑에서 일을 하며 권수 다음으로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배울 게 많은 참스승이었다.

평온한 나날이 흐르고, 순무는 삼십대 중반이 되었다.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어도 약간 어려보이는 건 변함없었기에 좀 더 성숙한 남자답게 보이고 싶었다. 턱수염을 기르던 피오니나 콧수염을 기르던 권수를 따라 수염을 길러볼까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어울리지도 않았고 순무는 선천적으로 체모가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스터드의 은퇴 이후 몇년동안 위원장의 자리는 여전히 공석이었다. 누가 되든 맹비난을 받을까봐 그 자리에 앉기를 피한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새로운 위원회장이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가라르에 퍼졌다. 그는 바로 로즈였다. 로즈는 옛날부터 성실하고 너그러운 이미지 관리를 착실히 해왔기에 어떤 야욕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피오니에게서 언제나 로즈의 성품에 대해 전해들었던 순무는 하필 로즈 씨라니, 하고 어째서 그가 되었는지 의심스러워 했다. 피오니는 당연히 아는 게 없었다.

로즈가 리그 위원장이 되고나서, 챔피언 자리를 유지하던 피오니가 잠적하게 되었다. 가라르는 또다시 난리법석이었다. 언론들은 챔피언의 실종, 챔피언 그는 어디에, 무엇이 켕기기라도 하는가, 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달고서 피오니가 일개 트레이너였을 시절부터 차근차근 분석하기 시작했다. 한 번 전임 위원장에게 데인 후였기에 또 뒤통수 맞을까봐 걱정하는 것도 아주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순무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형이니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항상 밝던 피오니가 남몰래 도망칠 정도라니, 로즈를 더욱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피오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슛시티의 강철타입 체육관은 폐쇄되었다. 순무가 느끼기엔 그것이 형제 관계의 완전한 파탄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빈 자리를 채워야했기에 챌린지도 개편에 들어갔다. 곧, 강철타입이 있던 자리는 악타입으로 변경되었다. 악타입 체육관은 본래 다이맥스가 불가능한 곳에 위치해있었지만 명문으로 불리며 다이맥스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음을 상징하는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꽤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던 피오니가 먼저 순무의 포켓내비로 전화를 해왔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고 화를 내자 피오니는 사과를 했다. 앞으로 형이 리그를 쥐락펴락할 것이 눈에 보여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화를 가라앉힌 순무는 피오니와 만날 약속을 했다.

며칠 후, 순무의 아파트에 찾아온 피오니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늘 언더컷의 머리스타일을 유지하며 스타일에 신경쓰던 피오니가 머리를 아주 짧게 깎고 반삭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턱수염에 이어 콧수염까지 기르고 있었다. 덩치도 좀 더 커진 것 같고, 어딘가 야성미가 풍겨져오는 피오니는 눈빛마저 달라져있었다.

"탐험을 좀 했지."

피오니는 순무와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도 날 모를 곳에 가서 숨어지냈어. 사람들이 나를 잊을 때가 돼서 돌아온 거야."

"어디에 있었길래 챔피언인 너를 몰라?"

"프리즈 마을. 거긴 노인분들만 지내시거든. 내가 일을 잘 하니까 다들 좋아해주셨어."

엉뚱한 소리를 하며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피오니였다. 순무는 그 미소를 보자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프리즈 마을? 설원에?"

"맞아. 마을에 버려져있던 폐가를 하나 얻어서 살 수 있도록 개조했어. 이름하여 피오니 탐험대의 아지트라는 거지. 시간나면 언제든지 놀러와. 난 이제 거기서 지낼 거니까."

"그럼… 이제 리그엔 돌아오지 않는 거야?"

그렇게 물으면 피오니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두 눈을 감고는 머리를 벅벅 긁은 후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콧김을 확 내뿜는다.

"거기서 여자친구가 생겼거든."

피오니는 입을 닫은 후 미소를 지었고, 순무는 닫고있던 입을 쩍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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