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독제독 1
일반 알파 석진
일반 알파, 석진.
담장 넘어 세상이 궁금하지 않다는 건 거짓이겠지.
본가에서 몰래 가져온 책을 읽는 기분은 생각 이상 즐거웠다. 일찍 잠이 든 척 동이 트기까지 독서에 빠졌지만 꾸벅꾸벅 졸거나 아침을 거르는 행동에 며칠 새 발각되어 된통 혼쭐났다. 아침과 저녁,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석진은 늘 혼자였다. 그 시간마저도 휴일엔 넓은 식탁에 혼자 앉아 밥을 먹어야 했다. 굶거나 나중에 먹는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될 금기사항이다. 약간의 외로움은 일반 알파가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그런 외로움이 겹겹이 쌓여 무언가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을 만들었고 가끔 아무도 없는 식탁 앞에서 소리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속눈썹 가득 그렁한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흐르지만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터트릴 수는 없다. 달싹이는 입술은 무언갈 말하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은 없었다. 그런 투정은 배운 바 없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안다고 해도, 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가득찬 울음을 토해내고 싶었던 그날, 석진이 처음 와인을 마신 날이다. 다독이는 말 없이 빈잔에 붉은 와인을 따라주고는 ‘이제 눈물이 날 것 같을 때 드셔요.’ 눈을 깜빡이며 유모를 보던 석진은 살짝 맛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어.”
그러니까 드셔요. 눈물이 쏙 달아나지요. 달짝지근한 와인이 있을 텐데 이렇게 쓰디쓴 와인을 건넨 유모가 원망스러운 찰나 덕분에 이 맛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지하면서 무지하지 말아야 하는 석진의 운명을 아는 듯, 늘 다정할 수 없는 그녀를 석진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신을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방관하면서도 관망하는 시선을 석진이 모를리 없다. 모르는 척하고 싶을 뿐. 아무리 일반 알파라고 해도 보통의 인간보다 습득력이 빠르고 상황 파악이 빠르다.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저항할 의지도 생기지 않을 만큼 석진을 아는 모든 이들이 그를 사랑했고 안타까워했으며 버텨내길 바랐다. 그 마음들이 온전히 닿아 성인이 되고 질문 없이 태형 앞에 설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 마음들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바닥없는 바닥으로 몰고 가는 그 덕분에 숨겨 뒀던 울분을 모두 토해내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이 나를 죽이면 사후에도 돈은 돌려주지 않는 걸로.
‘굳이 내가 너를 죽일까. 내 손을 타지 않고도 죽일 방법은 넘치고 넘칠 텐데.’
‘네, 굳이. 당신이 아니까 상관없어요. 죽을 생각하지 말란 협박도 되돌려 드리죠.’
그래서, 네가 얻는 건 뭐지?
우리 가문의 안녕. ……….
석진은 굳이 뒷말은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만 읊조렸다. 다시 들려오는 태형의 말에 생각은 순간에 흩날렸다.
“혼인이라던가 그런 유치한 생각으로 들어온 거라면 때려치워. 멍청하게 구는 건 봐주지만, 아는 척 아닌 척하는 꼴은 못 보니까. 알잖아, 네 위치 정도는.”
“대답해야 합니까?”
“그래, 이런 식으로 구는 거 말이야. 고상한 도련님인 척하는 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살짝 비웃고 시선을 내린 석진의 턱을 움켜진다. 쏟아내는 눈빛을 받아내는 순간 손끝이 희미하게 떨린다. 주먹을 말아 쥐고 턱턱 막히는 숨을 참는다. 호흡조차 힘들 만큼 시끄러운 냄새가 난다. 이유 모를 분노, 시기, 질투가 한데 모여 오금이 저리고 아랫배가 당겨온다.
“여태 제 페로몬 관리도 못 해. 잔뜩 솟았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태형을 노려보는 것 밖에 할 수 없다는 게 통탄스러웠지만.
“몰랐겠지만, 난 안 가려. 그게 남자건 여자건 베타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태형의 움직임은 빠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주듯 여유롭게 눈을 마주하다가 생긋 웃기도 하며 제 입술을 핥기까지 했다. 입을 맞출 거라고 예고하듯. 석진은 그 자리에 멈춰서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그 시끄러운 향이 색을 담았고 쿠퍼액이 쏟아졌기에 꼴깍 꼴깍 마른침을 삼킬 뿐이다. 시선을 피할 수 없어 내리깔았던 석진은 태형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자 깜짝 놀라 눈을 감았고 순간 벌어진 입술 틈으로 태형의 혀가 들어온다. 뜨겁다. 별 움직임이 없는데도 입천장이 간질거려 어깨가 들썩이고 가까스로 참고 있던 숨을 앗아가자 석진이 숨을 쉬었다. 들이 마시며 자연스럽게 태형의 향으로 한번 더 꿀렁. 긴장한 상태에 액체가 쏟아져 다리에 잔뜩 힘을 주며 비튼다. 순간 넘어질 듯 휘청거리자.
“잔재주 부리는 열성 알파만 못한 줄 알았는데.”
“키스는 계약에 없는 내용 아닙니까?”
“잔재주는 내가 부렸네. 온몸을 들썩 거리는 주제에 섹스 한 번 하는 게 뭐 어때.”
“미친 새끼.”
“울지 말고 와인이나 한잔하고 자. 내일부터 진짜 시작이니까.”
긴장을 하고 있어 인지하지 못 했는지, 붉은 빛이 쏟아지던 창은 어느새 푸른빛. 눈가 가득 눈물방울이 끼었는지 그마저도 흐릿하다. 어느 정신에 욕실로 들어선 것인지 옷을 벗고 보니, 잔뜩 솟아오른 가슴과 성기, 피어오른 붉은 뺨 촉촉한 눈가가 앞날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욕조에 얼굴을 담는다. 쏟아져 내리는 눈물은 아무래도 와인이 없어서 인가 보다. 온몸이 시뻘게지도록 긴 목욕을 한 뒤 나와 와인잔 가득 따랐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술을 따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일과표에 쓰인 5시 기상에 코웃음 쳤지만, 지금은 자정이 지난 시각이고 술은 떫으면서도 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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