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INA :: 미션 II - 죄수의 딜레마
“알료사.”
데얀은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손끝이 차가워진다. 알라티라니움에 급성 감염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들었는데. 데얀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내려보았고, 평소와 다름없는 빛깔을 확인하고 시선을 거두었다.
우리의 어리던 동급생, 좀 더 낯간지러운 호칭을 원한다면 가족. 어릴 적 불안해하며 모르는 세력에게 정보를 넘겼고, 며칠 전에는 케이드의 머리를 내리치고 쩔쩔 메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비난했고 누군가는 혀를 찼다. 나스챠는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데얀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미숙함이 비난의 이유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면 데얀은 오래 전에 배제당했어야 했고, 실제로 배제당했다. 실수를 너그럽게 봐줄 포용심이 데얀에게 있는 것을 아니었다. 데얀은 그저 누군가 몰려 비난당하는 광경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데얀은 주로 알렉세이의 편을 들었다.
“미쳤니?”
이번에는 순순히 그럴 수 없었다. 어렸던 우주 방호복의 소년. 너는 어쩌다가 이렇게 자랐니?
물론 이것은 알렉세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에 그니즈도에 머물렀던 이 중에서 대체 누가 얼마나 평범하고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는가? 세상에 휩쓸리거나, 아니면 세상을 장악해서 생존을 도모하고, 운이 좋게 세상의 흐름에서 비껴나간 이들은 온실 속에 산다는 평가가 따라붙는 시대이다. 죽음이나 새로운 전쟁은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그 세상에서 파멸적인 선택을 한다고 눈에 띄기나 할까? 특별히 더 악랄할까? 후대가 우리를 이르러 비정하고 잔혹한 세대였다고 비난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마저도 현재를 우리가 살아남았을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너는 이 혼돈을 부추기고 치료제를 더 퍼뜨리려고 하는구나. 모두에게 치료제가 퍼질 때까지, 살아남은 자만이 남을 때까지!”
진짜로 그렇게 할 테다. 알료샤 너는. 아나스타시아의 파괴적인 구상과 앞뒤나 염치를 보지 않는 실행력 아래서. 이 애는 뭘 배웠겠는가? 아니, 그걸 왜 나스챠의 문제로 한정지어야하는가? 그니즈도 다닐 시절부터 속내를 감추고 웃을 줄 알았던 녀석이다.
그렇지만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는 법이다. 적어도 망설임이 있어야 한다.
“잔혹하고 파괴적인 일. 그게 네 감상의 전부야? 그렇게 요약하고 싶어? 아니...... 그 정도로는 부족해. 희생자와의 눈을 마주쳐. 그의 삶에 대해 빠짐없이 들어. 그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사실은 얼마나 약했는지 전부 기억해. 그리고 직접 칼을 들고 목숨을 취해. 네가 먹은 치료제가 어디서 왔는지 똑똑히......!”
데얀은 말이 멎었다. 왜 너도 하지 않은 것을 알료샤에게 강요해?
데얀은 숨이 멎었다. 그 애는 전부 알아. 그 희생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
아직도 대제 안에 있는 모양이다. 알 수 없는 소리 들이 속삭였다. 데얀은 이마를 세게 누르며 환청을 몰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환청이 이어서 떠들어댄다.
목숨에 값을 매기고 싶지 않다면 누군가를 먹고 살아남은 목숨을 낮은 것으로 치부하지 마. 희생을 통해 살아남아야 했다는 꼬리표를 데얀 네가 얼마나 아니? 아니다, 모르지는 않겠지. 지금 부지하고 있는 목숨에 누군가의 목숨이 얹히지 않았다고 확신하니? 네 일행 중 델타구역으로 끌려간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집시는 기억 안 나니?
데얀은 바들거리면서 겨우 이 말을 하는 것이 전부이다. 환청에 집어 먹히지 않은 척, 알렉세이를 똑바로 보면서.
“알료사. 너는 그 말을 해서는 안 되었어.”
희생을 딛고 살아왔으면서도 행복을 누리고 싶은 이기적인 나를 그렇게 부추기지 마. 사실 세상의 파멸을 바랄 정도로 증오하면서 삶을 좋아하기 시작한 사람이 안위를 위해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데. 특이점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배제는 싫어하는 사람이,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약간의 숨 쉴 공간에서 사이에서 배제를 무시하는 법을 익혔을 뿐인 사람이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겠다고 욕망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너는 내게 그런 제안을 해서는 안 되었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돼.”
손끝이 떨린다. 알렉세이의 계획에 데얀은 상당히 제격인 사람이다. 이리병을 퍼뜨리고 치료제를 수급하고, 감염자를 만들고 남은 사람을 살리고, 알라티라니움 무기를 가공하고 쏘아서......
알료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데. 그 일을 위해 무엇까지 저지를 수 있는데. 실제로 이미 저질렀는데. 그런 사람에게 이런 제안을 하다니.
알료샤의 이야기는 교묘하다. 그런 날이 온다면 힘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자동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날은 만들어야 한다. 거절하면 혼자 갈 테지. 케이드를 거부한 우리처럼. 그리고 어쩌면 흔하디흔한 이유로 죽어버릴지도 모르지. 정말 약았어. 그니즈도의 아이들이 아무리 가차 없다 한들 그런 짓을 두고 볼 정도는 아닌 것 알잖아.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마. 내 행위에 정당함을, 너를 지원한다는 이유를 붙여버릴 일은 만들지 마.
“이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하지만 한번 입 밖을 떠난 말은 절대 되돌려질 수 없다. 이야기꾼이 술잔을 흔들며 ‘여러분은 이거 모두 지어낸 이야기인 거 아시지요?’라고 말하더라도, 이야기꾼이 그 술잔을 마시려고 보았을 때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허상이어도, 절대 잊을 수 없었던 저 ‘대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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