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MCU] 트친이 주는 첫문장으로 글쓰기

1. 힐타샤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닿을 때면 가슴속에선 항상 폭죽이 터졌다. 힐과 눈이 마주칠 때면 도파민이며 세로토닌 같은 호르몬이 마구잡이로 분출될 게 분명하니 꽤 직접적인 비유였다. 나타샤 로마노프는 일평생 동안 사랑은 어린아이를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힐과 함께 있을 때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그가 어디까지 이 감정을 받아줄 수 있을지 셈하느라 바빠 다른 일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리라. 나타샤 로마노프는 세계적인 스파이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힐 앞에서는 사랑에 빠진 멍청이에 불과했다.

 

 

 

2. 힐냇옐

방 문을 열자 침대 위에는 아내와 아내의 동생이 알몸으로 엉겨붙어 있었다. 힐은 말이 없는 두 사람 대신 변명거리를 찾으려 했지만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뜻하는 바는 자명했다. 나타샤는 외도하고 있으며 상대는 그의 빌어먹을 동생이라는 것. 조용히 문을 닫은 힐은 방금 벌어진 모든 일을 모른 척하면서까지 그의 결혼생활을 지키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나타샤의 어깨너머로 눈이 마주친 순간 옐레나 벨로바가 지은 미소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런 선택을 했으리라.

 

 

 

3. 도티냇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타샤 로마노프의 눈에 비친 도로시 언더우드는 그 자신보다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주는 연륜이라는 것 때문인지 몰라도 겉으로 보이는 도로시는 모두 빈 껍질 같았다. 과거의 나타샤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치기 어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답지 않게 진지한 도로시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 해맑기만 한 겉껍질 속에 들어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진지한 도로시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타샤는 작고한 페기 카터만이 알고 있던 도로시 언더우드의 일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사실은 전혀 충족감을 주지 못했다.

 

 

 

4. 냇옐

나타샤는 무저갱같은 어둠속으로 추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삶의 끝자락에서 소중한 것들을 보게 된다는 속설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끝없이 길고도 짧은 추락의 순간 떠오르는 건 오직 남겨두고 온 동생뿐이었다. 부디 네가 내 죽음에 매몰되지 않기를. 머지않은 미래에는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기를. 언젠가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기를. 나타샤는 마지막까지 타인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5. 냇옐

오늘따라 운이 좋더라니. 옐레나는 엄폐물에 숨어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팔을 지혈하며 생각했다. 상처는 엿같이도 아팠지만, 총을 쏘는 데에도 지장이 없었고 남은 적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으므로 작금의 상황도 썩 불운한 건 아니었다. 다만 오늘 임무에 나서기 전 나타샤가 오래간만에 집에 들르겠다는 연락을 남겼고,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을 잔소리가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옐레나는 나타샤를 떠올리자 괜히 웃음이 났다. 별것도 아닌 상처를 걱정해줄 언니를 생각하니 다친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역시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6. 힐타샤

꿈 속에서는 날 수 있었다. 꿈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당신을 다시 만나는 것도, 다시 사랑을 속삭이는 것도, 당신의 체온을 느끼는 것도. 다디단 꿈에서 깨어보면 나를 기다리는 건 언제나 공허한 추락뿐이었지만, 잠깐의 재회마저 허락되지 않는 건 더 잔인했다.

 

 

 

7. 옐냇

욕실 바닥에는 물이 흥건했다. 침수되는 바닥은 십 대 아이처럼 발정이 난 옐레나에게 나타샤가 같이 목욕을 하자고 한 시점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나타샤가 그런대로 정신이 있었다면 바닥에 물이 튀지 않게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했겠지만, 그는 옐레나의 아래에서 숨을 헐떡이느라 바빴고 옐레나는 원래부터 욕실 바닥 따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욕조의 물이 흘러넘치건 말건 격한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망가진 바닥의 뒤처리를 떠올리기엔 서로를 탐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8. 힐타샤

한 보 진전에는 한 걸음의 후퇴가 함께하는 것이었다. 나타샤 로마노프와의 관계는 항상 그랬다. 팔을 뻗어야만 닿을 거리에서 맴돌며 손에 잡히지는 않는. 힐은 줄어들지 않는 거리가 지긋지긋했지만, 섣불리 행동하여 나타샤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잃어버리기에 나타샤는 너무 많은 의미를 지녔다. 그건 힐이 그 사실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9. 힐타샤

포근한 이불 속에서 잠들어 있는 애인을 보는 것만큼 즐겁고 행복한 일도 없다고 나타샤는 생각했다. 제가 그런 물렁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는 힐을 볼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족감이 차올랐다. 사랑, 안정감, 평온함과 약간의 소유욕으로 정의한 감정은 이제 나타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제가 그런 감정을 느껴도 된다고 알려준 애인의 코끝에 입을 맞춘 나타샤가 작게 속삭였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그래요?”

힐은 고개를 흔들고는 익숙한 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며 조금만 더 자겠다는 말을 웅얼거린 그는 금세 고른 숨을 내쉬었다. 은퇴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나타샤는 잠에 취해 알게 모르게 애교를 부리는 애인이 귀여워 이대로 늦잠을 자게 두고 싶었지만, 둘에게는 이번 주말을 위한 계획이 있었다. 느슨하게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서 빠져나온 나타샤는 베개 자국이 난 힐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안 일어나면 혼자 샤워할 건데-.”

“…그러면 내가 ‘그건 안 돼요!’ 하고 벌떡 일어날 거 같죠?”

이불에 몇 번 부비적거리던 힐이 고개를 들고 나타샤와 눈을 맞췄다. 파란 눈동자는 조금 전까지 잠들어있던 사람답지 않게 번뜩거렸다. 어쩐지 불퉁한 것 같기도 한 표정에 나타샤가 웃음을 흘렸다.

“아니에요?”

“맞아요.”

한숨을 푹 내쉰 힐은 느릿느릿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가는 나탸샤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욕실 문을 닫고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조금 좁은 샤워 부스에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나타샤의 허리에 힐의 팔이 감겼다.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는 힐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때린 나타샤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힐을 올려다보았다.

“착하게 굴어야죠.”

“그러기 싫다면요?”

“욕실에서 또 쫓겨나고 싶은가 보죠, 전 부국장님?”

“그럴 리가요. 착하게 굴게요.”

힐은 짐짓 무해한 척 양손을 들어 보였다. 만족스러운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은 나타샤는 다시 뒤를 돌아 수도꼭지를 틀었다. 미지근한 물줄기가 쏟아지고도 힐의 손등은 몇 번이고 꼬집혔지만, 그가 욕실 밖으로 쫓겨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0. 힐타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내 생각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고 해서 널 원망할 생각은 없다. 도망자로 사는 건 꽤 팍팍한 일이고,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이 아니라면 의식의 뒤편으로 밀려나는 게 당연했다. 네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게 옳은 일이었다. 추억에 젖는 일은 사치인 삶. 이제는 그게 네 삶이었다. 너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인 게 내 삶이었고. 이 또한 나름대로 힘겨웠지만, 너와 비교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는 투정 부릴 처지가 못 되었다. 네가 내 생각을 하든 말든 아쉬워할 처지도 못 됐고. 그런데도 네가 날 떠올려주기를 바라는 건 널 향한 사랑을 가장한 내 이기심인 게 분명했다.

 

 

 

11. 힐타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뽀송한 타월에 물기를 닦아내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나타샤는 샤워를 마치고 맥주를 하나 꺼내 소파에 앉았다. 히터를 틀지 않아 수건만 걸치고 있기엔 쌀쌀했지만, 갈아입을 옷을 찾으려 이 층에 올라가기에는 소파의 푹신함이 중독적이었다. 또 힐의 성격상 이 층에도 함정이 가득할 게 뻔했다. 제 방문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부비트랩이 잔뜩 설치된 현관을 지나온 게 금방이었다. 실드의 부국장답게 정교한 트랩이어서 나타샤는 짧지 않은 시간을 들이고 나서야 문을 열 수 있었다. 힐이 기겁할 걸 알면서도 함정을 다시 설치하지 않은 건, 그에 대한 작은 심술이었다.

당당한 무단침입자 나타샤 로마노프는 맥주병을 열고 쓰레기통이 있는 곳으로 뚜껑을 던졌다. 금세 달그락 소리가 들리며 비어있는 쓰레기통으로 병뚜껑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타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몇 모금 마셨다. 힐의 맥주 취향은 끔찍했지만, 오래간만에 즐기는 여유를 방해할 만큼은 아니었다. 맥주를 반 정도 마셨을 때 진입로에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엔진 소리가 멎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소리 없이 현관문이 열렸다. 총을 들고 있을 게 분명한 힐을 돌아보지도 않은 나타샤가 성의 없이 손을 흔들었다.

“왔어, 자기?”

 

12. NCP

느리더라도 봄은 온다. 당연한 소리였다. 아무리 겨울이 길고 험해도 시간이 지나면 봄은 올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린 나타샤 로마노프가 가장 먼저 체득한 법칙 중 하나였다. 나타샤에게 오하이오는 그렇게 찾아온 봄이었다. 가짜라고는 하지만 처음으로 가져본 가족과 집, 평범한 어린아이가 될 기회. 나타샤는 왜 제가 이 임무에 차출되었는지는 몰라도 빼앗길 봄이나마 겪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겨울이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그다음 봄은 또다시 올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13. 옐냇

“Суцка!”

“Language, Yelena.”

나타샤는 옐레나의 손에서 잼 병을 뺏어 들었다. 제 언니도 열지 못할 것이라는 옐레나의 기대와는 달리 나타샤는 손쉽게 병을 열었다. 옐레나가 제가 한참을 씨름하며 힘을 써놔서 열 수 있었던 것이라며 투덜거리자 나타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거로 해두자.”

“그런 거로 해두는 게 아니라 그런 거 맞거든!”

혀를 삐죽 내민 옐레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토스트가 올라오자 접시를 가지고 토스터에 다가갔다. 제 언니가 일어나기 전에 아침 식사를 차리겠다는 목표는 빌어먹을 잼 뚜껑 때문에 날아갔지만, 멀쩡한 아침 식사를 준비할 수는 있었다.

 

 

 

14. 페기냇

그의 방패가 눈에 띄었다. 페기 카터와 임무에 나설 때면 나타샤 로마노프는 그의 등 뒤에 매달린 방패에 위안을 얻고는 했다. 늘 선봉에 서있는 페기 카터는 두려움을 몰랐다. 전장을 누비는 그의 모습이 꼭 신과 같다고 나타샤 로마노프는 생각했다.

 

 

 

15. 힐타샤

미소를 잔뜩 머금은 입술에서는 달콤한 와인 향이 폴폴 풍겼다. 힐의 입맛에는 너무 달지만, 나타샤가 생전 좋아하던 것이라 버리지 못했던 와인의 향이었다. 힐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나타나 태평하게 와인을 마시고 있는 나타샤 로마노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지? 매일 바라던 순간이 찾아왔기에 더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멀리서도 달달한 냄새가 풍길 정도로 와인에 푹 젖은 나타샤는 술기운에 흐려진 눈을 하고 힐의 이름을 불렀다. 나타샤가 술에 취한 밤마다 발음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힐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애썼지만, 나타샤를 안기 위해 달려나가는 몸을 막지는 못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