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글 연성

너다울 때

"이번 달 분은 여기 있다."
책 세 권이 눈앞에 내밀어졌다. 소설책 두 권과 여행 수기 한 권이다. 살짝 헤진 책의 모서리가 다른 사람들이 여럿 빌렸음을 짐작하게 했다. 나견은 익숙하다는 듯 양손으로 책들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 책 보따리를 친히 가져다준 건 기사, 담청색 기린 지우스다. 큰 사건들이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아직 한창 바쁠 텐데. 그가 자신에게 굳이 시간을 내주는 이유를 나견 스스로 알고 있다. 정확히는 지레짐작이지만. 나견이 생각하기에, 지우스는 그를 기사와 관련된 일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을 조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견."
"아, 네."
"안 듣고 있군."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세요."
"별거 아니다. 그것들로 괜찮겠냐고 물은 거였어."

 맨 위에 있던 소설책 표지를 훑어보았다. 짙은 남색의 표지에 하얀 색 제목이 수려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얼마 전에 서점에서 관심이 가서 잠깐 훑어본 거였는데, 설마 알고 가져온 건가? 아니지. 최근 니젤의 청년들, 그중에서도 나견의 또래쯤 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 많이 팔리는 책이니, 그걸 알고 가져왔을 것이다.

"마침 읽고 싶었던 책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책을 펼쳤다. 이전에 조금 읽었던 내용이었지만, 처음부터 차근차근 활자를 눈에 담았다. 집중하기 시작한 홍채의 붉은색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을 왼손으로 넘기는 건 잊지 않는다. 지우스는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기묘한 책 조달의 배경은 이러하다. 나견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자 행한 일들의 영향력은 실로 컸다. 기존의 기사제도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고 덕분에 상부에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아직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용의 후예의 폭로 전후로 생긴 대중과 중앙 간, 의원들과 기사 간, 격기사와 자유기사 간의 앙금이 남아있었다. 별천지에 산처럼 쌓인 서류 작업은 덤이고. 여기서 나견은 어떤 제의가 오더라도 전부 거절하고 떠날 심산이었지만 생각만큼 발걸음이 쉬이 떼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일을 크게 벌여놓고서는 그걸 내팽겨치고 떠나는 기분이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나견은 전부 털어버리고 꿈을 좇아야할 지, 지금까지 쌓아올린 일들을 보다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수도에 더 남아있을 지 영 갈피를 잡지 못하여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걸 눈치챈 지우스가 나견을 설득했다.

"나견, 이건 명령이 아니다. 넌 이제 견습기사 신분도 아니니 내 말을 들을 필요가 없지. 하지만 너만 괜찮다면, 현 상황을 바로잡는데 조금만 힘을 보태줬으면 한다. 지금 너의 영향력과 발언력은 상당해."

 그래서 아주 잠깐, 아직은 혼란스러운 기사들의 일이 어느 정도 수습될 때까지만 수도에 남아있기로 결정했고 이에 대한 승인을 지우스가 도왔다.

나견은 전략가로서 주변의 여러 자문을 받아주면서 할당된 서류 작업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러면서 수도에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싫지 않았다. 전부 내려놓고 떠나기에는 아직 많은 게 발걸음 하나하나에 걸렸는데, 차라리 제대로 마침표를 찍고 떠나는 편이 나견 본인 마음에도 편할 테니까. 그렇기에 나견은 더 성실하게 임했다. 뒤늦게나마 진짜 본인이 하고자 했던 일을 할 수 있을 그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했던 얼굴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지우스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조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자기가 먼저 남아달라 해놓고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크게 건드리지 않으니 나견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담청색 기린이라면 무슨 생각이 있겠지. 목숨이 걸린 전투 중인 것도 아닌데 이상한, 무모한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을 거고. 그렇게 넘겨짚던 어느 날, 지우스가 대뜸 잡지 한 권을 사준 것이다.

"...잡지네요."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무언가 확인해야 할 중요한 얘기가 잡지에 실렸나? 나견은 종이를 넘기며 물었다.
"아니. 그냥 관심 있으면 읽어보라고. 귀찮으면 그냥 돌려줘도 좋다."

 황당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잡지의 글을 잘 보니, 20, 30 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여행지에 대해 소개하는 부록이 크게 실려있었다.

"......"
 살짝 웃을 뻔했다. 전혀 티 내지는 않았지만. 나견은 지우스를 좀처럼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지난 날의 여러 난관을 헤쳐 나가면서 알게 된 그의 다른 면모란, 무모한 짓 하지 말라면서 무모한 짓을 하고, 미래를 생각하면서도 정작 본인의 빈 자리가 생길 더 먼 훗날은 고려하지 않고... 아무튼 그도 결국은 기사라는 점. 그리고 바로 이것. 냉철하고 현실적이기에 사령탑의 위치에 올랐고 그만큼 책임감이 남들의 몇 배는 되는 듯했다. 나견은 그가 자신을 신경 써주는 것도 이러한 책임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라고 추측했다. 보일 듯 말 듯, 이렇게 그 나름대로 잘해주려고 하는 티가 날 때면 제법... 그도 결국은 사람이구나, 하고 다시 생각한다.

그 잡지를 받아 든 것을 시작으로, 지우스는 종종 새 책을 가져다주었다. 나견은 거절하지 않았다. 나견은 시간이 나면 니젤의 길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흥미롭고 새로운 것을 찾거나 숙소에 돌아가 혼자 책을 읽었다. 마음에 드는 책을 찾으려면 많이 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나 나견이 수도의 서점들을 직접 돌아다니며 책을 보다 신중하게 고르고 싶었던 반면, 그에게 주어진 여가는 길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짚어주자면, 일을 하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시내를 돌아다닐 체력이 뚝 떨어지고 없었다. 그래서 이미 구비되어 있는 책을 읽고 또 읽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우스 덕분에 책을 찾아다니는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지우스의 책 선정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가져오는 책의 분야와 갈래는 다양했다. 항상 한 권에서 세 권 정도를 가져오는데, 적어도 한 권은 꼭 대륙의 다른 지방이나 특별한 장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역사와 신화, 전설 이야기라던가 각 지역 대표 명소의 자연적 특성과 형성 과정을 담은 자연책도 있었다. 어떨 때는 글이 없는 것도 가져왔고,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방언이니 타 대륙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사전도 챙겨준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그걸 공부할 시간은 없어서 그대로 반납했었다. 읽다가 좋았던 책은 제목을 따로 기록하기도 했다. 책 목록이 점점 길어지며 나견은 차츰 이 관계가 익숙해졌다.

 다시 상기하는 거지만 담청색 기린은 늘 바빴다. 책 배달은 지우스가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서점을 들르고 동료들에게 추천까지 받아 가며 골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주 가끔이었지만, 휴일이 겹치면 그는 나견의 방에 요깃거리를 사 들고 와서 같이 독서를 했다. 그럴 때면 마치 친한 지인과 여가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와 친분이 있다고는 할 수 있으려나? 한참 활자를 읽어나가다가 지우스로부터 약간의 시선이 느껴져서 흘겨보면 그는 도로 눈을 돌려 책을 읽었다. 자기가 준 책을 읽는지 굳이 확인하러 온 건가. 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 아이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건지 원.
 나견은 내심 그의 방문을 감사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우스가 왜 책 배달에 몰두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작은 의문을 가졌다. 굳이 일반인인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줄 것까지는 없는데. 꼭 미안하단 마음을 책으로 표현하려 할 건 없는데. 아마 지우스는 수도에 남아준 나견에게 보상해주고 싶은 동시에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기를 피하려고 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책을 매개체 삼아 친밀감을 형성하고 소통하려고 하는 걸지도. 나견은 그리 생각했다.



몇 개월이 지나고서야 나견은 짐을 쌀 수 있었다. 그 많은 일이 있고서야, 나견은 나견으로써 하고 싶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읽은 책들—목록에 적어두었던 것들 중 마음에 들었던 건 개인적으로 구비하여 책장에 고이 꽂아두었다.

"떠나는 거냐?"
"네. 곧입니다."
담청색 기린이 나견의 숙소에 방문했다. 그는 여전히 이래저래 신경 써주고 있다. 이제 이것도 끝이겠구나, 생각하니 새삼 섭섭하기도 했다.

"기린 님, 지금까지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니다. 그건 우리가... 내가 할 말이지."

알고는 있군.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으나 지우스는 나견의 속마음을 대충 짐작한 듯했다. 하지만 따로 지적해서 나무라지 않았다.

"...푹 쉬어라. 그럼 난,"
"기린 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한테? 말해 봐."
나견은 계속 추측만 해오던 질문을 던졌다.

"왜 항상... 책을 갖다주신 겁니까? 많이 바쁘셨을 때도 늘 신중하게 골라서 챙겨주셨잖아요. 가끔 오셔서 같이 읽기도 하시고. "
"...아."
 지우스는 나견이 그걸 직접 물어볼 줄은 몰랐다는 듯 아-주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짧은 시간 말을 고르다 입을 뗐다.

"그런데 그걸 왜 이제야 묻는거지? 혹시 불편했나?"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혼자서 어림 잡았는데, 막상 떠난다 생각하니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져서요."
"...내 제안 때문에 네 계획이 미루어졌으니, 그에 대한 보상이 하고 싶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책에는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어있어. 여행에 필요하거나 도움이 될 얘기도 많겠지. 조금 도움이 되었나?"
"네. 한 달 전에 빌려주신 수기가 특히 그랬습니다. 덕분에 생각하지 못한 위급 상황에서 응급처치하는 법을 몇 가지 알아두었습니다."
"그래, 그럼 됐어."

예측에서 크게 벗어난 대답은 아니었다. 역시 그런 거였군, 하고 나견은 자신의 심증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그래도 직접 말로 확인받는 것은 혼자서 추리하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기린의 첫인상은 속을 알 수 없어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기사였는데.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저 기사의 얼굴이 언젠가는 조금 보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직 끝난 게 아니었나? 나견은 의아하다는 눈으로 다시 그의 말에 집중했다.

"네가 책을 펼치고 인쇄된 활자에 집중하는 모습."
"네?"
"...이야기에 몰입하는 네 모습이 보기 좋았거든. 특히 소설 같은 거 말이다."

뭐? 잘못 들은 건가. 아니, 내 청력은 멀쩡하다. 나견은 당황한 탓에 머리를 굴리느라 살짝 반응이 늦었다. 너무 안온한 상황 속에서 지낸 지 오래라 감정을 꾸미는 감이 조금 떨어졌나. 아니면 편한 상대가 앞에 있어서?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내가 의미를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 원래 기사라는 족속은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자신을 진정시킨 나견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계속 질문했다.

"...그래서 틈틈이 소설책도 챙겨주신 겁니까? 제가 몰입해서 잘 읽으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나견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낯부끄러운 소리인 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니, 잘 아니까 더 열심히 숨기는 거다. 말은 누구보다 솔직하게 하고 있으면서 표정은 숨기려고 애쓰는 그의 불균형이 나견의 속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서 계속 준 거다. 마지못해 책을 받으면서도 은근히 기뻐 보이던 네 표정, 비는 시간마다 책을 펼쳐 읽으며 그 세계에 몰입하는 네 옆모습... 네가 멀리 떠나가더라도, 그 모습 하나는 오래 기억할 것 같았거든."
"..."
"그때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네가 너인 것 같았다. 나견."

 답지 않게 문장이 길어지잖아. 차마 가지 말라고는 못하고 그간 눌러둔 마음을 돌려 말하는 거구나. 이제라도 좋다는 심정으로. 아니, 훨씬 이전부터였던 걸까? 나더러 수도에 남아달라고 했던 그날부터. 처음부터 사심이 개입되었던 거라면, 그의 책임감과 부채감은 내 생각보다 더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그의 모든 행동에 더 큰 개연성이 생겼다. 다만 이런 식으로 깨닫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그는 이쪽을 보고 있지도 못한다. 어딜 보고 얘기하는 겁니까.


"그래서 좋았다."


아, 이거 고백인가. 어쩌지. 조금 흔들리는 것 같다.
마음 편히 떠나기는 그른 것 같다.
이 인간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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