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글 연성

[지우견] 낭만 하나쯤은

현대 대학생 au

저 칙칙한 모자에 풀빛 머리카락. 아주 익숙한 윤곽이다.

"어, 벌써 와 있었네."
"별로 안 기다렸습니다."

커피를 두 손에 들고 기다리던 시간은 길었는지 짧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네자 자연스럽게 받는 투박한 손이 더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을 그리 열심히 하는지 곳곳에 굳은 살이 보인다.

"그럼 갈까."
"네."

이 남자는 같은 대학교 선배 지우스다. 공모전 준비를 위해 만든 모임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성실하고 머리 회전이 빨라 일손이 잘 맞았다. 그 이후로 종종 만나며 과제나 진로 얘기를 했다. 남들은 굳이 만나서 참 딱딱하고 지루한 주제만 고른다며 혀를 내두르겠지만, 나중에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거나 사소한 주제로 담소를 나누는 일도 잦아졌다. 그래서 그 시간이 낭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일종의 과정인 것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나도 모르게 그가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것을 자각한 지도 어느새 몇 주가 흘렀다.


"그런데 오늘은 왜 부르신 겁니까?"
"아, 너 운동 좀 시키려고."
"네?"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아니 그것보다 이 선배가 왜 그걸 신경 쓰는 거지.

"...선배 운동도 하세요?"
"그래. 가끔이지만. 최근에 집 근처에 헬스장이 생겼는데 처음은 무료란다."
"그런데 왜 저를."
"너 보다 보면 체력이 약하다 싶어서."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물론 운동 같은 거에는 영 소질이 없기는 하지만 이 사람에게 지적받게 될 줄이야.

"심각한 수준은 아닌데요."
"뭘. 항상 조금 피곤한 상태인 거 아냐?"
"그렇긴 한데 학생은 원래 다 그런 거 아닙니까?"
"다 왔다."

젠장. 이거 연장자의 괴롭힘 아냐? 난 동의한 적 없다. 하지만 이 선배란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 있다.

"처음엔 스트레칭이랑 유산소 운동을 하고 그다음에 근력 운동, 그러고 유산소 운동으로 다시 마무리하는걸로."

런닝머신이나 좀 뛰게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본격적이다. 이걸 또 다 받아주고 있는 나도 참 웃기다. 당장 뒤돌아서 나갈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감정이 이성을 앞서버린다. 진이가 같이 운동하자 권할 때도 거절했는데.

"처음이니까 많이는 안 할 거다."
​"많이 시켰으면 도망가려고 했죠."
​"이 녀석이..."

아,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걱정이 앞선다.



"...괜찮나?"

그걸 말이라고. 본격적으로 뛰고 힘쓰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꼴이 말이 아니다. 숨이 차서 의자에 앉아 땅바닥에 시선이 꽂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고. 발 근처에 내려둔 커피는 이미 다 마셔서 얼음 녹은 물만 찰랑거렸다.

"......끝난 거 맞죠."
"그래. 돌아가자."

선배는 수고했다며 차가운 생수병을 건넸다. 뚜껑도 까준 채로. 와중에 같이 뛰어준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비슷한 과인 줄 알았는데 조금 배신감을 느꼈다.

헬스장을 나와 선배 집으로 향했다. 들러서 조금 쉬고 가라나. 순 제멋대로다. 여기서 내가 싫다고 하거나 다른 일정이 있다고 둘러댔으면 아마 순순히 돌려보내 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문득 내 몸이 땀으로 흥건하다는 걸 자각했다.

"저 땀 냄새 날 텐데."
"씻고 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얘길 하네, 이 사람.

"진심이에요?"
"이상한가."
"...아뇨."
"다 왔어."

동선이 짧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대화가 툭툭 끊긴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옷은 문 앞에다 두지."

설마 선배 옷인가. 난 여벌 옷이 없다.

"네."

최대한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문 앞에는 하얀 셔츠와 짙은 남색 츄리닝 바지가 개어져 있었다. 적당히 잘 맞는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향이 난다. 조금 아찔하다.


"나도 씻고 나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멀뚱히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취방에 온 건 처음이다. 그의 생활 습관이 곳곳에 묻어나온다. 파란색을 좋아하는지 유독 파란색 물건이 많다. 색깔 기호라는 게 있긴 하구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선배는 젖은 머리를 하고 나왔다. 모자 벗으니 또 달라 보이네. 시선을 알아챈 그가 쑥스러운 듯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조금 출출하지?"
"조금이요."

도대체 언제 준비한 건지 닭가슴살 샐러드를 냉장고에서 꺼내 작은 식탁 위에 올렸다.

"수고했어. 여기 앉아."
"이건 또 뭡니까?"
"너 영양분 섭취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해서."
"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농담이다."

이 선배는 하나도 재미없는 농담이나 한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을... 괜히 구시렁대며 자조하게 된다.

"술 마실래?"
"음."
"안주가 별로인가."
"아뇨, 괜찮습니다. 조금만 마실까요."

투박한 손이 차가운 맥주 두 캔을 들고 와 깐다. 내 것까지 대신 까줄 필요는 없는데. 사실 선배 집에서 그 체향이 나는 옷을 입고 있자니 제정신인 척하기가 힘들다. 맥주 한 캔에 취할 정도로 술을 못 하는 편은 아니지만 약간의 취기가 필요했다.
포크로 양상추와 크랜베리를 조금 집었다. 고기도 좀 먹으라는 타박 아닌 타박에 닭가슴살도 골라 먹는다.

"...네 동생은 잘 지내?"
"진이요? 잘 지내죠."
"그래. 그때 한 번 보고 못 봐서."
"아, 그랬죠. 그때 저인 줄 알고 말 거셨잖아요."
"그것참 미안하군."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요 뭘. 살짝 소리 내 웃으니 그가 살짝 흘겨본다.

"머리 자른 줄 알았지. 너는 원래 조금 더 긴 느낌이었는데."
"맞아요. 제가 좀 더 길죠."
"다음에 몰래 잘라 와놓고 헷갈리게 하려는건 아니겠지?"

들켰다. 진지하게 하려던 건 아니고 그런 상상이 잠깐 스쳤던 건데 바로 걸렸다. 난 원래 생각은 많지만 허황한 공상은 하지 않는 편인데, 그랑 있으면 소소하게 미래를 공상하게 된다.

"음. 아뇨."
"수상한데."
"...아니라니까."

이번엔 그가 조금 웃는다. 그리고 내가 그를 흘겨본다.

"솔직히 전 선배가 저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랬지. 싸가지도 없고."
"...지금은 어떤데요."
"그대로인데."
"그럼 왜 만나줘요?"
"만나주다니."

말이 헛나왔다.

"친히 저랑 친분을 유지하시는 이유가 궁금하다고요."
"머리 잘 굴러가는 후배가 있으면 편하니까."
"저도 머리 잘 굴러가는 선배가 있어서 편합니다."
"공생관계냐."

적당히 농담으로 얼버무렸다. 선배 집이라 그런가 목뒤가 금방 뜨거워졌다. 술 마시자고 할 때 받기를 잘했다.

"반쯤은 농담이고. 처음 만났을 때 얘기가 잘 통한다 싶어서."
"그랬군요."
"그래서 종강하기 전에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의외로 되게 솔직하시네요."
"그래야 믿어주잖아."

그러면서 다시 웃는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
이 사람은 자꾸 헷갈리게 만든다. 나와 같은 마음인 것 같다가도 그냥 우정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솔직하게 다 털어버리고 싶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기 시작했는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확신이 서지가 않는다.

"...방학 중에도 이렇게 부르시게요?"
"싫으면 안 봐도 돼."
"그런건 아니고, 여행갈까 해서."
"여행?"
"네. 국내든 해외든. 그럼 못 보잖아요."
"알바한다더니 여행 비용 모으려던 건가?"
"그렇죠."
"혹시 거기에 내가 따라가도 되나?"

그래, 이런 거. 누가 후배한테 그런 얘기를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데. 귀에 훅 들어오는 그의 장난기 없는 낮은 목소리가 자꾸 이성을 흔들리게 한다.

"마음대로 하세요."
"정말?"
"말동무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죠."
"...네가 그렇다면 나야 좋고."


맥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대낮에 만났는데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고,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여러 캔을 비운 뒤였다.

"시간이 벌써..."
"네 옷 세탁하고 건조해놨어."

빠르다. 어딘가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던데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였구나.

"감사합니다."
"아냐. 내가 갑자기 불러낸 건데."
"근데 진짜 왜 부르신 거에요? 정말 운동시키려고?"
"......"

그의 손가락이 식탁을 가볍게 툭툭 친다. 무슨 말을 할지 고르고 있는 것 같다.

"그냥.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그런 건 아니지만..."

친한 후배라 생각해서 부른 것뿐이라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당신 이런 걸로 막 오라 가라 하는 사람은 아니잖아. 아니면 난 그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고 바로 추궁하다니, 정말 취한 걸지도 모르겠다.
한참 고민하던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앉아있는 내 옆으로 왔다. 나도 자세를 선배 쪽으로 조금 틀었다. 갑자기 뭐지, 싶어서 그를 올려다본다. 선배야말로 취한 건가.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니면, 특별한 이유가 있기를 원해?"

그가 내 손등 위로 손을 포갠다. 그 굳은 살 박힌 손이 이번에는 내가 말을 고를 차례라는 걸 일러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해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간다. 나 지금 무슨 표정이지? 이런 건 생각도 안 해봤, 아니, 상상은 해봤다. 그런데 지금-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하는데."
"...무슨 대답이 나올 줄 알고요."
"그럼 내가 먼저 말할까?"

긍정도 부정도 못 표했다. 기대감 반, 불안감 반. 어느 쪽에 걸어야 할까. 하지만 숙인 시선 끝에 부드럽게 포개진 손의 떨림이 닿자, 그제야 무언의 확신이 들었다. 당신에게 기대해도 된다고.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친다.

"말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고개를 더 들어서 입술을 포갰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하고 말랑하다.

확신에 차서 호기롭게 덤벼놓고 어색하게 살짝 얼굴을 떨어트렸다. 부끄러움이 몰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그가 화답하듯 다가온다. 비집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살덩어리가 얽혀온다. 여전히 포갠 손을 떼지는 않는다. 대신 다른 손을 들어 내 옆머리를 넘겨주더니 열이 오른 내 볼을 잡아준다. 손이 축축하고 뜨겁다. 감각을 어디에 집중 시켜야 할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뚜렷하지 않던 생각은 확실해졌고, 어지럽던 마음은 개운해졌다.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그가 숙인 상체를 천천히 든다. 짧지 않은 첫 키스였는데 막상 입술이 떼어지니 조금 아쉽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건 좀 더 근사한 여행지에서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런 낭만도 있었나?"
"원래 없었는데, 누구 때문에 생겼었거든요."
"실망했어?"
"...아뇨."

상상보다 현실이 훨씬 좋은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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