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견] 새벽 귀갓길
요즘 따라 나견이 유난히 마음에 걸린다. 하도 단독행동을 많이 해서 그러느냐 하면, 부정하진 않겠다. 시작은 며칠 전의 임무에서 복귀한 후부터였다.
며칠 전의 임무란, 동서쪽의 마을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일이었다. 사건을 일으킨 조직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가 있어 기사를 파견한 것이었다. 이런 일에 보통 기사급을 보내는 경우는 없지만 파악된 바가 적고 민간인이 많은 마을 한복판이 목적지였기에 나를 보냈으리라. 그리고 그 임무는 나견이 따라오는 걸로 예정되었다. 이제 그는 제 이름으로 인정받아 종종 나와 함께 임무를 배정받았다. 이제 나견은 어엿한 자유기사였다.
임무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표적의 목적 파악 후 본거지를 찾고 제압. 나견도 이제 마냥 약한 민간인 수준은 아니었기에 곁에서 보조만 해준다면 괜찮은, 아니, 훌륭한 성과를 내주었다.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일이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포박 도중 한 명이 밧줄을 풀고 공격해온 것이었다. 딱 한 명 있던 강자. 기절한 척을 했던 그가 나견을 향해 빠르게 단도를 휘둘렀다. 난 급한 마음에 나견 앞을 막아섰고 등을 단도에 찔렸다. 우습게도 그 남자는 단도를 놓쳤다. 포박 단계에서 여러 번 몸싸움이 오가서 양팔에 힘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 몸에 박힌 칼날은 근육 수축 때문에 잘 빠지지 않을 테고. 그가 당황하자 나견이 바로 살기를 써 그의 시선을 돌렸고, 내가 그의 팔을 아작냈다. 강자라는 걸 미리 귀띔해주길 잘했다.
잡은 표적들을 들것에 실어 수도로 보내고 난 후, 나견이 어디선가 헝겊 여러 장과 소독제를 들고 왔다. 기사에게 치명상은 아니었다. 이 정도는 대충 손으로 막아두면 알아서 치유된다. 하지만 나견은 덧나서 좋을 것 없다며 굳이 직접 지혈을 해주었다. 흉터가 생긴다나. 그가 걱정하기에 차라리 내버려 두는 게 낫다 싶었다. 다만 나견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아마 보였더라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워낙 감추기를 잘 하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나견의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바쁜 건 둘째치고, 나견이 은근히 피하는 기색이었다. 사무실에 찾아가면 급하게 나간 듯 비어있었고 집에서 마주치면 졸린다며 답지 않게 일찍 잠을 청했다. 그럴듯한 이유를 몇 가지 추측해보기도 했으나, 어딘가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나견이니까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나견 녀석이 나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건 그로부터 며칠 후, 새벽의 일이었다. 자정을 넘기고 일을 끝마친 시간. 일터를 나와 귀가하던 중 나견이랑 마주쳤다. 집에서 잘 시간일 텐데. 그가 철야하는 건 내가 극구 말렸기 때문에 안다. 귀갓길에 그를 만나니 내심 반가웠다. 나견은 잠이 안 와서 산책 나왔다고 했다. 그 사이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피하려는 모습은 없었다. 둘 다 저녁 끼니를 걸렀기에 그를 데리고 근처 주점으로 들어갔던 게 기점이었다. 물론 서로 잔소리하면서. 피로도 달랠 겸 아늑한 분위기의 선술집으로 갔다. 이런 곳은 처음 와본다는 나견의 말에 놀라다가 수긍한 것도 잠시, 주문한 안줏거리와 술이 나왔다. 도수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양조주였다. 나견은 술잔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술을 잘 못하나? 억지로 마실 필요는..."
"아, 아닙니다."
나견은 금방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북부 출신 사람들은 술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런 애매한 편견을 차치하고서도 나견에 대해서는 이제 많이 알게 되었다. 낱낱이 다 안다고는 못하겠지만, 나견이 공공연하게 정체를 밝힌 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기사들과 나견의 견습 동기들도 함께한 자리에서. 하지만 그 외에도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 나견을 동반하여 수행한 임무며 처리한 업무만 해도 꽤 되었고... 함께한 시간이 기니까. 술기운에 무슨 욕심이라도 난 걸까. 문득 지금 당장 그의 머릿속을 알고 싶다는 충동이 일렁였다.
"...나견, 혹시 저번 임무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결국 직접 묻고 말았다. 맨정신이긴 했지만, 술은 종종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준다. 일부러 눈이 조금 풀린 척을 했다. 애매한 네 흉내다. 그리고 이왕이면 추측보단 직접 들었으면 했고. 몇 번 해봤다는 추측이라는 것도 별것 없다. 시기 상으로나, 상황 상으로나 자책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사실 그것 말고는 뭐가 있겠는가. 나견이 자책한다고 하면 그 싸가지가 그런 것도 하냐며 웃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 그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나진을 연기하는 나견이지, 진짜 나견이 아니다. (물론 나견 녀석도 싸가지 없지만, 두 인물은 조금 다르다.)
"티 나나요?"
"아니. 평소와 다름없지, 넌."
"그럼 왜 그런 얘기를..."
"너라면 그럴 것 같아서."
나견은 내 얼굴을 조금 놀란 듯 빤히 보다가 살짝 웃음을 흘린다. 그건 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나견은 조금 생각하더니 입을 뗐다.
"...기린 님께서 제 앞을 막아서셨을 때, 순간 겁이 났습니다."
"네가?"
"격기사니까 별 탈 없을 것이란걸 알았지만... 그때가 겹쳐 보여 버렸어요. 그 후로 기린 님 얼굴을 보면, 나진이 아닌 저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안 잡혀서. 제가 괜한 걱정을 끼쳤군요. 죄송합니다."
할 말을 잃었다. 나견이 왜 심경이 복잡했는지 완벽하게 짐작한게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를 다치게 한 일에 죄책감을 느꼈던 게 아니라, 소중한 가족이 자신을 지키려다 죽었던 일을 상기했던 것이었다. 그 일을 다시 화제로 끌어올리다니. 나견에게 조금 미안한 짓을 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군. 네가 사과할 것 없어."
"아뇨, 괜찮습니다. 이제는 극복해야겠죠."
그는 술을 홀짝였다. 나도 술잔을 들었다.
"혹시 그동안 제가 쌀쌀맞게 굴어서 그러십니까?"
"아니. 네가 바빴던 것 정도는 알아. 그리고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그릇이 작은 사람 같잖아."
"음."
나견은 장난스럽게 흘겨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아 안심이었다. 아니면 술기운이려나. 이 녀석이 한 번 작정하고 속이려 들면 간파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그날 이후 자유기사가 된 것도 좀 후회했습니다."
"그 정도로?"
"저 때문에 누가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는 걸 눈앞에서 봐야 한다는 게..."
"그러는 너도 동대륙에서 해골이 넘어왔을 때 희생하려 했잖아. 기사도 아니었으면서. 그 이후로도 셀 수 없이 그랬지, 안 그래?"
"그건, 어쩔 수 없었고..."
"그래, 타인을 생각해주지 않았다면 그런 판단은 서지도 않아. 그리고 그때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견의 빈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나견은 술을 들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네가 거기서 검에 찔렸다면, 나도 너처럼 후회 많이 했을 거다. 내 불찰이었으니까. 특히나 넌... 나한테 특별하고."
"기린 님."
"당연한 거잖아? 우리 사이에는."
"...! 다 들릴라..."
"괜찮아. 일부러 여기로 온 거야."
우리 두 사람 모두 맨정신으로 가게를 나왔다. 취중 진담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의 솔직한 심정을 담백하게 들을 수 있는 날이 왔다는 것이 사실 아직도 좀 얼떨떨한 감이 있다. 새벽이라 날이 조금 쌀쌀했다. 체온이 오른 탓일지도 모른다. 이것도 술기운일까? 아니면...
"기린 님."
나견이 주변을 좀 둘러보더니 손을 내민다. 이것도 참 오랜만이군. 그것도 먼저 청해오다니 드문 일이었다. 난 군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제 우리는 목적지도 같으니 이대로 오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차가워."
"계속 술병을 들고 따른 건 나니까."
"그것 때문이라고요? 말도 안 돼."
"아까부터 은근슬쩍 말 놓는 거냐?"
"싫으세요?"
"알면서."
그가 웃는 모습을 보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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