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글 연성

비수

"진아, 너는 왜 기사가 되고 싶은 거야?"

나견이 나진에게 물었다. 나진은 가만히 천장을 응시하다 운을 띄웠다.

"...멋있잖아. 지킬 수 있는 강한 힘이 있다는 게."

"명예에 죽고 사는 기사가 되려면 네 말투랑 태도부터 교정해야겠는데."

"뭣."

나견이 키득거렸다. 나견은 나진에게 짓궂은 농담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물론 이번 건 농담 반 진담 반이었겠지만. 나진은 그를 장난스럽게 째려보면서도 입가의 웃음은 감추지 않았다.

"이만 자자, 너무 늦었어."

"내가 무슨 어린 애야?"

"너 다음 주에 견습 시험 있잖아. 수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 말을 끝으로 나견은 잠이 들었다. 느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나진은 슬며시 눈을 떴다. 나진은 옆 침대가 보이게끔 반쯤 돌아누웠다. 나견의 멍투성이인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 그 두 눈은 절제된 말을 담고 있었다.

기사가 되려는 이유. 나진의 뇌리에 스친 것은 어린 날의 기억이다.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숲에서 장작을 패고, 먹을 것을 구하고, 서로 장난치며 뛰어놀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나진은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보다 발걸음이 느린 나견의 안색이 파리했다.

"견아, 괜찮아?"

"진아, 나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감기 걸린 거야?"

"모르겠어. 아까부터 몸이 으슬으슬 떨려."

"어서 돌아가서 밥 먹고 약 지어 먹어야겠다."

비틀거리는 나견을 부축하는 나진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나견은 애써 괜찮다며 저녁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다 나을 거라 웃으면서. 하지만 가벼운 감기인 줄 알았던 그것은 무서운 속도로 악화하였다. 밤이 되자 나견의 온 몸이 비정상적으로 열이 올랐고 기침은 목이 다 갈라질 정도로 쉬지 않고 나왔다. 먹은 것도 전부 게워냈다. 끔찍했다.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견의 모습에 나진은 그날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그날부터 나진은 알고 있는 약초란 약초는 전부 찾아 나견에게 달여 먹였다. 마을에 가끔 찾아온다는 의원에게 달려가 애원하여 진찰도 받아봤다. 하지만 병의 이름도 원인도 알아내지 못한 의원은 시중의 해열제와 진통제를 처방하는 게 고작이었다. 소용이 없었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도 해봤지만, 어린 아이의 간절함이 무색하게도 지독한 열기는 며칠째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신은 어떻게든 나진에게서 나견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불덩이 같은 작은 손을 맞잡은 같은 크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나진은 자는 것이 두려운 일이 되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나견이 싸늘하게 굳어버려, 다시는 그 웃음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공포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진은 도저히 나견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견아..."

나진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그날을 문득 떠올렸다. 바깥 외출이 금지되었던 쌍둥이에게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혹한이었다. 얼마 있지도 않던 낡은 천을 챙기고 급하게 도망치던 중, 맹추위를 견디지 못한 나견이 갑자기 나진의 손을 놓치며 쓰러졌었다. 스르르 손에서 손이 빠져나가는 감촉에 놀란 나진이 나견의 이름을 연신 불러댔었다. 다행히 나진이 자신의 옷을 벗어 나견에게 둘러주니 금방 정신을 차렸지만, 다시 떠올려봐도 가슴이 꽉 조이는 기분이었다. 나쁜 기억을 몰아내려 고개를 휘휘 저은 나진은 약 기운에 잠이 든 나견의 심장에 살포시 귀를 댔다. 그리고 이 소리가 끊기는 상상을 했다. 나견 없이 나 혼자 이 집에서, 이 세상에서 외롭게 살아간다. 어두운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참을 새도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견아, 죽지 마. 나 두고 어디 가지 마. 나는... 를..."

나진은 울먹이면서도, 혹여 겨우겨우 잠든 형제를 깨울까 봐 조용하게 읊조렸다. 나진은 새삼 자신이 나견을 많이 의지해왔다는 것을 통감했다. 나견 이외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견의 강한 책임감과 다정한 성정의 영향도 컸으리라.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던 든든한 형제는 세간에서 칭송하는 기사처럼 느껴졌다. 나진의 눈에 비친 나견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멋있었기에. 마을 아이들이 자신을 괴롭히면 부리나케 달려와 아이들을 쫓아내던 그 뒷모습. 가족이란 서로 지켜주는 것이 당연하다며 소리치던 나견의 모습은 나진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죽을 고비에 놓일 정도로 약해진 나견의 모습을 목도한 나진은 깨달았다. 나견이 평생 자신의 곁에 있을 수는 없다. 그는 기사가 아니었다. 손위 형제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자신과 같은 어린 아이였을 뿐. 그렇기에 이제는 나진 자신도 나견을 지킬 수 있어야만 했다. 나견을 잃는 순간, 그것은 곧 나진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건 안 돼."

눈이 번쩍 떠졌다. 나진은 소매로 젖은 눈가를 닦았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잴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불씨였고, 나진의 나약함을 순식간에 덮어버렸다. 그와 반대로 차가워진 머리는 변화의 필요성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나진은 곤히 자는 나견의 곁에 누웠다. 나견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 그 두 눈은 다짐의 말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나견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나진은 몰라보게 강해졌다. 더 이상 나견이 지켜줄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나진은 다시 돌아누웠다. 눈을 감으면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반쪽의 숨소리만이 예민해진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진에게 나견이 숨을 쉬지 않는 세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진은 자신에게 따스하게 웃어주는 가족의 존재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해도 상관 없었다. 애초에 나진은 남들한테 나견의 진면목을 보여줄 마음도 없었다(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 보다는, 가족을 제외한 타인을 깔보는 나진의 성격 상 그냥 그러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나견에게 미움받게 되더라도 나진은 자신의 생각을 굽힐 수 없었다. 어차피 모두 각오한 일이었다. 훗날 기사가 되어 제 삶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나진은 재차 변함없는 다짐을 되새긴다.

 네 심장에 칼을 꽂는 자가 있다면, 그자야말로 숨통이 끊겨야 응당하다. 기사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 한다면, 얼마든지 되어 보이겠다. 너를 위해서라면 고된 훈련이든, 황제에게 충성이든,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든 전부 해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 오직 그것만이 나의 명예이자 정의니까. 

 나진은 나견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과 삶을 전부 바치기로 스스로와 다시 한번 약속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나진은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그렇게 나진은 죽어서도 나견의 마음에 칼을 꽂고 말았다. 결의를 다지고, 횃불을 손에 든 그날부터 쭉...

 모순적이게도, 그 약속으로 인해 나견은 목숨을 걸고 스스로 전장에 나서게 된다. 나진이 바라던 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진짜 자신을 감춘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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