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견]청금의 풍경
덜컹거리는 마차가 둘레길을 달린다. 나견은 작게 난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둘레길의 양옆에는 맑은 하늘 아래 노란 들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옆에 앉은 지우스는 잠들지 않고 눈만 붙이고 있다가 몰래 나견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장시간 좁은 마차에 앉아있느라 불편할 법도 한데 나견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원래 좀처럼 불평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이라면 바깥의 경치에 더 집중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낯선 세상의 풍경은 항상 나견의 호기심을 고개 들게 했으니까. 아름다운 자연경관부터 수도의 가장 번화한 시장, 그리고 색다른 정취의 이국땅까지...그리고 지금은 부흥 사업 이후 급성장한 항구 도시로 향하고 있다. 마냥 놀러 온 것은 아니었다. 지우스는 항구 도시의 행정부 소속 인물과 직접 면담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나견이 갑작스레 그 항구 도시로 가자는 제안을 했다. 우연히도 나견이 가고자 하는 행선지와 지우스가 가야 하는 파견지가 겹쳤던 것이다. 지우스의 파견 기간은 일주일이었지만, 하루 일찍 출발한데다 나견이 직접 일손을 거들어주기로 하여 사실상 이동하고 쉬는 기간이 더 길었다. 그러니 두 사람에게는 여름휴가인 셈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무슨 소리냐며 기겁하겠지만.
어느새 바다 특유의 소금기 가득한 공기가 마차 안으로 물씬 풍겨왔다. 바닷가에 좀 더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나견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수정바다에 갔을 때도 이렇게 여유로웠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회고했다. 바다내음이 익숙해질 무렵, 나견은 제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새벽 일찍 출발하느라 피곤했을 터. 진작에 그의 상태를 파악한 지우스는 자신의 어깨를 내주었다. 나견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몸이 나른해졌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자장가 같았다. 자신의 편의를 봐주는 남자를 온전히 믿고, 많은 것을 나눌 수 있게 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더라. 나견은 눈을 감고 아무래도 좋을 햇수를 세었다. 그리고 스르르 얕은 잠에 빠졌다.
그로부터 대략 삼십 분을 더 달리고 정오가 되었다. 마을 사이사이의 골목길을 지나 큰길로 나오자 시끌벅적한군중 소리가 나견을 깨웠다. 때마침 나지막하게 부르는 지우스의 목소리에 나견은 두 눈을 약간 느리게 끔뻑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아, 혹시 내가 깨웠나?"
"......아뇨, 방금 깼어요. 그런데 왜요?"
"그냥. 원래 이런 곳을 좋아하나?"
"이런 곳?"
"바다 말이야."
"특별하게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 웬일로 네가 같이 오자길래 놀랐는데."
"서로 오랜만에 보는데 파견 나가신다길래 따라와 보고 싶었어요. 저야말로 기린 님이 허락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니까. 뭐라 할 사람은 없을 테고. 신경 쓰지 말고 오늘은 편하게 있어."
"...네."
가방을 등에 메고 마차에서 내리니, 북적거리는 대로의 활기가 온몸으로 전해져왔다. 남아있던 잠기운은 몽땅 달아났다.
"숙박시설은 이쪽에 몰려있다는군."
"건물들이 거의 신설이네요. 휴가철이 아니라 다행이군요."
"휴가철이면 내가 바빠서 이렇게 못 나오지."
"아, 그건 그렇죠."
나견과 지우스는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인파에 섞여들어 갔다. 해안가에 위치한 마을인지라 각종 해산물 음식부터 챙이 넓은 모자나 부채 따위의 피서 용품을 파는 노상들이 간간이 있었다. 아직 푹푹 찌는 한여름은 아니었으나 여행객이 눈요기로 보기 좋았다. 나견의 발걸음이 시선의 속도에 맞추어 느려지면 지우스는 부러 보폭을 줄였다.
두 사람은 이리저리 거리를 둘러보다가 깔끔해 보이는 숙소에 방을 잡아 짐을 풀었다. 숙소의 벽은 온통 하얬고 창을 여니 파란 하늘과 북적거리는 도시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남아있던 체력마저 다 떨어진 나견은 체면도 내팽개치고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웠다. 세탁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베개와 이불에서 세제 향이 은은하게 나 피로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지우스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동 시간이 좀 길었는데 잠깐 요기나 하고 갈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우리 둘뿐이니까 딱딱한 말투 쓰지 않아도 돼. 굳이 내가 기사인 걸 티 낼 필요도 없고."
"이러는 편이 입에 붙어서 말이죠."
"입만 살았군. 속으로는 막 부르잖아?"
"어떻게 아셨담."
그 정도는 이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제 동생의 행세를 할 필요가 없어지고, 오랜 시간 회복한 끝에 나견은 진짜 자신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꽤 쾌활하고, 다정하고, 장난스러운 면이 있었다. 새침한 듯 당돌하고 생각이 많은 건 역시 본래 성격인 듯했다. 자아가 없는 듯 무덤덤하기만 했던 표정은 훨씬 다채로워졌다. 새로운 모습, 아니, 그가 스스로 아주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지우스는 옅은 쾌감을 느꼈다. 가령 처음 보는 새와 대화를 시도하려는 모습이라던가... 지우스는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하지만 나견이 그것을 금방 알아차리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나견이 왜 갑자기 피식대냐고 물으니 지우스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네가 새랑 대화하는 걸 다시 보고 싶어졌다' 같이 황당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쉬고 숙소를 나오니 해는 중천에서 조금 기울어졌다. 미리 알아둔 가게는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있어서 장터를 거쳐 가야 했다. 두 사람 모두 식욕이 왕성한 편은 아니었으나, 지우스는 나견에게 좋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견은 이색적인 요리를 접해볼 생각에 속으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중간에 헤매는 일 없이 바로 가게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에서 살짝 빗겨나가 바다가 보이는 노단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안전하게 가장 인기 있는 요리들만 주문하는 건 아쉬우니 도전적인 요리도 한 가지 주문했다. 전채로 제공되는 밋밋한 과자를 입에 넣으며 나견이 걱정했다.
"요기만 하자더니 너무 막 주문하시는 것 아닌가요?"
"원래 많이 먹어야 쑥쑥 큰다. 근육이랑 살도 좀 더 붙어야지."
"저 이미 성인인데요. 그리고 훈련을 안 하니 당연히 근육이랑 살도 빠지죠. "
"성장판이 아직 덜 닫혔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훈련 시켜줄까?"
"...사양할게요."
나견의 눈높이가 지우스보다 높아진 지 시간이 꽤 흘렀다. 지우스는 멀대같이 큰 놈이라며 험담 아닌 험담을 하면서도 그가 끼니를 거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제 공식적으로는 같이 일하지 않았다. 대신 가끔 시간이 비면 만나서 상대의 일에 조언을 주고받는 정도의 관계. 그 조언들 사이에는 식습관 내지는 생활 습관을 지적하는 말도 섞여 있었다. 양쪽 모두 이것만은 흘려듣는 게 문제였지만. 둘이서 조용하게 투닥거리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연한 잎채소에 치즈와 올리브유로 풍미를 낸 샐러드였다. 동시에 양고기, 식당의 특제 양념, 그리고 각종 야채가 욱여넣어진 빵이 내어졌다. 갓 구웠는지 온기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허기진 줄도 몰랐던 배가 음식 냄새를 맡자 그 존재감을 느끼게 했다. 평소의 나견이라면 간단하게 식사를 했겠지만 오늘은 새벽 일찍 출발한 탓에 유난히 배가 고팠다. 그리고 지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식사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후에 내어진 <불린 쌀과 홍합, 강한 향신료를 포도잎에 싼 이색 요리>도 나쁘지 않았다. 나견과 지우스 모두 풀과 뿌리를 캐 먹으며 살아본 적이 있다 보니 조금 독특한 향이 나도 개의치 않았다. 가게를 나오며 지우스가 전부 계산하려는 것을 나견이 말렸다. 지우스는 자기 일을 도와주는 대가랍시고 식사비를 내려 했지만 나견의 반발과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 때문에 결국 반씩 지불하게 되었다. 계획이 흐트러진 지우스는 나견에게 잔소리를 하려다 이런 걸로 그에게 말로 이기는 건 무의미하다 여기고 관두었다.
나견과 지우스는 다시 장터로 돌아가 좀 더 느긋하게 상점들을 둘러보았다. 둘은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며 일정 거리를 벗어나지 않게 유지했다. 얼핏 보면 일행이 아닌 남남 같았다. 이건 아까의 사소한 의견 충돌 때문이 아니라, 잠시 각자의 시간을 존중해주는 것이었다. 지우스는 예정보다 남은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며 주변을 탐색하였다. 그러다 한 노상에 잠시 멈추어 섰다. 한편, 나견은 물건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어떤 것이 유행이고 어떤 것이 어느 고객층을 어떻게 겨냥했는지를 유추해보고 있었다. 일종의 습관이었다. 하지만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면 상인이 귀찮게 구니 최대한 흘겨보듯 자연스럽게.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다 잡화점에 진열된 담청색과 남색이 뒤엉킨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나견은 그 색이 잘 어울리는, 근처에 있을 남자를 떠올렸다. 사실 나견이 지우스에게 그의 목적지인 항구 도시로 가자고 제안했던 것은 우연을 가장한 노림수였다. 각자의 일에 뛰어들면서 얼굴 마주 보고 얘기할 시간도 명분도 없었다. 그 시점에서 지우스가 이 도시로 온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바다로 놀러 가고 싶다는 둥의 태평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가 바쁘다는 것도 알았지만 무엇보다도...
그때, 어느샌가 뒤에서 나타난 지우스가 말을 걸었다.
"나견. 바다 가볼까."
"좋아요."
어쩐지 그에게 이름을 불린 게 새삼스러웠다. 이것을 조금은 그리워했던 것 같았다.
도착한 바다는 평범했다. 하지만 바다라는 것 자체가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파도 소리는 아주 경쾌했고 푸른 수평선은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무한해 보였다. 태양열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모래사장 탓인지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견은 입고 있던 반소매 옷의 목깃을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나견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더워?"
"조금이요."
"해 떨어지고 올 걸 그랬나."
"괜찮습니다. 지금 와야 파란 바다를 보죠."
"이것도 책에 쓰려고? 여행작가 나으리."
"그거 핑계로 여기까지 온거니까 써야죠. 물론 아까 식당이랑 가게들도-"
"핑계?"
"......"
"아, 하긴. 너한텐 책 쓰는 일보다는 직접 보고 겪는 일이 훨씬 더 의미 있겠지."
"그렇죠, 뭐."
나견은 멋쩍게 대답하며 신발을 벗고 바짓단을 접어 올렸다. 시원한 바닷물에 다리를 담그며 천천히 해변가를 산책하듯 걸으니 더위가 가셨다. 그 뒤를 따라오던 지우스는 나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게 꽂힌 시선이 당혹스러웠던 나견은 장난스럽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기린 님은 더위를 별로 안 타시는 것 같네요. 항상 모자 쓰고 다니시니까요."
"조금 그런 것 같기도."
"보통 사람들은 추운 겨울날에나 쓰는데 말이죠. 아, 기사들은 다른가."
"...그러는 너는 왜 굳이 머리를 기르는데? 불편하지 않나?"
"이거요?"
나견은 걸음을 멈추고 머리끝을 만지작댔다. 머리를 길러 그 길이는 날개뼈를 조금 넘길 정도였다. 바닷바람에 살랑이는 금색 머리칼은 햇빛을 받아 태양만큼 밝게 빛났다. 지우스는 그것을 가만히 같은 빛깔의 눈에 담았다.
"그냥... 어릴 때부터 기르던 거라 별 의미는 없어요."
"그런가."
"네. 왜요? ...짧은게 나아서요?"
"그런 뜻이 아니다. "
"?"
"잠시만."
지우스는 대뜸 나견의 뒷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놀라서 뒤를 돌아볼 뻔했으나 이내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손길에 가만히 있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머리 긴 애들은 더울 때 이렇게 하던데."
나견은 의아해했다. 분명 바닷물이 지우스의 신발에 스며들었을 텐데 왜 굳이 여기에 서서 이러고 있는지. 하지만 지우스는 자신의 발이 젖는 것을 개의치 않아 했다.
"됐다. 아마도."
"이게 무슨..."
나견은 조심스레 손을 머리 뒤로 옮겨 더듬었다. 중간보다 조금 낮은 높이에 머리가 무언가로 느슨하게 묶여있었다. 그 무언가를 손으로 짚어보니 제법 길이가 길었다. 그것을 눈으로 확인한 나견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남색의 얇고 긴 비단 끈이었다.
"이게 뭡니까...?“
"아까 오다 주웠다."
"진부합니다. 아까 장터에서 산 거죠?"
"...응."
"이런 건 싸게 팔지도 않는데... 색깔도 기린 님 취향으로 골랐네요."
"그럼 내가 네 취향을 어떻게 알고. 원래 금색에는 파란색이 어울리거든. 그래서, 마음에 안 드나?"
".....아주 엉성하게 묶어놓고 생색은. 한 번도 안 해본 거 티 나요.”
"그건 네 키 때문이지."
저 인간이 강매당했을 리도 없는데 왜 이렇게 유치한 잔소리가 하고 싶어지는지. 나견은 괜히 툴툴댔다. 지우스도 나견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 를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적어도 나견이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견은 조금만 움직여도 풀릴 것 같은 비단 끈을 풀어서 입에 물었다. 사락, 하고 풀린 긴 머리를 정돈하고 다시 끈을 빙빙 둘러 묶었다. 한결 자연스러워진 모양새는 과거 짧게 꽁지로 묶던 모습과는 색다른 분위기였다.
"이제 됐어요."
"한결 시원한가?"
"네, 덕분에요."
드디어 긍정적인 신호가 떨어졌다. 지우스는 그의 솔직함에 피식 웃었다. 뭘 또 웃냐고 타박하겠지 싶어 '네가 갈매기랑 열심히 대화하는 상상을 해봤다'라는 대답을 준비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의 예상과는 다른 질문이 날아왔다.
"......잘 어울려요?"
그러나 지우스는 대답하는데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물론이지."
지금이라면 내일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에 젖은 신발 같은 것도 어찌 되던 상관없었다.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사이에서 말갛게 웃는 그가 눈앞의 풍경 속에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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