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글 연성

익명의 감정

당장 알 필요는 없겠지만,

"나진, 여기 앉아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마르샤가 바로 옆에 우뚝 서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기대고 있던 나무의 녹음 덕에 눈부시지 않았다.

"무슨 할 얘기라도 있어?"
"아, 뭐, 음..."
 모처럼의 휴식 시간이라서 혼자 있고 싶었다. 다른 애들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서 숨 좀 돌리나 했는데. 말동무라도 필요했던 건지 마르샤는 입을 옴짝달싹하고 있었다.


"...할 얘기 없으면,"
"나진은 그날 기억 나?'
 이런, 낭패다. 과거 나진과의 일을 꺼내 들려는 거라면, 최대한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재빠르게 구상하기 시작했다. 나진이 우디온 출신이 아닌 견습 기사와 구면이라는 것은 꽤 큰 변수였다. 나진이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고 훈련 이외의 대외 활동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잘 알았다. 나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마르샤와 만났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나진의 성정만큼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마르샤와의 첫 만남에서 "난 아무나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도발 아닌 도발은 먹혀들었다. 그다음 마르샤의 입에서 나온 발언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진이 어쩌다가 저 여자에게 찍힌 건지 내심 궁금했지만...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겠지.


"...뭐가."
"그때, 나진 네가..."
 마르샤는 말하려다 말고 뜸을 들였다. 휴식 시간은 언제 끝나더라. 지금이라면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을 텐데.

"니젤의 식당에서 네가 작전을 잘못 짰다고, 다음 번엔 그럴 일 없도록 만들겠다고 사과했던 거."
 아, 다행히도 화제는 내가 모르는 먼 옛날의 일이 아닌 듯하다. 

"...그때, 나 생각 많이 했어. 내가 그 문지기들을 잘 막았더라면, 먼저 공격에 성공했다면 그런 결과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못 했다고 생각하니 분하기도 하고."
 확실히, 마르샤는 정문에서의 일 때문에 분을 삭히지 못했었다. 그래서 식당에서 점심이 식어가는 와중에도 수저를 들지도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다른 견습 애들은 삼삼오오 모여 한창 놀고 있는 와중에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그 일을 이야기하는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쪽에서 먼저 질문했다. 최대한 퉁명스럽게.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나, 강해질게."

그러니까 그걸 왜 굳이 나한테 와서 면전에다 대고 선언하는 건지...

"더 강해져서 나진 네가 사과할 일 없게 만들 거야. 설령 잘못된 작전이라도 내 힘으로 성공시킬게."
 마르샤의 호박색 눈동자에 일순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심지 굳은 눈빛에 나는 눈만 껌뻑거렸다.

"나진 너를 뛰어넘어서, 내가 너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킨다고?"
"그래, 그러고 싶어."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겠다, 라니. 마르샤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오묘해졌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그랬기에 더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에 도달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날 거기에 있었던게 진짜 나진이었다면, 그가 세운 작전은 성공했을 수도 있으니까. 분명 성공했을 거다. 그랬다면 마르샤가 상심하는 일도 애초에 없었을 것이고. 
 그런데 왜 마르샤는 '지키고 싶다' 같은 사족을 붙이는 건가. 내가 나진인 줄로 알고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해서 직접 선전포고라도 하려던 걸까. 상대적으로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기사 유망주인 나진보다 더 강해지겠다는 포부를 돌려말한 것일 수도 있다. 마르샤에게서 강한 열망이 느껴졌다. 단순히 강해지고 싶다는 바람인가? 하지만, 어쩐지 마르샤의 열망은 그 애가 종종 나에게 보여주던 그것과 닮아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걸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러니까, 기다려줘. 알겠지?"

 마르샤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강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쑥스러워지기라도 한 듯 볼이 상기되더니 시선을 흐트렸다.
 알다가도 모를 이 여자가 앞으로 어떤 돌발 행동을 할 지 몰랐다. 그래서 이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나진이 할 법한 날 선 말—"그런 건 일일이 보고하지 말고 알아서 해"—을 쏘아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마르샤의 두 눈을 보고 말하려니 어쩐지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그래, 수고해."
 결국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마르샤는 얼굴빛이 밝아지며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더니 곧장 훈련하겠다며 뒤돌아 떠나버렸다. 

 아까 본 마르샤의 표정에서는 결의와 용기가 드러났었다. 다른 감정이 좀 더 섞여 있던 것도 같은데. 저 위험한 여자의 속내를 온전히 파악하긴 좀처럼 힘들다. 흥분과 관심, 약간의 긴장 사이의 어딘가. 경험해보지 않은 이름 모를 감정이다. 당장에 그걸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젠가는 마르샤의 본심을 더 알게 되는 편이 나에게도 유리해서 좋을지도.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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