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글 연성

회자정리(會者定離)

[불교] 만난 자는 반드시 헤어짐.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빨리 온다고 온 거였는데."
"충분히 일찍 오셨어요."

 카멜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인간과의 대화가 낯설지는 않았으나, 나견과는 특별한 인연이었기에 쉽게 말을 고를 수 없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읽어낸 나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찾아오셨네요."
"용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지."
"하긴 그렇겠군요."

 카멜시아는 힘의 완전한 개방 이후, 나견의 복수를 이루어주는데 일조했다. 모든 약속을 지킨 두 사람은 더 이상 함께 있을 명분이 없었다. 카멜시아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기색이었고(이제 귀찮게 하는 용이 없어서 속시원하다는 나견의 농담에 충격받을 뻔하기도 했다),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나견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카멜시아는 나견의 곁을 떠나기 전, 그에게 자신을 부를 수 있는 연락 수단을 건네주었다. 정말 긴급한 순간에 부르면 언제든지 도움을 주겠다는 의리의 선물이었다. 서로의 평탄한 미래를 기원해주며 각자의 길을 떠난 지 15년. 15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내내 쓰이지 않던 그것은, 어느 추운 겨울날 도움 요청이 아닌 안부 전달에 쓰였다.

나견의 부름을 받은 카멜시아는 착잡한 심정으로 중앙대륙의 수도 근처로 발을 들였다. 수도 중심에 비하면 거주민 수가 적은 외곽이었지만 연말을 맞이하여 가족 모임과 연인들의 만남이 잦은 시기였다. 한껏 연말 분위기를 낸 거리의 불빛과 왁자지껄한 군중의 목소리 속에서 익숙한 기운을 따라가면 나오는 눈 쌓인 작은 오두막. 나무로 된 문을 세 번 정도 두드리니 들어오세요, 하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견의 목소리는 기억과 조금 달랐다. 용에게 15년이란 눈 깜짝할 사이였으나, 인간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날 햇수였다. 카멜시아는 세월을 체감하며 삐걱이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현재, 침대틀에 기대어 앉은 집주인과 마주 보고 앉아있다.

"…그대가 갑자기 날 부른 이유가 뭐지?"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거든요. 대략 15년 정도 지났나? 용에게는 한순간이겠지만요."
"그렇지."
"저 없다고 굶고 다니신 건 아니죠?"
"이보게, 내가 여태 그럴 리가 있나!"

 나견이 웃음을 터트렸다. 몇 년 사이 성격이 조금 유하게 변한 듯했지만, 카멜시아가 느끼기에 그의 얄미운 구석은 아주 여전했다.

"그대는 변한 듯 변한 게 없군."
"그렇습니까? 당신은 그대로인데."
"당연하지. 용이니까."

 카멜시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하고 움직였다. 나견이 재수 없다는 듯 날카로운 눈매로 살짝 째려보자 카멜시아의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 나견은 쓸데없는 부분까지 그대로라며 그를 놀렸다.


"크흠, 그동안은 어떻게 지냈는가?"
"하고 싶었던 걸 했죠."

 낡았지만 깨끗한 침대, 여행 잡지 두세권이 놓인 작은 서랍장, 쓰인 흔적이 별로 없는 나무 식탁과 의자. 최소한의 가구만을 들여놓은 집안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하게 하였다. 필히 염원하던 대로 대륙 여기저기 쏘다니며 다녔겠지. 나견과 동대륙의 장군을 따라 수정바다를 방문했던 일을 떠올려보면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그가 찬란한 풍경 앞에서 진심으로 감탄하던 모습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생소했다. 나견은 아마 다시 그 바다를 꼭 찾아갔을 테지. 카멜시아는 생각했다. 나견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여행담을 즐겁게 이야기했다. 기억을 하나하나 꺼낼 때마다 나견은 들떠 하며 말이 점점 길어졌다. 그걸 잠자코 듣던 카멜시아가 피식 웃었다. 순간 아차 했는지, 나견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먼 길 오셨는데 배 안 고프세요? 뭐라도 먹을 걸…."
"움직이지 말게. 내 직접 하지."

 나견은 조용히 끄덕이며 서랍을 가리켰다. 미리 준비해두기라도 한 건지, 썰어둔 빵과 소금에 절인 고기가 밀폐용기에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찻잎을 담은 병과 찻잔이 있었다. 카멜시아는 불에 물을 올리며 나견을 설핏 곁눈질하였다.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긴 머리는 허리 근처에서 너울거렸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는 하얀 도자기 같았고, 팔다리는 한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처럼 야위었다. 하지만 그의 홍채만큼은 여전히 잘 익은 과실처럼 붉었다. 카멜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카멜시아가 이곳에 온 이유, 그가 15년만에 받은 나견의 연락은 '곧 죽을 것 같으니 만나러 와 달라'였다.

"여기 있네."
"감사합니다. 제가 용님에게 먹을 걸 받는 날도 다 오는군요."
"그래, 오래 살고 볼 일…."

 카멜시아는 말끝을 흐렸다. 이번에는 나견이 어깨를 으쓱하고 신경 쓰지 말라 하였다.

"…내가 실례를 범했군."
"뭘요."

 몇 번의 짧은 담소가 오가고, 준비한 요깃거리도 전부 먹었다. 카멜시아가 접시를 치우려 일어났고, 나견은 침대 옆 서랍의 문을 슬쩍 열었다. 하얀 봉투 안에서 꺼낸 것은 여러 약초를 빻아서 만든 약이었다. 그는 약을 입에 털어 넣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했다. 카멜시아도 이를 알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견은 제 머릿속을 훤히 읽고 있을 그의 배려를 금방 눈치챘다.

"용님, 이제 돌아보셔도 돼요."
"…15년이면, 자네는 아직 젊지 않은가."
"그렇죠."
"뭔가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괜찮습니다. 용하다는 병원도 여기저기 가봤는데, 이제 손 쓰기에는 너무 늦었대요."
"그럼 내가,"
"아뇨. …아뇨. 정말 됐어요."
"……."
"당신한테 신세 지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나견은 어느 날 갑자기 건강 상태가 악화하였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낯선 천장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당연히 병원에 내원도 했었다. 담당의는 좀처럼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어릴 적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던 적이 있다고 하자 의사는 그곳에서라도 이유를 찾아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뚜렷한 진단명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견이 먼저 포기를 선언했다. 최소한의 약만을 처방받으며 꾸역꾸역 살아온 지 1년, 나견은 조금씩 한계를 느꼈다. 그러다 약을 보관하던 서랍 속 구석에 잘 보관해두었던 카멜시아의 선물을 찾게 되었다. 오묘하고 영롱한 빛깔을 띠는 용의 구슬. 구슬을 쥐고 전하고 싶은 내용을 생각하며 깨트리라는 말을 기억해낸 나견은 즉흥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급할 때만 쓰라는 당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급한 일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로, 그냥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자네가…? 나를?"
"뭐요. 안 됩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자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니 답지 않군."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궁상이라도 떨고 싶어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

 나견은 다시 웃었다.


"네, 네. 그럼 대신에."
"?"
"앞으로 몇 번 더 보러 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혼자 집에서만 지내려니 너무 따분해서요."
"정말이지…."
"거절하셔도 되고요. 저는 상처받겠지만."
"됐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내 약속하지."

 그날 이후 카멜시아는 정말로 약속을 지켰다. 차를 우리고, 벽난로에 장작을 채워 넣어주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나견이라는 이름과 웃음과 병, 그의 많은 것이 변한 채로 15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죽을 것 같다는 나견의 통보는 현실이 되었다. 

 카멜시아의 병문안은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날을 맞이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이른 오전 시간이었음에도 나견이 머물고 있어야 할 집은 텅 비어있었다. 잠시 외출했나 싶었지만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자 카멜시아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였다. 이 추운 날씨에 오래 나가 있을 몸 상태가 아니었을 텐데. 급히 이웃들에게 수소문을 하니, 나무집에서 혼자 살던 청년이 전날 갑작스레 쓰러져 수도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카멜시아는 그 길로 바로 수도의 병원을 방문했다. 나견이라는 이름을 대고 안내받은 병실의 문을 열어보니 병원 침대를 둘러싼 몇 명의 인간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카멜시아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어떻게 찾아왔냐는 물음에 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불쾌할 정도로 새하얀 방 한가운데로 천천히 향하였다. 그곳에는 며칠 사이 안색이 더욱 수척해진 나견이 뉘어져 있었다. 여전히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지만, 항상 자신을 다그치던 나견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강철처럼 단단해보이던 그도 결국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현실이 새삼 잔인하게 느껴졌다.
 카멜시아는 뒤늦데 자신이 왜 이리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그를 찾아왔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인간의 죽음이라면 이미 숫하게 경험해봤다. 생명이란 바람 앞의 등불만큼 덧없다는 사실과 인간의 어두운 면모를 잘 알았기에 그들에게 깊이 관여하려 하지 않으려 했다. 더군다나 나견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카멜시아에게 닥쳐온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가슴 한 구석이 돌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무거웠다. 당장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자신을 무력하게 했다. 그제야 카멜시아는 이 인간의 죽음만큼은 자신의 안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그때, 나견의 마른 목에서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깜짝 놀라 괜찮냐고 물으려던 카멜시아는 그의 흐릿한 두 눈을 보고 주춤하였다. 힘없이 열린 두 홍채는 시들어가는 단풍잎의 색과 닮아있었다.

"……오셨네요."
"나에게는 힘들여서 말할 필요는 없네. 잘 알고 있으면서."
"……."
"자네가 사과를 왜 하는가. 사정은 다 들었으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짓궂은 농담이 나오는가."
"……."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 말해보게."
"……."
"…그래.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아무 말 없는 대답에 맞장구를 쳐주기를 몇 번, 이후 카멜시아도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았다. 더 이상 그로부터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기에.




 이후로 카멜시아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짧은 생을 살았던 청년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수도의 무덤가에 묻혔다. 듣기로는 그가 끔찍이 여기던 형제의 이름도 묘비에 함께 새겨졌다고 한다. 카멜시아는 그의 장례를 지켜보고 다시 소리소문없이 수도를 떠났다. 푸른 바다 근처를 지나칠 때나 하얀 눈이 오는 날에, 어쩌다 금발 사내를 마주칠 때면 어렴풋하게 그를 생각했다. 인간으로서는 가늠하기도 어려운 아주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의리가 강한 용은 잊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대륙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몇 백 년, 몇 천 년이라는 시간은 대륙의 마법과 과학, 그리고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많은 곳이 개발되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그러면서 쌍둥이가 함께 있던 묘지는 높으신 분들의 사정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콘크리트 건물이 여럿 세워졌다. 카멜시아는 씁쓸해할 틈도 없이 처소를 여러 번 옮기며 변한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대게 한적한 산이나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살았지만, 아주 가끔 많은 인간들이 사는 지역을 거쳐 갈 때면 옷도 시대에 맞춰 입어보려 했고 인간들의 새로운 음식도 접해보았다. 덕분에 영겁의 삶이 마냥 지루하지는 않았으나 바뀐 공기의 냄새가 썩 내키지는 않았다.

 초봄의 따뜻해진 바람이 눈을 녹이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워질 무렵, 카멜시아는 수도를 방문했다. 그러다 문득 이제 사라지고 없는 나견의 옛 묘지를 떠올렸다. 이제는 대학교라는 이름의 교육시설이 세워지고 젊은 인간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 되었다. 늦은 오후에 찾아간 학교 부지는 쓸데없이 넓으면서 한적했다. 학교 곳곳에 심어진 벚나무의 꽃봉오리들이 벌써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조경에 힘을 쓰긴 했군. 카멜시아는 성의 없는 감상평을 읊조렸다. 활짝 핀 개나리 화단 사이에서 카멜시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 분명 남동쪽이었지. 과거 묘비가 있던 방향을 떠올린 카멜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카멜시아는 멈칫했다. 시선이 꽂힌 그곳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두 명의 남자가 운동장 둘레길을 거닐고 있었다. 비슷한 가방을 맨 남학생들은 똑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서로를 툭툭 치며 재잘대는 모습이 의좋은 형제 같았다. 카멜시아는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통찰했다. 목덜미가 보이는 짧은 머리였지만 선명한 저 금빛 머리칼, 길쭉한 팔다리, 그리고 잊고 살았던 이 익숙한 기운은…. 머리를 앞선 두 발은 두 인간들을 향해 움직였고, 그의 손은 망설임 없이 한 쪽의 어깨를 골랐다. 느닷없이 낯선 사람에게 붙잡힌 청년은 당황하며 뒤를 휙 돌아보았다. 놀람이 서려 있는 두 눈을 본 카멜시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누구세요…?"

 
 용과 마주한 두 홍채는 만개한 동백꽃처럼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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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집중하는 백조

    안녕하세요 선생님! 견의 삶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카멜시아의 이야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나견은 아마도 다시 그 바다를 찾아갔을 테지. 하는 카멜시아가 견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는 듯해서 흐뭇해하면서 읽다가 나견이 어떤 이유로 다시 용을 불렀는가를 듣고 급격히 마음이 어두워졌어요.. 긴 삶을 살지 못하고 젊은 모습 그대로 묻히는게 나견 답다 싶고, 초자연적인 능력이 없이도 서로에 대해 신의를 가지는게 어쩌면 용이 인간에게 바라는 인연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어코 마음이 무너지는 카멜시아와 둘의 대답없는 대화가 메아리 같아서 용을 동정하게 되기도 하고 슬프네요.. 나견이 죽고 나서 카멜시아가 그를 어떻게 그리워 했을까, 묘지가 사라질 때까지도 계속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용과 나견이 많은 이들 중에서 서로에게 무이한 인연이라는 생각에 또 행복해지는 연성이었어요. 너무나도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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