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글 연성

담력 훈련

그것은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었다. 견습 기사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 훈련을 끝내고 땀과 먼지를 씻어내고 있었다. 드물게 목욕 시설이 갖추어진 이곳은 어느 버려진 저택으로, 오래도록 사용되지 않아 이제는 견습 기사의 훈련장으로 쓰이게 되었다. 실외의 넓은 정원 터는 마음껏 날뛰기에 좋았고 실내는 다수의 인원이 식사, 목욕, 수면을 취할 수 있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다수의 인원'이 한정된 공간에서 지내는 것은 나견에게 편한 일만은 아니었다.

"간만에 따끈한 물로 씻어보네."
"야, 물 좀 그만 튀겨! 애냐!"
"하하, 이 자식 물에 빠졌더니 머리가 완전 죽었어."
"야, 나진! 얘 좀 봐라!"
"……."
"듣는 척이라도 좀 해라…."

 현재 나견은 원성을 들어줄 힘도 없었다. 훈련 후에는 항상 힘겨웠으나 티를 내면 안 되었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나견은 혼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머리의 거품기를 씻어냈다. 물소리가 잠시나마 주변의 소음을 차단해주었고, 비누 향과 따뜻한 물의 온도는 심신에 쌓인 피로를 풀어주기에 적당했다.

"그나저나 이런 데가 다 있고 신기하다."
"너 몰라? 여기 사실 되게 흉흉한 데래."
"왜?"
"원래 어떤 원로 집안이 살았는데, 자꾸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아무도 안 살게 되었대. 아무도 없는데 소리가 나거나 갑자기 물건이 막 떨어지고…. 여기서 사람이 죽은 적은 없는데도 말이지. 그리고 전에 월간 잡지에서 봤는데, 여기서 훈련하던 선배 견습이 어릴 때 돌아가셨던 할머니 유령을 봤다는 거야. 여기에 뭔가 씐 걸지도…."
"아오,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믿냐? 유치하게."
"하! 쫄았냐?"
"겠냐?"
"그럼 오늘 밤에 소문이 사실인지 검증해 보자고. 여자애들도 좀 불러서."
"결국 그게 목적이었구만."
"…율니아도 오려나?"
"글쎄. 궁금하면 눌진 네가 얘기 좀 해봐."
"야, 잠깐 귀 좀…."

 저러다 기사한테 걸려서 혼나지. 나견은 물기를 털어내며 어수선한 욕실을 나왔다. 아직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지만, 알아서 마르게 놔두었다. 예전만큼 길진 않으니까. 저택의 낡은 복도는 조용했다. 띄엄띄엄 배치된 고풍스러운 장식장은 모두 굳게 닫혀있었고, 일부는 유리창 안쪽이 보이는 구조였으나 그 내부가 휑하게 비어있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임을 와닿게 했다. 게다가 견습의 임시 훈련장처럼 쓰이다 보니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지 않았다. 복도의 융단이 접혀서 말려 올라와 있거나 먼지 쌓인 창틀, 오래된 커튼. 견습 훈련과 생활 방식이 워낙 격한 만큼 최소한의 청소만 하는 모양이다. 과연, 소등하면 꽤 으스스한 분위기가 될 터였다. 
 하지만 나견은 귀신이나 괴기 현상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괴담의 대부분은 구전되며 왜곡되거나 과장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막상 파헤쳐 보면 원인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그런 이야기를 싫어하고 완강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 곳곳의 불가사의한 현상, 또는 미지의 땅은 나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세간의 기대와는 다른 진실이 있더라도 그것을 직접 알아가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다만, 나견은 알지도 못하는 귀신의 저주가 무섭지는 않았다. 대신 사람이 더 잔혹하고 무섭게 변할 수 있다고 여겼을 뿐.

 취침 시간이 되어 소등을 하고 5분 정도가 지났을까. 끼이익, 옆방에서 낡은 문을 조심스레 여는 소리가 작게 났다. 정말로 나가는구나. 얼마 가지 않아 보초를 서던 기사에게 걸려서 혼나고 쭈뼛거리며 방으로 돌아가는 미래가 훤했다. 
 나견 자신에게는 별일 없으리라 눈을 감고 무시하려던 건 오래가지 못했다.

덜컥, 끼릭, 끼릭, 끼릭—

 알 수 없는 소리가 문밖에서 울렸다. 필히 누군가가 문고리를 잡고 억지로 열려는 소리였다. 침입자인가? 나견은 상체를 일으켰다. 옆에 곤히 잠들어있는 라우준을 깨울까 했지만, 곤히 잠든 평온한 얼굴에 그럴 마음이 싹 가시었다. 불쾌할 정도로 높은 음을 내던 낡은 문고리가 일순 조용해졌다.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온 나견은 문에 귀를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꿈이라도 꾼 건가 싶었지만 나견은 자신의 청력을 의심할 정도로 잠에 빠져있지 않았었다. 미심쩍으면서도 찝찝했다. 혹여 담력 훈련을 한답시고 나간 녀석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 아닐까? 어쩌면 누군가의 함정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견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오른손으로 어처구니를, 왼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녹슨 경첩이 긴장감을 돋구었다. 열린 문 너머는 고요했다. 자신의 발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복도의 낮은 장식장 위에는 누군가 켜놓은 은촛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양초의 상태를 보니 불을 붙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견은 촛대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견습들은 물론 수상한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 기우였나. 아니, 이 보란 듯이 있던 촛대를 드는 것까지 함정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견은 다시 촛대를 도로 갖다 놓으려 팔을 내렸다. 의심을 거두려던 그때, 툭. 바닥으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야는 캄캄해졌다.

"…?!"

 바람이나 인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주변 창문은 모두 제대로 닫힌 데다가 두꺼운 커튼까지 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재빠른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불을 끈 것일까. 나견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며 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데 갑자기 늘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스윽 들어 올려지는 감각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어깨 너머로 어처구니를 휘둘러 보았지만 무언가 스치는 느낌은 없었다. 그때, 나견의 허리 아래쪽에서 오래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작게 났다.

"……."

 나견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공포보다도 허탈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동시에 나견은 결론을 내렸다. 이건 견습들의 수작이었다. 수상한 소리를 내 유인하고 복도의 장식장에 숨어서 겁을 주려는 심산이었을 터다. 아까 욕실에서 자기들끼리 속닥대던 게 이에 대한 제안이었을 테고. 그리고 정말로 침입자라면 괜히 어설픈 장난질을 할 시간에 무방비 상태인 '나진'을 어떻게든 서둘러 처리했을 것이다.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던 나견은 살짝 짜증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동시에 안도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견은 수색을 관두고 돌아가려 발걸음을 돌렸다. 이 이상 그들의 장난에 어울려줄 정도로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반응이 재미없으면 못된 장난도 금방 멈추는 법이었다. 때로 더 고약하게 나오는 질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설마 견습들이 ‘나진'에게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나견은 아무 수작도 없는 곳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하고 만다. 나견의 경계가 풀리면서 그는 발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접혀서 턱이 진 융단에 그만 발끝이 걸려버렸고, 제때 반응하지 못한 나견의 몸은 그대로 앞으로 쏠렸다. 

"…!"

 나견은 몹시 당황했다. 꼼짝없이 바닥에 넘어질 거란 순간적인 판단과 달리, 나견의 몸은 공중에 멈춰있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 그의 몸을 받쳐주고 있었다. 아니, 받아주었다기 보다는 안아주었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나견의 어깨와 등을 잡아주는 그의 품은 단단하면서도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묘한 상황이 연출되자 나견은 잠이 확 달아났다. 이쪽 방향이라면, 라우준? 아니, 문을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누구지?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확인하려던 찰나, 나견의 등 뒤쪽에서 불빛이 아롱거렸다.

"뭐야, 나진. 눈치챘다고 말없이 돌아가기나 하고."
"재미없어."

 예상대로, 아까 전 목욕탕에서 수다를 떨던 와드린을 비롯한 녀석들이다. 다리곤, 루지안, 율니아와 눌진까지. 예상은 했지만 나 하나 놀라게 하려고 작정을 했군. …마지막은 조금 놀랐지만. 나견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에이,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나."
"바보가 짠 작전이라 그렇다고 전해줘."
"작전이 조금 부실했던 것 같아."
"뭣."
"내가 뭐랬어, 나진 이 자식은 철판이라니까. 야, 실패했으니까 벌칙으로 딱밤이다! 나 이거 하려도 깨어 있었거든."
"루지안 너까지…! 아얏!!"
"얼씨구. 얼굴은 왜 빨개지냐?"
"다리곤 넌 한 것도 없으면서! 입 다물어!"

 음산하던 복도가 금방 왁자지껄해진 가운데 나견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뒤에 있어야 할 그 사람이 없었다. 나견의 머릿속에서는 비현실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너희들끼리 한 거야?"
"응. 다른 애들은 안 한다고 발 빼더라. 겁쟁이들."
"이상한데. 방금 이쪽으로 넘어질 뻔할 때 누가 날 잡아줬어."
"…? 그쪽 방향에는 아무도 없었어."
"우린 다 이쪽 장식장 안에 숨어서 너랑 촛불 살짝 건드린 게 다야."

 와드린네가 있던 곳은 서쪽, 나견이 돌아가려던 침실은 동쪽. 이중 아무도 없었을 위치였다. 침묵이 흘렀다. 나견이 훑어본 견습들의 표정에 거짓은 없었다. 당혹, 공포, 의문만이 서려 있었다. 나견은 자신이 착각을 했나 자문해보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농담 하지 마! 말도 안 돼."
"호, 혹시 진짜로 유…."
"이 녀석들, 거기서 뭐 해?"

 무어라 말하기도 전, 순찰 중이었던 피도란스가 나타났다. 제 발 저린 견습들은 볼일을 보러 나왔다는 둥, 밤늦게 불침번을 연습하는 중이었다는 둥 둘러대느라 바빴다. 늦여름 밤의 소름 끼치는 소동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다행히도 견습들은 어서 돌아가 자라는 꾸중만 듣고 침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온 나견은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건 뭐였을까.' 차가우면서도 따뜻했던 그것. 어두웠던 탓에 제대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몸에 닿은 손의 모양새가 어딘가 익숙하고도 애틋하고 아련했다. 절로 마음이 산란해졌다. 하지만 더 궁금해할 새도 없이 졸음이 마구 밀려왔다. 누군가 편히 쉬라고, 눈꺼풀을 덮어주며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견은 아주 오랜만에 푹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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