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글 연성

뭘 하길래 이렇게 늦어?

나진+지우견?

"진아, 나 오늘 좀 늦게 끝나니까 먼저 집에 들어가."
"어? 어, 그래."

 오전 10시. 나견은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나갔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인사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띠릭, 하고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요즘 따라 견이가 늦게 들어오네. 견이 오후 수업은 늦어봤자 5시에 끝날 텐데.'

 우리는 같은 대학을 다녔고, 시간표도 공유하고 있었다. 학과도 다르고 빌어먹을 수강 신청을 서로 맞추어가며 하기란 어려웠지만 교양을 하나 정도 같이 듣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견이 새 학기 이후로는 평소보다 2시간은 지난 시각인 오후 8시에야 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늦게 들어오거나 외박하는 일은 없었다. 이제는 둘 다 성인이고, 나견은 똘똘하니 자기 앞가림 정도는 훌륭하게 해내리라 믿었다. 난 어릴 때부터 일찍 철들어서 형 노릇을 한 그를 봐왔고, 나견에 대한 예측은 대체로 옳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유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늦게 귀가하는 쌍둥이를 걱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왜 늦냐고 질문해도 얼버무리거나 공부 때문이다, 별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지만, 어느 날은 잠결에 나견이 가방 없이 나가거나 수업도 없는 날 외출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자는 줄로 알고 구색도 없이 대충 몸만 나간 듯했다. 무슨 일을 하길래 늦을 일이 자꾸 생기는 거지? …보통은 클럽을 간다고들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고, 또한 나견이 그러는 모습은 상상조차 어려웠다. 그런 취미도 없을테고. 이런 상황에서 가족이라면 응당 마음이 불안해지는 법이었다.

'사실 오늘 휴강인데. 한 번만 따라가 볼까? 혹시 괜한 의심한다고 기분 나빠하려나.'

 그러고 보니 지난주 교수가 출장을 사유로 휴강을 공지했었다는 사실을 아직 나견에게 말하지 않았었다. 갈까? 말까? 의자에 축 늘어져서 고민했다. 나견의 늦은 귀가 이유를 알아내느냐, 아니면 형제를 믿고 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느냐…. 그때, 핸드폰에서 띠링, 하고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나견이었다.

진아 미안 오늘은 9시는 돼야 들어갈 것 같아.
밥 냉장고에 있으니까 꺼내 먹어.

뭐? 뭘 하는데 자꾸 늦어

진짜 미안.
수업 시작한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견아?
야 나견


 …나에게 있어서 삶의 1순위, 아니 0순위는 사랑하는 가족의 안전이었다. 남들은 극성맞다 할 지 몰라도 어릴 때부터 의지해온 나견은 보통의 형제 그 이상의 존재였다. 이 세상에 서로밖에 없는 각별한 사이. 적어도 이유라도 확실하게 알아야 마음이 놓이겠다 싶어 늦은 오후 몰래 나견을 찾기로 결정했다. 






 분명 오늘은 여기 수업이랬는데. 학교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강의실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예정보다 수업이 일찍 끝났는지 강의실은 비어있었다. 쳇, 조금 더 일찍 출발할걸 그랬다. 아쉬움에 혀를 차고 몸을 돌린 순간, 익숙하디 익숙한 맹한 얼굴과 마주쳤다.

"어? 진아."
"…준."

 라우준이었다. 어느 틈에 와 있던 거야. 라우준은 같이 교양 수업을 듣는 동기였다.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건 덤이고. 옛날부터 쓸데없이 감만 예리했던 라우준은 캡모자에다 후드 모자까지 눌러쓴 내가 나진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우리를 헷갈리지 않고 구분하는 유일한, 특이한 놈이다.

"여기서 뭐 해? 저번에 오늘은 쉰다고 하지 않았어."
"아. 어, 견이가 집에 뭘 두고 갔는데 좀 가져다 달래서."
"그렇구나. 그럼 내가 전해줄까?"
"나견이 어딨는지 알아?"
"오늘 견이가 같이 수업 들을 때 나한테 말해줬거든. 아마 이 건물 5층에…. 2509 강의실에 있을 거야."
"거기는 왜 갔대?"
"그건 나도 잘….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하더라고."
"오호. 그럼 일단 나 간다."
"그래, 안녕."

 혹시 그새 놓칠라 서둘러 자리를 떴다. 저 둔탱이도 가끔은 도움이 되네. 그나저나 준한테는 조금이라도 알려주는 걸 왜 나한테는 철저히 숨기지? 갑자기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물론 아무리 사이좋은 형제라고 모든 사생활과 비밀을 공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하지만 나견, 그는 지금껏 한 번도 크게 책잡힐 일은 만들지 않았었다. 보육원이나 학교 선생님에게도, 학우들에게도, 나에게도.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민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2층에서 5층으로 올라오는 동안 이런저런 잡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라우준이 알려준 강의실 문 앞에 섰다. 휑한 복도에서 우두커니 서있어봤지만 어디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없었다. 뭐야, 허탕인거 아냐? 하지만 귀를 기울이니 문 너머에서 익숙한 말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문에 나 있는 창문으로 살펴보니 조금 구석진 곳에 나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처음 보는 풀빛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나견의 대인관계를 전부 꿰고 있지는 않지만 친하다는 사람은 대강 다 아는데. 두 사람의 거리감은 어색하기는 커녕 친구 사이라 해도 상당히 가까운 정도였다. 근데 저 사람이 뭘 기다렸다는 거지? 나견은 정말 동아리나 대외활동이라도 하느라 바빴던건가? 아니, 그렇다면 쌍둥이인 나한테 숨길 필요가 없었을텐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그때, 그 고리를 끊어낸 건 저 풀빛 머리 남자의 행동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한 쪽 손을 들어 나견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 뭐 하는 거지?'

 사고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던 찰나, 나를 더욱 벙찌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나견의 반응이었다. 나견은 쑥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우물쭈물했다. 정말, 나견과 함께한 세월이 곧 내 한평생이었는데도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그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저런 적은 없었다. 지금 내가 뭘 엿보고 있는거지? 

"형,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해요…."
"괜찮아. 여기는 우리 둘뿐이잖아."

 나견은 곤란하다고 말해놓고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그 볼짝은 평소보다 발그레했고 나견과 그 남자의 얼굴은 점점 가까워졌다. 이건 그 누가 봐도 비밀 연애의 현장이었다.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럼 그동안 늦게 들어왔던 이유가 이거였다고? 난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사실 관계를 보다 확실하게 확인해야겠다는 강한 충동이 일었다. 아니, 그보다도 둘이 너무 가까웠다. 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나견!!"
“…! 나진,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설마 요즘 따라 자꾸 늦는 게 이 인간 때문이었어?"
"진아!"
"잠깐.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선배, 죄송해요. 제가 다 '설명'할게요."
"오해? 설명?"






"연극 연습?"

"그래. 같은 과 친구가 갑자기 연극 동아리에 공석이 생겨서 같이 해달라길래…. 선배가 그나마 친하니까 내가 상대역 해달라고 부탁해서 도와주시는 거고."

"그럼 왜 나한테 비밀로 한 거야?"

"이렇게 염장질하는 연기를 어떻게 네 앞에서 해. 나진 너 같으면 속 편하게 할 수 있겠어?"

"그렇게 어려운 역할을 냉큼 준다고?"

"꽤 잘하거든. 나견이 연기에 소질이 있던데."

"선배, 좀…."


 나견의 해명을 듣고 나니 몸에서 힘에 빠졌다. 하지만 진짜는 아니었다고 하니 안심이었다. 그래도 연극 연습하느라 늦는다는 것 정도는 말해주지, 하는 서운함도 있었다. 나견은 그 남자에게도 나에게도 연신 사과했다. 나견의 미안하다는 얼굴을 보니 나도 마음이 약해졌다.


"견아, 미안해. 내가 널 의심했어."
"아냐, 나도 쑥스럽다고 너한테 말 안 한 내 탓이 크지. 진이 네 마음도 이해해."
"……."
"아, 이 분은 같은 학과인 지우스 선배야."

 나견은 나한테 살짝 눈짓했다. 저건 사과하라는 뜻이다. 솔직히 연기였다고 해도 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견이 하라니 해야겠지.

"죄송했습니다."
"…쌍둥이라고 했나? 정말 닮았군."

 사과도 안 받고 이게 웬 뚱딴지 같은 소리람. 당연히 닮았지. 

"…선배."
"아무튼 연습 계속할 거지?"
"네. 진아, 넌 먼저 돌아가. 아까 문자 보낸 거 봤지?"

…나견의 연극 연습을 방해할 마음은 없었다. 무슨 역할이길래 저런 연기를 시키는 건가, 하는 짜증은 조금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항상 나를 챙기느라 바빴던 나견이 대학에서는 친구, 선후배와 잘 어울리는 것을 보니 무어라 말을 얹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럼 나 갈게."
"그래, 먼저 가."

 나는 문을 열고 도로 나왔다. 휴대폰을 꺼내 잠시 시간을 확인하려던 찰나, 그 지우스란 선배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릴락 말락 한 수준의 크기로 새어 나왔다.

"그래도 꽤 잘 둘러댔는걸. 확실히 연기에 소질이 있어."
"먼저 한 건 형이잖아요. 그리고 그런 거에 흥미없거든요."

 …저것도 그 '연극 연습' 얘기인 거겠지. 부디 이것도 내 기우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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