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모음
1. 비밀
"몸 상태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담청색 기린은 작게 한숨 쉰다.
"그런데 전 왜 누워있는 건가요?"
"그건......네가 어제 갑자기 쓰러졌다."
"제가요?"
"그래. 아마 몸이 피로했던 거겠지. 그러니 오늘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말고 그냥 쉬어."
"...감사합니다."
"아, 차를 끓였는데. 가지고 오지."
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간다. 문을 닫으며 좁아지는 틈새로 금발의 남자를 보았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 틈마저 전부 닫히고, 기린은 벽에 기대선다. 그리고 그의 주치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바로 전날, 상담실에서 나온 의사와 기린은 복도에서 마주쳤다. 기린은 뜸을 들이다 물었다.
"...녀석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직 호전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럴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고요. 현재 상태에서 억지로 상기시켰다가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붕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환자 분께서는, 여전히 자신이 '나견'이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자신을 연기하는 가족을 연기한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무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털썩, 그리고 뒤에서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지우스는 미간을 구겼다. 일이 생각 이상으로 꼬인 상태였다. 나진의 행세를 하는 나견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아냈는데, 또 한 번의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외적으로는 나진의 부상이 심하여 병원에 입원했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전력의 상실은 물론, 나진의 상태가 더욱 악화할 수도 있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샀던 기린은 고뇌했다. 그를 '나진을 연기하는 나견'으로 인정하여 특수 2기의 강력한 패로 이용해야 할 지, 아니면 '자신을 나견이라 착각하는 나진'으로 인정하여 정신 붕괴의 위험성을 감수해야 할 지. 어느 쪽이던 그에게는 괴로운 길이라는 것만이 틀림없었다.
"기린 님. 저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나요? 답답한데."
"좀만 참아. 부상이 다 나아야 뭐라도 하지."
"...원래 다쳐도 병원에서 치료는 잘 안 받잖아요."
"네가 좀 약하나? 그리고 그건 다른 견습들에게 있어서도 중상이야."
"알겠습니다."
"그래. 난 다음에 또 오마. 쉬어."
"네."
기린은 병실을 다시 나오며 묵묵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은 때가 아냐. 지금은 특수 2기와 나진의 미래를 위해 보류해야 한다. 견습 한 명 한 명의 사정을 모두 고려해줄 수도, 배려해줄 수도 없는 위급한 정세였다. 언젠가 진실을 말해줄 때가 오기를 바라며, 기린은 나진 본인조차도 모르는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
2. 청금의 풍경(2)
1편: https://glph.to/ozyw3o
아늑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지우스와 나견은 예정대로 일하러 갔다. 니젤 출신의 일반 마법사가 동대륙으로 밀입국하려던 게 항구에서 적발되어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두부 손상이 생겨 현재 그는 의식 불명이었다. 그래서 그의 출신지인 니젤의 별천지로 사건 수사의 공조를 요청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진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우스가 이미 니젤에서 마법사의 지인들을 탐문하고 왔고, 나견과 함께 그의 동료들의 증언, 주거지까지 꼼꼼하게 확인하여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 마법사는 치료용으로 쓰이는 마약성 희귀 약초를 동대륙의 재력가들에게 밀수출하는 일을 했었다. 그런데 대략 반년 전 동대륙의 한 양반가와 거래를 했는데, 그곳의 규수와 눈이 맞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의뢰를 받고 간간이 하던 밀입국의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일기에 특정 여성의 이름이 실리기 시작하며 장부에 꽃이나 여성용 장신구 같은 품목이 생겨난 것이 그 증거. 그리고 작정하고 사랑의 도피를 위해 밀입국하려던 날, 덜미가 잡혀 체포된 것이었다.
여기까지 알아내고 보고하는데 걸린 시간은 하루하고 반나절. 두 사람이 같이 일하니 남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바깥이 어둑해진 시간, 숙소에서 지우스는 별천지 상부에 부칠 보고서를 작성했고 나견은 돌아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을 수첩에 정리하고 있었다. 나견은 옛날부터 즐겨보던 월간 잡지에 글이 실리는 것을 계기로 명성을 얻어 알 사람은 다 아는 여행 수기 작가가 되었다. 지우스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가 대견했다. 기린으로서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기사측의 전술가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나견이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한때난 공허함에 젖어있던 녀석이 나름의 꿈을 이룬 것만으로도 지우스에게는 충분했다.
그때, 바깥에서 요란하게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 오색찬란한 폭죽. 지우스는 그날 밤부터가 여름 축제가 시작하는 기간이라는 것을 어깨 너머 들었던 게 생각이 났다. 나견은 펜을 내려두고 창문가로 갔다. 지우스는 방의 조명을 끄고 그 곁에 나란히 섰다. 어두운 밤하늘에 화려한 불꽃이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나가서 볼까? 묻는 지우스에 나견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도 잘 보여요."
지우스는 말없이 나견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나견은 자신이 선물한 비단끈을 계속 써주고 있었다. 낮고 헐렁하게 묶은 머리가 마치 금으로 된 실오라기 같았다. 그리고 몰입하는 저 눈빛. 어두워서 선명하게 보일 리가 없는 눈동자의 붉음이 그를 현혹했다. 하지만 나견이 자신의 시선을 불편해할까 지우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손등으로 어떤 감촉이 느껴졌다. 나견은 그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일부러임을 넌지시 알리려는 듯이 그것이 몇 번 반복되었다. 지우스는 새끼손가락으로 나견의 새끼손가락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두 손이 겹쳐진 면적을 넓혀, 서로의 것을 맞잡았다. 지우스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면서도 혹여 땀이 나서 축축해지진 않을지 걱정했다. 그건 나견도 마찬가지였다.
폭죽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깜깜한 방 안에서 미약하게 숨소리만 들렸다. 평소라면 익숙했을 정적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기린 님."
"왜?"
"이거, 언제까지 잡고 있으실 건가요?"
나견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손을 놓자 나견은 수첩을 정리하고 자신이 눕던 침대에 곧장 누워버렸다. 그의 내면이 전혀 평온하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 지우스는, 제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이 수사하던 내용을 떠올렸다. 감정 때문에 무모한 짓도 서슴없이 하게 되는 건 인간 모두가 그러한 걸까? 기사인 자신이 그 마법사처럼 불법적인 일에 손대지 않으리란 확신은 있었으나, 무모함만을 논하자면 지우스는 절대 질 것 같지 않았다.
나견. 그를 마음에 둔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나견의 태도가 조금씩 부드러워지며 자신을 되찾아감이 느껴질 적부터였다. 그가 의외의 면모를 보여줄 때마다 얻는 쾌감은 점차 애정으로 변해갔다. 그러기를 몇 년. 지금까지 나견 쪽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가 함께 이곳에 오자고 한 순간부터 지우스는 묵혀왔던 약간의 기대감이 샘솟았다. 그리고 방금까지 맞잡았던 손은, 지우스가 나견의 입장을 확인하게 했다. 지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견에게 다가갔다. 나견은 인기척을 알아차렸는지 담담히 말을 걸어왔다.
"기린 님."
"왜 그러지?"
"사실, 여기로 같이 오자고 한 건 우연이 아니었어요."
"그럼?"
"알고 있었어요. 여기로 근무하러 오신다는 걸 듣고, 모르는 척 제안한 거였어요."
"...왜 그랬지?"
"......"
등이 보이게 누워있던 나견이 몸을 돌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서로의 표정을 읽었다. 나견의 손이 다시 지우스의 손에 닿았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눈치채셨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래. 맞다."
"제가 회복하는 동안에는 먼저 제 심정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린 님의 걸림돌이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러다가 일 년 전에 기린 님의 마음이 저와 같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이번에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는, 기린 님이라면, 제가 아는 지우스 님이라면 이제 믿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정 상, 분위기 상 좋은 기회는 이번 뿐일 것 같았어요."
나견은 답지 않게 두서없이 이야기했고, 지우스는 가만히 들었다.
"그래서... 제가,"
그리고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입술이 겹쳤다. 나견의 놀란 눈동자는 폭죽만큼이나 형형한 색을 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감겼다. 긴 눈꺼풀의 떨림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하려 했는데."
"내가 너무 성급했군. 미안하다. 그래도 난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었다는 건 말하고 싶어."
"...알겠으니까 사과하시진 말고요."
"너야말로."
지우스는 약간 웃으며 나견이 누워있던 침대 위로 다리를 올렸다. 나견은 가만히 잡고 있던 그의 손등을 제 얼굴로 가져가 입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손을 맞잡은 채, 조금 더 길고 깊은 입맞춤과 열기를 서로 나누었다.
3. 망각
"............진..."
의식이 뿌옇다. 귀에서 흐릿한 목소리가 윙윙 울렸다.
".......진아!!"
갑자기 귀에 꽂힌 큰 목소리에 남자는 눈을 번쩍 떴다. 시야는 초점을 찾지 못하여 어지러웠고 후두부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진아, 괜찮아?"
"......여...긴...?"
"기습을 당했어. 진이 너 머리를 세게 맞고 기절했었어. 많이 힘들어?"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의 남성은 그의 양 볼을 붙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비를 맞아 식어버린 피부에 따뜻한 체온이 닿자, 남자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진아. 아프면 참지 말고 꼭 말해줘. 여기 우리밖에 없어. 내가 널 데리고 급하게 빠져나왔거든. 마침 기사 님들이 와주셔서..."
"...진."
"응?"
"진이, 내 이름이야?"
"......뭐?"
남성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황하는 그의 떨림이 손으로, 피부로 전해져왔다.
"농담하는 거지? 진아..."
"으으, 머리가 아파... 생각이 잘 안 나."
"나는? 내 이름은 알겠어?"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남성은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숨을 겨우 골랐다.
"......나는 라우준이야."
"라우준."
"그래. 우린 전투 중이었고, 네가 머리를 크게 다쳐서 기억을 잃었나 봐. 돌아올 방법이..."
라우준은 말을 하려다 말았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그의 표정을 읽어냈다. 저건, 망설임. 무엇을 망설이는 거지? 울리는 머리로도 그는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
"일단 푹 쉬고 있어. 내가 나중에 기사님들께 잘 말씀 드려볼게."
라우준은 남자를 동굴의 벽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는 쌓아둔 나뭇가지 더미 앞에 앉아 불을 피웠다. 남자는 다시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듣는다.
"...네가 가장 잊고 싶어 하던 것을 잊었구나."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릴 새도 없이, 남자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4. 고양이
"견아."
"응?"
"그 꼬질꼬질한 건 뭐야."
"너랑 닮았지?"
"말 돌리지 말고."
나진은 불만이 가득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나견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도 태연한 얼굴을 했다.
"털 날려."
"당연하지."
나견의 품에는 본 적 없는 노란 털의 고양이가 한 마리 안겨있었다. 나진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뻔뻔한 태도로 말이다.
"웬 고양이? 설마 키우려는 건 아니겠지?"
"...쥐 잔뜩 잡게 시키려고."
"우리 집에 먹을게 뭐 있다고 쥐가 나와. 견이 너 그런 식으로 라우준도 집에 들였었잖아."
"언제적 얘기를...걔는 자기가 알아서 독립할 수 있었잖아."
"아무튼 이건 왜 데려온 거야?"
"이거라니."
티격태격 실랑이를 벌이는 쌍둥이 사이에서 고양이는 제 앞발만 열심히 핥았다. 나견은 괜히 고양이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원래 종종 보던 애인데, 오늘 보니까 다리를 다쳤더라고. 그래서 치료만 해주려고 데려온 거야."
"뭐어, 치료? 그러면서 쥐는 무슨."
나견은 농담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고양이의 왼쪽 뒷다리는 천으로 감싸져 있었다. 거짓말은 아니겠거니, 판단한 나진은 한숨을 쉬며 나견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근데 사람을 안 무서워하네."
"글쎄? 다른 사람들은 막 피하던데."
"...그럼 종종 보던 게 아니네. 먹을 것도 챙겨줬지?"
"...응."
"왜? 고양이 키우고 싶어?"
"아니, 그건 아닌데. 처음 봤을 때 굶어서 죽어가더라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한 번 챙겨주기 시작하면 졸졸 쫓아다닌다고."
"막 쫓아오진 않아. 아는 체만 하는 정도야. 이렇게 느긋해 빠진 애인데 어디서 다쳐온 건지 감도 안 와."
"어찌 되었건. 다 나으면 바로 내보내."
"혹시 질투하는 거야?"
"뭣. 고작 고양이 상대로 그럴 리가 없잖아!"
"하하, 농담이야."
"그게 무슨 농담이야. 나견 넌 농담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야."
나견은 웃으며 잔뜩 삐진 동생의 머리를 헤집었다. 나진은 제 형의 장난스러운 손길에 짜증을 내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때, 나진이 움직이며 그의 긴 머리 끈이 고양이 앞에서 휘날렸다. 고양이는 머리 끈을 잡으려 잽싸게 앞발을 휘둘렀다. 나진은 질색하며 머리 끈을 치우려 했지만, 고양이는 이를 놀이라고 여겼는지 그 끝을 마구 쫓았다.
"이거 놔아."
"당분간 그 머리 끈은 못 하겠는데."
"아, 진짜. 이런 법이 어딨어."
나진은 고양이를 째려봤다. 그새 질리기라도 한 건지, 고양이는 하품을 쩌억 하더니 나견의 무릎 위에서 몸을 말고 잠이 들었다.
"어쭈? 아주 건방져. 감히 거기가 어디라고 두 다리 뻗고 누워서 자. 야. 털덩어리. 야."
"쉿. 진아, 깨겠어."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나진은 볼멘소리를 하며 고양이 옆에 고개를 갖다 대었다. 무릎이 한 층 무거워진 나견은 피식 웃었다. 지금 둘이 닮았다고 하면 화내겠지, 속으로 생각하면서. 이후 깜빡 잠이 든 나견과 고양이를 보며 닮기는 너가 더 닮았다고 툴툴대는 나진과 더불어 '셋이서 닮았다'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5. 가능성
*스스로 써놓고도 너무 모호하게 서술해서 설명: 자신은 죽어도 고결한 기사는 못 된다는 나견과 그의 능력 외의 부분에서 가능성을 찾고 너무 꽉 막힌 채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신뢰의 기린입니다.
"기린 님, 기사에게 내려지는 이명에는 어떤 기준이 있는 겁니까?"
"무슨 일이지? 갑자기 그런 걸 다 묻고."
"...그냥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서요."
"글쎄. 황제께서 하사하는 기어스는 받는 자의 성향을 반영한다곤 들었다. 반면 색과 동물에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 같진 않더군. 색의 명도가 강함의 척도와 관련 없단 건 너도 알겠지. 취향도 관계 없는 모양이다. 너구리는 자신이 싫어하는 하늘색을 하사받기도 했고."
"그렇군요."
당신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나진이 기사가 되었다면, 같은 일어나지 않을 미래를 그려봤을 뿐이다. 그에겐 어떤 이명이 어울릴지 몇번이고 정해보았다. 특별한 기준은 없다지만, 역시 네 눈의 선홍색과 특출나게 강한 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의 목숨을 헛되게 한 내가 이런 가정을 하는 것 자체가 너에게는 기만이겠지.
"그러는 나견 너는 생각해본 적 있나? 네가 기사가 된다면 어떤 이명을 받을까, 하고."
"...아뇨. 저에게는 큰 의미 없습니다. "
"어디까지나 만약에지. 나는 네 나이 땐... 아니, 예비 기사일 때는 가끔이지만 몇 번 생각해본 적 있다."
"기린 님이요?"
"그래. 의외인가?"
네, 조금요. 기린 님은 더 어렸을 때도 지금처럼 철두철미하고 쓸데없는 공상은 안 했을 것 같은 인상인데.
"격기사가 되고 싶었으니까, 난."
"...그러셨군요."
난 다시금 거리감을 느낀다. 난 기사를 이용할 뿐인 입장이니까. 나진과도, 당신과도, 이곳의 모두와도 다르다. 기사가 되면 어떨 것 같다느니, 따위의 가정을 할 자격조차 나에게는 없었다.
"넌 네가 제대로 된 기사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글쎄. 꼭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는 법은 없지. 절대란 건 절대 없기도 하고."
"무슨 뜻입니까?"
"너무 네 가능성을 단정 짓진 말란 거다."
뭐라는거야... 속으로 딴죽을 걸었다.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기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난 동기들 중에서도 약한 편이었어. 기어스를 받기 전에도 말이지. 턱걸이로 겨우 기사가 된 거였어."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격기사가 되셨잖습니까.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강자인데."
"너한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의 난 초조했어. 나 혼자만 뒤처질까 봐. 그래서 더 열심히 훈련하기도 했고, 고민도 많이 했었다. 이 길이 맞는건가 하고."
감정의 굴곡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 같은 사람도 그런 시절이 다 있구나. 신기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무던함이란 때로 아주 큰 굴곡을 겪은 사람에게서 나올 때도 있으니까. 익숙해진 것이든, 극복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나 스스로 가장 잘 알면서 그 사실을 뒤늦게 상기했다.
"그때의 나는 내게 이런 힘이 생기리란 것도 몰랐지만, 지금에서야 느끼는 건... 분명 오늘의 난 어제의 나보다 조금은 성장했다는 것이다."
"예?"
"여러 임무를 직접 뛰어보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경력을 쌓았다. 그러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지. 시야가 넓어진 거야. 그러니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의 가능성을 함부로 잴 수가 없는 거다."
"...?"
"너무 선 긋지 말란 소리야. 기사와 너, 다른 견습들과 너 사이를. 넌 똑똑하니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의 눈빛에서 어렴풋이 기대를 느낀 것 같다면 나의 착각인 걸까. 다만, 흔들림 없는 그의 표정이 확고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은 일종의 '격려'였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내가 당신의 격려를 받아도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담청색 기린.
"...압박을 주려던 게 아니다. 난 네가 이곳에 있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건지 기린이 덧붙였다. 내가 이곳에 있는 진짜 이유, 복수. 이곳을 이용하기 위해 잠입한 나를 눈감아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의 기대와 격려에 움츠러드는 나를 발견할 때면 자꾸만 자괴감에 짓눌린다는 걸 당신은 알까. 사실은 내가 아닌 나진이 여기에 있었어야 옳은 일인데, 그랬다면 당신이 내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그 기대와 격려는 내가 아닌 나진에게 갔어야 했다.
나를 대신해 내일을 잃은 그 아이의 가능성을, 염치도 없는 나는 당신이 되어 끊임없이 재본다.
"내가 너를 내버려 두는 이유는, 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넌 네 생각보다 중요해. 네가 낸 성과만 봐도 이견을 가질 기사는 없을 거다. 이건 이미 많이 말했으니 이제 좀 납득해줘. 그리고 네가 그 복수심을 차치하고서 보여준..."
'보여준...?'
"...아무것도 아니다. 나머지는 사족이야."
그의 표정을 읽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옅게 보이는 게 있다. 믿음. 그래, 그가 끊임없이 보여주던 것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담청색 기린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가 믿는 건 단순히 내 성과만이 아닌 건가? 하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자라고 꾸짖는 목소리에 나는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오리무중인 채 끝난 문답의 끝은 그만이 알고 있을 테지.
6. 나진을 웃겨라.
*나진, 나견 생존/방화 사건도 없는 평화 시공
*분명 기사들인데 명예는 안중에도 없음.
*절망적일 정도로 재미없음... 하지만 손가락 아플 정도로 썼으니 올릴거임.
사건의 발단은 지극히도 단순했다. 어느 날, 와드린이 다리곤에게 "나진 녀석, 성격도 더럽고 잘 웃지도 않는데 얼굴 근육이 석고로 된 것 같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다리곤은 그가 미소 짓는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다며 웃었고, 잠깐의 정적 이후 이는 내기의 주제가 되었다. 일명 "나진을 웃겨라"라는, 심히 단순한 이름이 붙여진 내기는 어느새 특수 2기 견습들이 혈투 아닌 혈투를 벌이게 했다.
먼저 나선 것은 와드린이었다. 와드린과 다리곤은 투리순, 파이멜을 끌어들여 나진이 쉬는 옆에 모여 앉았다. 역시나 눈길 한 번 안 주는 나진을 힐끔 쳐다본 와드린은 먼저 입을 열었다. 훈련 중 성대하게 넘어지며 바지가 세 갈래로 찢어졌다느니, 너무 많이 자라버려서 태양처럼 커진 머리카락을 자르려다가 실수로 위쪽을 수평으로 자르는 바람에 毛평선이 만들어졌다느니, 채찍을 잘못 휘둘러서 얼굴 한가운데에 일자 모양의 자국이 남았다는 둥. 온갖 흑역사가 큰 소리로 공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출처 모를 경쟁심이 치솟으며, 나진을 웃기려던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점점 자기들끼리 서로를 이기려고 무작정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재미없다며 언성을 높여 상대를 매도했지만 상처받는 것은 글쓴이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진은 시끄럽다며 자리를 떴다. 대화의 내용이 점점 저열해질 때쯤 투리순이 나진이 떴음을 지적했지만 흑역사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와드린과 다리곤은 첫 번째 작전이 실패하자 두 번째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의견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고, 마르샤, 율니아를 통해 여자들에게도 이 내기가 전달되었다. 그들을 바보 취급하던 콰링은 "그 나진을 웃기려 하다니 용기가 아주 대단하다"라는 지룬의 말을 듣고 호승심에 불이 붙었다.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뮤사는, 우디온 출신인 애들한테 물으면 단서를 잡을 수 있지 않겠냐며 한마디 했다. 합리적이고도 지당한 추론에 견습들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루지안, 티르, 라우준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루지안, 우리 내기하는데 얘기 좀 들어봐."
"내기?"
"그래. 나진을 웃기는 놈이 이기는 건데, 우리 다 실패했거든.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아?"
"뭐? 별 쓸데없는 내기를 다 하네."
"아, 좀! 알려주라."
"이기면 뭐 있어?"
"음... 그건..."
"그것도 안 정한 거야?"
"진 사람이 이긴 사람한테 딱밤 맞기?"
"대충 그런 걸로 하자."
"야야, 쫑내라. 나진을 무슨 수로 웃겨. 우리도 걔 웃는 거 별로 못 봤어. 제 형 앞에서만 방실방실 웃는 자식인데."
"형?"
"아, 나진한테 쌍둥이 형이 있거든. 나견이라고 완전 판박이다?"
"그래, 마침 니젤 외곽에 머무른댔는데. 나 견이 봤어."
"어? 우리 어제까지 거기 있었잖아. 만난 거야?"
"근데 훈련 때문에 정비만 하고 금방 장소 옮겼잖아. 견이가 바로 말하지만 말라고 했는데... 그래서 니젤 나오고 나중에 내가 진이한테 얘기했어. 그래서 오늘 진이 기분이 완전 바닥이야."
"쭌, 너는 뭐 하러 그런 얘기를 해줘서..."
"여기서 니젤 외곽은 별로 안 멀잖아? 가서 데려올까? 똑같이 생겼으면 우리도 알아보겠지."
"뭐? 하지만 우리 훈련장 이탈은 금지잖아. 기사님들한테 혼나고 싶어?"
"괜찮아. 자유 시간이겠다, 우리끼리 몰래 쓰윽 갔다 오면 되지. 준비 땅."
"야!!"
와드린이 빠른 속도로 니젤 방향을 향해 뛰어갔다. 그의 실행력이 쓸데없이 빛을 발했다. 다리곤과 다른 견습들도 이를 놓칠세라 뒤따랐고, 이를 말리고자 우디온 삼인방도 그들을 쫓았다. 나진은 갑자기 휑 해진 주변에 의아해했으나, 조용해서 좋다며 자미를 우적우적 씹었다. 곧 다른 기사들이 텅 빈 훈련장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나, 나진은 배 째라는 식으로 모른다고 일관하였다. 지우스가 나진에게 설명하라고 요구했지만 나진이 그의 주머니에 자미를 좀 찔러넣어 주니 어느 정도 참작이 되었다. 반발이 있었지만 지우스는 견습 여럿이 한꺼번에 자리를 떠났으니 그 흔적을 찾으면 그만이고, 오히려 이 싸가지를 설득하는 쪽이 더 시간 낭비라는 논리를 펼쳤다. 이어서 루디카가 나진을 추궁하려 하자마자, 나진은 품속에서 파디얀이 찍힌 사진을 그녀의 눈앞에 꺼내 들었다. 그리고 거래는 성립되었다. 루디카까지 지우스 쪽으로 돌려보낸 나진은 껄렁이며 다가오는 와론을 못 본 체 했다.
"어째 너 옷이 넉넉하다 싶더니 뇌물을 숨겨두고 있었냐? 웃긴 놈이네."
나진은 우디온에 있을 적 사슴 님이 필요할 때 쓰라며 알려준 방법이라고 덤덤하게 설명했다. 와론은 아무에게도 안 보일 미소를 씨익 지으며 협박조로 말했다.
"다 들었다. 너 쌍둥이라며? 사실대로 안 불면 내가 그 형 확 잡아서..."
"저쪽 방향으로 뛰어가던데요."
"확인. 알겠으니까 목에 검 치워라, 병아리."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
"샛노랗구만 뭘. 딱 병아리색이다. 병아리면 닭 말을 잘 들어야지."
"닭. 헛소리 말고 애들 잡으러 가자. 흔적을 찾았어."
"참나. 안 알려줘도 갈려고 했거든."
한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자신을 추적하는 견습 무리를 전혀 알 리가 없는 나견은 저녁 거리를 찾아 니젤의 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전날 우연히 견습 기사가 된 라우준을 만나 반가워했다. 하지만 나견은 나진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의존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가 좀 더 어엿한 기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나진을 굳이 찾지 않았었다. 그래도 아쉬운 감정이 남아있어 씁쓸해하던 차, 강제적인 형제 상봉의 순간이 턱 끝까지 닥쳐왔다.
갑자기 땅에서 붕 뜬 두 다리. 어? 이게 뭐지. 처음 보는 남자가 그를 둘러매고 뛰고 있었다.
"?! 이게 무슨...!!"
"와, 진짜 똑같네! 싸가지 없게 생겼어!!"
"야, 와드린! 치사하게!"
"내 용기 내놔."
"쟤는 또 뭐라는 거야?"
와드린의 뒤로는 몇 명의 또래들이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나견은 벗어나고 싶었으나 그의 약한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바보같은 속도로 달리는 사람의 팔에서 풀려나는 순간 바닥을 몇 번이고 구르고, 몸 속의 얇은 뼈들과 튼튼하지도 않은 근육들이 이별을 고할 게 뻔했다. 나견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했으나, 될 리가 만무했다. 누군데 이 사람들.
"나진이랑 쌍둥이라니, 이쪽은 얼마나 강한 지 봐야겠어!"
"이부일처제라도 하려고...?"
"와드린한테 저렇게 덥석 들려가는데 나진만큼 강하겠냐."
"아."
마르샤가 아차 하는 순간, 재빠른 티르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의 비장의 무기, 단검 정도로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갑자기 시야가 차단된 마르샤는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 뒤를 따라오던 견습들이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여 그녀와 정면으로 부딪히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치 망부석 같은 어처구니와 그에 속절없이 베이는 나무들 같았다. 정작 마르샤는 약간 휘청였을 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그 자리 그대로에 멀뚱히 서 있었다. 나견은 약간의 시간 차를 두며 그녀의 근처로 툭, 툭 떨어지는 사람들을 목도하고서 경악하였다. 이 미친 인간들 다 뭐냐니까? 범죄 소설에서나 보던 명백한 납치에다 추격전이었다. 전지적 현금다발 시점에 놓인 나견의 머릿속에는 온갖 불행한 미래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바로 루지안과 라우준. 얘들아, 너희들이 희망이라니 진짜 말세인가 보다. 나견표 싸가지가 거침없이 발동했다.
"야, 나견 내려놔!"
"안돼, 저기서 내려놓으면 견이더러 그냥 교통사고 당하라는 소리랑 똑같아!"
"아오, 저 화상! 게 섰거라!!"
"루지안, 비켜 봐."
"어? 준?!"
"가로베기."
나견은 어쩌라고 저 기술을...! 루지안이 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라우준은 중력을 무시하고 나무에 발을 붙이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검격은 기술명이 무색하게 세로로 날아가 와드린의 바로 뒤를 쫓던 다리곤에게 정확히 맞았다. 그 반동으로 와드린이 넘어지며 나견을 놓쳤다. 하늘로 붕 날아오른 나견은 비명 지를 힘도 없었다. 숲의 전경이 보였다.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이라니. 내가 수리냐고. 나견은 체념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딱딱한 지면에 충돌하여 비명횡사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무언가가 그를 가볍게 받아주었다. 이건 누군가의 품? 슬며시 눈을 뜬 나견은 벙찐 채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진아?"
"...견아!"
이미 견습들은 훈련장에 거의 다다른 상태였다. 그 근처에서 발사된 나견은 포물선을 그리며 기적적으로 나진에게로 떨어진 것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나견을 공주님 안기로 받은 나진 또한 얼떨떨한 건 마찬가지였다.
"뭐야?? 견이 네가 왜 하늘에서 내려와? 천산가?"
"진아아..."
나견은 헛소리에 반박할 새도 없이 온 몸에 힘이 다 풀렸다. 나진은 당황하며 나견을 일으켜 토닥여줬다. 루지안, 티르, 라우준, 그리고 기사들이 땅에서 구르고 있는 견습들을 주워 왔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이후 나견을 포획하러 이탈했던 견습들은 뼈 빠지게 훈련하는 벌을 받았다. 그런 견습들은 나진의 웃는 얼굴을 실컷 볼 수 있었으나, 땀이 눈꺼풀을 짓눌러서 그 모습은 흐릿하기만 했다.
후일담: 나진은 나견을 옆에 끼고서 그의 여행담을 들을 수 있어 기쁠 따름이었다. 이후 나견이 보는 앞에서 대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잔뜩 칭찬받을 생각에 신이 났으나, 나진의 전투 방식과 전략을 곧잘 분석하고 조언하는 나견을 눈여겨보는 지우스와 와론의 눈빛이 그의 미소를 도로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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