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XXX 노트

240112 800자? 챌린지. 꿈일기 때문에 떠오른, 기본적으로 헛소리.

예전엔 뭔가 배우면 영감이 자동으로 솟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머릿속에 뭔가 집어넣는 걸 목표로 했지. 마치 동전을 밀어넣으면 거기서 울컥 밀려나듯이 밑으로 툭 떨어지는 자판기의 음료수 캔처럼 뭔가가 나오길 기대하면서.


교수가 꿈 노트를 활용하라더군.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담겨있다고, 좋은 소재가 될 거라고. 머리맡에 노트를 두고 꿈을 꾸고 나면 바로 그것을 적어두라고. 정리하려고 하지 않아도 좋다고, 정리하려고 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고. 하지만 그래서 남는 건 이게 지렁이 기어간 자국인지 글씨인지 알아볼 수 없는 선 몇개와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더 안 남은 꿈의 찌꺼기뿐이었어.

그래서 방을 나섰을 때 엄마는 왜 내 찻잔에 독을 넣고 있었지? 나는 왜 알면서도 그 물을 마셨지? 땡볕의 여름에 한참을 달리고 난 뒤 타는 갈증에 우물물을 퍼올렸을 때 거기에 시원한 우물물 대신 뜨끈한 수프가 들어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짠맛을 견디며 그걸 한 입 들이킨 순간 와르륵, 옥수수 알갱이 대신 뽑힌 내 이가 한입 가득 오드득 씹힌 건, 모르겠어.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모서리가 형편없이 닳아버린 꿈을 조각조각 이어보았자 나오는 건 너덜너덜해진 누더기같은 이야기 뿐이었지.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교수님. 건방지게도 따져보려고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간 건 아마 중간고사 과제를 호되게 망쳤기 때문일 거야. 꿈에서 나온 이야기를 재료로 멋진 소환진을 꾸며보기.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한단다.

노크를 해도 교수님은 대답이 없으셨지. 안에 계실 것이 분명한 시간이었고, 방문에는 부재중 문패조차 걸려있지 않았어. 그건 명백한 직무 유기였지.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단다. 중간고사를 망치고 술을 질펀하게 퍼마신 대학생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야. 그날 꾼 꿈은 정말로 아름다워서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싶었거든. 어릴 적에 꾸고 나서 계속해서 곱씹곤 하던,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때때로 들여다보곤 하던 꿈처럼 말이야. 그런 보석같은 기억의 재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꿈이었는데 내 손에 남은 건 너덜해진 무지갯빛 넝마조각 뿐이었어. 용서 못하지. 용서 못하고말고.
문에 귀를 대고 들어보면 교수님은 뭔가 말씀을 나누고 계셨단다.

그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냐고?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러니까-아아, 맞아.

"시키신 대로 그 학생의 꿈자락 속에 나와있던 VIP의 흔적을 말끔히 지웠습니다. 사소한 논리의 정합성에 집착하게 만들었더니 제 손으로 간단히 꿈을 풀어내더군요. 아마 복구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위대하신 분이시여.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제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는 역시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학생들은 유능하고 그들은 언젠가 그분의 왕국에 도달하고 말 것입니다-"

응? 내가 뭐라고 말했지? 으응, 신경쓰지 말라구? 그래, 늙은이 노망이 심하지. 어쨌든 나는 그대로 교수의 방에 박차고 들어가-(후략)



제 2567차 녹취 시도는 여기서 중단되었다. 피험체 N54호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하면서 동시에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당시의 세뇌 시술자인 에클스턴 교수의 조치는 완벽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교수 본인은 피험자의 사소한 논리적 강박성을 이용하여 꿈짜기 체계를 완벽히 망가트리는 이러한 방식에 의문을 표하였으나 새로운 대안이 발견될 때까지는 종래의 방식을 지속하여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샌드맨의 성과 위대한 그분의 꿈속 왕국에 영광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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