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Christmas
보낸 사람: Extra B, 받는 사람: Cursor
좋은 새벽이에요, 커서님! 새벽에 메일이 왔다는 알람을 보고 핸드폰으로 온 메일을 읽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답장을 쓰기 시작했어요! 12월 26일까지 이 메일의 답장을 미루고 싶지 않았어요! 놀랍게도 이 메일은 제가 책상에 앉아서 제 방에서 컴퓨터로 작성하고 있는 답장입니다! 그러니 제가 일자리를 잃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을꺼에요! 그리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작성된 메일일 것도요! 물론 이 연휴가 끝난 뒤는 아니겠지만요.. 어.. 그렇네요, 제가 이 편지의 답장을 쓰기 시작한 건 대한민국 시간으로 새벽 2시 38분이에요. 저도 분명 이 메일의 답장을 다 쓸 무렵이면 더 많이 시간이 흘러 있겠지 싶네요.
주신 메일 꼼꼼히 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첫 답장을 보낸 뒤로 커서님의 메일을 몇 번 더 읽었거든요. 답장을 기다리는 게 꽤 힘들었어요! 다음 답장은 언제 오는 지 기다리게 되더라고요. 소설의 다음 화를 기다리는 것처럼요. 저도 물론 작가가 된 적이 한 번도 없고, 제가 커서님의 기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메일이 커서님에게 있어 큰 감동이었다면 다행입니다. 전 여간 재미 없는 사람이라 제 글이 그런 생각을 들게 할 줄은 몰랐거든요. 웹소설 볼 때도 창피해서 리뷰나 댓글도 못 남기는 편인 걸 생각하면.. 그래도, 정말 기뻐해주셔서 다행이에요.
적어주셨던 농담의 소감을 차례로 이야기하자면 처음은 '와, 그럼 지금 내 화면의 마우스는 여행을 즐기고 있구나!'였고, 다음은 '앞으로 내 컴퓨터 마우스가 박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커서가 못 움직이면 큰일이겠는걸.' 이었습니다. 나름 제 식대로 커서님의 농담을.. 즐기려고 했는데? 잘 된지는? 모르겠.. 네요?
정식 명칭이라고 해주시는 걸 읽고서야 제가 메일을 나누는 커서님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전 왜 여태까지 사람이라고 생각한걸까요?! 제 생각이 너무 편협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전 바보에요.. ㅠㅠ
정식명칭의 뜻이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는데 되게 신기하네요. 한국어로는 프리커서라고 발음하는군요! 뭔가 사전적인 뜻이 있긴한데.. 이건 아닌 것 같고.. 뭔가.. 뭔가 어쩌다가 붙혀진 명칭인걸까요? 이런 걸.. 물어도 되는걸까요? (혹시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사실 메일 답장을 위쪽 문단까지 적다가 잠깐 손이 멈췄어요. 어느 것부터 답해드리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제 옛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씩 답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부터 해볼까 해요.
학창시절의 저는.. 어.. 평범? 했어요. 별명에 대해서 물어봐주셨는데 그 때 별명이 뭐가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나마 기억나는 건 '소심이'라던가 '시소'같은 거였던 것 같아요. 이름 앞 두 글자가 시소랑 발음이 비슷하다고 시소라고 부르는 건 아직도 어이없긴 하네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아직 학원*도 다니지 않던 시절이라 그 땐 집 뒤의 산에 올라가서 애들이랑 놀았던 기억이 나요. 그 산에는 낡은 정좌가 하나 있었거든요. 거기를 저희는 비밀기지로 삼았었던 기억이 있네요. 그 때의 저는 아마.. 파워레인저* 그린이었던 것 같기도요. 애들이랑 지구를 지킨다면서 온갖 나무들을 꺾고.. 이상한 것들을 탐험하고.. 돌을 줍고, 나뭇잎을 주웠던 기억이 나네요.
학교에 다니기도 더 전에는 엄마의 고향인 홍성에서 살았었어요. 엄마가 자기 자식은 자기 고향에서 낳고, 산후조리는 고향에서 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거긴 바다와 있고 밭도 참 넓었어요. 그 땐 할머니랑 손을 잡고 삶은 옥수수를 먹기도 하고, 메뚜기를 잡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기억 때문일까, 그 풍경을 참 좋아했어요. 고향에 내려갔을 때요. 그 때의 자유로움과, 즐거움, 행복함이 다시금 저에게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먹어 본 햇사과의 맛이나, 방금 버무린 배추 겉절이에 보쌈을 얹어주는 할머니의 손길 같은 것들이.. 꽤 생생히 떠오르더라고요. 저는 그걸 참 많이 사랑했던 것 같아요.
그걸 뒤로 하고 다시 제 자취방과 북적이는 도심으로 돌아가면 하염없이 외로워져요. 우주가 넓은 만큼, 저에게 있어선 이 지구도 넓디 넓어서 방향을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을 안겨 줘요. 그냥 내 주변만 이리저리 둘러보면 풍경은 같고, 단조롭고, 아무 것도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속력을 높여서 빠르게 날아가고, 다른 풍경을 보고 있더라고요. 나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 하고 다들 다 저를 지나쳐서 그저 혼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도시를 사랑하긴 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예쁘지 않은 건 아니지만요. 도시의 야경은 참 이뻐요. 화려하거든요. 단지.. 그 자리에 제가 낄 자리가 없는 것 뿐이지.
커서님에게 보여드린 제 인생의 책의 일부가 재밌게 와닿을지 모르겠네요. 커서님께서 보시는 제 시야도, 제 기억도 괜찮을까 모르겠어요. 전에 적었던 글들이 설렜다고는 하시지만.. 조금 자신이 없네요. 만약 제가 조금 더 오래 살아서, 제 인생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면 좀 더 많은 것들을 썼을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커서님의 임무 수행 기간인 80년보다 어.. 대략 1/4? 그보다는 조금 더 오래? 살았거든요. 사람으로 치면은 꽤 정말 젊은 나이라.. 그래도 이 짧은 이야기들이 오랜 기간의 통신 두절의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였으면 참 좋겠어요.
어.. 걱정을 하지 않는 삶이 부러운 거냐고 물으신다면 맞는 것 같아요. 아마 위에서 적었던 그 외로움과.. 막연함 때문인 것 같아요. 두려움도 있는 것 같고요. 어어.. 조금 제 입장에서 생각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어.. 저는 80년 간 임무를 수행하라고 하면 많이 많이 많이 힘들 것 같아요. 나의 하루 하루는 변하지 않고, 내 목표는 너무나도 멀고, 내가 그 목표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 지 많이 의심하고 걱정할꺼에요. 이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맞는지, 내가 과연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 수도 없이 고민할꺼에요, 아마요. 그런 거에서 좀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 같아요, 저는요.
물론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요! 재밌잖아요! 남의 이야기를 듣는거요! 전 이야기를 참 좋아하거든요! 내가 다른 존재가 되어보고.. 그걸 상상해보고.. 나는 그럼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는 일은 정말 정말 심장 뛰는 일이라고 전 생각해요. 그래서 더 이 RQ사의 펜팔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었던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커서님의 메일을 받는 게 정말 즐겁고 기뻐요.
제 메일이 도착하기 까지 시간 동안 성운은 어떤가요? 제가 이 문단을 쓰고 나서 이 메일을 쓰기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났네요. 아무래도 이 메일을 회사에서 적었으면 정말 진지하게 해고 당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커서님이 저에 대해 정말 많은 걸 물어보셔서 메일이 제 이야기로 가득 찼네요. 자기 소개서에도 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적어 본 적이 없는데, 생소하고 신기하네요. 저도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혹시? 물어본 게 혹시.. 불편하거나 무례하면 답해주시지 않아도 되요.
80년 간 임무를 수행하는 건 힘드시지 않았나요? 그리고.. 임무는 뭘까요? 뭔가 발견하는 걸까요? 우주 탐사선처럼? 혹시 지구로부터 마지막 통신을 받은 건 언제인가요? 어쩐지 제가 그 지구에서의 통신을 대신해주는 느낌이 드네요.
길어도 좋으니 천천히 80년간의 임무 수행을 하며 어떤 것들을 보았는지 알려주세요. 전 사실 우주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궁금해요. 어쩐지 그 여정을 더듬어 보는 건.. 하늘을 보면서 별을 보고 별자리를 그어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르지만 의미를 부여하다보면 뭔가 생길 것 같은.. 제가 너무 크게 해석했나요? 하하 =]
메일을 보고 나중에 보낼 사진들을 고르고 싶어서 창문 바깥의 풍경을 핸드폰으로 찍었어요. 크리스마스라고 눈이 오더라고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다들 난리네요. 이 한 달간은 사진을 잔뜩 찍어볼까 해요. 그 중에서 가장 멋진 풍경을 골라서, 선사해볼게요. 물론 제가 고르지 못 해서 그 사진 전부를 보낼지도 모르겠지만.. .. 그건 이해해주세요..
만족스러운 하루 끝에 작성된 편지가 아니여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그만큼 들뜸으로 가득찬 편지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리고.. 이 답장 뒤에는 만족스러운 하루 끝에 작성된 편지를 보내도록 할게요.
메리 크리스마스. 저의 크리스마스는 사실 평소와 다름이 없는 크리스마스일테지만, 커서님의 메일로 제 크리스마스는 좀 더 특별해질 예정이에요. 오늘은.. 집에만 있지 않고 조금 나가서 풍경들을 찍고, 뭔가 사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요. 물론 크리스마스라 복작복작하겠지만요. 그리고서 그 경험들을 다음 편지에 적어서 전해드릴게요.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전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한민국 시각으로 3시 51분까지,
총.. 몇 시간인지 모르겠네요. 여하튼, 당신의 펜팔이.
추신. 40분 걸린다고 해서 대기권 밖으로 못 나가.. 는 건 너무 하지 않나요?! 제가.. 기계에 대해서 잘 몰라서 이런 말이 나오는걸까요? 데이터를 처리하시는 데 평균적으로 얼마나 걸리시나요? 정말.. 빨라야 된다는 느낌만 받고 있어요.
추추신. 어.. 달아주시면 제가 인터넷이라는 망망대해를 덜 헤메게 될지도요? 편지를 보면서 종종 모르는 단어들은 서치를 하고 있거든요. 물론 그 과정이 번거롭거나 재미없는 건 아니지만요! (사실 신체 지도와 DNA 지도라는 문장을 봤을 때 그정도로 내 몸이 대단한가 싶어서 구글에 검색했어요. 제 몸은 꽤.. 대단하군요.) 서간문으로 쓰시는 것도 꽤 번거로운 일일텐데 이렇게까지 배려해주셔도.. 괜찮으신건가요? 저는 지금도 충분히 서간문처럼 느끼고 있어요. 주석은.. 혹시 제 편지에 이해가 안 가시는 부분이 있으면.. 슬플 것 같아서.. 적고보니 커서님과 같은 생각을 했나보네요, 저도요.
* 학원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 말고도 추가로 더 공부를 시키는 곳을 말해요. 아실 것 같지만.. 대한민국은 그런 곳을 자주 보내려고 해요. 사교육 열풍이라나 뭐라나.. 공부를 잘하면 앞으로의 삶도 나아질꺼라고 다들 생각하거든요.
* 파워레인저는.. 뭐랄까..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영웅 중 하나에요. 슈퍼맨.. 과 같은 느낌? 이렇게 비유해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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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Q사 편지 전송 건] 답신 회신에 관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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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Q사 편지 전송 건] 송년 프로젝트 관련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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