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내기

괜찮아요, 캘시, 쉬이……. 가만 계세요. 제가 알아서 다 해드릴게요. 캘시가 원하는 거, 내가 알아서 다…….

어떻게 오두막까지 들어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밖에는 재가 된 요타와 머리가 뚫린 에타가 나란히 눕혀져 있었고 생존자 둘은 그 참혹한 현장을 수습할 새도 없이 방금 막 집 안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캘시는 반쯤 얼이 나가 있었다. 그는 매디가 옆에서 계속해 속삭이는 말, 따끈한 우유를 준비하던 것을 무시하곤 이만 자겠다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피조물은 창조주의 몫으로 준비해둔 우유를 대신해 마시고 곧 방에 뒤따라 들어갔다. 오늘 같은 날은 함께 자야 해요. 혼자 이 어두운 방에 남기엔 무서운 날이잖아요. 캘시는 몇 번 그가 허락도 없이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을 지적했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그저 피곤한 눈을 감기로 했다. 악몽 같은 날이었다.

사랑이든 뭐든 좋아. 원한다면 해줄게. 이젠 실험체를 만들 일도 없으니까... 대신에, 네가 나보다 먼저 죽어선 안돼.

아! 그럼요, 캘시! 내가 다 책임질게요! 캘시가 바란다면 전부 제 책임으로 둘게요!

피로에 짓물린 눈커풀사이로 아까의 장면이 오버랩 되어 나타났다. 책임진다고… 난 그런 걸 바란 적이 없는데. 그냥 죽지만 않으면…… 아, 애초에 네가 책임질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책임진다는 걸까.

머릿속이 엉킨 채로 시끄러웠다. 그 주범쯤 되는 남자는 자신의 등 뒤에 ‘손가락으로 글씨 쓰기 놀이'를 해대는 중이었다. 캘시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말로 눈을 감았다.


“ …… 아침부터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건 또 어디서 났어. ”

“ 그 사람 방에서요. 아니, 내 방에서. ”

“ 거긴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당장 벗어. ”

대위복은 생각보다 무겁고 거추장스럽다. 가슴팍에서 흔들리는 여러 개의 훈장과 뱃지를 보면서 매디는 이런 옷을 입고 최전선을 누비다니 제정신은 아닌 남자겠거니- 무료히 생각했다. 암묵적 출입금지 구역이던 매드헤스턴 파비안의 방은 생각보다 공허하고 황량한 곳이었다. 몇 개 없는 옷은 단정히 개어 직사각형 모양 옷장에 들어가 있었고 어지럽게 서류가 늘려져 있는 책상을 제외하면 사용감이 느껴지는 가구들도 별로 없었다. 귀족이라는 남자 치고는 소박하고 작은 공간이었다. 매디는 그곳에서 어렵잖게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는 데 성공했다.

알아서 해준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캘시는 벌써부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잠자코 앞만 노려 보았다. 저 치에겐 거부라는 게 통하질 않았다. 억지로 흉내낼 필요 없어. 기억이 돌아오면 해. 몇 번이고 말했는데 보란 듯이 방을 헤집고 온 꼬락서니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또 의미없는 설교를 퍼붓기엔 보란 듯 무시할 게 뻔히 보여서.

“ 알지도 못하는 걸 따라해봤자 우스울 뿐이야. 너 매드헤스턴이랑 안 닮았어. ”

“ 캘시라고 해서 매드헤스턴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잖아요. ”

나 어제 다 들었는데. 덧붙이는 말까지 들으면 반박할 거리가 없어진다. 그치. 기억이 거의 사라진 지금에는 나라고 아는 건 없지. 하지만 희미한 기억 끝 어딘가를 긁으면 그 매드헤스턴 파비안이란 사람이 눈을 저렇게 말갛게 뜨는 인간은 아니었단 것 정도는, 부스럼이 된 기억 어딘가에서 떠오르곤 했다.

해서 캘시는 손을 뻗어 양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매디를 제지했다. 그런 포즈도 안 했어. 그런 표정도 안 했고. 짧은 교정 몇 번에 매디는 제법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따라할 거면 제대로나 따라하라고. 다리를 자주 꼬았던 것 같고,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외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 연구자라면 호기심 많고 위계질서에 얽메이지 않는, 자유주의자다운 성격이었을 것 같고 캘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보니… 어쩌면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대위라면- 소위였던 캘시에 반해선… ”

캘시.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리드미컬한 투로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두드리면서 매디는 제법 그럴싸한 표정으로 고갤 기울였다. 뭐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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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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