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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의 시선이 기기를 향했다. 불안하게 떨리던 파동이 점차 안정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방사 가이딩을 돕던 가이드에게 수고했다고 전했다.
“또 무리했어요? 자꾸 오면 곤란한데.”
하진이 가슴에 붙인 패드를 떼어내고 한숨처럼 걱정을 뱉어냈다. 하진보다 훨씬 어린,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에스퍼는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대답했다.
“에이, 이러면 도 쌤 보러 오고 좋죠.”
“뭐가 좋아요. 좋은 일 있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아파서 오는 거잖아.”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친근하게 말하자 에스퍼의 입꼬리가 금세 호선을 그렸다. 하진은 슬그머니 그 몰래 군복의 명찰을 살폈다.
“이든, 몸 잘 챙겨야 해요. 나랑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안 좋은 거야. 몸이 안 좋다는 뜻이잖아요.”
그래도 치료 잘 받았으니까. 하진은 주머니를 뒤적여 빨간 하트가 그려진 막대 사탕을 꺼냈다. 딸기 맛. 외곽지역에 구호물자를 보낼 때 가이드 선별 검사 겸, 어린아이들에게 곧잘 나눠주곤 하던 것이었다. 그것이 버릇이 남아 다 큰 어른들에게도 치료를 잘 끝내면 칭찬 겸 주고는 했는데, 아이나 어른이나 다를 게 없는지 반응이 꽤 괜찮았다. 특히 외곽 지역에서 온 에스퍼들은 더 좋아했다. 옛날 생각이 난다고.
“아싸!”
이든이 신이 나 사탕을 넙죽 받아들였다. 훌러덩 까서는 입 안에 쏙 집어넣는다.
“뭐, 이든이 좋아서 여기 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나 굴려대요? 한대위가?”
하진이 넌지시 떠보자 이든은 말도 말라는 듯 고개를 세게 주억였다. 미간까지 구긴 걸 보니 어지간한 일이 아닌 모양이다.
“아, 진짜. 미쳤어요. 한대위님 미친 게 분명해.”
“왜요?”
“새벽부터 불러내서 훈련 굴리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일대일로 대련하재요. 박하사님은 눈 밑이 이렇게 퀭, 해져가지고 혹시 무슨 이유가 있냐고 물으니까 대위님이 글쎄 뭐라는지 알아요?”
이든이 미간을 좁히고 짐짓 엄한 척 입술을 일자로 만들어 입매를 굳혔다. 대위, 재이를 흉내 내는 것이다. 그게 무척 닮아있어서 하진은 저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전쟁이 예고하고 일어납니까? 며칠 몇시에 쳐들어올 테니까 준비하고 있으라고, 그렇게 예고하느냐고요. 제가 그런 거라면 그런 겁니다. 이유 같은 거 없어요. 움직이세요. 이 지랄…, 헙! 아, 죄송해요.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어색하게 웃는 그를 뒤로하고 하진은 도구를 정리헀다. 옆에서 차트를 들고 있는 사우도 머쓱한 듯 하진의 눈치를 살폈다.
“죄송해요, 진짜로….”
하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뭘요, 완전 똑같은데요. 근데 거기서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춰야겠다. 약간 기계처럼 말하면 더 좋고. 제가 그런 거라면-, 그런 겁니다-. 이렇게.”
하진이 로봇 말투를 오버해 따라 했다. 푸하하 웃음이 터진 이든이 그걸 또 그대로 따라 했다. 사람들은 하진이 가볍게 구는 것을 친근하게 여겼다. 하진이 가이딩 센터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전부 이 때문이다. 남들처럼 무게 잡지도 않고, 친절하고, 본인은 모르지만, 정이 많아서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일이 잦았다.
하진은 이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일으켰다. 이든은 여전히 여운이 남은 듯 로봇 말투를 계속 따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조급하게 문을 노크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윤이 나타났다.
“팀장님, 한대위님이 볼 일이 있으시다고,”
윤의 뒤로 재이가 불쑥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빠른 걸음으로 들어선 그는 무덤덤한 눈으로 이든을 바라봤다. 쓸데없이 귀가 밝은 녀석이니 이든과 제가 하던 장난을 들었을 것이다.
저야 상관은 없지만, 이리저리 굴려지는 입장인 에스퍼에게는 큰 실수일 것이다. 하진은 이든의 앞을 막아섰다.
“약속을 잡고 오셔야지.”
“약속을 잡으면, 도하진이 재깍 오기나 하나?”
재이가 등을 진 곳에는 사우와 윤이 손짓, 발짓으로 서로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윤이 어서 나오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손짓하자 사우가 후다닥 병실을 나섰다.
“이든, 나가봐요. 몸 잘 챙기고.”
“넵,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대위님, 나중에 뵙겠습니다.”
잔뜩 기합이 든 이든이 거수경례하곤 빠져나갔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게 영 불쌍했다. 하진의 시선이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재이가 발을 옮겨 그의 시선을 막았다. 저를 보고 있으라는, 무언의 몸짓이었다.
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 잡아서 가도 개소리만 하시니까 그렇지.”
“넌 이제 내가 편하지?”
“불편하면 그것도 웃기지. 별꼴을 다 봤는데, 그럼.”
재이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하진은 태도를 굽힐 생각이 없었다. 어제 폐쇄 병동에서의 일을 윤에게 들었다. 에스퍼의 목에 걸어둔 감지 장치에서 경고음이 들렸고 허락 없이 들어선 한재이의 팀이 그를 무력으로 제압했다.
원래라면 팀장인 하진의 허락이 있어야만 약물을 주입할 수 있었는데 어제는 보안국에서의 긴급호출로 그럴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런 일이 벌어지지 못하도록 신경을 썼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하진은 그 일로 짜증이 난 상태였다.
“다음엔 멋대로 그러지 좀 말아줄래.”
제멋대로인 재이에겐 절절한 부탁처럼 들리겠지만 하진에겐 동등한 입장의 팀장이 전하는 권유였다.
“그럼, 거기서 기다릴 걸 그랬나. 폭주하고 나서 다 뒤진 다음에? 그럼 네가 와서 내 시체에 대고 그러라고 허락해줬으려나.”
비아냥대는 그를 보고 있자니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진은 고개를 내려 하얀 클로그에 붙은 강아지 지비츠를 바라봤다. 심신 안정. 심신 안정.
“너 나한테 아직 불만 있지? 그래서 그런 거잖아. 네가 그따위로 나오면 내가 짜증 낼 거 아니까 그런 거지? 너 조금이라도 더 생각할까 봐. 유치하긴.”
“알면 내 전담 네가 다시 맡아. 다른 새끼들이 내 몸 만지는 거 싫어.”
“네 말마따나 나 이제 F급이야. 한재이 씨 같이 귀하신 몸에 대고 가이딩이랍시고 비벼봤자 가이딩 기별도 안 가셔.”
하진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재이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하진이 F급으로 내려간 뒤로 급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며 전담 가이드를 그만뒀다. 덕분에 고생하는 건 저였다. 도하진이 S급일 땐 이러지 않았다. 부르면 어디서든, 뭘 하고 있든 재깍 달려왔고 재이가 원하면 언제든 접촉 가이딩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재이는 이를 부득 갈았다. 불러도 오질 않고 그 말대로 약속을 잡아도 하진은 가이딩은커녕 이쪽을 바라봐주지도 않았다. 재이는 그런 하진에게 왜 오질 않느냐고 화도 내봤고 네가 없으니 돌아가는 게 없다고 투정도 부려봤고 가이딩을 해주지 않으면 전장에 나갈 일도 없을 것이라고 협박도 해봤다.
하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그 특유의 잘난 얼굴로 뺀질대며 난 이제 F급이다, 너랑 어울릴 주제가 안 된다, 너는 네 급 맞는 사람 찾아 떠나라며 개같은 소릴 해댈 뿐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제 호출엔 대꾸도 않던 녀석이 팀의 막내 치료를 보고 있었다. 재이의 입장에선 짜증이 났다. 어제의 일 때문인가? 하지만 평소 시큰둥한 태도를 생각하면 그 때문만은 아니다. 도하진은 이젠 나만 보면 지랄하니까. 그러니 그만 보면 자꾸 바른 소리가 안 나간다.
원하는 것을 못 얻어낼 바에야 도하진이 저 때문에 짜증 내는 걸 한 번이라도 더 보는 게 속이 풀렸다. 이제는 하진을 먼저 찾아다녔고 찾아내면 그가 짜증 내는 걸 보기 위해 시비를 걸었다. 남들이 보면 유치하다고 생각할진 몰라도 지금 재이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도하진 개새끼. 재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진을 살폈다.
“뭐해. 도대체 언제 갈 생각? 난 얘기 끝났어.”
하진은 바쁘게 도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재수 없게 눈에 걸리는 밀색 머리카락, 졸려 보인다는 평을 듣는 유순하게 내려간 눈꼬리, 재수 없이 좋은 매끈한 피부, 늘 연한 분홍빛으로 물든 동그란 코끝, 적당히 도톰한 입술, 웃지 않아도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그냥 그런 것들이 죄다 재이의 심기를 거슬렸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다. 재이의 말을 잘 들었다. 오라면 재깍 오고 꺼지라면 꺼졌다. 벗으라면 잘 벗고 재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사람을 있는 취급도 하질 않고 틈만 나면 피해 다니기 바쁘다.
하진은 이 정도면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재이는 아니었다. 개같은 성정일 진 몰라도 하진이 뻔질나게 피해 다닐수록 이상한 오기만 생겨났다.
“내가 대위 어떻게 달았는지 알아? 뭘 하나 물면 절대 안 놔줘. 전장에서 뒤질 것 같아도 반란군 새끼 하나라도 더 죽이려고, 이 악물고 바짓가랑이 질질 잡았거든.”
하진의 시큰둥한 눈길이 이쪽으로 닿았다. 언제 가나 몰라. 하진은 대꾸가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너 놓아줄 것 같아?”
“누누이 말하지만 그건 가이드에 대한 집착일 뿐이지 어떤 감정도 아니야.”
“지랄하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포기해줄 생각 없어. 결국 넌 오게 돼 있어.”
“내가 물건이야? 네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결국 네가 원하는 형태가 될진 몰라도, 내 몸이 그렇게 될진 몰라도 마음은 절대 안 변해, 씨발 새끼야.”
하진이 결국 성질을 내고 말았다. 하진은 성큼 걸어 문을 열었다. 그리곤 바깥을 턱짓했다. 뭐하고 섰느냐고, 얼른 방에서 꺼지라는 뜻이었다. 재이는 화를 내느라 조금 흐트러진 군복의 끝을 바로 잡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곧장 말끔한 차림새가 됐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난다. 저는 이만큼이나 달라졌는데 한재이는 끔찍한 그때 그대로다. 하진은 그가 들으라는 듯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는 목이 홧홧해지도록 씨근거렸다. 씨발 새끼, 개새끼, 뭔 새끼 하면서 치료실 안을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빙글빙글 돌기도, 문이나 벽 따위를 발로 쾅쾅 차 대기도 했다.
어차피 나가야 하지만. 문을 노려보던 이내 슬쩍 문을 열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복도를 살폈다. 한재이는 없었다. 이따금 제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는 가이드들이 이상한 눈초리를 하고 흰 가운을 펄럭이며 지나갈 뿐이다.
“안녕하세요, 예.”
하진은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벅벅 문지르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재이가 그랬던 것처럼 구겨진 흰 가운을 손으로 탁탁, 두드려 정리했다. 그리곤 슬쩍 발을 빼냈다. 혹여나 한재이가 복도 끝에서부터 그 잘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올까 봐, 도둑고양이처럼 복도를 잽싸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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