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피셔
그나마 다행인 건 나인이 식사를 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접촉도 거부하고 치료도 거부하는 마당에 식사마저 거른다면 정말 골치 아팠을 것이다. 신호에 걸린 사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몇 가지 도착해있었다. [윤] 팀장님 나인 씨 잠을 자지 않습니다. 어떡하죠? 물은 자주 마시는 것 같은데 수면제라도 넣는 게 어떨까요? 이러다 쓰러질까 봐 걱정입니다.
“한재이랑 다시 만날 테냐? 아니면 내가 만든 자릴 나가서 얼굴 구경이나 해볼 테냐. 네가 듣기에 혹하는 건 후자라고 생각하는데.” “둘 다 안 한다면요?” “이번 구호물자에 물 보급을 늘려달라는 요청을 했던데.”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못 들어주겠다. “아씨, 진짜! 무슨 씨, 가이딩 센터라면서 돌아가는 꼬락서니 하고는. 구멍가게야? 진짜 유
“그래요!” 하진은 신이 나 TV를 켰다. 음량 조절도 해줬다. 대뜸 호출기가 울렸다. 센터장이 볼 일이 있는 듯했다. 개같은 아버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하진이 옷 정리를 했다. 그게 나갈 준비라는 걸 알았는지 나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몸을 웅크렸다. 그래도 한창 얘기할 땐 긴장을 좀 푼 것 같았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진전이 있었다.
“여기, 이름. 이름이 뭐예요?” 종이 맨 위, 사진이 붙어있어야 할 빈칸 옆을 검지로 짚으며 물었다. 뭐라고 불렸어요? 그렇게도 고쳐 물었다. 남자는 제가 무엇으로 불렸는지를 떠올려봤다. 술에 진탕 취하거나 도박으로 생필품을 따지 못한 날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말이 있었다. 씨발 새끼, 후레자식, 개새끼. 지금에서도 다 떠올리지 못할 것들로 불렸는데 좋은
폐쇄 병동으로 향할 때는 언제나 마음가짐을 새로 한다. 디귿자로 된 중앙 가이딩 센터 건물은 왼쪽에는 폐쇄 병동, 오른쪽에는 일반 병동이 있었다. 일반 병동은 주로 군이나 일반인 수준으로 급이 낮은 에스퍼들이 치료를 목적으로 이용했다. 폐쇄 병동은 지난 구출했던 에스퍼처럼 외곽 지역에서 온 에스퍼들을 치료하고 중앙 구역에서 지낼 수 있도록 적응을 돕거나 외
하진의 시선이 기기를 향했다. 불안하게 떨리던 파동이 점차 안정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방사 가이딩을 돕던 가이드에게 수고했다고 전했다. “또 무리했어요? 자꾸 오면 곤란한데.” 하진이 가슴에 붙인 패드를 떼어내고 한숨처럼 걱정을 뱉어냈다. 하진보다 훨씬 어린,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에스퍼는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대답했다. “에이, 이러면 도 쌤
남자는 홀로 남았다. 고개는 여전히 그대로 둔 채 눈만 돌려 TV를 바라보았다. 품에 안은 봉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쓰레기를 껴안고 있으면 불안한 마음이 줄어든다. 끌려오느라 두 개밖에 못 들고 왔는데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자꾸만 든다. 남자는 쓰레기가 가득 쌓여있던 방이 그리웠다. 봉투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으면 그들과 같이 하등
하진은 어이가 없었다. 아침부터 이런 것으로 실랑이를 하는 팀원들의 모습을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한동안 에스퍼의 폭주가 없었다. 센터에서 커피나 마시며 시간을 때웠던 지난날이 꼭 휴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너무 농땡이 부렸나. 누군가 제게 벌이라도 주는 게 분명했다. “저기요, 저희가 절대로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이거
이제 와 사람을 구한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마천루 위에서 아래를 바라다보면 눈 부신 빛에 잠식된 도시가 보인다. 밤이고 낮이고 빛이 꺼지지 않는 도시. 해가 뜨지 않는 세계. 세상은 이미 한 번 멸망했다. 인간의 근간에 깔린 이기심과 욕망 때문에 그들이 발명한 무기는 그들 스스로를 죽였다. 이를 미리 예견하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새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