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물(무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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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by 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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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사람을 구한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마천루 위에서 아래를 바라다보면 눈 부신 빛에 잠식된 도시가 보인다. 밤이고 낮이고 빛이 꺼지지 않는 도시. 해가 뜨지 않는 세계. 세상은 이미 한 번 멸망했다. 인간의 근간에 깔린 이기심과 욕망 때문에 그들이 발명한 무기는 그들 스스로를 죽였다.

이를 미리 예견하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하늘을 향해 쏘아진 화학 무기가 대기의 물질과 결합해 그들과 그들 자손에게 원인 불명의 영향을 끼쳤다. 이능. 당시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자들이 나타났다.

신인류.

보랏빛으로 물든 검은 하늘과 수몰된 도시. 폐허가 된 세계 아래 그들은 생겨났다. 그들 스스로를 ‘에스퍼’라 명명하고 문명을 재건키로 맹세했다. 그들은 각국에 중앙을 중심으로 한 도시를 세웠고 인간들을 폐허가 된 지구의 영향으로부터 지킬 거대한 장벽을 세웠다.

그들은 신인류였으며 동시에 개척자였다. 그들이 문명을 재건하는 동안, 장벽 안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라 불렸다. 그들은 화학 물질에 적응하지 못한 몸으로도 성벽을 기어코 부수었다. 억지로 장벽 안으로 들어와 벌레처럼 기생했다.

신인류는 저들의 숭고한 사명을 필두로 그들 스스로가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중앙, 1구역에서 살 권리. 신인류와 그들에 가까운 자들이 사는 1구역에서부터 중앙 구역이 번성하기 위해 각종 물자를 조달하거나 전기를 생산해낼 2구역에서 8구역, 그리고 선택받지 못한 벌레들이 기생하는 외곽. 기준이 모호한 신분 계급이 생겨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도시를 세우고 다시금 평화가 보이려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뜻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이곳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한때는 나 역시 특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장벽 바깥의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세계가 얼마나 뒤틀렸는지를 보았다.

모두가 평화롭다고 입을 모아 얘기하는 시대다. 그러나 내심 알고 있다.

이 세계는 뭔가 잘못되었다.

*

“팀장님, 괜찮으세요?”

“아, 미안해요. 잠깐 생각 좀 하느라.”

하진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벽 너머로 섬광이 터진 흔적이 섞여 새카만 보랏빛 하늘에 하얀빛이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높다란 장벽 너머로도 보일 만큼 규모가 큰 재난이었다.

보고를 이어 나가던 가이드, 윤은 긴 머리를 질끈 올려묶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재난 뒤 복구 작업 시작했습니다. 건물들이 무너진 건 아니어서 복구할 건 별로 없다고 하더라고요. 금방 끝날 것 같습니다.”

“생존자는요? 9구역 사람들 얼마나 남았습니까.” 

“그게…, 없습니다.”

“없다니요?”

하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윤은 이상했던 광경을 떠올렸다. 재난이 벌어지고 난 뒤 구호를 위해 떠났던 지난 밤, 시간이 가늠되지 않아 시계를 몇 번이고 확인했어야 했다. 새카맣던 밤을 날이 잘 든 칼 따위로 죽 찢어놓은 것처럼 그 틈으로 보이던 눈 부신 빛이 새카만 대지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재난 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하던 곳. 원래라면 구호 헬기가 소음을 내는 즉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손을 뻗대곤 했었는데.

“시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종말 직후의 세계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아무리 걸어도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구호팀의 눈에 걸린 것은 둥그런 원형의 형태로 된, 새카만 재의 흔적이었다. 

하진이 서류를 넘기자 사진 한장이 눈에 들어온다. 집 바깥과 안, 곳곳에 원 형태로 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위로 사람이 누우면 딱 맞을 듯한….

“아예 타 버린 겁니까? 흔적도 없이? 이게 가능해요?”

놀란 하진이 사진을 짚은 채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나 윤이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중앙의 손이 닿지 않는 장벽 너머의 구역에선 이따금 에스퍼의 폭주가 일어났다. 폭주의 크기는 때에 따라 다른데, 아무리 크더라도 하진이 봐온 경험에 따르면 건물이 무너지거나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무너진 건물도 없이 사람들만 죄다 타버려 사라졌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하진을 제외하고서라도, 이런 일은 역사에 없었다.

“에스퍼는?”

“일단은 신원 파악 중인데 칩 인식이 안 되는 걸 보니 칩도 없고, 추정되는 나이도 다른 이들보다 좀 많아요. 스물셋, 넷 정도…. 무엇보다도 직접 이름을 물어봤는데, 교육을 못 받은 건지 경계하는 건지, 대답을 안 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태도가 모호해서요….”

하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신과 가장 가까운 영역에 도달한 이들. 특히 장벽 너머의 외곽 지역에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발현 과정부터 몸 바깥으로 이능이 드러나는 에스퍼와 다르게 가이드들은 이렇다 할 징조가 없다.

 검사를 받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앙에서는 일정 나이가 되면 가이드 선별 검사를 실시했다. 그렇기에 환경이 조악하기 그지없는 외곽에서 가이드를 찾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권력을 위해 이능을 사용하는 자들은 대체로 얼마 버티지 못하고 폭주하고 만다. 보통 그들이 구출해내는 에스퍼들의 나이는 열여덟에서 스물이다. 구호팀이 추정하는 나이가 그렇다면 이번 에스퍼는 꽤나 오래 버틴 것이다.

권력을 위해 이능을 사용하지 않은, 부모로부터 교육조차 받지 못한 에스퍼.

윤은 보고를 마저 이어 나갔다.

“구출 도중에 집을 좀 봤는데, 엄청 열악한 환경이더라고요. 집이 쓰레기장이었어요. 자기가 에스퍼인줄도 모르는 것 같았어요.” 

“특이하네요. 보통 발현 징조가 나타나면 부모가 이용부터 하려고 하던데.” 

이번에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케이스가 조금 달랐다. 하진은 서류를 바라보았다. 여태 보았던 서류와는 다르게 비워진 칸이 많았다. 일단은 사진이 있을 자리가 그랬고, 당연히 있어야 할 이름도 없었다.

등급 측정 불가.

유일하게 채워진 칸 하나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특이사항은 또 어떻고. 일단은 폭주를 잠재우면 에스퍼의 정신이 드는 대로 인적 사항을 묻는 게 관례인데, 측정도 불가하고 물어도 대답하지를 않으니 채워 넣을 게 없는 것이다.

윤은 보고서라기에도 민망한 종이를 내민 게 부끄러웠는지 연신 안절부절못했다. 보고할 거리도 없는데, 윤이 버티고 서있는 게 의아했다.

“그게, 저….”

“네.”

“쓰레기봉투를 안 놓아주려고 해서 좀 고생했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하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쓰레기라니.

“그게, 구출 당시에 의식이 있었거든요. 대원들이 방에서 꺼내려 하는데 쓰레기봉투를 도무지 놓아주질 않더래요.”

“….”

“억지로 떼어 내려고 했는데 대원을 공격하려고 해서, 결국 못 빼앗고 구조 헬기에 태웠습니다.”

“지금도 있습니까?”

“네, 방금 확인하고 오는 길인데….”

껴안고 자고 있던데요. 윤이 헛기침 속에 문장을 마무리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구호팀 새벽. 팀장으로 일해온 지도 햇수로 5년이다. 별의별 인간들을 다 구출했다. 제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알고 기세가 등등해져서는 이것저것 요구하는 이도 있었고, 다시 내보내 달라며 팀원들을 공격해오는 이도 있었고, 도무지 적응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있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일이지만 사람을 대하는 직업이라 그런지 매번 새롭다. 하진은 포스트잇을 꺼내 사진이 있을 자리에 붙였다. 그리고 물음표 세 개를 그려 넣었다. 날이 밝는 대로 들러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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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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