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물(무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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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by 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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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은 어이가 없었다. 아침부터 이런 것으로 실랑이를 하는 팀원들의 모습을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한동안 에스퍼의 폭주가 없었다. 센터에서 커피나 마시며 시간을 때웠던 지난날이 꼭 휴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너무 농땡이 부렸나. 누군가 제게 벌이라도 주는 게 분명했다. 

“저기요, 저희가 절대로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이거, 이게 너무 더러워서 그래요. 치료하는 데 방해가 돼요. 잠깐만 치울게요. 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샤워했다. 빳빳한 흰 셔츠 위로 검은 넥타이를 매고, 하얀 가운을 걸쳤다. 때 묻지 않은 하얀 클로그 위엔 병동 가이드들이 선물처럼 건네곤 하던 아기자기한 지비츠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부드러운 밀색 머리와 똑같은 색의 강아지가 붙은 신발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기분 전환이 꽤 됐다. 아직 여유 시간이 있어서 센터 병동 아래에 위치한 카페에 들를 수도 있었다. 하진은 팀원들의 몫과 제 몫의 커피를 캐리어에 담아 양손 가득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이다. 

“난리다….”

하진이 커피를 쭉 빨며 병실 안을 관망했다. 끼어들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시트콤 보는 것 같달까. 마침 안쪽에선 하진이 있는 쪽을 볼 수 없는 유리 벽이 설치되어 있어서 큰 창이 나 있었는데, 그게 꼭 거대한 스크린을 보는 것 같았다.

이대로 구경만 하면 좋겠지만.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팀원들을 보고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저러고들 있어?” 

쓰레기봉투를 빼앗으려는 팀원과 가위를 들고 설치고 있는 팀원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사야와 사우. 둘은 두 달전 새로 들어온 신입 가이드로, 쌍둥이다.

“보시다시피 사야는 치료에 방해가 된다고 쓰레기봉투를 빼앗고 있고요, 사우는 머리를 잘라야 한다고 가위를 들고 있네요.”

그들의 사수인 우혁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하진의 시선은 봉투를 껴안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180 후반쯤 되는 큰 키로 침대 한구석으로 몸을 물리고 있는데도 병상 침대가 비좁아 보였다.

창백하다시피 하얀 피부. 새카맣고 덥수룩한 머리는 그의 어깻죽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불안한지 방 안을 바쁘게 살폈다. 폭주 직후의 에스퍼를 불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진은 주저하지 않고 병실로 들어갔다.

사야와 사우는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어린애들처럼 흠칫 뒤로 물러났다.

“얘들아, 기세는 좋은데 환자가 불안해하잖아. 이러면 안 돼. 특히 사우야, 가위는 정말 아니야.”

봉투를 빼앗으려고 낑낑대던 사야가 쓰레기봉투를 도로 놓고 사우는 시무룩해져 가위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목뒤에 칩을 삽입해야 하는데 머리 때문에….”

하진은 남자가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알아, 내가 설득해볼게.”

“죄송합니다.”

“아니야. 너희 들어온 이후로 에스퍼 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네.”

“처음이면 꽤 괜찮은 편이야.”

살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분위기가 풀렸다. 와중에도 남자를 곁눈질했는데 그는 밖에서 봤을 때처럼 웅크린 채 미동도 없었다. 하진은 둘을 내보내고 천천히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

“저희 가이드들 때문에 많이 놀랐죠. 미안해요. 상황 설명은 들었죠? 저희는 중앙 구역 가이딩 센터 소속 구호팀이고, 어제 일어난 폭주 때문에 환자분을 구출했어요.”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살짝 다가가자 그가 어깨를 움찔했다. 놀란 것 같았다. 하진은 양손을 들고 해하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희는 외곽 구역의 사람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거나 환자분처럼 폭주한 에스퍼들을 구출해 치료를 돕고 있어요.” 

“….”

“환자분이 능력을 다시 안정적으로 쓸 수 있도록 저희가 도울게요. 상황이 많이 좋아지면 중앙 구역에서 머물 수 있을 거예요. 중앙 구역엔 가이드들이 많아요. 환자분 안정에 도움 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에요. 특히 저희가 그렇고.” 

“….”

“그러니까 이제 무서워할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이제 건강해질 일만 남았어요. 하진은 작게 덧붙였다.

“저는 도하진이에요. 구호팀의 팀장. 환자분들은 도 선생님, 도 쌤, 뭐 그렇게 불러요. 저기요도 괜찮고. 아무렇게나 불러주세요.”

“….”

“우리 앞으로 자주 볼 거예요. 그러니까 잘 부탁해요.”

할 말은 다 전한 것 같은데 하진은 가만히 있었다. 침대의 헤드 쪽으로 고개를 바짝 기울였던 남자의 고개가 이리로 살짝 움직였다. 덥수룩한 앞머리 사이로 이쪽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진은 병상 침대의 맞은편에 자리한 TV를 가리켰다. TV에는 가이딩 센터의 로고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저거 동그란 로고 있죠. 저거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으면요, 계속 떠다니다가 오른쪽 구석에서 한 번 로고가 튕겨서 제자리로 돌아오거든요. 요새 못 본 지 좀 됐어요. 그러니까 혹시 보게 되면 말해줘요.”

뜬금없는 소리를 마구 늘어놓은 하진은 병실을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질문이 쏟아졌다. 어땠냐는 둥, 무슨 얘기를 나눴냐는 둥. 하진은 미소 지은 채 대충 대꾸했다.

“치료 기간은 어떻게 보세요?”

우혁이 옆에서 다가왔다. 하진은 방 안에 시선을 둔 채로 대꾸했다. 

“시간을 길게 잡아야겠는걸. 내가 자주 들를게.”

“군부에서 재촉할지도 모르는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하진은 입술을 끌어당겨 웃은 뒤 탁자에 놓인 커피를 턱짓했다. 어서 먹어. 작게 덧붙이는 말에 우혁이 신났는지 그리로 쪼르르 달려갔다. 곧장 호출기가 울렸다. 보안국에서 온 긴급 호출이었다. 하진은 발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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