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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하진은 신이 나 TV를 켰다. 음량 조절도 해줬다. 대뜸 호출기가 울렸다. 센터장이 볼 일이 있는 듯했다. 개같은 아버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하진이 옷 정리를 했다. 그게 나갈 준비라는 걸 알았는지 나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몸을 웅크렸다. 그래도 한창 얘기할 땐 긴장을 좀 푼 것 같았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진전이 있었다.
“내일 또 올게요. 아, 혹시나 저희 가이드들이 실수하면 꼬박꼬박 일러줘요. 내가 혼내줄게.”
“….”
“그럼 나인, 다음에 봐요.”
하진은 손을 흔들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덥수룩한 머리는 깔깔 웃음소리가 들리는 TV를 향해있었지만, 또 몰랐다. 눈만 돌려 자신을 봐주었을지. 하진은 병실을 나오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휴, 사람 죽겠다.”
“고생하셨어요….”
“약간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야. 어린 에스퍼들 돌볼 때 딱 이런 기분이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것 같으면서도 막막한 기분.”
“다음엔 저희가 들어가 볼까요? 저희가 다른 건 못해도 환자 정신 빼놓는 건 진짜 잘하잖아요. 막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구….”
하진이 아서라 손을 내저었다. 비척비척 걸어 소파 위로 드러누워선 손을 뻗었다. 사야가 기다렸다는 듯 하진의 손에 아메리카노를 들려주었다. 쪼옥, 빨아 마신 하진의 어깨가 안도감으로 축 처졌다.
“애들이 다루기 어렵긴 하죠. 어디로 튈지 모르겠고.”
“아니, 그래도 난 그 일 꽤 좋아했어. 지금도 좋은데? 애들 귀엽잖아.”
하진이 실없이 헤헤 웃었다. 축 내려가 순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 웃으면 두 세 살은 앳되어 보이곤 했다.
“저 환자는 성인인데요….”
의미를 모르겠다는 양 사우가 덧붙였다.
하진은 누운 채 고개만 치들곤 몇 번 아메리카노를 빨았다. 그리곤 일어나 앉았다. 어차피 아버지의 부름이 있었으니 곧장 나가봐야 했다. 자랑은 하고 나가야지. 하진은 입술을 끌어당기고 말했다.
“그래도 이름은 알았다.”
“헐, 뭔데요?”
하진은 전리품처럼 자랑스럽게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내보였다. 나인. 검은색 크레용으로 대문짝만하게 적힌 글자를 모두가 ‘우와’하면서 바라봤다. 어찌나 자랑스러운지, 하진은 이 일을 하면서 그렇게나 뿌듯하게 웃어본 일이 없었다.
*
하진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업무 외 시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하필 근무 중이고, 아버지는 까마득한 상사다. 하진은 처음 가이딩 센터에 발령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일 경험도 없는데 대뜸 팀장 직함을 달아주려던 아버지의 무모함에 혀를 내둘렀다.
일반 병동에서 몇 년 구르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했어야 할 정도였다. 내가 센터장이고 네가 내 아들이고, 심지어는 S급인데 뭐가 문제냐고. 도무지 이해되질 않는다는 얼굴로 저를 쳐다봤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땀이 삐질삐질 난다. 지금도 아버지가 센터장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낙하산이란 꼬리표가 따라붙는데, 그때 무작정 아버지의 말을 따랐더라면 지금쯤 무슨 소리를 듣고 있었을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센터의 꼭대기 층에 도착한 하진이 복도를 걸었다. 얼마나 하는 지 모를, 궁금하지도 않은 조각상과 꽃병 따위가 복도에 듬성듬성 놓여있었다. 벽에는 사진이 트로피처럼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중앙의 고위직들끼리 만나 악수를 하거나 나란히 서 있는 사진으로, 하진은 어렸을 적부터 질릴 정도로 봐온 것들이다.
하진의 먼 조상 중에는 ‘개척자’가 있다. 장벽을 세우고 문명을 재건키로 한 신인류. 그의 후손인 아버지가 떡하니 고위직에 앉아있는 것도, 하진이 중앙에서 태어난 이래 성인이 될 때까지 외곽 구역은 구경조차 못 해본 것도 전부 그 때문이다.
이 복도를 걷다 보면 제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가라앉는다. 치과에서나 들릴 법한 기분 나쁜 클래식도 짜증 났고, 기회가 되자마자 독립했는데 아직도 아버지의 손바닥 안이라는 것도 짜증 났다.
하진은 문 앞에 섰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한숨을 푹 내쉬곤 문을 노크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이번에도 별거 아니면 그냥 나가렵니다.”
하진이 문을 반쯤 열어둔 채로 얘기했다. 언제든지 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 발 하나를 문틈에 끼워놓았다. 아버지, 도일주는 보던 서류를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중앙 고위직의 특징인 은발. 하진은 아버지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갈색 머리를 조금이라도 뺴닮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은발마저 닮았더라면 아버지의 고매한 성정까지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
“들어와. 할 얘기 길다.”
“그럼 더 들어가기 싫은데요. 구호팀 팀장을 부른 건지 아들을 부른 건지 먼저 확실히 해주세요.”
“둘 다야.”
일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으로 다가섰다. 언뜻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라벨이 둘러싸인 양주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일주는 개중에 하나를 골라 유리잔에 따랐다. 하진의 몫도 덤이었다.
“아직 근무 시간이거든요. 근무 중에 누가 술을 합니까?”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랑 어울릴 줄을 모르는구나.”
“그럼 아들을 부르신 거네요? 나가볼게요.”
“한태성이 그놈한테서 전화 왔다. 중앙 회의가 잡혀도 전화 한 번 안 하는 놈인데.”
한태성, 보안국 국장이자 한재이의 아버지다. 도일주와 마찬가지로 개척자의 덕을 톡톡히 본 집안. 중앙 고위직들은 죄다 이 모양이다.
“뭐라던데요?”
하진이 제집처럼 드러눕듯이 소파에 앉았다. 아버지가 센터장이라 좋은 점은 공적인 일이 아니면 소파를 편하게 써도 된다는 점뿐이다.
“한재이랑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던데.”
“걔 전담 그만둔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래요?”
“그래, S급인 놈이 전담 가이드 자릴 그렇게 오래 비워두면 안 된다고. 너한테 아직 이상한 미련이 있는 모양인데 깨끗하게 정리해달라고 하더군.”
“전담은 있어요. 그 새끼가 호출을 안 해서 그 사람 직업이 모호해졌을 뿐이지.”
하진은 재이의 전담 가이드를 그만두자마자 센터에 재이의 전담 가이드를 배정해달라는 서류를 제출했다. S급 에스퍼, 특히 장벽 바깥으로 나가 반란군과 싸우는 이들은 전담 가이드를 지정하지 않으면 센터에서 배정해주고는 했다. 일정 기간 이상 전담 가이드 자리를 공석으로 해두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근데 이런 얘기를 아버지끼리 왜 해요?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가네. 저희끼리 이미 끝난 얘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정리 끝난 지 오래라고요.”
“그 새끼가 보안국 국장이고 내가 센터장이니까.”
“…걔는 도대체 뭘 하고 다니면 지 아빠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너라고 다를 거 없다.”
일주가 단호하게 일갈했다. 하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일이 전부 이렇게 된 것은, 하진이 ‘가이드’의 업무를 빌어먹을 첫사랑과 겸했기 때문이다. 하진은 그의 전담 가이드를 맡으면서 그를 가이딩해본 적이 없었다. 업무가 아니라 진심으로 부딪히려 했고 유치한 감정 소모로 일을 흘려보냈다. 그때 자신이 했던 것은 가이딩이 아니라 섹스였다.
“한재이랑은 진짜 아예 끝난 거냐?”
“여기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놈만큼 좋은 조건 없어. 무엇보다 걔가 널 좋아한대지 않냐? 너도 걜 좋아했으니 뭐가 문제야. 다시 너희 둘이 결혼하면 가문끼리도 좋을 거고….”
“그 새낀 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에스퍼가 흔히들 하는 착각 중인 거고요. 전 걔한테서 마음 떴습니다. 과거형이에요.”
일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너도 슬슬 결혼 생각할 때 됐다. 지금 만나는 사람도 없는 모양인데, 한재이가 영 싫으면 내가 자리 하나 주선해줄 테니 만나거라.”
“내가 이런 소릴 듣다니 미쳤지. 드라마 출연하시나 봐요? 무슨 씨, 대본에도 안 적힐 소리야….”
하진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가문이 어떻니, 핏줄이 어떻니, 식사 자리에선 밥맛 떨어지게 꼭 그딴 얘기만 해대던 아버지를 보며 성인이 되면 어떤 말이나 해댈까 상상하곤 했었는데 기어코 내뱉고야 만 것이다.
일주는 얼음이 녹아 달그락, 소리를 내는 잔을 들어 한 번 돌렸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며 녹아가고 있었다. 하진은 제 몫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았다. 입에도 대지 않은 잔 속의 얼음이 속절없이 침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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