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물(무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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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by 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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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이랑 다시 만날 테냐? 아니면 내가 만든 자릴 나가서 얼굴 구경이나 해볼 테냐. 네가 듣기에 혹하는 건 후자라고 생각하는데.”

“둘 다 안 한다면요?”

“이번 구호물자에 물 보급을 늘려달라는 요청을 했던데.”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못 들어주겠다.

“아씨, 진짜! 무슨 씨, 가이딩 센터라면서 돌아가는 꼬락서니 하고는. 구멍가게야? 진짜 유치하다, 유치해!”

“유치하게 안 나오면 네가 듣는 시늉도 안 하니 그렇지.”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누가 뭐래? 나가기만 하면 귀찮은 절차 없이 바로 승인해준다는데.”

시큰둥하니 대답하는 태도는 남 일 여기듯 가볍다. 뭣 모를 땐 아버지와 똑같이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진은 지금의 자신이 도일주란 사람과 닮아있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여겼다.

“어디 시장 바닥도 안 이러겠다!”

“유치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봐.”

구호물자를 빌미로 해오는 딜은 하진에게 선택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버지는 부탁할 일이 있으면 꼭 외곽 지역의 사람들을 물고 늘어졌다. ‘귀찮은 절차’를 생략하는 것이 외곽 사람들에게 하루빨리 물자를 보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하진이 외곽 지역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를 도일주는 알고 있다. 개척자들이 피와 땀을 흘려 세워낸 장벽을 기어코 비집고 들어온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 도일주는 그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하진이 그런 이들을 왜 그렇게나 챙기는지 이해가 안 갔다. 물어보면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말아 이유를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었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앉아, 할 얘기 남았어.”

하진은 홧홧하게 달아오른 목을 매만지며 자리에 앉았다.

“이런 얘기 듣고 있으려니 퇴근이 간절해지네요.”

“구출했다던 놈은? 올라온 보고서를 보니 적힌 것도 없던데. 뭐, 그런 놈 보는 게 하루 이틀이겠냐만.”

“이름은 알아냈고, 등급 측정은 일정을 좀 미뤘어요. 접촉하는데 거부감이 있는 것 같아요.”

“측정이 왜 안 된다고 생각하지? 9구역 현장을 봤어. 처참하더군. 시체조차 안 남는 재난…, 미국에서 뜬소문처럼 한 번 지나간 뒤로 들어본 적이 없었지. 그게 벌어질 줄이야.”

“폭발형 폭주였어요. 그 에스퍼, 추정 나이도 많았고. 나이를 고려하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폭주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폭발형과 잔류형. 폭발형은 에스퍼의 힘이 발현과 동시에 몸이 버티지 못해 폭주하는 것으로, 내재해 있던 힘이 폭발적으로 터지는 것을 의미한다. 폭주의 크기가 크고 단발성이다.

반면 잔류형의 경우 줄곧 힘을 써왔던 에스퍼가 가이딩을 받지 못해 폭주하는 것인데 말대로 에스퍼의 능력이 ‘잔류’해 긴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폭주의 크기가 작지만, 시간이 오래 지속되며, 여러 가지 양상의 이능이 보이는 등 다발성의 특징을 지닌다.

나인의 경우 전자다. 중앙에서도, 높다란 장벽을 두른 곳에서도 눈꺼풀이 하얗게 번쩍일 정도의 섬광은 단 한 번,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의식을 잃은 채 자신의 의지에 반해 능력이 발휘되기에 잔류형은 접근이 어려워 에스퍼의 생존 가능성이 극히 낮다. 그러나 폭발형은 한 번, 거대한 크기로 이능을 방출하고 끝나기에 에스퍼의 의식도 있으며 접근이 쉽다. 나인이 멀쩡히 구출된 것은 그가 폭발형 폭주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폭발형이라고 해도 말이지. 그렇게나 큰 재난은 보기 어려워. 보안국도 해외에 극히 적은 정보만 주려고 혈안이던데. 한동안 바빠지겠어.”

“등급 측정이 안 되는 건, 파동이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가이딩을 오래 받지 못해서. 파동이 안 읽히는 에스퍼들 왕왕 있었어요.”

“필사적으로 부정하려는 모습이 안타깝구나.”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본인 좋을 대로 믿는 아버지가 더 안타까운데요.”

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억지로 끼워놓은 렌즈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짜증 나네. 하진은 허벅지에 올려놓은 손을 세게 쥐었다.

“아무튼,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시계를 확인하니 퇴근 시간이 넘어서고 있었다. 

“어쩌나, 근무 끝났네요. 칼같이 퇴근하는 게 제 모토라서. 이만 가볼게요.”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뒤를 도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안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목소리는 하진이 어릴 적부터 무서워하던 아버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기가 측정할 수 있는 힘의 역치를 넘는 녀석일까 봐. 넌 그게 무서운 거야. 안 그래?”

“….”

일주가 비죽 웃고는 위스키를 들이켰다.

“쓸만한 녀석으로 만들어 놔. 군에서도 좋아할 거다.”

하진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섰다. 아버지, 도일주는 하진이 하는 구호팀의 일을 ‘재활용’으로 표현하고는 했다. 하등 쓸모없는 녀석들을 주워다 쓸만한 것으로 만들어낸다고. 하진은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그 말에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었다.

“제가 하는 일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에요. 재활용이 아니라.”

“그러시겠지.”

하진은 걸음을 재촉해 방을 나왔다. 목 부근이 뻐근했다. 목 끝까지 잠근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고쳤다. 숨이 막혔다.

[데스크] 도 쌤 호출기 못 보셨어요? 한대위님 오셨는데용

[데스크] 도 쌤 뭐 하세요? 도망가심?

가운을 걸치며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센터에서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내 메신저인데, 하진이 친한 사람을 여럿 두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한재이 일정 및 동선 보고 받는 용도. 힌재이로부터 효율적으로 도망가기 위해 친한 사람을 이곳저곳에 심어놨다. 사실 똑바로 말하자면 한재이가 잘 다니는 동선에 있는 사람들만 쏙쏙 골라 사귀어 놓은 거지만.

넥타이를 바로잡고 주머니에 딸기 맛 사탕과 딸기우유 맛 사탕도 한 움큼 집어넣었다. 그리고 온종일 질질 끌고 다니는 클로그의 지비츠도 새로운 강아지로 바꿔주었다. 이러면 기분 전환이 된다.

[도하진] 데용이 뭐야. 데요, 이렇게 해야지.

[데스크] 데요

[도하진] 나 아직 출근 전. 걔는 할 짓도 없나 일찍 쳐기어나와서 지랄이야, 왜?

[데스크] ㅋㅋ

문을 열고 나선 하진은 차에 올랐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돔이 덮이고 있었다. 이따금 온도 조절과 공기 중의 화학 물질을 씻어내기 위해 인공 비가 내리고는 했다. 전력이 충분하면 해를 흉내 내기도 하고. 오늘은 비를 내릴 모양이다.

외곽 지역에서는 물이 부족하면 인공 비를 모으기도 했다. 한동안 안 내렸으니 오늘 씻기도 하고 마실 물을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구호물자를 보낼 날이 머지않았다.

하진은 글로브 박스를 열어 접이식 우산이 있는지 확인했다. 누구는 비를 모으기 위해 허둥지둥하고 누군가는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우산을 챙기는 삶. 지나치게 뒤틀린 세계다. 구호팀을 맡기 전에는 남 일처럼 여겼던 일이었다.

오늘 저녁 아버지가 주선한 자리에 나가기로 했다. 나가기만 하면 구호물자 승인도 금방 날 테고, 하루라도 더 빨리 외곽 지역에 물자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중앙 신문사 사장의 딸이라고 했던가. 상대가 자리에 대해 진지하게 여기지만 않기를 바랐다.

이미 물자를 빌미로 가당치도 않은 딜을 해오려는 아버지에게 몇 번이고 넘어갔다. 외곽에 대한 말만 꺼내면 쉽사리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챈 이후로 아버지는 줄곧 하진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는데…. 이러다 결혼까지 해버리면. 으으, 오소소 소름이 돋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차체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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