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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건 나인이 식사를 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접촉도 거부하고 치료도 거부하는 마당에 식사마저 거른다면 정말 골치 아팠을 것이다.
신호에 걸린 사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몇 가지 도착해있었다.
[윤] 팀장님 나인 씨 잠을 자지 않습니다. 어떡하죠? 물은 자주 마시는 것 같은데 수면제라도 넣는 게 어떨까요? 이러다 쓰러질까 봐 걱정입니다.
[사야] 팀장님 사탕 몇 개 챙기셨어요? 사탕 먹고 싶습니다!!
[우혁] 나인 씨 등급 측정일 27일로 미뤘습니다.
잠을 안 자다니. 머리를 긁적인 하진이 차를 출발시켰다. 측정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그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줘야만 했다.
센터 앞에 도착하니 하진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인형이 가득 쌓여있는 트럭이었다. 아이들의 퇴원 선물로 사 가는 사람들이 곧잘 보였다. 정문에서 나온 남자아이 하나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곰 인형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한달음에 달려와 인형을 끌어안고 웃는 아이의 모습에 어쩐지 나인이 생각났다.
쓰레기봉투를 꼭 껴안고 절대 놔주지 않던 그가 결국 한재이에게 뺏기고 말았단 얘기를 들었을 때 하진은 정말이지 미안했다. 어린 에스퍼들을 치료할 때 방사 가이딩이 무서워 인형을 꼭 껴안고 있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일까.
주차한 하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트럭으로 다가갔다. 인형과 꽃이 가득 놓인 차에 다가가자 트럭 주인이 의아한 눈으로 하진을 바라봤다. 하진이 이곳에 근무하고 있는 가이드라는 걸 알아본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여기 일하시는 분 아니에요? …여기서 장사 못하게 하려는 건 아니지요?”
“에이, 설마요. 오히려 사러 왔는데요.”
“아이, 난 또. 요새 이래저래 말이 많아서 말이야. 골라봐요.”
“음….”
뭘 줘야 좋아하려나. 하진의 눈이 바삐 인형들을 살폈다. 병상 침대가 비좁아 보일 정도로 큰 체격이었으니 작은 인형을 주기엔 좀 그렇다. 끌어안으면 안심이 될 만한 큰 인형이 좋겠다.
“그런데, 병원에서 일하시는 분이 인형은 왜 사려고? 설마 여자친구?”
“아뇨, 환자분한테 주려는 거예요.”
“에, 환자를 좋아해?”
“하하, 설마요. 며칠 전에 미안한 일이 좀 있어서. 그거 만회하려고요.”
좋아하는 거 맞는구먼. 제 얘기를 어디로 들었는지 멋대로 결론까지 낸 주인이 허허 웃었다. 어지간히 예쁜 사람인가 봐. 하진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인형을 골랐다. 갈색 곰 인형과 검은색 토끼 인형 중 중 어떤 것으로 할까 한참 고민하다 토끼를 골랐다. 토끼의 검은색이 새까맣던 그의 머리색과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할게요.”
“이거? 큰 거라 좀 비싼데.”
“상관없어요. 가이드인 게 이럴 때 좋네요.”
농담을 몇 번 주고받고는 값을 지불하고 인형을 건네받았다. 하진의 품에 안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큰 것이었다. 안자마자 좀 후회했다. 너무 큰 거 샀다 싶어서. 무엇보다 끌어안고 보니 앞이 안 보였다. 인형을 안고 겨우내 고개를 빼꼼 내밀어 시야를 확보한 하진이 뒤뚱뒤뚱 걸어 센터 입구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시선이 집중됐다. 다행히 뵈는 게 없어 그렇게 부끄럽진 않았다. 데스크로 다가가자 수민이 손짓, 발짓으로 뭔가를 표현하고 있는 게 보였다. 다만 하진은 인형의 왼쪽으로만 고개를 내밀고 있는 탓에 다른 한쪽의 시야는 막혀있었다.
“어때? 대박이지.”
“네, 그것참 대박인데….”
“아, 미안. 오늘 커피 안 사 왔다.”
“커피가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수민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했다. 하진이 의아함을 품기도 잠시, 옆에서 기분 나쁘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주려고.”
“아.”
낑낑대며 인형을 고쳐 든 하진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린 한재이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명치 아래께서부터 분노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저 새끼 때문에. 다 저 새끼 때문에! 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거래도 앞으로 지겨우리만치 나가야 할 저녁 식사 자리도 전부 한재이의 지랄 덕인데, 출근하자마자 잘난 얼굴을 마주하니 화가 안 나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삐뚜름한 시선이 닿자 재이가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렇게까지 노려봐야 할 이유가 있어?”
“이유? 이유야 차고 넘쳤지, 미친놈아. 어제, 씨. 내가 너 때문에 아버지한테…!”
“아버지? 센터장님이?”
“크흠….”
수민이 헛기침했다. 제가 들을 얘기가 아닌 것 같다는 뜻이었다. 아, 맞다. 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데스크에서 벗어났다. 따라오라는 턱짓에 재이가 뒤를 조용히 따랐다.
센터 1층에 위치한 카페에 도착한 둘은 제 몫의 커피를 시켰다. 물론 재이와의 대화에 돈을 쓸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에 재이가 지갑을 열었다. 계산대 앞에서 네 돈 쓰기 전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고 반협박을 해대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재이는 제 돈 쓰는 것엔 문제가 없었지만, 굳이 제 지갑을 열게 만들겠다 애쓰는 하진이 어이없는 모양이었다.
하진이 시계를 확인했다.
“출근까지 10분 남았네.”
재이와 눈 마주치기가 싫단 이유로 제 무릎에 올려놓은 인형 때문에 재이는 대형 검은 토끼와 눈을 마주한 채였다.
“센터장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너희 아버지가 전화했다고. 네가 나한테 미련이 있는 것 같은데 깔끔하게 정리해 달래나 뭐라나. 정리할 것도 없는 사이인데 말이야.”
“왜 쓸데없는 소릴….”
“그러니까. 내가 왜 그딴 소릴 듣고 있어야 하는데? 너 때문에 선까지 보러 가게 생겼,”
“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됐어. 아버지랑 거래한 게 좀 있어.”
“거래같은 건 관심없어. 가지 마.”
“나도 안 가고 싶거든? 씨, 이게 누구 때문인데.”
인형 옆으로 손을 뻗은 하진이 커피를 마셨다. 곧 죽어도 아이스라고 말헀는데 제 얘긴 듣지도 않은 모양인지 커피가 뜨거웠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달라진 척하지만 그대로다.
“하여튼, 너희 아버지가 쓸데없는 일로 전화할 일 만들지 말라고. 그것 때문에 여간 피곤한 게 아니야.”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아버지 성격이 그런 거지.”
“성격이 그런 거면 네가 좀 나서서 막지 그래? 왜 나까지 피해 봐야 하는데? 제발 좀 포기해. 전담 가이드 그만둔 지가 언젠데.”
“….”
검은 토끼 인형의 등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재이의 눈과 마주하지 않아서 그런가, 이상한 용기마저 생기는 것 같았다.
“S급 에스퍼 몇이 유럽 지부로 차출된다고 하던데. 너도 그리로 가지 그래? 대우도 한국보단 훨씬 나을 텐데. 너희 어머니가 유럽 출신이잖아. 여행한다고 생각해.”
전쟁이 일어났던 당시, 본부인 미국을 필두로 각 나라의 개척자들이 그들의 뜻을 따라 각국에 장벽을 세웠다. 전쟁의 여파로 피난민들이 여기저기로 퍼지면서부터는 인종의 구별이 필요 없어질 정도로 피가 섞여버렸다.
한국 지부의 경우 순수 한국인은 정말 손에 꼽힐 정도다. 하진의 먼 조상 중에도 외국인이 섞여 있는 탓에 머리가 유독 밝은 것도, 재이의 이름이 영어로도 발음하기 쉬운 것도 그 탓이다.
에스퍼의 폭주에 따른 구호나 반란군과의 전쟁 투입을 위해 다른 지부에서 급 높은 가이드와 에스퍼를 차출해가는 일이 자주 있다. 마음에 들면 중앙에 거주하는 가이드와 에스퍼에 한정해 다른 지부에 머물 수 있게도 해주는데, 중국 지부 출신인 사야와 사우가 그렇다고 들었다.
한국은 최근 반란군을 제압한 뒤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한동안 폭주 이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이라 판단된바, 유럽의 차출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일단 선발되면 해외 지부에서 차출된 것이니 한국보단 훨씬 대우가 좋다. 다만 장벽의 설계는 모두 같기 때문에 하진의 말처럼 해외여행이라고 하기엔 뭣하다. 각 구역의 생김새, 건물 하나하나까지 전부 똑같으니까. 사람들만 다른 것이 되레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주로 이곳의 대우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사내 연애하다 헤어져 도피성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하진은 제 눈앞에서 완전히 꺼져달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재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당초 좋은 소릴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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