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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름. 이름이 뭐예요?”
종이 맨 위, 사진이 붙어있어야 할 빈칸 옆을 검지로 짚으며 물었다. 뭐라고 불렸어요? 그렇게도 고쳐 물었다.
남자는 제가 무엇으로 불렸는지를 떠올려봤다. 술에 진탕 취하거나 도박으로 생필품을 따지 못한 날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말이 있었다. 씨발 새끼, 후레자식, 개새끼. 지금에서도 다 떠올리지 못할 것들로 불렸는데 좋은 뜻은 아니었다. 그렇게 불리면서 맞았으니.
게다가 저만 그렇게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방 바깥의 남자도 씨발 새끼고 여자도 씨발 새끼였으며 남자의 말에 따르면 대략 마을의 모든 사람이 씨발 새끼인 셈이었다. 제 앞의 남자, 하진이 요구하는 것은 적어도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남자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남자는 이름이 없었다.
남자의 당황한 눈이 종이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차피 아무렇게나 불려온 삶이다. 인제 와서 번듯하고 좋은 이름을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렇게나 불려도 된다. 정말로 아무렇게나.
남자의 시선이 종이의 한구석에 박혔다. C-9 구역 생존자. 그렇게 적혀있었다. 네모난 글씨들은 흉내 내기 어려워 보였다. 남자는 검은색 크레용을 들어 하진이 짚은 손가락 옆으로 가져갔다.
[ 9 ]
그렇게 적었다.
“구? 이름이 구예요?”
하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지만 남자는 대꾸가 없었다. 애초에 대꾸를 기대하고 물은 것도 아니었다. 남자의 시선이 종이 아래로 갔다가, 다시 이름 칸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훔쳐보았다. 제가 똑바로 잘 적었는가, 잘 흉내 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름이 없구나. 하진은 금방 착잡한 마음이 되었다. 그럴싸한 이름을 지어주면 좋겠지만 그건 주제넘은 짓이다.
“아니면 나인?”
하진이 영어로 되물었다. 남자의 고개가 바짝 들렸다. 훨씬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하진은 허락을 구하듯 크레용을 쥔 남자의 손 앞에 손을 뻗었다. 남자도 그 뜻을 이해한 듯 크레용을 놔줬다.
하진은 이름 칸 옆에 ‘나인’이라고 큼지막하게 썼다. 남자, 나인의 시선이 그 위로 오래 머무는 것을 보았다.
하진은 구호팀을 맡기 전 일반 병동에서 소아를 주로 한 가이딩 업무를 본 적이 있었다. 어린 에스퍼들을 치료했던 지난날의 경험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나인은 이곳에 온 뒤로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낯선 환경 때문이겠지. 하진은 나인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알고 있는지, 또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린 에스퍼들이 겪는 갓 발현한 직후의 두려움을 하진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했듯이, 어쩌면 나인이 보기에 좀 웃긴 모양새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환자분, 에스퍼가 뭔지 알아요?”
하진은 TV 리모컨을 들었다. 소아 병동에서 교육용 영상을 만들어 보기에 지루할 정도로 온종일 틀어놓는 게 있었다. 에스퍼란 뭘까요, 가이드는 뭘까요, 우리는 서로를 도와주는 착한 친구, 그런 내용이다.
[ 안녕, 나는 토끼야. 어릴 때는 건강했는데, 언젠가부터 몸이 자꾸 아프고 열이 났어. 그러다가 짜잔, 어느 날부터인가 내 손에서 불이 나오기 시작했어! ]
이족보행 하는 토끼가 시름시름 앓더니 어느새 번쩍 일어나 손을 들어 보였다. 손끝에서 조그마한 불이 피어났다. 하진은 이 교육용 영상을 하도 봐서 대사를 줄줄이 외웠다. 다음 대사는 ‘친구들이 나를 괴물이라고 놀리기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다.
[ 친구들이 나를 괴물이라고 놀리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했어.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힘이 막 튀어나왔어. 내가 좋아하는 꽃을 태워버린 날엔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
토끼의 새카만 눈이 그렁그렁하더니 눈물을 툭툭 떨궜다. 하진은 계속 서 있어서 다리가 아팠다. 나인의 눈치를 보다가 침대 끄트머리에 슬쩍 앉아봤는데, 나인은 이쪽에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그의 고개가 TV에 가 있었다. 귀여운 토끼가 펄쩍펄쩍 뛰고 눈물도 흘리고 불도 쏘아대니 흥미로운 것 같았다.
다행이다. 하진은 뿌듯했다.
[ 난 정말 괴물일까? 내 힘이 무서워. 불을 쏘고 싶지 않은데 불이 나와. 게다가 아프기까지 해! 너무 아파, 누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
잔디밭에 앉아 엉엉 우는 토끼의 곁으로 연한 갈색 강아지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갈색 강아지는 토끼가 울든 말든 무척 여유로웠는데, 그건 하진이 이 교육용 영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점이었다.
높은 급을 단 에스퍼들은 저들이 뭐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지만 실제로 에스퍼와 가이드의 관계에서 을이 되는 건 에스퍼다. 가이드의 가이딩이 없으면 에스퍼는 죽지만 가이드는 에스퍼가 없이도 일반인처럼 잘만 먹고산다. 신에 가까운 영역이니 신인류니 하는 것들을 하진은 결단코 사양했다. 손에서 불이 나오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잔디밭에서 울 필요도 없고.
[ 왜 울어? 어디가 아파? ]
[ 흑흑, 갈색 가나지야. 나 정말 아파. 이러다 죽으면 어떡해? ]
그것 외에도 이 영상에서 하진이 좋아하는 것은 어린이 성우가 녹음해 ‘강아지’를 ‘가나지’라고 발음하는 점이었다.
[ 걱정하지 마, 토끼. 내 손을 잡아. ]
의젓한 강아지가 토끼에게 손을 뻗고 토끼는 주저하다 그 손을 잡는다. 토끼의 눈물이 뚝 그치는 것도, 그렁그렁하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부터다.
[ 우와, 이거 짱이다! 기분이 좋아지고, 힘도 나는 것 같아! 으쌰으쌰! ]
“실제로는 가이딩을 받을 때 에스퍼는 여러 감각을 느껴요. 사람마다 다른데,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도 있고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도 있죠.”
하진은 설명을 덧붙였다.
[ 나는 가이드고 너는 에스퍼야. 우리가 함께라면 네가 다시 아플 일은 없을 거야. 우리 친구 할래? ]
갈색 강아지가 토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진은 강아지가 했듯이 나인에게 손을 뻗었다. ‘우리 친구 할래?’ 특유의 장난기 묻은 입술을 씩 끌어올린 채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인은 손을 한 번 보고, 하진을 올려다봤다. 손을 마주 잡지는 않았지만 하진은 손을 맞잡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을 쥐고 흔드는 시늉을 했다.
[ 응, 우린 이제 친구야! ]
손을 잡고 잔디밭 위를 펄쩍펄쩍 뛰어대는 두 캐릭터를 바라봤다. 잘 만들었다. 꿀릴 것 없는 가이드가 에스퍼에게 먼저 손 내밀 일은 국가가 끼어들지 않는 이상 없지만, 어린이가 보기에는 적당한 방식의 마무리다.
“나인이 원한다면 계속 틀어둘게요. 그럴까요?”
하진은 남자가 의사 표현을 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말을 하지 않는다면 좋고 싫은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나인이 그렇게 표현할 줄 알아야 했고.
나인이 대답하지 않자 하진은 조금 강제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나인이 어린이 교육용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보고 싶어 한다는 것쯤은 이미 파악한 뒤였다. 하진은 TV를 껐다. 나인은 리모컨을 작동하지 못하니 하진이 아니면 다시 TV를 켤 수 없다.
덥수룩한 머리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당황을 표했다. 덩치가 큰 것과 어울리지 않게 당황하면 몸짓이 컸다.
“어쩔까요? 다시 켤까요?”
하진은 어린이들을 많이 다뤄봐서 알고 있다. 극도로 내향적인 아이들은 혹하는 것을 끼워 넣고 등을 조금만 떠밀어주면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등을 떠밀어줬으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진은 나인이 대답할 때까지 몇 분이고 기다렸다.
덥수룩한 머리가 살짝 위아래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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