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연과 함께 흩날리는 추억
해등절 기념 소루미네
시끌벅적한 리월항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들뜬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기다란 색색의 천은 바람에 맞춰 유유히 흔들리고 주렁주렁 열린 소등은 어서 밤이 되어 제빛을 발하길 기다렸다.
회색 바닥에 또각또각 청아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루미네와 페이몬은 번화한 항구를 이곳저곳 둘러보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산들바람에 옷자락 끝이 펄럭였다.
그들이 발을 멈춘 곳은 진연의 연 노점이었다.
“안녕, 진연! 혹시 연 재료 남은 것 있어?” 페이몬은 손을 붕붕 흔들며 말했다.
“또 뵙네요, 두 분! 재료라···, 아마 조금 있을 거예요. 직접 만들어 보시게요?”
진연이 뒤를 돌아 노점 한편에 있는 상자를 뒤적였다.
“네,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루미네가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명절에 연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도 좋죠. 받는 분이 좋아하시겠어요. 어디 보자, 재료는 이쯤 남았네요.”
“얼마야?”
“두 분께는 공짜로 드릴게요.”
“엥? 그치만···.”
“어차피 재료를 사 가시는 손님은 거의 없어서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아마 그저 재고로 남을 거예요. 좋은 사용처를 찾는 게 이 재료들에게도, 저에게도 큰 기쁨 아닐까요?”
진연이 한 손을 가슴께에 얹은 채 밝게 미소지었다.
“진연······. 고마워! 우리가 이 재료들로 꼭 훌륭한 연을 만들게!” 페이몬이 울먹거리며 다짐했다.
“감사합니다.” 루미네도 입꼬리를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네네, 그럼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막 노점을 떠나려던 차 페이몬이 갑작스레 입을 뗐다.
“근데 루미네.”
“응?”
“너 소 가면-.”
“쉿!” 루미네가 다급히 검지를 입술 위에 올렸다.
“앗, 미안 미안. 너 그거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음··· 그러고 보니까 자세한 생김새는 잘 모르겠네.”
“그럼 기왕 만들 거 한운에게 가서 도움을 받는 건 어때?” 페이몬이 제안했다.
“한운은 우리보다 소와 함께한 시간이 더 기니까 가면에 대해서도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래, 그거 좋겠다.”
“좋아, 한운한테 가보자고-! 앗, 잠깐만. 그런데 한운을 어디서 찾지? 이젠 오장산에도 없잖아.”
“한운이라면 혹시 긴 머리에 빨간 안경을 쓰신 여성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연을 만지던 진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맞아요.”
“그분이라면 두 분께서 오시기 전 연을 한 번 둘러보시더니 곧 다른 가게로 가셨어요. 쇼핑하시던 것 같던데 저희 가게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마 근처에 계실 거예요.”
“고마워! 루미네, 우리 주변을 돌아다녀 보자!”
“그래.”
‘한운은 영업에 약하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루미네가 손을 턱에 맞댄 채 생각했다.
“뭐해? 빨리 가자, 놓치면 안 되잖아!”
“알았어.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두 분 모두 즐거운 해등절 보내세요~!” 진연이 말했다.
“해피 해등절!” 페이몬이 화답했다.
루미네의 예상대로 한운은 근처 가게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각종 보석으로 장식한 장신구들을 면밀히 관찰 중인 듯했다.
“한운!”
“또 보는구나. 너희도 이 근방을 둘러보고 있었던 게냐?” 한운이 물었다.
“응응! 그것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냐?”
“여기서 말하긴 좀 그래. 지금 오장산으로 같이 가줄 수 있어?” 루미네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운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곤 들고 있던 팔찌를 내려놓았다.
“흠, 그러지. 이보게, 이 팔찌들은 얼마인가.”
“각각 2000모라입니다.” 상인이 반질반질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둘 다 사지.”
한운이 돈을 건네는 사이 페이몬이 물었다.
“예쁜 팔찌네. 장신구를 좋아한다니 의외인데?”
“이 몸의 것일 리가 있겠느냐. 신학과 감우에게 줄 것이니라.”
“그랬구나! 둘한테 잘 어울리겠는걸.”
“누가 고른 것인데 당연히 그러하겠지.” 한운이 턱을 치켜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여기, 받으시지요. 즐거운 명절 보내시고 다음에 또 들러주세요!” 상인이 팔찌를 내밀었다.
“고맙네. 자네도 즐거운 명절 보내길. 자, 이제 오장산으로 가보지.” 한운이 팔찌를 가방에 조심스레 넣곤 루미네와 페이몬을 돌아보았다.
“응, 가자!” 페이몬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곧 한운의 가방이 둥둥 뜬 채 그녀와 걸음을 같이했다.
“나도 페이몬 대신 저런 가방을 들고 다닐까···.” 루미네가 가방을 유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원한다면 하나 만들어 주마.”
“야! 날 단순히 떠다닐 수 있단 이유만으로 저런 가방이랑 비교하지 말라고!” 페이몬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곤 외쳤다.
“‘저런 가방’이라니. 저것은 이 몸이 정성 들여 만든 귀중품이거늘.” 한운이 페이몬 쪽으로 눈을 흘겼다.
“하하하!” 루미네가 경쾌하게 웃어젖혔다.
“이익, 야!”
세 사람은 계속해서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천천히 오장산으로 향했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해야 할 그 귀한 이야기가 무엇이냐?” 류운이 물었다.
“그게, 이제 곧 해등절인데 소는 또 명절을 혼자 보내고 있을 거 아냐. 그래서 얘가 소랑 같이 연 날리고 싶다고 했어.” 페이몬이 한 손으로 루미네를 가리켰다.
“좋은 생각이구나. 확실히 항마대성이라면 먼 곳에서 혼자 조용히 보내길 택했겠지. 약속을 잡으려 해도 거절했을 테고. 그래서 그 연을 만드는 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
“맞아! 소의 가면 모양 연을 만들고 싶은데 우리 둘 다 가면을 자세히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어···.” 페이몬이 머리를 긁적이며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가면이라···. 어렴풋이 기억나는구나. 그래, 도와주지.”
“헤헤, 고마워!”
“감사해요.”
“···그는 참으로 좋은 이를 곁에 두었군.” 한운이 루미네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중얼거렸다.
“아니, 거긴 좀 더 날카로워야 해.”
“그 부분은 검은색이 아니라 노란색.”
“그게 아니다.”
“다시.”
“다시.”
“다시!”
·
·
·
“후아, 드디어 다 만들었다!”
루미네와 페이몬은 다소 기진맥진한 채 기어이 연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류운의 의견이 (많이) 들어간 연은 가히 작품이라 해도 될 정도로 정교하며 훌륭했다.
“흠, 나쁘지 않군. 바로 전해줄 참인가?”
다 죽어가던 루미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망서 객잔에 들러서 행인두부 포장해 갈 거에요······.”
“좋은 생각이군. 그나저나 그것 좀 만들었다고 둘 다 이렇게 진이 빠지다니, 하여간 요즘 사람들은···. 됐다, 워낙 힘들어 보이니 내 친히 객잔까지 바래다주지. 타거라.”
류운이 금세 선학의 모습으로 변해 말했다.
“고마워···.”
“감사합니다···.”
“빨리 타기나 하거라.”
휘이이익-.
두 사람을 태운 학이 빠르게 창공을 갈랐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시원한 공기와 바람에 루미네의 치맛자락이 나부꼈다.
“우와, 엄청 시원해···!”
페이몬이 바람을 입 안에 담으려는 듯 입을 한가득 벌렸다.
“흥, 선인을 타고 날아가는 것은 매우 귀중한 경험이니 감사히 여기거라.”
“응, 고마워!”
루미네도 페이몬처럼 허리를 곧추세우고 아래쪽의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위에서 보는 리월은 평소와는 달랐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페이몬이 루미네를 따라하려다 질겁하며 류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살살 잡거라. 거의 다 왔다.” 류운이 말했다.
한운은 점차 나는 속도를 줄이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들을 조용히 망서 객잔의 꼭대기 층에 내려줬다.
“고마워, 한운!”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차례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래. 아, 잊을 뻔했군. 이것 받거라. 연에 음식까지 들려면 아무리 둘이라도 필시 손이 모자랄 테지.” 한운이 어디선가 쇼핑할 때 가지고 다녔던 가방을 꺼내 건넸다.
“엥? 우리 주는 거야?”
“정확히는 ‘빌려주는’ 것이니라. 나중에 마주치면 다시 주도록. 그럼 난 이만 가보마.”
감사 인사를 전할 새도 없이 한운이 다시 날개를 펄럭이며 저 멀리 날아갔다. 페이몬은 감동에 찬 얼굴로 그녀가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손을 붕붕 흔들어댔다.
계단을 내려가자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베르 고데트와 연신 발바닥을 핥아대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안녕, 베르 고데트! 우리 왔어!” 페이몬이 밝게 인사를 건네고 루미네는 옆에서 작게 고개를 까딱했다.
“안녕, 어서 와. 또 만났네.”
“행인두부 세 개 포장할게. 그리고··· 또···” 페이몬이 우물쭈물하며 슬쩍 루미네 쪽으로 눈을 돌렸다.
“버섯고기말이 넷, 절운고추 치킨 하나 포장이요.” 루미네가 말했다.
“헤헷.” 페이몬이 헤실댔다.
“응, 잠시만 기다려줘. 그런데 뒤에 있는 건 뭐니?”
“아, 이건···”
페이몬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루미네가 들고 있던 연을 보이며 객잔의 천장 쪽을 가리키곤 ‘쉿’ 표시를 했다.
“···아하. 그래, 알겠어.” 베르 고데트도 검지를 입 위에 올렸다.
“여기, 주문한 음식들 나왔어.” 베르 고데트가 용기에 포장한 음식을 두 사람에게 건넸다.
“고마워!”
음식을 받은 루미네가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가방에 넣어두었다. 마지막 음식까지 넣자 공간이 딱 맞아떨어졌다.
“아 참, 베르 고데트!”
“왜 그래?”
“혹시 연날리기에 좋은 장소 추천해줄 수 있어?”
“음···. 가장 가까운 곳은 역시 귀리 평원이려나. 그곳이라면 사람이 너무 많지도 않아서 딱 적당할 거야.”
“고마워!”
“이 정도로 뭘. 다음에 또 만나자.”
“또 봬요.” 두 사람은 웃으며 인사하곤 한운의 가방과 함께 객잔을 나섰다.
“이쯤이면 됐겠지?”
귀리 평원은 베르 고데트의 말처럼 한적했고 바람도 적절히 불어 연을 날리기에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응. 여기가 좋겠다.”
루미네는 걸음을 멈추고 가방에서 준비해 온 연을 꺼낸 후 입을 열었다.
“소!”
“무슨 일이지?”
부르기가 무섭게 소가 그들 뒤에 나타났다.
“흐엑! 놀랐잖아, 기척 좀 내고 다녀!” 페이몬이 화들짝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어서 와.”
“이건···”.
소가 루미네가 들고 있는 연에 초점을 맞추며 말했다.
“같이 날리지 않을래?”
“우리가 널 위해 만들었다고!”
“이 정도의 정교함이라면 분명 정성 들여 제작한 것이겠지. 마음은 고맙지만··· 난 연을 날려본 적이 없어.”
“이번 기회에 해 보면 되지! 우리, 아니 얘가 가르쳐 줄 거야. 우리가 이거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한운한테 도움을 청했어.”
“···류운 진군의 도움을 받았다고?”
“그래! 어휴, 다시는 연 만드는 걸 도와달라고 하지 않을 거야. 어찌나 스파르타던지···.”
이후로도 계속되는 페이몬의 종용과 루미네의 부담스러울 만큼 뚫어질 듯한 눈빛에 소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정 원한다면 해 보도록 하지.”
“예이!”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여기 이걸 쥐고, 천천히 실을 풀면 돼. 응, 그렇게. 쉽지?”
루미네는 바로 옆에서 소에게 연을 쥐여주곤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애초에 그리 어려운 과정이 아니었기에 연은 소의 손에서 금세 하늘로 떠올랐다.
“우와!” 페이몬이 탄성을 참지 못했다.
루미네는 말없이 옆을 돌아보았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을 뿐 감탄한 건 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응달이 제비 모양 연을 하나 사 왔었지. 연을 품에 안고 멀리서부터 뛰어오며 우리에게 함께 날리자 제안했어.”
“너는? 수락했어?” 루미네가 물었다.
“아니. 난 그저 먼 곳에서 그들이 연을 날리는 광경을 지켜봤어. 다들 연이 처음이었고, 날리는 법을 가르쳐 준 이도 없었기에 결국은 실이 끊어지고 말았지. 미노는 그걸 보곤 혀를 찼고, 부사는 호탕한 웃음을 지었어.”
루미네는 홀린 듯 옛일을 늘어놓는 소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하늘 위의 연을 넘어 어딘가 더 높은 곳을 보는 듯한 소의 눈은 추억으로 한껏 젖어 있었다.
‘방해하지 말자.’ 루미네는 페이몬에게 고갯짓했고 페이몬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는 그렇게 한참을 연을 만지작대며 기억 속에 잠겨갔다.
“···미안하군. 나도 모르게 너무 집중해버렸어.”
“에이, 괜찮아! 즐거워 보이던걸, 그렇지?”
“응. 네가 즐겼으면 우린 그걸로 됐어.”
“고마워. 그러고 보니 시장하지 않나?”
“헷헤~, 그럴 줄 알고 우리가 또 미리 음식을 챙겨왔지!”
페이몬이 자랑스레 양팔을 허리 위에 올렸다. 루미네는 옆에서 가방을 열곤 차례로 음식들을 꺼냈다.
“여기 네가 좋아하는 행인두부도 있어!”
“신세를 지게 됐군. 감사히 받지. 그런데··· 이걸 정말 다 먹을 수 있나?”
“후후, 페이몬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이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단 말씀!”
“그렇다면야···. 잠깐, 다 꺼내지 말아 봐. 음식을 먹기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지.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소가 늘 그렇듯 풍륜양립을 사용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몇 초 후 다시 나타났다.
“저기 저 나무가 좋겠어.”
“어디? 설마 저어기 저 점만 한 저거?? 아니, 왜···? 주변에 다른 나무들도 많은데···?”
“너무 먼가? 하지만 이 근방에서는 저 나무가 가장 적절해 보이는데. 흠··· 정 그렇다면 잠시 실례하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소는 루미네를 빠른 속도로 들쳐 안았다.
“?!”
“꽉 잡도록.”
“잠깐 잠깐 잠깐!!”
소가 다시 풍륜양립을 쓰려는 순간 페이몬이 다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나도 데리고 가!”
“···넌 날 수 있지 않나.”
“그치만 저긴 너무 멀다고!” 페이몬이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내 어깨를 잡아. 놓치지 않게 조심하고.”
“알았어. 이렇게 하면 되지?”
“페이몬, 가방!” 루미네가 외쳤다.
“아 맞다! 이제 진짜 준비 완료!”
슉-.
짧은 바람이 스치듯 지나가자 어느새 그들은 소가 말했던 나무 아래에 와 있었다.
“우, 우와···!” 페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심.”
“으, 응.”
소는 살며시 루미네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루미네는 아직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두 발을 땅에 붙이자 볼살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비로소 제대로 느껴졌다. 루미네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마음에 들어?”
“···응. 고마워.”
“이봐, 너희들. 얘기 그만하고 나 좀 도와줘! 꺼낼 음식이 많은데다 연까지 있어서 나 혼자선 힘들단 말이야.”
“앗, 미안. 도와줄게.”
세 사람은 가지런히 쌓여 있던 음식들을 순서대로 꺼냈다. 음식이 하나씩 모습을 보일 때마다 페이몬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으으으음~!! 이거지. 좋아 좋아!”
페이몬이 음식을 볼이 터질 듯 집어넣곤 만족스레 말했다.
“페이몬, 이러다 너무 무거워져서 바닥에 떨어지는 거 아냐?”
“야, 아니거든? 날 만만히 봤겠다, 에잇, 네 것까지 먹어주마!”
“하하하!” 날아드는 페이몬을 피해 잽싸게 뒤로 물러나던 루미네는 나무 기둥에 몸이 부딪히고 말았다. 그 바람에 쿵 소리와 함께 나뭇잎 몇 개가 떨어져 하나는 루미네의 머리 위에, 하나는 페이몬의 접시 위에 얹혔다.
“괜찮아?” 소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이 정도야 뭐. 괜찮아.” 루미네가 웃으며 대답했다.
“미, 미안! 난 그러려던 게 아니라··· 힉! 내 치킨!”
“다칠 수도 있으니 다음부턴 조심해.” 소가 루미네에게서 나뭇잎을 떼어내며 말했다.
“아, 붙어있는 줄도 몰랐네. 고마워.” 루미네가 배시시 웃었다.
“야, 너희들! 난 또 안 보이는 거야?! 나도 나뭇잎 붙었다고···. 엥? 근데 소는 왜 귀가 빨개졌어?”
“···잘못 본 거야. 잠시 나무를 살피고 오지.” 소는 쏜살같이 나무 기둥 뒤로 숨어 버렸다. 루미네는 잠시 눈이 동그래졌다가 곧 옅은 웃음을 지었다.
“으엥? 넌 또 왜 웃는 거야? 뭐야, 뭔데! 나도 알려줘!” 페이몬이 떼를 쓰듯 졸라댔다.
“아무것도 아냐. 페이몬, 그 접시 나한테 주고 내 거 가져가.”
“됐어! 흥, 나한테만 안 알려주고.”
페이몬은 이내 한 손으로 나뭇잎을 떼어내 날려버리더니 우악스럽게 입을 벌려 남은 치킨을 한 번에 쓸어 넣었다.
“후암··· 배부르다······.”
“나도···.”
배를 채운 셋은 나른함에 각자 나무 아래에서 뻗고 말았다.
“아, 잠 온다···. 루미네, 넌 안 졸려···?”
“나도 졸려···. 소, 넌 어때?”
루미네는 나무 뿌리를 베고 누운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
소는 이미 눈을 굳게 감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우리 좀만 자자······.”
“그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었다. 나무 아래 세 사람의 숨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한편 꿈속에서 소는 아주 오래전 평화로웠던 순간에 다다랐다.
“짜잔! 다들 이것 좀 보라고.”
타오르는 불길같이 빨간 머리의 여인이 야차들을 향해 외쳤다. 그 모습에 야차들이 하나둘 고개를 빼 들기 시작했다.
부사는 굵은 나뭇가지에 기대 자던 소를 툭툭 치며 깨웠다.
“이봐, 금붕. 일어나.”
“으음···.”
잠에서 깬 소는 위화감을 느끼며 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사? 이게 무슨···, 정말 너야?” 소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봐, 너무 푹 잔 것 아냐? 날 잊어버릴 정도라니. 네가 그렇게 깊이 잠든 모습은 보기 힘든데 말이야.”
“······”
“금붕, 왜 그래? 괜찮아?”
“난···, 그래. 하··· 꿈이라면, 그저 잠깐일 뿐이라면 만끽한다 해서 나쁠 건 없겠지.”
“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한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주변이 소란스러운데.”
“아, 응달이 뭔가 재미있는 것을 가져온 모양이야.”
두 야차는 천천히 다른 야차들에게로 향했다.
“이게 뭐야, 응달?” 날카로운 푸른 뿔을 가진 야차, 벌난이 물었다.
“연이야. 이제 곧 해등절이잖아. 다들 이걸 하늘에 날리고 있던걸?”
“흐음···.” 심원대장 미노가 검지와 엄지를 턱에 비비며 연을 관찰했다.
“우리도 날려보자!” 응달이 말했다.
“어떻게 날리는지는 알고?”
“음, 일단 하다 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하, 응달 말이 맞다. 뭐든 일단 부딪혀봐야 알 수 있는 법이지. 그렇지 않나, 금붕?”
“그래.” 소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얼른 날려보자!”
응달이 연을 품에 안은 채 앞을 향해 빠르게 뛰어갔고 벌난과 미노가 그 뒤를 쫓았다. 부사와 소는 느린 속도로 셋을 따라갔다.
“으음, 이걸 이렇게 하면··· 아, 됐다!”
“우와···.”
“호오···.”
야차들은 하늘 높이 날아간 연을 바라보며 제각기 감탄사를 내뱉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놀이에 그들의 눈이 반짝였다.
“금붕! 너도 해 볼래?” 응달이 연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 소가 잠시 주저하다 연을 받아들었다.
“살다 보니 네가 이런 놀이를 하는 모습도 다 보는군. 웬일이야?” 부사가 물었다.
“그러게.” 소가 실을 풀며 답했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희한한 일이군···’ 야차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생각을 공유했다.
투명한 실 끝에서 제비 모양 연이 자유로이 허공을 누볐다.
“뭐야, 금붕 너 전에 연 날려본 적 있어? 왜 이렇게 잘해?” 벌난이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맞아 맞아, 하는 모양새가 되게 능숙한데?” 응달도 옆에서 거들었다.
소는 침묵하며 미소를 띤 채 그저 자유자재로 연을 조종했다.
“하하! 이봐 금붕, 연 날리는 솜씨가 제법인데 나도 좀 알려줄 수 있나?”
“나도!”
“나도 나도!”
“그럼 나도.”
순식간에 모든 야차들이 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지.” 소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저무는 해와 함께 세 사람의 꿈은 무르익어 갔다. 거대한 나무 아래 각자의 미소가 점점 짙어지며 평화로운 소풍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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