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4박 5일 후쿠오카/유후인 여행기(3)

오늘은 과연 첫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텐진 지하상가(줄여서 텐치카)에는 별 것이 다 있다. 개인적으로는 지하상가보다는… 백화점 지하매장 같은 느낌이었다. 그게 뭔 느낌이냐고 물으신다면 대충 이런 느낌이다.

저 화려하고 아름다운 천장 무늬 좀 보세요. 우리도 저런 거 하면 좋겠다. 아 요즘은 하나. 지하상가 간 지가 너무 오래돼서 나만 모르나.

어쨌든 그랬다. C양은 이 지하상가에서 가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무슨 커피집하고… 또 무슨 디저트 가게하고… 그리고 또… 텐치카는 생각보다 굉장히 크고(텐진 어디서든 지하로 내려가면 텐치카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 별 것이 다 있기 때문에 그 중에 C양의 원래 목표가 정확히 뭐였는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주방 편집숍도 기웃거리고, 빵집이나 옷가게도 힐끔거리면서 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첫 번째 주방 편집숍을 샅샅이 살핀 끝에 나는 내가 좀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랬냐면…

C양 : 저 컵 장난 아니다 진짜 예뻐

나 : 다 썰어버려야지(가위를 찾으며)

C양 : 저 접시도 괜찮은데? 나 목기 좀 사고 싶었어. 저 숟가락도 예쁜 것 같은데

나 : 다 포를 떠 버려야지(필러를 찾으며)

음. 아무래도 가위나 필러가 편집숍에서 구경하기 좋은 물건은 아니다. 아까 로프트 갔을 때 그냥 찾아볼 걸. C양은 내일도 큰 상점에서 쇼핑할 일이 있을 거라고 했다. 아니면 로프트에 다시 들러 봐도 된다고 했다. 그러기로 했다. 사실 안 그럴 방법도 없었다. 그 편집숍에 가위는 단 하나뿐이었고(그나마도 이게 주방가위냐 문구가위냐 싶은 사이즈로) 필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로프트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쓴 탓에 텐치카 상점들 대다수가 문 닫을 시간을 앞두고 있었고, 우리는 어느 가게가 어디 붙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C양의 목표였던 커피집은 길 반대편에 있었다. 우리가 이쪽 끄트머리에서 들어갔다면… 저쪽 끄트머리에…

원두도 팔고 음료도 팔고 잼도 팔고 아무튼 여러 가지 파는 곳이었는데… 나는 제대로 구경을 못 했다. 집에서 전화 와서(…) 구매 목록에 손바닥 반 사이즈만한 파스와 손바닥만한 파스가 추가되었다. 내일은 돈키호테 갈 거라고 했으니까 거기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지나가다 마츠모토 키요시라도 들를 일이 있지 않을까. 아니 뭐 정 안 되면 공항에서라도 그런 건 살 수 있지 않을까… 통화를 좀 하고 나니 이것저것 짐 들고(신발 박스가 3개 든 커다란 쇼핑백과 양산 든 쇼핑백과 아무튼 기타 등등) 저 협소한 복도에 들어서기가 새삼스러웠다. C양도 한참 저 앞까지 가 버린 것 같고, 나는 원래 커피도 안 마시고, 그냥 여기 서 있자… 생각난 김에 언니한테 문자나 보냈다.

나 : 로프트에서 짱 귀여운 곰돌이 봤다

언니 : 사진 보내줘

나 : 안 찍었는데

언니 : 아 그래요

사진… 찍어둘 걸 그랬나… 귀여웠지… 어쨌든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이미 로프트는 떠나왔고 심지어 닫을 시간 다 되어 간다. C양은 원두와 이것저것을 좀 사서 가게를 나왔다. 텐치카의 다른 가게들은 벌써 문을 닫은 후다. 일단은 얌전히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지하에서 올라와 보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일기예보에서는 지속적으로 첫 이틀 동안 비가 올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우산을 가져오긴 했는데 문제는 그게 캐리어에 있다. 어차피 챙겨 다니지 않을 거면 뭐하러 캐리어에 무게추를 실은 것일까? 정신이 있습니까 휴먼? 하지만 숙소를 떠날 당시엔 비가 오지 않았고, 평소 가방 메는 습관이 없는 내겐 크로스백 무게조차 귀찮았기 때문에… 물론 변명해 봐야 소용은 없었고 없던 우산이 손에 뿅 나타나지도 않았다. 다행히 비가 많이 오진 않았기에 우리는 우산을 구매하지 않고 적당히 비를 맞으며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다 고양이도 좀 보고

편의점도 좀 털고

정대만술 팔던 가게도 다시 갔다. C양의 증언에 따르면 이거 파는 친구들은 벌써 한 번 모여서 마셔봤다는 모양이다(C양은 거기 없었다고). 내가 마실 생각은 없었으니 결국 C양이 사냐 마냐인데, 다들 마셔봤다는 말에 C양은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일본주파가 아니라 맥주파니까… 그리고 이 가게에서 파는 술은 대부분 일본술이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지출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빠른 귀환. C양은 내게 먼저 씻으라고 권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벅벅 씻고 나와 보니 사람이 없다. 엥.

C양은 그새 다시 나가서 편의점을 또 털어왔다. 맥주 안 먹는 동행인을 위한 딸기우유까지 사왔다. 근처에 봐 둔 초밥집이 있는데 문 닫을 시간이 다 돼서 손님을 안 받아 줬다고 했다. 괜찮습니다 저 너무 많이 먹어서 배불러요… 꽤 걸은 것 같은데 배는 왜 안 꺼지는지 모른다. 아니 간만에 많이 걷는다고 에너지를 걷는 데 쓰느라 소화하는 데 못 써서 그런가…

C양은 첫날부터 슬쩍 어긋난 일정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으나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계획이란 걸 세워 본 적이 없는 자는 기분이 널널하다. 비도 오는데 그냥 얼른 씻고 쉽시다.

밤에 자다가 뭔가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C양이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왜 그래? 말을 하면서도 어째 좀 찔리는 것이 많다. 침대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내가 피곤하다고 드러누워서 세상이 떠나가라 코를 골았나? 발로 찼나? 잠꼬대라도 했나? 나 때문에 깼어? C양은 내 쪽을 흘끗 보더니 그런 거 아니라고 했다. 귀마개까지 준비했다고 했다. 그래 한 명이라도 준비성이 철저한 건 좋은 일이지… 이 소리 들려? 근데 그건 뭔 소린지 모르겠다. 네 목소리 말고 말이니… C양에 따르면 어디서 소리지르는 소리가 났다고 했다. 음, 진짜 모르겠다. 시계를 봤더니 새벽 4시 47분이었다. 이 시간에 누가 소리지를 일이 얼마나 있으려나. 없었으면 좋겠군. 어쨌든 깬 김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꿈꾼 게 아닐까, 하고 일단 C양을 달래 보았다. 아직 새벽이니까 더 자자고 권하니 C양은 미적미적 자리에 누웠다. 괜찮은 건가 싶어서 몇 번 곁눈질을 했는데… 눈 떴을 땐 굉장히 선명하게 잠에서 깨어났는데 눕자마자 금방 또 곯아떨어졌다. C양이 속으로 잠만보라고 투덜투덜 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옛 밤은 가고 새 아침이 밝았다. 이틀째 아침이다. C양이 조금 더 먼저 눈을 뜬 것 같다(그가 새벽 4시 47분 이래 한잠도 이루지 못 한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온다. 어제 대충 펴서 말려 둔 우산은 마른 것 같은데 이제 새로 적실 생각을 해야 한다. 오늘의 첫 행선지는 C양이 미리 보여준 바 있던 빵집이다. 갓파독(핫도그 빵 사이에 오이를 통째로 끼운 빵)이 있다는데 어떤 맛이 날지 퍽 궁금하다. 명란바게트가 유명하고 무슨 건강빵을 많이 판다지만 오븐도 없는 마당이라 내 머릿속은 반쯤 우유버터화이트롤 같은 것에 쏠려 있다.

아침에 거의 문 열자마자 간 것 같은데 사람이 많았다. 둔기 없으면 대신 쓸 수 있을 것 같은 것들부터 입에 좀 마닐마닐한 것들까지 빵은 다양했다. 나름 맛의 밸런스… 같은 걸 고려하고 싶지만 가타카나 읽어 가며 줄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따라가기도 바쁘다.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몇 개 주워 담고 새로 나왔다는 빵도 좀 주워 담고 하다 보니 진열장이 거의 끝났는데 갓파독이 보이지 않는다. 어? 왜 없어? 카운터까지 간 후에 직원에게 갓파독 없냐고 물었다. 갓파독을 네 번은 연호한 것 같은데 직원 얼굴에는 ‘얘 뭔소리하냐’가 씌어 있다. 그 빵이 이제 없어졌나? 이 사람이 오늘 새로 왔나? 내 발음이… 그렇게… 안 좋나…? 뒤로 줄이 너무 길어서 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됐습니다, 하고 물러났다.

음료를 시키면 여기서 먹고 갈 수 있다는데 비까지 오는 통에 앉아서 먹을 자리가 도저히 없었다. 우리는 빵을 포장해서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대신 이제 호텔 가기 전에 어디 달리 들를 데가 있다고 했다. 9시부턴지 10시부턴지에 어떤 가게가 문을 연다고. 네? 디저트 가게요? 네? 파르페요?? 아 일본 가면 파르페 하나쯤은 먹어 봐야죠! 신나서 따라갔는데 가게에 들어가도 파르페가 없다. 직원 말로는 그건 또 12시부터라고 한다. 음, 그, 제가 여기서 지금부터 그때까지 기다리긴 좀… 호텔이 우리를 불렀다. 그래서 도로 호텔로 가서 빵을 우적우적 먹었다. 또 빵순이 빵집을 지나치지 못 하고 나의 위장을 과대평가했다. 좀 남은 건 나중에 더 먹기로 하고 이제 다시 쇼핑에 임할 시간이다.

다리 위에서 찍은 제법 근사한 강변과 우리의 목적지(였던가). 남 뒤만 뇌를 빼고 따라다니면 이게 문제다. 백화점을 간 것 같긴 한데 그게 어딘지 기억이 안 난다. 근데 아마 저기 맞을 거다. 아마. 아마…

C양의 쾌적한 러닝을 위해서는 신발이 필요했다. 사실은 - 아마도 - 좀 많이 필요했다. 전에 보내 준 링크를 봤더니 그게 최대 800km 유통기한이라더라고. 하루에 4km씩 달리면 200일에 한 번씩 신발을 갈아야 한다는 뜻이다. 최대라는 말 속에는 최소도 상정되어 있는데, 최소는 480이었으니까 그러면 120일이면 신발을 갈아야 한다. 그거 20만원이었는데도. 운동 선수들은 이래 갖고 어떻게 사나. 사람 사는 데는 돈이 참 많이 든다. 어쨌든 그렇기에 C양의 발을 위해서는 다른 신발이 좀 있을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무지 끝내주는 꿈의 신발 같은 걸 발견할지도 모르지.

1층은 거의 골프 매장들이었다. 우리는 둘 다 골프를 안 치기에 그 사이를 그냥 가로질러 위로 올라갔다. 목적지는 3층이었던 것 같다. 정말 신기했던 건 대다수의 물건들이 용도별로 진열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은 브랜드별로 진열하지 않나? 어쨌든 거긴 그랬다. 우리는 러닝 코너를 돌면서 괜찮은 물건이 있는지 기웃거렸다. C양이 M브랜드의 신발 하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어딘가엔 M브랜드 매장이 따로 있지 않을까? 더 많은 M브랜드 신발 또는 또 다른 후보를 찾아 우리는 그 층을 한 바퀴 돌았다. M브랜드 매장은 보이지 않고 직원도 거의 없다. 지금 이 층 전체에 직원 3명 있는 거임? 평일인데? 평일 아침인데? 아니 평일 아침이라?

얼마 없는 직원 중 하나를 붙잡고 M브랜드 러닝용 신발 찾는다고 했더니 처음 구경한 그 코너로 도로 데려다 주었다. 아무래도 여기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M브랜드 신발이 더 있긴 했는데 그게 다 야구용, 축구용, 농구용, 배구용 이런 식이었다. 아무튼 배구용 신발을 신고 달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겠지… 러닝용으로 나온 놈들 중에서 사이즈 맞는 걸 신겨보고 싶은데 물건이 어딨는지 도통 보이질 않았다. 결국 안 보이는 직원을 또 찾아서 뒤져서 질질 끌고 왔다. 그런데 이 사람 아무래도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 같다… 영… 못 찾는다… 그리고 결국은 내가 요청한 게 아닌 신발 찾아서 보여준다… 아뇨 그거 말고 저거요… 저거라고요… 괜찮은 거냐고요 이거…

오랜 세월 끝에(과장) 결국 C양은 신발 하나를 집었다. 계산하러 가는 길에 프로틴 가루가 가득 있어서 그 중에서도 한 봉지를 골랐다. 프로틴 가루를 타서 먹을 텀블러도 바구니에 마저 담았다. 여기는 택스프리가 아니라 택스리펀이라 나중에 지하에 있는 리펀 카운터로 가서 직접 돈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냥 지금 빼고 계산해주시면 안 될까요? 내심 강렬하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아마 누군가는 귀찮아서 돌려받지 않을 거란 점을 노리고 이러는 거겠지… 아마 그렇겠지… C양은 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매장을 나오자마자 리펀 카운터가 아닌 식당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픈런을 해야 먹을 수 있는 엄청난 무슨 가게를 준비했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길을 건너고

모퉁이를 돌아서

지하상가 같은 지상상가(…)를 지나서

장어덮밥을 먹으러 갔다. 벌써 줄이 한 10명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대기줄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걸칠 정도는 되어서 쉴 겸 기분 좋게 기다렸다. 오늘도 많은 것을 입에 집어넣을 것이 분명했던 데다가 아침에 빵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에 나는 4분의 3마리만 시켰다. C양은 나보다 빈 위장 분배를 잘 해두었는지 1마리를 주문했다.

바로 이렇게.

장어덮밥집 가면 보통 먹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냥 먹거나 녹차 부어서 먹는 걸 선호한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파도 와사비도 썩 안 좋아하는 나는 C양의 그릇에 정치적 선전물을 몰래 리필해 주었다. 사실 딱히 몰래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C양이 왜 늘어나냐고 놀라서 내가 생각보다 몰래 행동했나보다 싶었다(…) 잠시 후 녹차도 리필해 주려다가 엎었다… 또 사고 쳤다. 조용히 살 걸.

장어덮밥집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에서 또 문자가 왔다. 가는 김에 구매대행 필요하냐고 물어본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백화점 가느냐는 질문이라 그렇다고 했다. 아마 가겠죠? 하다못해 저기 택스리펀 받으려고라도 가겠죠? 뭐 안 간다면 저만이라도 잠깐 갔다올 순 있겠죠… 그리고 나는 새로운 의뢰를 받았다. 이름하여 C브랜드 가서 귀금속 사기.

이 시점까지는 나는 이게 그렇게 어려운 미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뭐 사다 달라니까 사다 주지 뭐… 물론 이런 식의 문장에는 언제나 역접 접속사가 붙어 있기 마련이고(그러나 같은 거) 역접 접속사는 언제나 뒷문장이 중요하기 마련이다. 내 인생에서도 그건…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투 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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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2


  • 배부른 페가수스

    하ㅠ 새벽에 소리지르는 소리 들린 거 진자 지금 생각해봐도 무서워요 귀마개하고 있는데 소리지르는 소리가 왜 들리며 일어나서 폰보니 시간도 4:44였다고 크아악 그치만 그냥 가위눌렸겠거니 하고 넘어갔어..... 근데 운동화 수명이 진짜 그정도예요? 미쳤다 처음 안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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