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려문대]망할 놈과 함께 로판세계에 떨어졌다. 02

엋문 오메가버스

상처는 나았으나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아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문대가 기거하는 저택은 해가 미처 뜨기 전부터 분주했다. 해가 긴 늦여름인데도 그랬다.

목을 긁은 상처의 자국은 가리기 위해서 결국 문대는 제가 입을 하얀 연미복의 드레스 셔츠의 목을 높였다. 거기에 하얗고 커다란 리본을 달았는데, 거울 앞에 서 있는 제 모습이 무슨 포장 잘된 선물 상자 같았다. 입술을 비뚜름하게 틀었다가 다시 연하게 미소를 짓는다.

이까짓 거.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팬 창작

[청려문대]

망할 놈과 함께 로판세계에 떨어졌다.

"도련님, 세지아뉴 소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세지아뉴는 이곳에 둘이 똑 떨어지면서 생긴 재현의 또 다른 성이었다. 둘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있었다는 것처럼 새로운 부모와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는데, 아무도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없었다. 다행히 둘의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어서 그나마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그들의 세계처럼 영상매체는 없더라도, 수다스러운 하인들과 친구들, 기록을 잔뜩 남겨둔 나(?) 그런 것들을 이용해서 둘은 세계에 적응했다. 특히 일기 같은 것들은 이전 세계의 이들이 봤어도 제가 작성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정교했다.

하인의 말에 문대는 화장을 받기 위해 감고 있었던 눈을 느리게 떴다. 퉁명스러운 말투가 이제 막 붉은 색을 바른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왜 이렇게 일찍 왔데? 좀 서 있으라고 해.“

문전박대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고. 참고로 이런 대외적 행보 덕분에 세지아뉴의 소공작은 오르체의 둘째 아들에게 푹 빠진 것으로 사교계에 소문이 쫙 퍼져있다. 공식적으로 보내라고 했던 그 청혼 쇼가 정말 화려했거든. 박문대는 그때 공식이고 절차고 어쩌고를 지껄인 제 혀를 깨물 뻔했다. 다시 생각해도 이 개새끼를 어떻게 처치할까 고민하게 되어서 문대는 머리를 털며 생각도 같이 털었다.

그래서 ‘그’ 오르체의 도련님은 문자 그대로 오늘 결혼할 정인을 밖에 반시간 정도 세워두었다. 준비가 늦어진다는 핑계였다. 하인들이 딱히 안에 들어오라는 소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누가 시켰을지 뻔한 명령에 재현은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더분한 미소는 오늘따라 심술을 부리는 제 도련님의 미래의 부군을 감히 안쓰러워하기 충분했다. 신재현은 불평도 하지 않고 저택 앞에 세워둔 마차의 문도 닫지 않고서 문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라도 오면 태워 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도련님은 매정하시기도 하지-. 그런 중얼거림이 그의 주변에서 들려오기도 했다.

문대가 저택의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뚱한 표정을 마주한 재현은 볼까지 붉히며 웃으며 그의 앞으로 걸어온 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타시죠―. 모시러 왔답니다."

둘이 같이 자란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아는데 웬 경어람. 여기서도 문대는 재현보다 서너 살 정도 어렸다. 위로 형이 하나 있었고, 형은 재현보다 나이가 많아 이미 4년 전에 결혼을 해 조카도 있었다.

"왜 안 하던 짓이야?"

문대는 내민 손을 잡고 마차를 오르며 물었다. 그가 앉고 나면 따라 마차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었다.

"특별한 날이니까요."

마차 안이 보이지 않도록 하얀 커튼을 치면서 대답한 재현은 고개를 돌려 문대를 봤다. 세팅된 머리와 화장, 화려한 의상은 그들의 세계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세련되고, 정돈되어 있었다.

"예쁘네요."

"알아."

"하하!"

쳐 웃기는. 남 속도 모르고. 문대는 뚱한 표정이었으나 애써 만진 것들이 망가질까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짜증나도 Show Must Go On이다.

*   *   *

결혼식은 종일 이어졌다. 점심 즈음에 시작한 식은 공연과 무도회를 포함한 피로연으로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 하루에도 수십커플이 결혼하는 한국의 결혼 문화에 익숙한 둘에게는 어색했지만, 이곳 귀족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돌아다니며 참석한 사람마다 인사를 하고 덕담을 주고받는다. 둘 다 보이는 게 직업이었으니 이런 것들은 눈도 깜짝 않고 해냈다. 제법 합이 잘 맞기도 했다. 식은 무리 없이 성대하고, 권위에 걸맞게 웅장했으며, 부족함 없이 마무리되었다.

*   *   *

늦은 밤, 시종들은 문대를 거울 앞에 앉혀놓고 수발을 들었다. 얼굴을 닦고 머리를 정돈하고, 옷의 매무새를 다듬는 손길이 익숙하다. 그러나 시종들의 능숙함과 별개로 떡 줄 놈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만 사발로 들이키는 것 같아 문대는 기분이 더러웠다.

그 불쾌함을 그저 첫날밤에 들어가는 오메가의 불안 정도로 여겼는지 그들은 제 머리를 빗고 몸에 향유를 바르면서 어떻게 알파를 유혹하는지에 대해 수 시간째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은데.

귀족 부부는 방을 같이 쓰지 않는다. 앞으론 히트, 러트 사이클에나 도움을 주고받겠지. 초야가 시끄럽지 않으면 또 둘 사이에 입을 대는 무성한 소문들이 나돌 테니, 밖에 도열하고 있는 두 가문의 가신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뭐든 하긴 해야 했다. 참으로 징그러운 전통이었다. 향유를 바르고, 가운을 걸치고 나면 준비는 끝이다. 알파를 위한 흥분제가 시종을 통해 비밀스러운 것이라도 전해지는 양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이 정도의 비장함이려면 단검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냐?

제 방에서 나와 바로 맞은편에 그가 기다리고 있는 부부의 침실이 있었다. 문이 느리게 열리고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왔어요?"

먼저 와 있었던 신재현이 테이블 앞에 서서 잔에 와인을 채우고 있었다. 루비를 닮은 붉은 빛깔의 술이 잔 안으로 맑은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이 자리와 상황이 불편한 것은 둘째 치고 오랜만에 술은 꽤 달가워서 냉큼 손을 뻗어 잔을 쥐었다. 바로 마시려는 것을 손을 뻗어 제지하기에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왜."

"아무리 그래도 혼자 마시는 것도 아닌데."

잔이라도 부딪혀 달라는 건가. 잔을 들어 부딪히면 맑은 소리가 났다. 냉큼 다시 제 입술 앞으로 당겨온 술잔에 입을 대고 붉은 액체를 망설임 없이 삼켜냈다.

그러다 문득, 숨기는 게 의미가 있나? 비운 잔을 내려놓으면서 다른 손에 쥐고 있었던 조그마한 약병까지 내려놓는다. 고급스러운 병 안에 담긴 것을 신재현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봤다. 어느 정도는 짐작은 한 모양이었지만.

"이게 뭐에요?"

"알파용 발정제."

"세상에-"

입을 가리며 과장되게 대꾸하지만 눈웃음을 짓는 것을 보면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제 집 오메가가 소박맞을까 걱정인가보지."

꽤 자극 적인 말에도 잔을 내려놓은 신재현이 팔짱을 끼며 으쓱였다.

"뭐, 여기선 흔한 모양이더라고요."

뭐가 그렇게 태연한 건데, 내가 진짜 먹였으면 어쩌려고 그런 꼬인 생각을 하면서 문대는 잔에 담긴 와인 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분명 기분 나쁠 일이 하나도 없는데도 기분이 더러워졌다.

"넌 내가 진짜 먹였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후배님이 그럴 것 같진 않았다고 생각하면 좀 그런가요?“

신재현은 빈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가 내려놓는다. 술을 그렇게 즐기지 않는 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제가 병을 들어 올리면 그건 또 냉큼 뺏어 들어 제 잔을 채운다. 알콜에 열이 올라 제 볼만 발그랗게 달아 오른 게 느껴졌다. 저놈은 언제나처럼 저렇게 하얗고, 냉정하고, 뻣뻣했다.

“넌 마음 편하게 술이 들어 가냐?”

“안 들어갈 건 뭐에요. 아, 혹시 초야라고 신경 쓰이나요?”

“.....”

"싫으면 안할게요. 그건 앞으로도 똑같을 거 에요 우리결혼은 어차피 가짜잖아요"

넌 알파라 모르는 것 같은데 오메가로 태어나면 결혼식 직전까지 귀에 딱지가 앉게 듣는 게 뭔 줄은 아냐? 그 망할 첫날밤을 제대로 치루라는 거야.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가 내 손까지 꽉 틀어잡고 한 말이 겨우 그거야.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잔을 흔들었다. 붉은 액체가 요동쳤다. 어색함에 그 잔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더니 하는 말이 저런 꼴이었다. 신재현은 그게 제게 어떤 선고 같은 말이란 것을 알까? 잔에 든 와인의 파고가 나며 거칠게 출렁였다. 너는…….

"……. 씨발……. 진짜 말을 그렇게 좆같게 밖에 못해?"

짜증스러운 대꾸에 오히려 재현이 더 놀란 얼굴을 했다. 멍청하니 눈만 끔벅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먹던 술잔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됐다. 내가 뭘 바라냐. 안 할 거면 나 잔다."

“뭘 바랬어요?”

“시끄러워!”

어쩐지 재현이 반색하는 것 같았으나, 문대는 실망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부러 큰 동작으로 일어나 침대로 털퍽 들어가 누웠다. 그가 일어나 침대로 향하는 것을 그대로 보던 신재현은 그를 따라가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두 사람이 누워도 넉넉한 침대 가운데에 대자로 뻗은 걸 보니 아직 심술이 끝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신재현은 그걸 책잡는 대신에 문대의 이마를 가리는 머리칼을 정돈 하면서 이마와 귀를 쓰다듬으며 목과 쇄골로 손을 옮겼다.

오늘 하루 종일 가리고 있었던 목이 드러난 자리에는 흉터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불과 2주의 전의 일이었다.

"목, 아직도 아파요? 흉 지겠네."

"무슨 상관이야."

문대는 눈을 감은채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성대가 만들어내는 진동에 목 주변을 쓰다듬는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느리게 움직이며 손끝이 지나온 길에 온기를 전했다. 신재현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 걱정했죠."

"왜, 상품에 흠집났을까 봐?"

눈을 뜬 문대가 신재현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모가 난 대답이었으나, 사실 정략결혼 하는 이곳 귀족들 사이에서는 드문 말도 아니었다. 물론 그게 신혼의 초야를 치르는 곳에서 할법한 대화는 아니겠지만. 신재현은 짧은 침묵 뒤에 느리게 물었다.

"그렇게 말 했으면 좋겠어요?"

"........"

"요새 나한테 엄청 틱틱거리는 거 알죠."

알고 있었나, 뜨끔해진 기분에 문대는 말문이 막혔다. 그 와중에 신재현의 손길은 꽤 고집스러워서,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목에 있는 흉터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보면 어떻게 없앨 수라도 있는 것처럼.

"미안해요."

니가 왜 사과를 해? 뭐가 미안한데. 문대는 의아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재현은 객관적으로도 좋은 피앙세였다.

"늦어서……, 미안해요. 그때 말 못한 것 같아서."

"괜찮아"

"화났어요?"

"안 났어."

"화난 것 같은데."

 

저도 고집스러웠으나 신재현도 똑같이 고집스러웠다. 그의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껍다 여기는 스스로에 치가 떨린다. 화가 나지 않았다는 말조차도 꽤 날카롭게 대꾸해서 딱히 진정성 있게 들리진 않았다. 신재현은 그런데도 꽤 오랫동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꽤 긴 정적이었던 것 같은데 문대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저를 내려다보는 신재현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면……윽……?"

"사과하고 싶지?"

벌떡 일어나서 신재현의 어깨를 잡아 눕히며 자세를 바꿨다. 순식간에 위 아래가 바뀌었다. 문대는 재현의 허벅지를 깔고 앉아 그를 가두듯 양 팔을 얼굴 옆으로 뻗으며 내려다봤다.

"그러면 안아줘."

03편부터 성인입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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