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려문대]망할 놈과 함께 로판세계에 떨어졌다 01

오메가버스 엋문

"결혼할까요?"

 

 

여상한 말투의 내용이 참 우스웠다. ‘결혼해줄래요?‘도 아니고 ’결혼할까요?‘가 뭐야. 네가 하고 싶으니 결혼해 준다는 거야? 신재현의 지문이나 다름없는 여상한 말투와 건조한 태도가 짜증이나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지금 회귀도 아니고, 빙의도 아니고 둘이 함께 무슨 판타지 세상에 뚝 떨어져 우스꽝스러운 로코코시대 옷을 입고서 마주하고 있었다. 요새 회귀빙의물 유행한다며 그거 소설 속에나 있던 거 아니냐? 궁시렁 거리는 마음속과 달리 문대는 그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너는 무슨 청혼을 이딴 식으로 하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아이돌이 이제는 귀족의 영식이 되어 결혼하네 마네하고 있었다. 소설도 이렇게 쓰면 욕먹겠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팬 창작

[청려문대]

망할 놈과 함께 로판세계에 떨어졌다.

 

 

 

 

 

 

 

 

 

 

 

 

 

 

 

 

 

 

 

 

"여긴 결혼을 무조건 해야 하는 거 같아서요. 후배님도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는데요."

 

 

세모난 눈이 신재현을 올려다본다. 이 새끼는 왜 키가 커서 올려다봐야 하는 거야? 내려 보는 시선이 짜증났다. 틀린 말 하나 없는 점이 열 받는다. 그런데도 그렇게 대답하기 싫은 건 이 감정의 무게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싫었다, 그래서.

 

 

"예물 잔뜩 싸 들고 사람 보내. 그러면 생각 정도는 할 테니."

 

 

어차피 수락할 것들도 한 번씩 돌아가는 심술을 부린다. 그의 말대로 전략적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익숙한 척 이곳의 사람들처럼 행동을 해도 둘은 이방인이었다. 그러면 이방인 둘이 붙어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책잡힐 일이 적었다.

 

 

"그럴게요."

 

 

뭐라도 덧붙일 줄 알았는데 신재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문대는 그 발언을 즉각 후회한다. 다음 날 부터 몰아치듯 들이닥친 청혼서부터, 미리 준비라도 했다는 듯 둘의 결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큰 행사인데도 진행속도는 빛의 속도를 방불케 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바쁜 것은 역시 수도였다. 둘 다 황가의 영토에 못지않은 거대한 영지가 있었으나, 황가에서 참여하는 만큼, 신성한 결혼식과 피로연은 모두 수도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식장을 꾸미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여느 내로라하는 거리의 상점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한두 가지의 것들만 맡아도 당장 장사를 닫고 만들어도 빠듯했다. 수도의 모든 의상실은 그들의 결혼식에 참여하는 이들의 의상만 만드는 것만으로도 연일 성화를 이루었다. 내로라하는 가문의 이들이 의상실에서 가장 빼어난 옷을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들을 쪼아댔다. 그럼에도 이를 거절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행사, 하나라도 눈에 띈다면 그 이후의 명성과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 입소문은 따 놓은 당상이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면 황제가 결혼하는 줄 알겠네. 그렇게 생각했던 문대도 마찬가지로 식을 준비하기 위해 종일 제국의 제일가는 보석상과 의상실이 응접실을 내내 바꿔가며 돌아다니는 것을 견뎌야 했다. 황제는 아니더라도 황가의 방계이자 외척, 개국 공신가문이 결혼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혼인예물을, 맹세의 검을, 겨우 한 번의 결혼식을 위해서 몇 달을 같은 짓을 반복했다. 현 황후가 예물 중 보석의 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보석에 흠집이 있다고 하여, 맹세의 검에 균열이 있다 하여 수십, 수백 번씩 내용물을 바꾸고 그것을 만들 이들을 닦달했던 탓이었다.

 

나중에는 눈앞이 노랬다. 빛나는 것은 보석이고, 날카로운 것은 검이고. 예복으로 사용할 흰색 천은 다 같은 흰색인데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야? 아버지를 따라 옷을 입고 보석을 고르기를 수십번,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나면 저녁이었다. 피곤함에 젖은 몸이 침대 위로 녹아내렸다. 이거다 허례허식인데 그냥 간단하게 하면 덧나나. 그런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일은 황후를 알현하기 위해 또 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현 황비 엘테나 마그리시아 에르베슈비첸은 제 아버지의 누나다. 그러니까, 지금 박문대에게는 고모. 문대는 현황후의 조카였다. 그런이의 결혼식인데 작게 할 수 있을 리가. 결혼식에는 황후와 황태자 내외까지 참석할 예정이었다. 황가가 참석하는 곳에서 어설프게 식을 진행할 수 없었다. 황가의 외척의 결혼식, 사실상 황족의 결혼식에 비견 될 수 있었다.

 

 

"죽겠네."

 

 

문대는 기다란 신음을 흘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종이 그의 불편한 상의를 벗겨 받아내고 소파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을 벗겼다. 이렇게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뼈가 빠지는 동안 신재현의 얼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매일매일 손수 작성한 편지와 꽃이 배달되었다. 저택의 하녀들은 로맨틱하다며 난리가 났다. 문대는 방에 가득 찬 꽃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말이다.

 

 

"응접실에 갖다 놓고 편지는 내 방에 가져다 놔."

 

 

시종이 내미는 편지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쿠션에 머리를 박았다. 며칠째 쌓인 편지는 비슷한 내용이었다. 영지에서의 일이 바쁘고, 곧 수도로 올라가며,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잘도. 그나마 정갈한 글씨는 분명 그의 것이었다. 그의 영지에서 수도는 꽤 멀어서 이번에도 편지를 쓴 날짜는 3일 정도 전이었다.

 

답신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집안의 사용인이며 하녀들은 신재현이 사랑에 미쳐 결혼한다는 말이 기정사실화가 되고 있었다. 고마워해야할지 수습해야할지, 참 말없이도 빨리 퍼지는 게 소문이라는 것을 새삼 몸으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진실은 인사치례로 보고 싶다는 말에 진심으로 답신을 하는 게 자존심 상했을 뿐이었지만. 어차피 슬슬 히트 사이클쯤이라 연락을 해야 했다. 결혼식이 코앞인 오메가가 다른 알파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상한 거 아니야. -아닌가 다른 알파랑 콱 보내버릴까- 그런 생각을 했다가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하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어 차분히 집어넣었다. 갑작스럽게 생긴 제 부모님과 가문에는 유감이 없었다.

 

졸음이 걷히지 않은 몸에 팔을 뻗어 달력을 들어 올렸다. 오늘따라 몸이 무거웠다. 마지막 히트 사이클이 표시되어있는 달력에서 그다음을 손으로 짚어가며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아?

 

"X발"

 

갑작스러운 충동이었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긴장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를 때렸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침대 위에서 온몸을 옹송그렸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뒷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떡하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충동에 눈앞이 점멸했다. 베타인 사용인들은 알지 못 하는 오메가의 페로몬이 방 안 가득 찼다.

 

 

"나, 나 좀..."

 

도와줘.

 

 

소리 대신 신음만 튀어나오는 입에 쿠션 커버를 물었다. 어떡하지. 발광하는 몸에 비해 머릿속은 또렷했으나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본능적으로 알파를 원하는 몸이 끔찍했다.

 

 

"후……. 흐윽……아흐!"

 

 

통제를 벗어난 몸이 아무렇게나 신음을 뱉어냈다. 왜 알지 못했지? 그나 그의 부모나 이런 것을 챙기지 못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이토록 중요한 시기에 대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커버를 입에 가득 문 채로 그저 이 통증이나 다를 바 없는 흥분감이 지나가기만을 빌며 눈을 감았다. 대부분의 고용인은 베타였고, 오늘은 공작과 공비 모두 황후를 알현하기 위해 미리 황성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고 그걸 신재현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재수 없는 새끼가 보고 싶었다.

 

아, 아, 아…….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 몸이 벌벌 날뛰었다. 손끝으로 목덜미를 긁어내렸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 기간에 알파가 공략하는 부분 중 하나인 목은 그 자리에 알파의 접촉으로 진정시키기에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 지금은 알파의 페로몬 대신 무딘 손끝으로 긁어내려 만든 상처가 주는 통증으로 대신했다. 통증이 있으면 그나마 나았다. 쾌락을 원하는 몸이 잠시나마 고통에 눈을 돌릴 수 있었으니까. 이 와중에도 혹시나 그가 먼저 알아채기를 바라는 바보 같은 기대를 하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  *  *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익숙한 향취에 무겁게 가라앉은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오메가를 자연스럽게 안정시키는 알파의 페로몬, 불타버린 숲속에서 비에 젖은 나무의 향취. 신재현이었다. 어쩐 일이라고 묻기엔 너무 뻔해서 고개를 돌리면서 가볍게 뱉었다.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목덜미에 감긴 붕대가 갑갑했다.

 

 

"귀찮게 했네."

"괜찮아요 약혼자인데“

 

 

어쩜 그렇게 태연한지, 그럼에도 그 고저 없는 말에 괜히 한 번 더 기대하는 자신은 혐오스러웠다. 괜히 더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온다. 몸을 돌려서 약혼자를 등지고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제 가봐. 끝났잖아."

"밤에 달려온 사람 이렇게 차 한 잔도 안 주고 내쫓아요?"

 

 

대답이 가관이라 돌아보면 잔뜩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하며 끼를 부리기에 인상을 팍 썼다.

 

 

"환자 앞에 두고 차가 넘어 가냐?"

 

 

까칠한 대답에 신재현의 말이 멎었다. 저를 쳐다보는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골똘했으나 그 내면을 예측해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윽고 계산이 끝났는지 신재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딱히 예상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럼 가볼게요. 몸 추슬러요."

 

 

 

잘가라는 인사 대신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잠깐의 공백 뒤에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완벽한 고요가 찾아왔다. 그제서야 몸을 돌려 그가 떠난 문을 노려봤다. 미련 없이 떠난 모습이 괜히 성질을 돋웠다. X발 진짜. 해가 쨍쨍한 늦여름 대낮에 괜히 한기가 들어 이불을 잔뜩 끌어안았다.

 

 

 

*  *  *

 

 

"허..."

 

 

이꼴을 보였다고? 욕실에 멍하니 선 문대는 거울을 보고선 망연히 서였다. 알파에게 뒷덜미를 물려서 붕대를 감아놓은 줄 알았더니. 제가 목을 난자해놨던 모양이었다. 엉망이 된 목에 할 말을 잃었다. 어쩐지 목이 따끔거리더라... 버티기 위해 목을 얼마나 혹사했는지 난자된 손톱자국이 꽤 끔찍했다. 그나마 껍질이 벗겨졌을 뿐 상처는 얕았다는 사실이 위안일 뿐이었다. 하지만 결혼식이 고작 2주 남았는데 목이 이 꼴이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혼자 씻겠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무슨 꼴로 소문이 나려고, 집안의 시종들은 입이 무겁지만 어디서든, 어떤 식으로든 타인의 입에 오르는 것은 달갑지 못했다. 특히 이런 주제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가볍게 몸을 풀고 나왔다. 가운만 대충 걸치고 나와 시종의 손길을 받는 것도 모두 물렸다. 몸이 아프단 핑계로 가장 바쁜 시기에 모든 일은 아버지와 측근 가신들에게 떠넘기듯 맡겨두었다. 알바냐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할 일이 없으니 신재현의 얼굴은 더 자주 기억을 비집고 떠올랐다. 우습게도 형식뿐인 결혼식 준비를 할 때는 생각나지 않던 것이었다. 침대에 이마를 문지르며 얼굴을 이불에 파묻었다. 숨이 막혔지만 미동도 않았다. 제 세상에서는 종일 바빠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도 없었는데, 누가 귀족의 삶이 즐겁데. 지루하기 짝이 없고 허구한 날 돈을 쓰고 남을 험담하는 것을 제외하면 할 것도 딱히 없는 게으르디 게으른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게 귀족의 삶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신재현 일하고 있어도 신재현 온통 그놈 관련 된 것들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하겠다고 해야 하나.

 

웅얼거리는 소리가 이불 사이에서 막혔지만,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다시 할까. 하지만 그 지긋지긋한 짓거리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만 들어 올려 상태창을 불렀다. ENJOY YOUR LUCID DREAM. 징그러운 문장이었다. 자각할 수 있는 꿈. 그래서 이게 언제 끝난다는 건데. 이곳으로 신재현과 함께 떨어진 지 6개월 동안 별것을 다 해봐도 상태창에 변화는 없었다. 둘은 그 사이에 새로운 세계에 서서히 적응하고 있었다. 아니 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나. 페로몬과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특성을 가진 알파, 오메가, 베타를 배워가면서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져 베개를 적셨다. 여전히 몸이 뻐근한 건 매한가지라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다. 문대는 눈이 감기는 데로, 잠이 오는 대로 그대로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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