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레이] 장밋빛 노을
ⓒ묭(@myong_dream_) 님 커미션
장밋빛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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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의 작은 저택. 화사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가 흐르는 집은 한 명이 산다고 하기엔 곳곳에 두 사람 분의 흔적이 흐르고 있었다. 검은 파도의 남자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서 제 품 안에 있 는 애인의 머리를 조심히 말려주고 있었다. 적당히 뜨거운 바람을 따라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그와 같은 샴푸 향이 느껴졌다. 알파드 블랙은, 지금 인생에서 느끼고 있는 행복 중 가장 최고로 행복한 줄다리기를하고 있다고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적당히 마른 긴 머리를 이번엔 빗으로 찬찬히 빗어주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관리해 주는 것은 이 묘한 동거를 시작했을 때부터 제 뮤이었으며 마무리는 언제나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당신을 사모합니다. 나를 사랑해 주세요.
"로즈, 오늘 저녁은 뭐 먹고 싶어?"
"저녁? 나 또 자고 가?"
"로즈라면 언제나 환영이지."
"흐음-, 좋아. 그러지, 뭐."
새침한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분 좋구나, 지금. 레이시의 뒷목에 여리고 부드런 온도가 닿았다. 간지럽고 포근한 온도에 레이시가 움찔 하고는 몸을 돌려 알파드를 바라보았다. 단단히 안아주는 팔과 따뜻한 품, 시선을 맞추는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은회색의 시선이 붉은 시선을 마주보았다. 차오르는 행복감에 은회색의 시선이 부드럽게 폴렸다. 자잘한 온기를 나누어 주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금방 떠나버렸지만.
"체리, 나랑 놀까?"
웨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레이시의 부름에 다가와 발등에 머리를 부비다가 폴짝 뛰어 올라왔다. 태평한 자세로 레이시 옆을 어슬렁 거리더니 이내 뻔뻔하게 레이시의 무릎에 제 말랑한 몸을 실었다. 허벅지에 전해져오는 따뜻하고 말랑한 온기에 작게 미소지었다.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 몇 달 전의 저였다면 전혀 상상도 못 했을 일상이고 꿈이었다. 잠시 알파드에게 파혼장을 썼던 날을 생각했다.
그 때는 그랬다. 그날 레이시는 울면서 파혼장을 썼다. 그들을 아주 열게라도 이어주고 있는 오래된 인연을 지우기로 한 날, 레이시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달라진 알파드의 모습에 조금 놀랐었지. 그 얄팍한 관계에 대해 서로 큰 의미를 두지 말자고 한 것은 알파드였다.
'네가- 내 약혼자라고? 참 나, 아직 호그와트도 안 갔는데. 이게 뭔.., 야, 어, 레이시? 레이시라고 부를게. 하나만 나랑 약속하자. 만약 우리가 약혼하면, 서로 좋아하지는 말자. 서로 귀찮아할 일은 만들지 말자고. 어때?"
사랑이 아직 무엿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때의 일이었다. 얼굴도 처음 본 약혼자는 제게 서로 사랑은 하지 말자며 제안했다. 그때의 레이시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서 사랑의 가장 비극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 레이시는 그제서야 알파드의 제안을 제대로 수락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말자,알파드. ..-그래.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잠시 과거 생각을 마쳤다. 제 손길에 몸을 맡기고 고롱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작고 따뜻한 생명체에 미소지었다. 잠시 체리를 옆에 두고서 고양이로 변했다. 체리보다는 살짝 큰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체리에게 다가가 감싸며 활아주었다. 아직 활발한 아기인 체리를 놀아줄 때면 종종 애니마구스 모습으로 변해 체리를 감싸듯 몸을 부비며 온기를나눴다. 푹신한 소파에 발이 폭폭 빠지는 것이 좋아 몇 번 앞발로 꼭꼭이를 하다가 아예 편하게 누워 잠깐 잠을 청했다. 평화롭고 따뜻한 햇살이 거실의 유리창을 통해 들어왔다. 모든 것을 공평하게 비추는 햇살이 좋은 지 두 고양이는 몸을 쭉 늘려 기지개를 폈다. 그르릉 거리는 소리가 목 안에서 율리고 말랑한 발바닥 사이로 발톱을 꼼질거렸다. 이리 평화롭고 평화로워도 되는가. 세상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모든 것을 무시하겠다는 듯, 이 곳 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 처럼 안온과 고요만이 흘렸다.
"로즈, 뭐하는-, 이런."
작고 소중한 고양이 두 마리가 평화롭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진귀한 존재를 다루는 듯한 손길로 조심히 큰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고양이를 안은 채 조심히 누웠다.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자세를 바꾸는 동안 잠꼬대를 하기는커녕, 야무진 숨소리만이 들렸다. 고롱고롱. 골골골.. 이렇게 작은데도 어찌나 따뜻하고 편안한지, 고양이를 안고 있는 알파드에게도 따스한 졸음이 쏟아졌다.
조금씩 해가 지며 강렬한 오렌지빛이 거실에 가득 들어찬다. 러그에 누워있던 작은 고양이가 소파 아래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지러운 감각에 머리카락의 주인이 눈을 떴다.
"체리- 간지러워..."
"웨 우웅-"
말대답을 하며 제 의견을 무시하는 고양이에 열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자신을 안고 잠들어 있는 알파드를 바라보았다. 따뜻하게 저를 안고 있는 너른 품이 좋다. 열렬한 색으로 가득 찬 이 거실도, 제 긴 머리카락을 괴롭히면서 놀아달라고 보채는 소중한 고양이도. 잠시 일어날까 하다가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허리를 짝 안고 놓아주질 않는 단단한 힘에 그대로 안겨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모텐시아에서 나던 향기가 그대로 코끝에 스몄다. 자유롭고 시원한 바람 냄새. 풀잎이 섞인 바람 냄새를 맡을 때면 꼭 저까지 이 자유로움에 잠기는 것 같았다.
짧게 생각을 마치고서 자고 있는 알파드의 얼굴을 감상했다. 길고 좀춤한 속눈썹, 고급스런 비단실 같은 검은 머리카락, 오똑한 롯날과 얇고 붉은 입술은 꼭 조각상 같이 어우러졌다. 그저 눈을 감고 자고 있을 뿐인데도 그에게서는 블랙가 특유의 오만함과 우아함이 흘렀다. 이렇게 보니 그의 아버지인 플룩스 블랙과 참 닮았다. 파혼서를 보냈을 때와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블랙 부부를 떠올렸다.
폴룩스 블랙은 신사적이었다. 스칼렛이라는 성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는 제 부인 친구의 딸이란 이유로, 부인의 우정을 위해 둘의 약혼을 허락했다. 이르마 블랙은 다정했다. 제 친한 친구의 딸이자 장남의 약혼녀, 꽤 예쁘장한 아이. 그것이 이르마 블랙이 제게 가지고 있는 평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좋다고 말하라면 그리 말할 수 있는 정도였다. 블랙 부부가 갈수록 자신을 탐탁지 않아 했으나 그것에 대해 더육 티내지는 않았다. 그런 허울 뿐인 관계이더라도 그와 있다는 것이 좋았으니까. 그 관계를 망치기 싫어서 꼭 참았다. 파혼서를 쓰고서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얄팍한 종이 한 장으로 묶인 관계를 사랑하면서도 그 이상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을 정말 스스럼 없이 대하는 것 같은 알파드를 보았을 때, 정말로 나만 그런 마음을 가졌구나, 정말로 우린 사랑 그 이상을 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더욱 사랑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파드를 피해다니면서 그리 마음을 접고 다녔을 때,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알파드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가장 증오하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꼭 파혼장을 쓰던 날의 제 모습과도 같았으니까. 그런 얼굴을 하는 알파드는 정말로 오랜만, 아니, 거의 처음이었다. 그날을 상기하니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차올랐다. 알파드는 항상 자신을 껴안고 자는 게 버릇이었다. 처음엔 그저 아무거나 안는 줄 알았지만 그것을 안 날은 세 번째로 알파드의 집에서 자게 된 날이었다.
알파드 블랙은 가끔, 아주 가끔이면 악몽을 꾼다. 자신을 피해 다니던 레이시를 잊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덮쳐오는 암흑에 혼자 남겨질 때면, 정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준 존재에 대한 사랑을 그의 부재를 통해 깨달았다. 처음엔 그저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허울뿐일지라도 약혼은 약혼이었고, 당시의 레이시는 자신을 짝사랑했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그런가보다, 했다. 정말로. 그러다 하루는 몰래 울고 있는 레이시를 발견했을 때, 평소처럼 안아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처음으로 후회했다. 자신이 이리 무력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왜 내가 저 애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의문을 던졌을 때 아무런 답조차 할 수 없었다.
레이시와는 언제나 친구였다. 약혼녀, 가문간의 거래. 이런 단어들로 관계를 절대 설명할 수 없었으며 우정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이 레이시와 저, 알파드 블랙의 관계였다. 자유만을 바라고 갈망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 애를 사랑한다고? 비참함과 후회 섞인 웃음이 홈렀다. 그는 '블랙'이라는 이름 아래 누구보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 관계에 있어 연인간의 사랑은 없다고 한 것은 저였다. 레이시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도 매몰차게 굴어놓고 아무렇지 않게 대한 주제에. 졸업식에서는 어떴지? 아주 형식적인 대화만 했다. 작은 꽃다발을 주고 받고 헤어졌다. 그 뒤로는 정말 레이시에 대한 소식을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연락하고 싶었지만 함부로 편지조차 쓸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주가 지났을 때에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자신의 품에 안겨 사랑한다고 하다가 사라지는 레이시를 붙잡지도 못하고 울며 바라보는 꿈을 꾸었다. 가지 마. 가지 마, 로즈. 내가 다 잘못했어. 사랑해. 늦게 알아서 미안해. 너 없이 나 혼자만 있는 건 너무 힘들어. 너에게 내 자유만을 이야기 해서 미안해. 내 사랑도 얘기할게. 보고 싶어. 제발 나랑 있어 줘, 로즈. 입안 가득 떠다니는 말을 다 꺼낼 수가 없었다. 알파드 블랙은 레이시 스칼렛에게 고백을 성공한 날 이 후로 낮에도 꿈을 꾸었다. 노을을 가득 받으며 장미 같은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는 연인을 더 끌어 안았다. 이제는 정말 빈틈없이 가까워진 거리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레이시에게서는 알파드와 같은 향이 났다. 알파드에게서는 레이시와 같은 향이 났다. 똑같이 뛰고 있는 심장박동에 나른한 입꼬리를 끌어 올려 레이시의 입술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점점 깊게 다가갔다. 레이시의 등을 다정히 쓸어주는 알파드의 손길에 평소의 섬세함은 사라지고 떨리는 손길만이 남아 있었다. 서로를 옭아 맬수록 분위기가 짙어졌다. 레이시를 가볍게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허리를 조심히 매만졌다. 얇고 마른 몸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마치 세게 쥐면 꿈에서처럼 날아갈까봐 무서웠다. 레이시의 허리에 팔을 감아 품안에 가두듯 끌어 안았다.
아니, 어디도 못 가. 내 거야. 내 것이고, 내 연인이야. 레이시는 날 사랑해.
맞닿은 현실이 지독하게도 달았다. 차마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자신을 따라오는 레이시를 눈에 가득 담고 여린 살을 깨물었다. 작은 자극에도 반응하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눈에 다 담아두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이 모습을, 이 순간을 놓치면 사라질까 봐 계속 눈에 새겨 넣었다.
진하고 깊은 입맞춤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알파드는 가끔, 아니면 어쩌면 자주 이렇게 힘든 정도로 깊게 입을 맞추곤 했다. 그럴 때면 레이시는 아주 커다란 호수에 빠지는 것 같아 숨을 급하게 쉬며 알파드를 붙잡았다.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 알파드가 싫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좋았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에 알파드를 밀어냈다. 잠깐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맞추고 제 안을 다 헤집었다. 자신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잔뜩 열이 오른 숨소리와 공기가 거실을 가득 매웠다. 몇 번 물기 어린 소리가 이어지더니 입술을 떼어내고 천천히 목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많이 힘들어?"
"으응, 조금."
"그래도 안돼. 오늘은- 너무 예뻐서 말이야."
"너 그 소리 지난 번에도 했어."
"나도 알아."
다시 따뜻한 온기가 맞닿았다. 전보다 더 깊은 입맞춤에 꼭 속에서 열꽃이 피는 것 같았다. 이 꿈같은 순간을 마주할 때면 정말 모든 걸 다 내던지고 둘만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이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을 깨닫고는 했다. 기나긴 짝사랑과 슬픔의 역사를 마쳤던 그날처럼, 레이시는 다시 이 안온한 현실에 몸을 맡겼다. 자신을 껴안는 단단한 몸은 언제나 현실을 자각하도록 만들어 주었으며 그 현실이 오히려 꿈일까 봐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미 없는 가설에 목을 매기보다는 자신과 맞닿아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기뻐하는 것으로도 바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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