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공략 100주년 기념행사 - 3
[이녹두, 배은하]
11월 30일, 100년 전까지는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그 날짜는 이제 그 어느 날보다 특별한 날이 되었다. 첫 균열이 생긴 날, ‘법칙’이 생긴 날, 첫 각성자가 생긴 날. 세상이 격변한 날이었다.
사람들에게 공포로 각인될 것이라 여겼던 그 날은 일주일 후, 첫 균열이 공략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로 기억되었다. 인류에게 새로운 발판이 생긴 날, 안전하지는 않아도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열어준 날, 신인류가 탄생한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을 기념하며, 중립국에서는 매년 11월 30일부터 일주일 간 균열 공략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온갖 관광객들이 중립국으로 모여드는 날이자, 합법적으로 모든 사람이 중립국에서 숙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였다. 당연히 좁은 중립국 내 숙박 시설은 물론이요, 주변 국가의 숙박 시설까지 몇 달, 몇 년 전부터 빼곡히 들어차 있는 날이다.
“무려 그런 날에! 이런 최고급 호텔을 잡아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 배진 길드다, 이말이다!”
오늘도 난해한 셔츠에 깔끔한 정장 재킷을 걸친 배은하가 극적으로 손을 뻗었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 겨우 꼭대기가 보일까 말까한 거대한 건물이었다. 중립국 국경에 위치한 유명한 5성급 호텔, S&M 호텔. 전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길드만 가려 받기로 유명한 호텔이었다.
그런 호텔을 무려 균열 공략 100주년 기념 행사 기간에 예약했다는 것에 배진 길드 이사 배은하는 자부심이 넘치는 상태였다. 사실 배진 길드가 국제적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협회 한국 지부와 긴밀한 협력 관계인 만큼, 협회의 영향력이 강한 중립국에서는 특별 대우를 받는 특이한 길드였다. 물론 이것도, 배진 길드에 영혼을 바치지 않은 일반 직원들에게는 협회의 덕으로만 보이기 마련이다. 영혼이 멀쩡한 직원, 이녹두와 신시아는 영혼 없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100주년이라고 경쟁이 붙긴 했지만, 이 배은하님이 우리 직속 헌터들을 위해 특별히 이번 길드 대표 자리를 따왔지.”
“그것 참 감사한 일이네요.”
이녹두가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래, 더 감사하도록 해!”
“예에, 감사합니다.”
신시아도 성의 없이 대답했다.
“하하, 이걸 이뤄낸 게 누구라고?”
마침내 3절을 시작한 배은하를 지나쳐 이녹두와 신시아는 호텔의 깨끗한 회전문으로 들어갔다. 흰색과 붉은색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금색을 둘둘 두른 호텔은 고급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느새 유튜브 촬영용 카메라를 꺼내든 신시아가 감탄했다.
“우와, 나 살면서 이런 데 와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길드가 좋긴 좋다.”
“이사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 치곤 잘 굴러가는 편이죠.”
이녹두는 시무룩하게 쫓아오는 배은하에게 들리도록 대꾸했다. 배은하도 양심은 있는지 반박은 하지 못했다.
로비는 무지하게 넓었다. 이녹두는 본인의 원룸을 세개쯤 이어 붙인 크기 같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옆에서 신시아가 너희 집 세배쯤 되겠다고 종알댔다. 이녹두는 왜 본인 집 두고 남의 집으로 비교를 하냐며 어이 없다는 반응을 돌려주었다. 신시아는 원룸이 크기 비교에는 좋다고 대답해 주었다. 물론 이녹두는 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쓸데없는 만담을 하는 동안 배은하는 프론트에 배진 길드 뱃지를 보여주고 카드키를 두개 받아왔다.
“방은 두개로 잡았다더라. 너희 둘이 하나 쓰고, 나 하나 쓰자고.”
배은하가 이녹두에게 카드키를 하나 건넸다. 이 호텔의 태평양 같은 방 크기는 소문으로 많이 들었으므로, 이녹두와 신시아는 불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짐풀고 저녁 쯤에 로비에서 만나지. 개최식은 내일이니까 그 전에 주변 관광이나 하자.”
배은하가 신시아의 카메라에 윙크를 날리고 먼저 돌아섰다. 카메라 녹화 화면으로 배은하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한 신시아가 인상을 구겼다. 이녹두가 쌍욕이 담긴 눈으로 배은하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후에 유튜브 영상 자막으로 ‘오늘도 멋있는 이사님^^’이 들어간 장면이었다. 자본주의 만만세였다.
“끄어어어... .”
신시아가 눈을 뜸과 동시에 괴상한 소리를 냈다. 요란한 기상 소리에 양치를 하던 이녹두가 신시아를 노려봤다.
“선배, 좀 조용히 일어나세요. 술 냄새 나요.”
“녹두야아... , 나 해장국… .”
이녹두가 더없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뜨거운 물을 부어놓은 황태국 컵반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신시아가 깨질 듯이 울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테이블로 기어갔다. 이제 보니 옷도 어제 입고 나간 외출복이었다. 위에 걸친 코트만 벗겨져 있었다.
“그러게 적당히 좀 마시라고 했잖아요.”
이녹두가 찬물이 든 컵을 탁 소리나게 내려 놓았다.
어제 저녁에 배은하와 함께 중립국 관광을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어느 정도 유명한 곳을 돌고 난 후, 몸에 안 좋은 자극만 쫓는 이사님은 고삼 미성년자 녹두까지 끌고 술을 퍼마시러 갔다. 신시아는 알콜 분해 능력이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배은하와 잔을 맞대다가 기억과 정신머리를 골로 날려 버렸다. 꽐라가 된 신시아와 취기가 올라 헛소리하는 배은하를 끌고 와야 했던 건 미자 이녹두였다. 이녹두는 두 사람을 보며 한심한 어른의 전형을 배웠다.
“그치만…. 모처럼 이사님 등골을 빼먹을 수 있는 기회였는걸… .”
신시아가 찬물을 원샷하고 비실비실 황태국 국물을 떴다. 음식점 아르바이트 경력까기 있는 이녹두표 해장국에는 못미치지만, 외국에서는 감지덕지인 수준이었다. 이녹두는 한심한 어른1을 구경하다가 먼저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10시부터 개최식 시작이래요. 9시반까지는 도착해야 하니까, 늦어도 9시까지는 준비하고 로비로 나오세요.”
숙취 속에 구르다가 8시반에 겨우 일어난 신시아와는 다르게, 6시부터 일어나 조식까지 야무지게 챙겨먹은 이녹두는 호텔의 다른 층을 둘러본다고 일찍 나갔다. 신시아는 매정한 이녹두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려고 일어났다가, 아찔한 두통 때문에 다시 주저앉았다. 어제 너무 무리했다. 신시아는 뼈저리게 통감하며 남은 황태국밥부터 비웠다. 숙취로 고통받는 상황이라도 밥은 중요한 것이 한국인이었다.
“첫 균열 발생 및 공략으로부터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우리 인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고,
이제는 균열이 일어났던 볼모지에도 화려한 문명을 꽃 피웠습니다.
그 문명의 증거가 되는 이 땅에서, 바로 오늘을 기념하는 축제의 시작을, 알립니다!”
쓸데 없이 장황한 말의 마지막 음절과 동시에 펑, 펑, 하늘에 커다란 불꽃이 터졌다. 중앙 지부 소속 헌터들이 스킬로 만들어낸 불꽃이었다. 배진 길드 대표 셋은 길드 전용석에 앉아 색색깔의 불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배은하는 귀가 아프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고, 신시아는 카메라에 불꽃이 잘 잡혔을지를 걱정했으며, 이녹두는 헌터의 임금과 불꽃놀이 비용을 저울질하는 중이었다.
일반적인 불꽃놀이의 낭만과는 영 관련이 없는 세 사람은 곧 흥미를 잃고 고개를 내렸다. 족히 20분동안 지루한 연설을 했던 협회장이 드디어 단상을 내려갔다. 배은하가 길드석을 비추는 카메라를 피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드디어 끝났네. 하여간 쓸데없이 말만 긴 노인네.”
이녹두와 신시아는 오랜만에 배은하의 말에 동의했다. 계속 이쪽을 찍고 있던 카메라만 없었다면 진작에 졸뻔했다. 날씨는 겨울에 가까웠으나 투명한 막이 쳐진 중앙 광장에는 바람 한점 없었고, 오히려 맑은 햇빛만 들어와 따뜻했다. 적당히 몸을 누르는 두꺼운 옷의 감촉, 조용한 톤의 노인 목소리, 자그맣게 웅성대는 사람들. 모든 것이 한숨 자기에는 딱 좋은 조건이었다.
“이사님, 저희 점심 사주세요.”
화려하게 문을 연 개최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슬슬 광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신시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배은하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 관종 이사님은 은근히 카메라에 약했다.
“크흠, 멀리까지 왔으니까 내가 한 번 아량을 베풀어 주지.”
“아싸, 비싼 거 먹어야지.”
신시아가 카메라에만 들리도록 속삭였고, 이녹두는 곧장 중립국 관광 팜플렛을 펼쳐들었다.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쏙닥대는 모습을 보니 조금 두려워졌다. 배은하는 남에게 쓰는 돈에는 인색한 편이었다.
“얘들아? 정말 그렇게 작정하고 상사한테서 뜯어먹을 건 아니지?”
“뜯어먹을 건데요?”
이녹두가 지극히 당연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신시아도 옆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은하는 너무나 수평적인 길드의 구조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요오즘 애들은,,, 상사 무서운 걸 모르고,,, 상사 뜯어먹을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꼰대 소리에 충격 받아서 묻어 놓은 옛날의 자아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럼 메인으로는 여기 스테이크 먹고, 후식으로 이쪽 디저트점이랑 저기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돌까요?”
“좋아, 코스도 딱 좋네. 중앙 광장 근처에서만 돌면 되고.”
배은하가 울든 말든, 신시아와 이녹두에게는 상관 없는 얘기였다.
기어이 배터지게 배은하를 뜯어 먹은 신시아와 이녹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들고 걸었다. 개최식 행사가 끝난 후 사람이 빠져나간 중앙 광장은 아까와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원 모양의 커다란 광장에는 한쪽에 줄지어 노점이 서있었고, 다른 쪽에는 협회의 지부들과 길드들이 운영하는 부스가 서있었다. 맛있는 간식거리와 수공예품, 아이템, 헌터 굿즈들을 파는 곳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균열 공략을 상징하는 노란 프리지아와 월계수를 엮은 꽃다발과 화관도 흔히 보였다.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그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신시아의 카메라가 그 광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비록 마구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녹두가 옆에서 화면을 보고 타박했고, 1년차 유튜버 배은하가 한 마디씩 참견을 얹었다. 신시아가 손떨림 보정 기능을 찾으려고 카메라를 이것저것 건드렸다.
“어?”
순간 멀리까지 확대된 화면을 들여다 보던 신시아가 이상한 목소리를 냈다.
“왜요, 고장났어요?”
더없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이녹두가 화면을 들여다 봤다. 저 멀리, 본부 건너편의 화면을 크게 확대하고 있는 화면이었다. 온통 파랗고 군데군데 하얀 화면 속에, 이질적인 검은 물체가, 점점 그 크기를 부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녹두는 신시아를 따라 눈을 크게 떴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것은 누가 어떻게 보아도 괴물이었다. 균열에서 나오는, 괴물.
“ … 저건.”
배은하가 광장의 입구를 보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괴물. 그제야 멀리서 희미하게 울리는 비명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명백했다. 균열이었다.
애애애애애앵-.
괴물들의 침입을 알린 것은 익숙한 균열 알림 목소리가 아니었다. 익숙하지만 갑작스러운 사이렌 소리. 그 사이렌 소리가 한번 끊기기도 전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게 될수밖에 없었다.
꺄아악! 으아악!
사방을 온갖 비명소리가 채웠다. 광장이 아수라장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부산스럽지만 나름 질서가 있던 방금 전과 달리,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나갔다. 괴물에게 공격 당하고, 그런 사람을 보고, 달리다가 넘어지고, 그런 사람을 밟고.
사람들의 물결을 거슬러 뛰어가며, 신시아가 호랑이 같은 괴물의 발톱에 채인 사람을 떼어냈다. 신시아가 세 걸음을 물러서자마자 괴물에게 번개가 꽂힌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사람이 정신없이 말을 내뱉었다. 대충 '쎄쎼'인 것 같았다.
“선배, 균열 어디 있는지 봤어요?”
“아니, 나도 못봤어!”
“그건 공무원들한테 맡기고, 일단 이쪽에 있는 놈들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배은하가 이쪽으로 뛰어오던 멧돼지 같은 괴물들을 중력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중력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그 사이를 혼비백산 뛰쳐나왔다. 범위를 넓게 펼치고 있는지 발이 묶이기만 하고 터지지는 않은 괴물들이 보였다.
“이사님, 그쪽 사람들 다 나왔어요?”
“아니, 아직. 좀만 더 기다려.”
이녹두가 하늘에서 가시를 뿜어대는 비행형 괴물 셋에게 동시에 번개를 꽂았다. 사람들 위로 떨어지려는 괴물 사체를 신시아가 물을 뭉쳐 막아냈다. 배은하가 괴물들의 발을 묶어 놓은 구역에서 마침내 마지막 사람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강한 중력을 거스르고 일어나려는 괴물들과 사투하며, 배은하가 짧게 외쳤다.
“신시아!”
물의 구에 갇힌 괴물 사체를 적당히 내려놓고, 신시아가 곧장 물을 소환했다. 한번에 쏟아져 나온 방대한 양의 물이 파도치며 넓게 퍼졌다. 배은하가 중력장을 작용하고 있는 공간을 메우고, 그 밖으로는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절한다. 그리고 마무리.
“녹두야!”
부름과 동시에 강한 빛이 한 차례 번쩍인다. 가운데에 엎어진 괴물에게 번개가 꽂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물을 타고 전기가 번져 나간다. 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괴물들이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검게 타들어갔다. 꾸에에에엑! 듣기 싫은 소리가 도미노처럼 퍼져나갔다. 신시아가 물을 거둬들이자마자 그 뒤로 다시 괴물들이 몰려왔다. 이번에는 토끼를 닮았다. 방금 해치운 그 어떤 괴물과도 닮지 않은 모습이었다.
“대체 뭔 균열이 터진거냐? 아무리 외부여도 이딴 식으로 나오진 않는데.”
배은하가 혀를 차고 다시 중력장을 펼쳤다. 괴물들이 내부에서 나오는 내부형 균열은 물론이고, 밖으로 쏟아지는 외부형 균열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가 한 번에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저 멀리 보이는 괴물들이 또 세종류였다.
“100주년이라더니, '법칙'이 준비한 서프라이즈인가 보죠.”
신시아가 도망치는 사람들의 뒤로 물 장막을 펼치며 말했다. 어쩐지 해탈한 이녹두에 가까운 말투였다.
“이런 상황에 농담이 나와요?”
“난 원래 균열에서도 그랬어.”
“평소의 그 행동부터가 문제라는 건데요.”
쿠과과광, 주변에 한차례 벼락 세례를 내리고 이녹두가 신시아를 타박했다. 신시아는 평소처럼 입술을 비죽일 틈도 없이 코앞에 닥쳐온 괴물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빈틈이 생기자마자 신시아가 세 발짝 물러섰고, 그 자리를 어김없이 이녹두의 번개가 관통했다. 신시아는 타버린 괴물에게서 창을 뽑으려다가 남아있는 전류에 손을 델 뻔했다.
“녹두야아...”
안타깝게도 신시아의 울상은 번개를 꽂느라 바쁜 이녹두에게는 닿지 않았다. 주변이 온갖 스킬이 날아다니는 소리와 괴물들의 괴성으로 시끄러웠던 탓이었다. 신시아는 장난 걸기를 포기하고 다시 창을 뽑아들었다. 한번 더 징징대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때, 스피커를 울리던 사이렌 소리가 끊어졌다. 침착한 목소리가 노이즈에 섞여 흘러나왔다.
[ISMA 미국 지부 S팀 팀장, 아르마 코르니스입니다. 현재 발생한 균열은 내부형 균열입니다. 하지만 몬스터가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있어 접근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뭐라는 거야?"
급박한 상황에 시작된 영어 듣기 평가에 평균적인 코리안 대학생 신시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한테 물어보신거에요?”
영어듣기 모의고사 점수 5점보다 편의점 시급 8,950원이 중요한 이녹두라고 알리 없었다. 약간의 신경질을 담아 돌아온 대꾸에 신시아가 그제야 두 사람의 절망스러운 영어 듣기 실력을 깨달았다. 앞에서 몰려오는 괴물들을 막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영어 방송에 귀 기울일 시간이 있을리도 만무했다.
“이거 내부형인데, 외부형처럼 괴물 쏟아져서 접근 못하고 있댄다!”
해석은 의외의 인물에게서 터져나왔다. 배은하가 괴물 5마리를 통째로 터트리며 소리쳤다.
“이사님, 영어할 줄 아세요?”
“이것들이 나를 뭐로 보는 거냐?”
평소 행색에서는 전혀 연상되지 않지만, 지적 능력으로는 천재 소리를 듣던 배은하가 어이 없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배은하에게 영어 회화 정도는 껌이었다. 사람들이 잘 못믿을 뿐이지.
[균열 공략에 도움을 주실 수 있는 헌터분들은 본부 뒤, 52번 길로 와주십시오. 반복합니다. 균열 공략에 도움을 주실 수 있는 헌터분들은 52번 길로 와주십시오.]
“균열 공략할 헌터들 모집한댄다. 52번 길이면, 본부 바로 뒤쪽 큰길일텐데?”
배은하가 정신없이 괴물 5마리를 찍어누르며 통역해주었다. 급하게 범위 공격을 펼친 탓에 괴물 옆에 있던 노점 하나가 같이 찌그러졌다. 이미 물이 한 번 휩쓸고 갔으니 크게 티는 안나겠지. 배은하는 가볍게 생각하곤, 휘둘러지는 괴물의 손톱을 피해 잽싸게 물러났다.
“우리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보통 균열은 아닌 것 같은데!”
신시아가 광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뒤로 물 장막을 두르며 소리쳤다. 직접 상대해본 괴물들의 수준이 상당했다. 보통 이런 괴물들이 튀어나온다면 못해도 2급일텐데, 이상한 현상들까지 줄줄이 일어나니 1급 균열도 훌쩍 넘는 난이도일 가능성도 있었다.
못해도 2급, 잘하면 역대급 난이도인 균열이라면 등급이 높은 편인 이들이 가야 했다. 당장 A등급대의 헌터 몇 십명이 와도 부족할 상황에, S등급 대의 이들은 큰 전력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쪽이 조금만 안정되면 좋을텐데.”
하지만 당장 달려가기에는 중앙 광장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그나마 괴물들을 수월하게 상대하고 있는 것이 이녹두와 신시아, 배은하를 포함해서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곳곳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이곳을 버리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배은하가 하늘로 몰려오는 괴물들을 보고 쯧, 거칠게 혀를 찼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말도 없이 집중한 이녹두는 물론이고, 말을 꺼냈던 신시아도 괴물들을 상대하느라 바빴다. 지원군이 오지 않는 이상 이곳을 떠나기는 요원해 보였다.
한창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그들의 뒤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말소리, 고함소리, 괴물들의 괴성. 사람들의 비명이 아닌 말소리를 듣는 것이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말소리가 상당한 여유를 담고 있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의아함이 치솟았지만 고개를 돌려 확인할 새는 없었다.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밀려오는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팽팽한 긴장 상태를 끊은 것은 앞으로 날아드는 스킬들, 떨어지는 괴물의 사체들과 배은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오랜만이네? 은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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