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칙'의 시대

균열 공략 100주년 기념행사 - 4

[이레네아 코르니스, 애슐린 킹스턴]

11월 30일, 100년 전까지는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그 날짜는 이제 그 어느 날보다 특별한 날이 되었다. 첫 균열이 생긴 날, ‘법칙’이 생긴 날, 첫 각성자가 생긴 날. 세상이 격변한 날이었다.

사람들에게 공포로 각인될 것이라 여겼던 그 날은 일주일 후, 첫 균열이 공략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로 기억되었다. 인류에게 새로운 발판이 생긴 날, 안전하지는 않아도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열어준 날, 신인류가 탄생한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을 기념하며, 중립국에서는 매년 11월 30일부터 일주일 간 균열 공략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온갖 관광객들이 중립국으로 모여드는 날이자, 합법적으로 모든 사람이 중립국에서 숙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였다. 당연히 좁은 중립국 내 숙박 시설은 물론이요, 주변 국가의 숙박 시설까지 몇 달, 몇 년 전부터 빼곡히 들어차 있는 날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균열 공략 기념일은 교육 기관에 속한 헌터 지망생들이 놀러오기 좋은 날이라는 것이다.

“교수님, 저희 스테이크 먹어요.”

“나 돈 없다.”

“쫌생이... .”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 양성 기관인 E.S.H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균열 공략 기념 행사는 E.S.H의 신입생들이 거치는 필수코스가 된지 오래였다. 게다가 올해는 숫자의 의미가 깊은 100주년. 신입생이 아닌 헌터 지망생들까지 신청이 몰려 같은 외투를 걸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매년 중앙 지부에 납치당한 고급 인력 딸래미를 보려고 인솔자를 자처하는 이레네아가 앞담을 하는 길드원의 머리통을 꾹꾹 눌렀다. 한 손밖에 없지만 여전히 가공할 만한 힘이었다. 교수님 앞담의 처절한 대가를 치른 길드원이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사님은 돈 많으니까 스테이크 사주세요!”

“직접 사먹으렴.”

“진짜 쫌생이... .”

힐 스킬을 지닌 헌터들의 교육을 자처하는 프리메딕도 중립국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의료직과 연구직 뿐만 아니라 힐 스킬 용병 헌터 활동으로도 유명한 프리메딕에도, E.S.H 못지 않게 헌터 지망생들이 많았다. 하얀 외투를 입은 헌터 지망생들 사이에 남색 외투를 입은 정식 헌터들까지 꽤 섞여 있었다. 역시 100주년이라는 이름에 이끌려온 길드원들이 호텔 앞 한쪽에 바글바글 내려섰다.

길드원에게 무력행사를 하는 이레네아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애슐린은, 막상 제 험담을 하는 길드원에게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몬스터의 뼈를 가공하여 만든 단단한 지팡이가 길드원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길드원은 ‘으억’에 가까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사이가 나쁘기로 소문난 E.S.H의 이사 겸 교수, 이레네아 코르니스와 프리메딕의 이사, 애슐린 킹스턴은, 그렇게 길드원들 응징을 마치고 나서야 얼굴을 맞댔다. 서로의 얼굴을 눈에 담자마자 두 사람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당연히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렇게 내 제자 뺏어가고 싶어서 안달을 내더니, 이젠 중립국까지 쫓아오시나?”

“프리메딕이 뭐가 아쉬워서? 그쪽에서 쫓아온 거겠지, 키워본 적도 없는 힐 스킬 각성자 키우는 법 훔쳐가려고.”

“E.S.H가 몇 십년 동안 해오던 일이 우습나 보지?”

“우리가 몇 십년 동안 해오던 일에 비하면 우습지도 않지.”

서로 인재를 뺏고 빼앗기며 돈독한 우애를 다져온 두 길드는 만나기만 하면 시비가 붙었다. 미국 헌터 양성 기관의 실적 싸움이자 자존심 싸움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싸움이 격렬한 이레네아와 애슐린에게는 협회와 가족이 연관된 문제까지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서 ‘세계 최초의 SS급 서포터’를 협회에 뺏기셨나?”

“얼마나 할 말이 궁하면 남의 업적까지 끌어오실까?”

“이런 건 자랑하는 게 아니라 너의 인재 스카웃 능력을 폄하하는 거라고 봐야지.”

몇 년 전, 이레네아의 딸인 아르마가 레온타인을 협회로 홀랑 스카웃 해갔다. 힐 스킬 각성자를 미친듯이 찾아다니는 프리메딕은 변변한 스카웃 제의도 못해보고 귀한 인력 하나를 빼앗겼다. 심지어 레온타인은 애슐린의 하나뿐인 조카였다. 제 이모가 있는 길드를 시원하게 걷어차고 협회로 들어가 버린 레온타인 탓에 애슐린은 코르니스라면 치를 떨었다. 그 감정은 아르마보다 더 자주 만나는 이레네아에게 쏟아졌다.

다혈질 기질도 있고, 애슐린에게 오랜 시간 시비가 걸려온 이레네아라고 좋은 반응을 돌려줄리는 없었다. 자존심 강한 두 중년 이사의 싸움은 그렇게 성립되어 지독하게 이어져 왔다.

하지만 가족의 싸움은 다른 가족에게는 조금 창피한 일일뿐이었으며, 이사의 싸움은 배고픈 제자들과 길드원들에게는 딱히 알 바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무한한 존경을 받는 이사들일지라도 유치한 길드 싸움을 할 때는 역시 존중 받기 힘들었다.

“그쪽 이사님도 여전히 유치하시네요.”

“뭐, 한두 번도 아니고. 저희끼리 먼저 체크인 할까요?”

“네, 좋아요.”

“이사님들 저렇게 내버려 두고 가도 돼요?”

“저래 보여도 두 분 다 어른들인데요. 알아서 오시겠죠.”

이미 몇 년 견학을 와본 고참 지망생들과 헌터들이 자연스럽게 길드원들을 이끌었다. 녹색, 흰색, 남색 외투의 무리가 와글와글 섞여서 호텔로 들어갔다. 자랑스러운 이사님들은 막 머리채를 잡을락 말락 하는 단계였다.

“프리메딕은 저녁으로 뭐 드실 거예요?”

“저희는 중식 유명한 식당 예약해 놨는데, 같이 가실래요?”

“헐, 좋죠. 지금 추가 예약 되려나요?”

“좀 넉넉하게 해놔서 괜찮을 거예요.”

다른 길드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헌터 지망생들은 이사들이 싸운다고 반목할 필요까지는 없는 법이었다. 평소처럼 친목을 다진 길드원들은 식당 예약 정정 전화를 걸었다. 역시 오늘도 평화로웠다.




“첫 균열 발생 및 공략으로부터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우리 인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고, 

이제는 균열이 일어났던 볼모지에도 화려한 문명을 꽃 피웠습니다.

그 문명의 증거가 되는 이 땅에서, 바로 오늘을 기념하는 축제의 시작을, 알립니다!”

쓸데 없이 장황한 말의 마지막 음절과 동시에 펑, 펑, 하늘에 커다란 불꽃이 터졌다. 중앙 지부 소속 헌터들이 스킬로 만들어낸 불꽃이었다.

    갑자기 터진 큰 소리에 아래로 꾸벅, 떨어지던 고개가 급히 위로 들렸다. 쓰읍. 이레네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면을 응시하며 침을 닦았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불꽃놀이를 구경하느라 하늘 위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정면을 보는이레네아는 누가봐도 자다가 깨서 딴 곳을 보는 사람이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애슐린이 옆에서 이레네아를 보며 혀를 찼다. 여전히 웃는 표정을 유지한다는 것이 지극히 애슐린다웠다.

    “아까 카메라가 이쪽도 찍더라. 너 침 흘리는 거 다 찍혔어.”

    “ … 네가 이 나이 돼봐.”

    이레네아가 뒤늦게 머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군데군데 하얗게 센 머리카락, 주름이 자리잡아 가는 얼굴. 오른쪽은 화상 흉터로 덮인 그 얼굴을 애슐린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잠시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30대로 보일 제 얼굴을 보고 그 누가 이사람과 비슷한 나이를 떠올릴까? 간혹 제 나이대로 늙어가는 이레네아를 마주하면, 애슐린은 그것이 서글퍼졌다. 평범한 인간과 거리가 벌어진 이들은 관성적으로 느끼게되는 감정이었다. 물론 이레네아 앞에서 굳이 티를 내지는 않지만.

    “내가 너보다 4살 많거든?”

    “당연히 신체 나이 말한거지. 늙고 한 팔 없는 몸뚱이가 얼마나 피곤한지 알아?”

    이레네아가 뚱하게 대꾸했다. 막 잠에서 깬 목소리에는 독기가 덜 했다. 어쩌면 힐끗 본 애슐린의 표정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액면가에 비해 훨씬 굳어 있는 얼굴, 얼핏 따분해 보이기도, 어떤 감정을 숨기려는 것 같기도 한 표정. 몇 십년을 봐왔고, 애슐린의 나이까지 아는 이레네아도 간혹 위화감이 치솟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벌어진 이들의 숙명이었다. 자신도 이런 표정일지, 이레네아는 간혹 궁금해졌다. 그 표정이 제 얼굴에 이만큼 끔찍하게 어울리지 않을지, 같은 것들도. 애슐린 앞에서 굳이 티를 내지는 않지만.

    시끄러운 함성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두 사람의 주변을 둘러싼 길드원들도 신나게 소리를 높였다. 그 분위기 속에서, 이레네아와 애슐린은 오랜만에 침묵을 유지했다. 애슐린이 다리를 다친 후로 종종 생겼고, 이레네아가 오른팔을 잃은 후로 더 자주 생긴 시간이었다. 

그들에게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평범하지 않게 살아와서, 평범함을 너무 일찍 포기해서, 그렇게 천천히 일상에서 멀어지는 것. 상대를 보고, 자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그 참혹함에 절망하기도 하는. 그럼에도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내는. 사실 이제는 그런 상대방의 생각의 기류까지 눈에 보일 듯 선했다. 제 얼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누구를 생각했을지, 결국 그 생각의 끝이 어디인지. 굳이 그것을 티내고 이해한다고 말할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할 뿐이었다. 어색하지 않은 공기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이사님, 저희 점심 먹으러 가요!”

    “교수님, 빨리 안가면 좋은 자리 다 뺏긴다니까요?”

    물론 그런 생각을 알리 없는 길드원들에게는 점심 밥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공사가 다망한 이사들은 동시에 감상을 걷어내고 한숨을 쉬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참 분위기도 없다고, 지극히 꼰대같은 생각은 덤이었다.




    좋으나 싫으나, 헌터 지망생들을 데리고 온 E.S.H와 프리메딕은 좁은 중립국 내에서 동선이 많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 헌터 지망생들의 체험학습 코스야 어느 나라든, 어느 길드든 거기서 거기였다.

    개최식에서 한 차례 감상적인 시간을 가진 이레네아와 애슐린은 점심을 먹고 다시 만난 순간부터 3차전을 시작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아르마에게 면회 요청을 거절당한 이레네아는 물론, 노는 데 방해된다고 조카에게 까인 애슐린도 짜증이 마구 쌓인 상태였다. 

    “어떻게 저렇게 하루종일 싸우시죠? 제 체력으로도 안될 것 같은데.”

    “워낙 쌓인 게 많으시니까… . 저런 게 연륜이죠.”

    “저런 연륜 쌓아서 어디다가 써요?”

    “ … 저런 데?”

    길드 생활 5년 차에 달하는 헌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뒤를 가리켰다. 어느 새 지팡이를 후리고 있는 애슐린이 보였다. 이레네아는 손쉽게 그 궤적을 피해냈다. 애초에 이레네아는 균열에서 헌터로 굴러온 SS급 각성자이고, 애슐린은 아이템으로 회복 능력만 월등해진 비각성자였다. 말싸움은 몰라도 몸싸움으로는 상대가 될리 없었다.

    헌터의 손가락질에 따라 그 광경을 구경하던 길드원들은 곧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지’의 표본이었다. 길드원들의 관심사는 빠르게 노점에서 파는 닭꼬치로 옮겨갔다. 정신 없는 틈을 타서 애슐린의 카드를 쟁취한 길드원들이 신나게 달려갔다.

    “신체 나이가 30대면 뭐해. 그따위로 밖에 말을 못하니까 조카한테 재미없다고 까이기나 하지!”

    “그러는, 지는, 딸래미한테도 까이면서!”

    애슐린 말 중간중간에 지팡이가 붕, 붕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다. 퍽 위협적인 소리에도 이레네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애슐린의 신체능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딸은 바빠서 못 만나주는 거거든, 안 만나주는 게 아니라!”
    “놀러 나가서 못 보는 거면서!”

    실로 상처뿐인 싸움이었다. 말에 후드려 맞은 이레네아가 잠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멈칫했다.

    “하, 반박할 말도 없… .”

    “ … 썩을.”

    갑작스레 튀어나온 욕은 에슐린의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중앙 광장과 이어지는 거리. 프리지아와 월계수로 장식된 거대한 아치문.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인간 승리의 증거, 활기찬 축제의 풍경이 아니었다. 몬스터에게 짓밟히고 뜯어 먹히는 100년 전 살육의 재현이었다.

    “로렌!”

    이레네아가 아이템창에서 급히 무기를 꺼내들며 소리를 높혔다.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헌터가 먼저 달려나갔다. E.S.H 현장팀 소속의 헌터가 달려나간 방향을 눈으로 쫓고 나서야, 헌터 지망생들과 애슐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왜 이때까지 몰랐을까, 싶을 만큼 거대한 존재감이 폐부를 압박하는 느낌이었다. 몬스터는 보지도 못할 먼 거리라는 것도 딱히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삽시간에 얼어붙은 지망생들과는 다르게, E.S.H의 고참 지망생들과 헌터들, 프리메딕의 헌터들은 다급하게 다리를 놀리는 것이 먼저였다.

    “교, 교수님, 지금 이게, 무슨… .”

    “몬스터. 아무래도 균열이 터진 것 같다.”

    “하지만 균열 알림은 없었잖아요!”

    지망생의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에 애슐린이 차갑게 대꾸했다.

    “균열 예측기가 완벽한 건 아니란다. 개발된지도 얼마 안되었고, 그게 잡지 못하는 균열도 있을 수 있지.”

    균열 예측기가 개발된 것은 30년 전. 그나마도 지금과 같은 성능을 내게 된 것은 10년 내외였다. 균열 예측기가 없는 삶이 더 익숙했던 이사들에게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애애애앵-. 바닥에 피가 흩뿌려진 후에야 울리는 사이렌 소리조차도.

    “애들 데리고 대피해, 애쉬.”

    “말 안해도 안다.”

    애슐린이 손짓하자 길드원들의 앞에 선두에 서있던 헌터 하나가 애슐린의 뒤에 따라붙었다. 전투 능력이 없는 비각성자와 전투가 서툰 지망생들이 있어봤자 도움이 될리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애슐린이 금세 두 길드의 길드원들을 한 데 모았다.

    “대피소 위치부터 파악하고, 주위 사람들도 함께 대피시켜라. 훈련 받은 것도 못하는 건 아니겠지?”

    헌터 양성소의 신입생들이 가장 먼저 받는 훈련은 다름아닌 대피 훈련이다. 벌써 지겨울 만큼 반복한 훈련을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망생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안감과 공포가 떠올라 있었지만, 적어도 일사분란한 움직임만은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았다. 바쁘게 뛰는 헌터의 품에서 대피 지시를 내리는 애슐린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시선교환이 끝나고서야 이레네아는 발을 옮겼다.



  

  중앙 광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침입한 몬스터의 수도 상당했는지, 먼저 출발한 길드원들도 이제야 아치문을 건너고 있었다. 이레네아가 빠르게 다가서자 가장 먼저 출발한 로렌이 붙어섰다.

    “일단 바깥쪽 거리로 나가는 건 막았습니다. 안쪽에서도 누가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생각보다는 수월했네요.”

    아치문을 건너자 몬스터의 수는 오히려 줄어있었다. 중앙 광장의 안쪽에서 누군가가 몬스터의 흐름을 끊어놓은 덕이었다. 몬스터가 사라지자 주변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프리메딕의 헌터들이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가벼운 힐을 걸어주고, E.S.H의 헌터들이 그들을 엄호하며 길을 터주었다. 이레네아는 검을 가볍게 돌려 잡았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구만. 이건 괜히 꺼냈어.”

광장은 슬슬 정리되어 가고 있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광장의 뒤쪽은 그랬다는 말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대피소로 보낸 길드원들이 슬슬 주변을 정리했다.

    “저 누가 잘 정리하고 있는 것 같으니, 차라리 우리는 바깥쪽으로 다시-.”

    [ISMA 미국 지부 S팀 팀장, 아르마 코르니스입니다.]

    급작스러운 방송이 사이렌 소리와 이레네아의 말 소리를 묻었다. 이레네아는 말할 것도 없고, E.S.H의 길드원들도, 미국 시민들인 프리메딕의 길드원들까지 익숙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SSS급 국가 헌터, 아르마 코르니스. 앞뒤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들리면 반가울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현재 발생한 균열은 내부형 균열입니다. 하지만 몬스터가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있어 접근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지금 이게 던전이라고?”

    침착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길드원들은 아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던전에서는 몬스터가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현 시대의 가장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미 중앙 광장을 점령한 몬스터들이 던전에서 나왔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균열 예측기가 작동하지 않은 것부터, 몬스터들의 종류가 지나치게 다양한 것, 아무리 전투 인원이 부족한 중립국이라지만 몬스터들에 대처하지 못한 것까지, 이상한 일은 이미 한가득이었다. 이레네아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균열 공략에 도움을 주실 수 있는 헌터분들은 본부 뒤, 52번 길로 와주십시오. 반복합니다. 균열 공략에 도움을 주실 수 있는 헌터분들은 52번 길로 와주십시오.]

    “ … 어떡할까요, 이사님.”

    로렌이 이레네아의 심각한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52번 길은 중앙 광장 너머, 본부의 바로 뒤. 이레네아가 지시했던 방향과는 정반대였다. 그 길로 가려면 광장의 중심부를 지나가야 했다. 어차피 저가 가봤자 도움도 안되겠지만, 이레네아가 냉정하게 식은 머리를 굴렸다. 대답은 빠르게 나왔다.

    “일단 가보지.”



   

중앙 광장의 변방부와는 다르게, 중심부는 여전히 심각한 아수라장이었다. 몬스터들의 사체가 빼곡하게 쌓여있는 가운데, 헌터 몇몇이 다시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흔 명 남짓한 헌터들 중에서도 수월하게 싸우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열 명이 될까말까해 보였다.

    “허, 저정도도 상대 못해서 헌터 생활 어떻게 하나 몰라.”

    “이사님, 지금 나오는 몬스터들이 다 일반적인 수준은 아닌데요.”

    “나 때는 이정도 급들은 맨손으로 잡았어.”

    이레네아의 못마땅한 대꾸에 로렌은 그냥 입을 닫는 것을 택했다. SS급에, 헌터 경력 약 40년에 달하는 이레네아에게는 뭔들 어려워 보이겠냐만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이레에아와 로렌의 근처에서는 다른 길드원들이 분주하게 사투 중이었다. 앞에서 진을 친 헌터들을 뚫고 나온 몬스터들을 쫓아 숨통을 끊어놓고 있었다.

    “어, 저건... .”

    그 중심에서 한 발짝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던 로렌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굴러갔다.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한국 배진 길드의 이사, 이름이, 은하랬나. 요즘 헌터 교육 세미나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는 배진 길드 대표에서 항상 옷자락이 잡혀 끌려오는 사람이었다.

    “왜, 누구 있어?”

    “그 왜, 만날 때마다 이사님이랑 싸우는 배진 길드 이사요.”

    “아, 은하?”

    이레네아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 길드 대표도 아닌 이사 주제에, 매번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기밀만 들고 와 신경을 긁는 인물이었다. 세미나에는 매번 절대 가기 싫다는 얼굴로 끌려오더니, 여기에는 왜 왔을까. 이레네아가 의미없이 돌리던 검을 고쳐 잡았다.

    “힘들어 보이는데, 인사나 해줄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레네아가 발을 떼었다. 길드원들이 둘러싼 공간 바깥에는 아직도 몬스터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이레네아는 그것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여유롭게 걸음을 내딛었다. 로렌도 긴장감 없는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느릿하게 도착한 헌터들의 뒤쪽, 그들이 구축한 방어선 바로 뒤에서 이레네아가 검을 고쳐잡았다. 얄쌍한 검신에 스킬을 때려 박는다. 무식하리만치 때려박은 스킬에 검이 웅웅 진동한다. 로렌이 안정화 스킬을 걸고, 이레네아는 왼손으로 검을 쥐고, 그대로 휘둘렀다.

    헌터들의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바람, 그리고 몬스터에게는 자비없이 터져나가는 칼날. 적을 찢어 발기는 바람이 한 차례 광장을 휩쓸었다. 이레네아가 인식한 몬스터들은 어김없이 갈라져 쓰러졌다.

    저가 상대하던 몬스터가 쓰러지자 그제야 배은하가 뒤를 돌았다. 이레네아가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건방진 이사 꼬맹이네?”

    “참나,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배은하가 땀에 엉긴 머리카락을 짜증스럽게 넘겼다. 웬만한 추격전에도 땀 한 방울 안흘리는 배은하가 저꼴이 될 정도면, 대치가 생각보다 길었던 것 같다. 이레네아가 검을 바닥에 가볍게 꽂아 기대섰다.

    “아직 죽을 때는 멀었지.”

    “살만큼 사신 줄 알았는데.”

    “말버릇하고는.”

    “제가 꼰대 어르신들하고는 유전자적으로 안 맞아서요.”

    땀과 피로 엉망이 된 얼굴이 능청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오랜만에 봐도 말 한마디 지지 않으려는 모습이 여전했다. 이레네아가 불만스럽게 눈썹을 까딱였다.

    “방송은 들으셨을 테고, 가실 겁니까?”

    배은하가 본부 쪽을 건너다 보았다. 방금 스킬 덕분에 현재 중앙 광장에 남은 몬스터의 수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경험상 곧 쓰러트린 보람도 없는 수가 다시 몰려올 것이다. 사람들의 대피도 아직이었고. 배은하가 미소를 거둔 얼굴로 물어오자 이레네아도 본부를 응시했다.

    “글쎄다, 내가 가봤자 도움도 안될텐데.”

    이레네아가 검에 기댄 왼손으로 손잡이를 툭툭 쳤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아무리 팔 한짝 날아갔다지만, 이레네아가 그정도로 무뎌질 사람도 아니고. 방금 스킬을 쓰던 것을 보면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는데. 배은하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답은 금세 떨어졌다.

    “딸래미 문제?”

    “그건 또 어디서 들었니?”

    너무 어이가 없다보니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이레네아가 먼 곳을 응시하던 시선을 배은하에게 돌렸다. 느물느물하게 웃는 모습이 아주 애슐린 같고, 재수없었다. 새파랗게 어린 놈 주제에. 배은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애가 좀 심약해서.”

    “할망구는 안 닮으셨나 보지?”

    “애 아빠를 닮았어.”

    이레네아의 팔이 날아간 그 균열에 아르마도 함께 있었다. 이레네아가 싸우는 장면, 달려나가는 장면, 지망생을 감싸고, 몬스터가 터지고, 이레네아의 팔까지 터지는 그 장면. 모든 것은 고스란히 아르마의 눈에 담겼다. 정작 이레네아는 몇 년 지난 일에 관심이 없었으나, 아르마에겐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간혹 허전한 이레네아의 오른팔을 보는 눈빛이 그랬고, 같은 균열에 서지 못하는 모습이 그랬다. 배은하는 이레네아가 굳이 말로 하지 않는 사정까지 대강 짐작해 냈다.

    “그럼 이쪽은 내가 맡지. 넌 네 똘마니들 챙겨서 균열로 가봐라.”

    이레네아가 차마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뚱히 서있는 이녹두와 신시아를 턱짓했다. 그러든지, 배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그래도 광장을 막아서 줄 사람을 찾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실력 하나는 확실한 이레네아 할망구가 맡아준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 사실 셋보다는 이레네아 하나가 가는 것이 균열 공략에는 효과적일 테지만 본인이 안간다는 데 굳이 가라고 등 떠밀어줄 이유는 없었다.

    “저거 프리메딕이죠? 우리 힐러 하나만 빌려주쇼.”

    “아주 당당하네?”

    이레네아는 눈썹을 까딱이면서도 로렌에게 적당한 놈 하나 골라오라고 손짓했다. 어차피 프리메딕은 제 길드도 아니었다. 하나쯤 빌려준다고 배 아프진 않았다. 든든한 힐러 하나를 손에 넣은 배은하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뒤를 돌았다. 슬슬 몬스터들이 또 몰려올 조짐이 보였다. 아직 본부에서 막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뭐 말이라도 전해줄까요?”

    이녹두와 신시아에게 뭐라뭐라 설명한 배은하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았다. 대상은 빠져있었지만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딸, 아르마 얘기겠지. 이레네아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할 시간도 없을 거다. 남의 가족사에 끼어들지 말고 싸움이나 잘 해라, 꼬맹아.”

    그러든지, 배은하가 또 다시 어깨를 으쓱이고 돌아섰다. 이녹두는 스킬을 써서 먼저 앞서가고 있었고, 배은하를 기다리던 신시아와 힐러가 함께 움직였다. 적당히 몬스터들을 피해가며 빠르게 전진하는 뒷모습을 이레네아가 잠시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몸 좀 푸시겠네요, 이사님.”    

    “그러게, 아르마가 알면 잔소리 하겠는데.”

    “하하, 저도 같이 있었다는 건 꼭 비밀로 해주셔야 돼요.”

    “생각해 보마.”

    짓궂게 웃는 이레네아의 표정에 로렌이 울상을 지었다. 배은하한테는 남의 가족사에 신경 끄라고 하더니, 비서인 저는 항상 곤란한 가족사에 끌어들였다. 아르마에게 잔소리를 듣는 거라든지, 남편에게 잔소리를 듣는 거라든지, 길드 대표한테 잔소리를 듣는 거라든지. 하지만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기 때문에 로렌은 곧 한숨 한번과 함께 체념했다.

    앞에서 몬스터가 다시 밀려들었다. 아마 저 몬스터 떼가 끊기는 때가 바로 균열에 진입을 성공했다는 신호겠지. 이레네아가 검에 기댔던 몸을 바르게 일으켰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엔 끝내면 좋겠네.”

    “불안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저는 죽기 싫단 말이에요.”

    “하하, 죽기 싫으면 아르마가 성공하길 빌어야지.”

    이레네아가 여상하게 웃으며 검을 고쳐잡았다.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내리라는, 해내야 한다는 믿음만을 새겼다.

    균열 공략 100주년, 인간과 균열의 2차 전쟁이 막을 올렸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