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칙'의 시대

균열 공략 100주년 기념행사 - 5

[김예한]

11월 30일, 100년 전까지는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그 날짜는 이제 그 어느 날보다 특별한 날이 되었다. 첫 균열이 생긴 날, ‘법칙’이 생긴 날, 첫 각성자가 생긴 날. 세상이 격변한 날이었다.

사람들에게 공포로 각인될 것이라 여겼던 그 날은 일주일 후, 첫 균열이 공략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로 기억되었다. 인류에게 새로운 발판이 생긴 날, 안전하지는 않아도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열어준 날, 신인류가 탄생한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을 기념하며, 중립국에서는 매년 11월 30일부터 일주일 간 균열 공략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온갖 관광객들이 중립국으로 모여드는 날이자, 합법적으로 모든 사람이 중립국에서 숙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였다. 당연히 좁은 중립국 내 숙박 시설은 물론이요, 주변 국가의 숙박 시설까지 몇 달, 몇 년 전부터 빼곡히 들어차 있는 날이다.

균열 공략 1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 올해는 아레나 개최 시기까지 겹쳐 있었다. 올해 12월 1일은 아레나 개최 40주년, 제 20회 아레나가 열리는 날이었다. 균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특히나 각성자들이라면 의미가 큰 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인 탓인지, 행사 개회식 전 날이자 아레나 개회식 전 날, 김예한도 간만에 감상에 젖어 아레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특히나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전투 부문 전용 경기장, 일명 헌터돔. 뭣모르는 비각성자 시절부터 봐왔고, 선수로서 보는 것도 벌써 3번째였지만, 볼 때마다 벅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유전적 스포츠광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으므로.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이어져 왔다는 김씨 가문의 스포츠 사랑은 그 종목만 다를 뿐, 굉장한 일관성과 꾸준함을 보여주었다. 김예한의 어머니는 축구, 아버지는 다이빙, 언니는 사격, 동생은 배구, 사촌 오빠 둘은 각각 아레나의 생산과 보조 부문을. 전부 다른 종목이어도 어떤 한 팀이나 선수를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결국 경기를 매번 찾아가다 못해 본인도 시작해 버린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그 운동을 적어도 아마추어 수준 이상은 해내 버린다는 실로 무시무시한 공통점까지 있었다.

김예한도 예외는 없었다. 태교도 스포츠로 한 김예한은 출생 직후, 신생아 시절부터 온갖 스포츠 경기를 보며 자랐다. 미친 일가 친척들은 돌잡이도 운동 장비로 했다. 돌잡이에서 온갖 공과 방망이와 수영복 등을 제치고 아레나의 공식 로고를 잡았다는 김예한은, 어떤 운명이었는지 초등학생 때 BB급으로 각성, 곧장 아레나 훈련에 뛰어 들었다.

그리하여 현재, SSS급, 공격 부문 한국 공식 랭킹 1위, 전세계 아레나 랭킹 3위권. 던전 공략을 취미로 두고 있는 바람직한 전투광, 국위선양,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 재능과 실력과 노력으로 거머쥔 영광의 자리였다.

오늘도 자랑스러운 김씨 집안의 일원 김예한은 영광의 반석, 헌터돔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감상을 내뱉었다.

“쓰읍…, 콩나물 국밥 땡기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원래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밥심이다.


“여업, 오랜만.”

김예한의 인별 라이브가 켜졌다. 마지막 인별 업로드로부터 약 10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대한민국 공인 인별 중독자 김예한치고는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김예한이 인별 업로드나 라이브를 이틀 이상 뛰어넘는 데에는 단 두 가지 이유만이 존재했다. 첫 번째, 던전 공략. 두 번째, 아레나 훈련. 이번에는 후자였다.

“보다시피 여긴 헌터돔이고, 알다시피 오늘이 개회식이고.”

김예한은 꼭 아레나 개회 열흘 전부터는 인별을 끊고 개회식 당일에 라이브를 켰다. 그래야 관심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관종의 생각 반, ‘나는 이렇게 여유롭다’를 보여주고 경쟁자의 멘탈을 흔들어 버리겠다는 유치한 생각 반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생각은 꽤 잘 들어 맞는데, 팬들의 반응도 좋을 뿐더러 언론의 반응도 좋고, 경쟁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팬들은 아레나에 대한 관심이 가장 증폭된 순간 켜지는 인별 라이브에 열심히 들어왔고, 언론은 대회 직전 자랑스러운 한국의 랭킹 1위가 한 말을 열심히 기록해 퍼다 날랐으며, 그 말에 선수들은 간혹 흔들리기도 했다. 물론 흔들리는 수준까지는 아니고, 그냥 약 올라서 김예한을 더 싫어하게 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어쨌든 앞 두 가지를 달성한 것만으로도 관종 스포츠 스타는 꽤 만족하는 편이었다.

“오늘은 행사 개회식 오전에 먼저 하고, 저녁에 아레나 개회식 한다더라고.”

인별 라이브를 켠다는 소식에, 외부 유출 금지인 대기실에서 쫓겨난 김예한은 헌터돔 건너편 공원으로 슬렁슬렁 걸어가는 중이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화면으로 셀카 구도에 담긴 김예한이 비치고 있었다. 대중에게는 더없이 익숙할, 약간 비뚜름하게 미소 짓는 여유로운 표정. 사람들이 자신의 이 표정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김예한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큰 대회를 앞두고 짓는 이 표정은 효과가 좋았다.

오늘도 예상대로 시청자 수는 십만 단위를 뚫어갔다. 아레나에 대한 관심과 김예한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숫자였다. 김예한은 빠르게 올라가는 숫자와 채팅창을 만족스럽게 훑으며, 적당한 벤치에 걸터 앉았다. 하트와 우는 이모티콘과, 열기어린 한국어의 외침, 종종 외국어. 간혹 눈에 띄는 댓글을 하나씩 읽어주면 채팅창은 더 빠르게 치솟았다.

“‘언니, 긴장은’…, 아, 올라 갔네. 뭐, 긴장 안되냐, 그거겠지?”

매번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었다. 긴장 안되냐. 한 나라의 꼭대기를 차지하고, 전 세계의 머리까지 올라 앉은 사람이니 그 무게가 무겁지는 않냐고, 그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것이 두렵지는 않냐고. 아무리 김예한이어도 긴장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자리였다. 김예한은 자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매번 물어봐야 알아?”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질문이 지겨워지지는 않았다. 매번 자신에게 업히는 기대와, 희망과, 어떤 칭송의 확인. 동시에 이 사람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확신. 타고난 스포츠스타이자 관종에게 그런 식의 감정은 항상 기꺼운 법이다. 김예한은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입꼬리가 비죽 말려올라가고 황금빛 눈동자가 옅은 아침 햇살 아래 예리하게 반짝였다.

“내가 이길 건데, 긴장은 왜 해?”

언제나와 같은 여유와 확신.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을 찾아 이 방송에 찾아온 사람들은 언제나 그것을 원했다. 그런 사람이 이겼을 때도, 졌을 때도 재밌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채팅창은 또 다시 폭주했다. 광기에 가깝게 올라가는 채팅창의 속도에 김예한이 짐짓, 어이구,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무 빨라서 뭘 못 읽겠네, 하여간.”

의도한 결과를 내고도 아닌 척, 모르는 척 한 번 해주는 게 이 바닥 예의였다. 김예한은 본인만 아는 예의에 따라 너스레를 떨었다. 사람들은 그런 반응까지 좋아했다.

한참만에 조금 가라앉은 채팅창을 보며, 김예한은 오늘 먹은 아침이나, 중립국의 브런치 맛집이나, 지난 열흘 간 한 훈련(자세한 내용은 당연히 비밀이었다) 따위의 수다를 떨었다. 김예한이 한적한 공원을 슬슬 걷다가 막 시계탑 아래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막 10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제 기념행사 개회식 시작 시간이네? 다들 보러 안가?”

11월 30일의 오전 10시는 균열 공략 기념행사의 개회식, 그리고 오늘 오후 7시에는 아레나 개회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제 기념행사 개회식이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김예한은 스포츠가 아닌 행사 따위에는 별 관심 없었으므로 개회식이 시작하든지 말든지 상관은 없었으나,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아레나 개회식 당일에 헌터돔 앞이 이렇게 한적한 것도 다 기념행사 개회식 때문이니까. 그런 개회식이 뭐가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것도 그가 알바는 아니었다.

“와, 아무리 내가 말했다지만 그렇다고 바로 빠져나가는 것 좀 보게. 의리 없긴.”

라이브를 켠 후 쭉 상승세를 유지하던 사람 수가 쭉쭉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쯤되면 라이브도 끝낼 생각이었지만, 김예한은 괜히 혀를 차는 시늉을 한 번 했다. 아직 남아있던 팬들이 웃으며 마주 장난을 쳤다. 순식간에 채팅창에 드립이 날아다녔다. 김예한이 채팅을 읽으며 폭소를 터뜨렸다.

라이브는 그런 식으로 한동안 더 이어졌다. 채팅창은 쭉 장난스럽고 쾌활한 분위기였다. 채팅 속도가 줄어들고 분탕질을 치는 채팅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지만, 언제나처럼 금방 삭제되었다. 김예한이나 시청자들이나, 아직까지는 기분이 좋았다.

펑, 펑.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김예한이 고개를 들었다. 저쪽, 협회 건물 너머의 하늘에 붉고 푸른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해가 환하게 난 아침인데도 선명하게 보이는 불꽃이었다. 각성자들이 쏘아올린 불꽃. 기념행사의 개회식도 끝난 모양이었다. 대체 라이브를 얼마나 한 거야, 김예한은 정말 방송을 마무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럼 다들 남은 개회식 잘 보시고. 있다가 아레나도-.”

봐주세요.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화면을 가득 덮은 채팅 때문이었다. 아까보다 빠르게 올라 가는 채팅창은 김예한의 동체시력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중간중간 물음표가 찍힌 말이나 화를 내는 댓글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하나의 말이 반복적으로 밀려 들었다.

‘%$&%#의 문이 열렸다.’

사이비인가? 오류? 먼저 든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평소와 비슷한 어그로라고 여기고 방송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찌르르한 직감. 무언가 이상했다.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불안감은 금세 부피를 부풀리고, 부풀리고, 부풀려서, 머릿속을 터질 듯 채우고 척추를 따라 내달렸다.

이상했다. 이런 식으로 되도 않는 관심을 끄는 부류는 익숙했고, 이런 사이비 같은 말이 처음도 아니었다. 시스템을 어떻게 만졌는지 말도 안되는 도배를 하고 있진 했지만 그것도 이렇게 당황할 정도의 큰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뭔가, 잡을 수 없는 것이.

…뭔가가 잘못됐다.

김예한은 곧장 방송을 종료하고 자리를 박찼다. 공원 초입에 세워 놓은 바이크에 다급하게 시동을 걸었다. 이딴 개같은 직감이 드는 이유는 항상 하나밖에 없었다. 균열. 근처에 균열이 터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큰 게.

김예한의 직감은 틀리는 일이 없었다.



김예한의 직감은 틀리는 일이 없었다.

“…시발.”

경기장이 모여있는, 통칭 ‘아레나’의 앞, 협회 본부와 이어지는 길. 도로 위에 비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예한이 쓰고 있던 헬멧을 던지고 달려 나갔다. 샛노란 눈동자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괴물에게 고정된다. 아이템창은 보지도 않고 손에 익숙한 것을 꺼내들었다. 달리던 몸에 꾸욱, 힘이 실리고 그대로 뻐억. 막 사람을 하나 물어 뜯으려던 괴물이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순간 울린 엄청난 타격음에 괴물 앞에 굳어 있던 사람까지 고개를 들었다.

샛노란 눈을 빛내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뻐억, 확인사살을 위해 쓰러진 괴물의 머리를 다시 내리친다. 균열 신물질로 만들어진 튼튼한 빠루가 괴물의 머리 비슷한 부분을 박살내는 모습을 고스란히 마주한 시민은 약간 졸도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김예한은 빠루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고개를 들었다가, 하얗게 질린 시민을 보고 다시 이를 드러내듯 웃었다.

“살고 싶으면 저쪽으로 가지?”

아직 괴물들이 가지 않은 방향으로 턱짓을 했다. 국적도 언어도 달라보이는 이 사람이 알아들은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래지는 것을 보니 못 알아들었나 보다. 김예한은 여상하게 생각하며 오른쪽으로 덤벼드는 괴물의 대가리를 깼다.

제 껄렁한 태도와 말투, 고양감에 지어지는 표정, 그리고 타칭 ‘짐승 같은 전투방식’ 때문에 두려움을 사는 건 매번 있는 일이었다. 제 표정과 태도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는 가족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딱히 모르지도 않았다.

그래도 주변만 조금 정리해주면 알아서 기어 나가니까 상관은 없겠지. 김예한은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빡, 빠악, 연속으로 빠루를 휘둘렀다. 등을 돌리자마자 다급하게 떠나는 시민의 기척이 느껴졌다.

뻐억. 대가리 하나에 한 걸음, 일단 김예한은 평소 균열을 공략하던 버릇대로, 균열과 가까울 것이라고 추정되는 곳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아직 균열이 열린지 얼마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균열의 등급이 낮은건지, 아직은 혼자서 빠루로도 대충 정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던 비명 소리가 점점 줄어들어갔다. 김예한이 무자비하게 뚫어놓은 길을 따라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들이 간간히 보였다. 김예한이 곁눈질로 시민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빠루를 가볍게 휘둘렀다.

“아, 귀찮게.”

뻐억. 결코 가볍지 않은 소리와 함께 괴물의 몸이 무너졌다. 그 위에 피도 대충 털어주고 김예한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불길한 기운이 강하게 뭉쳐진 것만 같은 느낌. 균열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곳. 멀지는 않았다. 뛰어가면 금방 닿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 균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균열’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균열은 마치 잘못 생긴 틈새처럼, 언제나 공간의 한 쪽을 찢은 듯한 모양새로 나타나곤 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것이, 혹은 그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면 나오는 것이 괴물. 지금 김예한이 대가리를 깨고 있는 이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습을 감춘 균열과, 마치 텔레포트라도 하는 것처럼 어떤 공간에 무더기로 생겨나는 괴물들이 있었다. 이따위 변화는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저따위 꼴을 보면 괴물들의 소리 빼고는 지나치게 조용한 사위도 이해가 됐다. 균열 알림도 없고, 사이렌 소리도 없고, 헌터들도 없고. 아레나와 협회 본부 사이라고는 해도 두 장소 모두 걸어서 갈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다. 육안으로 이변을 알아채고 지원군이 오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핸드폰은 급하게 달려오다가 어디서 떨어뜨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젠장.

김예한은 직감적으로, 또한 본능에 가깝게 돌아가는 추론으로 알아챘다. 이 균열은 존나게 위험할 거다. 진짜로, 상상도 못해봤을 만큼.

“100년 기념 선물을 줄거면 좀 좋은 걸 줘야지, 미친놈이.”

쯧, 김예한이 맹렬하게 혀를 찼다. 일단 균열의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이걸 균열이라고 칭해야 하는지 부터가 의문이었다. 대충 균열과 비슷한 기운이 뭉친 곳은 알겠지만, 보이지도 않는 균열을 어떻게 닫으라고? 애초에 거기서 이 괴물들은 어떻게 뱉는 건데? 장난 까냐고?

김예한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쨌든 피해를 줄이려면 의문을 가지고 추론을 할 시간따위 없었다. 김예한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보통 외부형 균열은 육안으로 보이는 균열에 충격을 주면 닫힌다. 그렇다면, 이렇게 괴물을 마구 생성해 내고 있는 균열인지 뭔지 모를 기분 나쁜 공간도 일단 후려쳐 보면 되겠지. 혹시 다른 돌파구가 생각날까, 잠시 주시하고 있었지만 역시 이 방법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김예한은 정면에서 달려오는 괴물의 머리를 뻑 후려치고, 바닥에서 짱돌 크기의 아스팔트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아직 다시 주변까지 달려온 괴물은 없다. 방금 괴물들이 소환됐고, 어느정도의 텀이 있는 것 같으니 지금이 기회였다. 빠루를 잠시 아이템창에 넣고, 딱딱한 아스팔트 조각을 꾹 쥐었다. 스킬 발동, 폭탄, 위력 강화, 중첩 5회. 네모반듯한 창이 빠르게 떠올랐다. 기이한 푸른빛이 김예한의 오른손을 맴돌았고, 곧 흡수되듯 사라졌다.

제발, 이걸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절대로 그럴리 없을 거라는 강렬한 불안감과 일말의 희망. 김예한은 할머니에게 배운 야구 투수의 폼으로 아스팔트 조각을 날렸다. 감히 인간이 낼 수 없을 법한 속도로 날아간 검은 것이 돌연 퉁, 어느 지점에 막힌 듯 멈췄고, 그 즉시 콰아앙. 굉음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대인 사용이 금지되어 균열 공략 때나 간간이 써먹는 스킬이었다.

후우웅, 조금 떨어진 김예한에게도 열기와 바람이 밀려들었다. 김예한은 보호복으로 감싸인 팔을 대충 들어 얼굴을 막았다. 유난히 기분 나빴던, 괴물들이 소환되던 곳의 정중앙에서 무언가에 걸려 폭발. 역시 균열이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충격을 줬으니 닫힐 것인가? 한 차례 파열음이 지나고 난 뒤, 팔을 내리고 다시 그곳을 봤을 때.

김예한은 직감적으로, 또한 본능에 가깝게 돌아가는 추론으로 알아챘다. 이 균열은 존나게 위험할 거다. 진짜로, 상상도 못해봤을 만큼. 그리고 김예한의 직감은 틀리는 일이 없었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균열보다 거대한 균열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김예한은 그 메시지를 봤다. 네모반듯한, 반쯤 투명한 푸른 창, 그 위에 하얀 글씨로 가지런히 쓰여 있는 ‘법칙’의 선언을.

< %*&%#의 문이 열렸습니다. >

“그게 뭔데, 시발….”

‘법칙’. 인류를 멸망시킬 듯 했으나 인류의 기반이 되었고, 그럼에도 언제나 인류를 멸망시킬 것만 같은 힘. 어쩌면 어떤 규칙. 인간은 지난 100년 간 ‘법칙’을 이해한 적이 없었다. 단 한 순간도. 김예한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깨달음만 얻었다.

균열은 닫히지 않았다. 괴물들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균열의 모습이 드러났음에도 사이렌이 울리지 않는 사위는 기이하리만치 고요했다. 여전히.

여전히. 김예한은 무의미한 추론을 그만두었다. 이해 따위가 이 혼돈에서 김예한을 구해주지는 못한다. 이해할 수 없다면 그저 후려치고 패버릴 수밖에. 김예한이 이를 갈았다.

사이렌 소리가 울린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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