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백천 - 別有乾坤 (1)
이런 생각이 우습게도 믿음이 생기니 희망도 같이 생겼다.
* 2023.09.17 일자 글 백업
忽到窓前疑是君 *
갑자기 창 앞에 보이는 매화꽃이 그대인가.
*당나라 시대의 시인 노동盧仝이 쓴 시, 유소사有所思의 일부분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사이사이로 은은한 매화향이 맴돈다. 도시에선 쉬이 맡을 수 없는 달달한 향에 슬며시 감았던 눈을 뜨자 높디 높은 푸른 하늘이 진동룡을 반겼다.
진동룡은 평소 잘 보지 못했던 하늘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했다. 이유도 없이 마음이 평안했다. 바람이 선선히 불어올 때마다 흰 구름은 천천히 푸른 하늘을 헤엄쳐갔다. 청명한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진동룡은 한순간 눈이 부셔 눈을 다시 감았다.
곧 아무런 행동도,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누워만 있자 조용히 바람 부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진동룡은 문득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했다. 방학식을 끝내자마자 바로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온 것까지는 떠올랐으나 그 뒤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인의로 기억을 끊어놓은 것처럼, 막아놓은 것처럼. 하지만 또 굳이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면 의구심을 갖지 않을 정도였기에 아니, 오히려 기억하지 않으려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진동룡은 그 사실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며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슬쩍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과 절벽 너머로 보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늘어져 있는 험난한 산봉우리들과 땅을 대신하여 가득 차 있는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도시에선 볼 수 없는 풍경에 진동룡은 잠시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 항상 높은 건물과 빠르게 지나가는 차, 피곤에 찌들어 같은 삶을 반복하는 사람들만 봐오던 진동룡에게 이런 풍경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옛사람들의 이상향이라 할 수 있는 도원향桃園鄕의 입구가 바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휙─하고 빠르게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진동룡은 막힘없이 펼쳐진 풍경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는 순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차오르는 마음에 오른손을 들어 옆에 있을 이를 잡고 얼굴을 보며 얘기하려 고개를 돌렸다.
“형! ……형?”
신이 나서 내뱉은 말이 무색하게도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그저 의문이 가득 담긴 단어일 뿐 진동룡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곁에 있는 이를 잡으려던 손은 목적을 잃은 채 허공을 배회했고 자신의 부름이 향할 곳엔 그 부름을 받을 이도, 다른 그 무엇도 없었다.
잠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혼란스러운 진동룡의 마음을 모르는 바람은 그저 짙은 매화향을 흘리며 지나쳐갔다.
진동룡은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혼자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이곳엔 자신만 존재했다. 분명 저와 함께 온 가족들이, 제 기억 마지막까지 제 곁에 있어 주었던 형님들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은 진동룡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움직이며 주변을 보아도 이곳엔 오직 자신 혼자만이 서 있을 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정말로 이곳에 자신 혼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동룡은 한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진동룡은 저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고 처음 겪는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두려움에 의해 빠르게 뛰는 심장과 함께 가빠진 숨으로 인해 진동룡은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지만, 머릿속 한 편에선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발자국 걸음을 내딛자 진동룡의 발에 묵직한 물건 하나가 차였다.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니 가방 하나가 놓여있었다.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여행을 가기로 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여행에도 가져왔던 가방이었다. 진동룡은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 안에는 필통, 휴대폰, 지갑, 공책과 문제집 등과 같은 고등학생이 갖고 있을 법한 물건만이 존재했다. 진동룡은 딱히 쓸만한 것이 없는 가방 속을 확인했다. 곧 쯧, 하고 짧게 혀를 찼으나 그래도 휴대폰이라도 들어있음에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꺼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키며 진동룡은 익숙하게 가방을 멨다. 휴대폰 화면에선 불빛이 들어오더니 곧 잠금화면이 보였다.
잠금을 해지한 진동룡은 통화나 문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이나, 안타깝게도 깊은 산 속에서 인터넷은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통화권 이탈이라는 안내 문구만이 진동룡의 눈에 비추었다. 안내 문구 외에 다른 알림이 없는 것을 확인한 진동룡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 전원을 다시 껐다. 차후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배터리가 부족할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곧 휴대폰 화면을 가득 채웠던 밝은 빛이 사라지고 어두운 화면만이 남았다. 어두운 화면에는 진동룡의 근심스러운 얼굴이 담겨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무얼 할 수 있지?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 내 가족들은? 가족들에겐 아무 일도 없겠지? ……….
수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은 진동룡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던 진동룡은 차마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에 거짓으로라도 답하지 못하였다.
아무리 험준한 산이라도 사람이 있지 않을까? 가족들은 괜찮을 거야. 나도 곧 사람들이 찾으러 올 수도 있지.
같은 조금의 희망이라도 담긴, 예상으로라도 할 수 있는 말조차도 쉬이 내뱉지 못한 진동룡은 결국 끄으응……. 소리를 내며 자리에 쭈그려 앉곤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 상태로 몇 분을 있었을까. 슬슬 다리가 저리는 것을 느낀 진동룡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이곳에만 가만히 있어봤자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불안감만 커질 것이 분명했다. 어디로든 가야 한다. 더군다나 이곳은 해발고도가 높은 산이 아닌가. 이대로 밤이 찾아왔다간 매서운 추위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험난한 산속에서 가진 거라곤 가방에 있는 물건이 전부였고, 등산을 하기엔 불편한 교복 차림인 진동룡이었으나 그럼에도 가만히 서서 안주하며 올지도 모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보단 위험할지라도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래, 가는 거야. 뭔 일 있겠어? 진동룡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읊조리곤 길이 나 있는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동룡은 그저 험난한 산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보통이라면 산을 내려가는 것이 맞았겠지만 진동룡은 내려가는 것보단 오르는 것을 택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산을 오르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하여 진동룡은 숨이 턱 끝까지 차다 못해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듦에도 진동룡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을 확인했고, 앞에 나 있는 길을 확인했다.
준험한 산길 속에서도 풀이 나지 않은 널찍한 길과 이유를 알 수 없이 이리저리 남아있는 바퀴 자국들. 진동룡은 그 흔적들을 되짚으며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아예 없는 길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중간중간 이상하게 파여있는 땅이나 날카로운 흠집이 난 나무들도 있었기에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진동룡은 애써 그것들을 무시했다.
진동룡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얼마나 올라왔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산은 평소 운동을 하던 이에게도 무척이나 힘겨웠다. 선선하다 못해 이제는 점차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땀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바지에 있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낸 진동룡은 뒤를 돌아 저가 걸어온 길을 확인했다.
처음 걸음을 옮길 땐 이 산을 쉽게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딱 보아도 만만하게 볼 산새가 아니지 않은가.
다만 평소 운동을 해온 것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조금의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체감상 느낀 시간과 자신이 걸어온 길을 보면 그 자신감이 무색하게도 그리 먼 길을 올라온 것 같진 않았다.
체력도 이제 거의 다 떨어졌고 산의 고도도 높아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숨을 내쉬는 건 한 번으로 끝낼 수 있었어도 숨을 들이마시는 데는 그 배로 오래 걸렸다. 땀도 비 오듯 흘러내린 건 아니었지만 불편한 교복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거기에다 슬슬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보통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만 포기하겠다고 걸음을 멈췄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동룡은 포기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은 더 움직일 수 있었고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아직 더 할 수 있었기에 끝이 아니었다.
순간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산행에서 곧 정상에 도착할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겼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사이에 온 산에서 믿음이라니…. 진동룡은 처음과 달리 생겨난 알 수 없는 믿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뭘 믿고 어디서 이런 믿음이 생긴 거지?
처음 눈을 떴을 때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는 거짓으로라도 희망스런 답을 내뱉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뭘 믿고 이런 믿음이 생긴 지…….
진동룡은 정말로 알 수 없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이 산에 대해서 듣지도, 보지도, 알지도, 오지도 않았다. 이는 집 안에 놓인 제 큰형의 번쩍번쩍한 로스쿨 합격증을 걸고서 말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우습게도 믿음이 생기니 희망도 같이 생겼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쉼 없이 돌아가던 머리는 이제야 휴식을 취하듯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믿음이 생기니 희망이 생겼고 희망이 생기니 조금은 쉬어갈 여유가 생겼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수많은 산등성이 넘어 슬슬 몸을 숨기려 하는 태양을 보았다.
진동룡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다가 천천히 내쉬고는 짧고 굵은 기합 소리를 냈다. 휴식은 이제 끝이었다.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에 넣곤 가방을 들썩이고 자신이 가야 할 방향으로, 산의 정상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알 수 없는 믿음이 정말이었던 것처럼 진동룡은 곧 오래되어 보이는 대문 하나를 발견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문을 두드려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 사이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숨을 고르게 내쉬려 노력한 진동룡은 곧 천천히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가서 본 문은 무척이나 컸고 생각보다 깨끗했다. 단단하게 세워진 기둥과 항상 깨끗하게 쓸고 닦는지 더러운 곳이 없었다. 특히 문 위에 있는 한자로 뭐라 쓰여있는 현판은 반짝반짝 광이라도 내듯 닦는지 무척이나 깨끗했다.
물론 본인도 더러운 것보단 깨끗한 것을 선호하고 언제나 깨끗하게 하고 다닌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무언가 광이 날 때까지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오래된 유적지나 역사서에서만 볼법한 건물을.
진동룡은 순간 자신이 혹시 문화재나 사유지에 들어온 것은 또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곧 그나마 나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진동룡은 짧게 숨을 내쉬며 긴장한 제 몸과 마음을 풀어냈다. 그러곤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안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진동룡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곤 안에서 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곤 문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제가 길을 잃었는데, 혹시 하루 신세를 질 수 있을지….”
진동룡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살짝 열렸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어떤 이와 안도하듯 미소 짓는 진동룡의 눈이 마주치자 진동룡의 말이 끝맺기도 전에 다시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뒤로 다급하게 달려가며 사, 사형..! 하고 몇 번이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며 멀어졌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진동룡만이 무슨 일 벌어진 것인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진동룡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문을 닫아버린 이를 떠올리며 혹시 저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인가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을 때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문을 닫아버렸다는 건…….
진동룡은 저가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새하얗던 운동화는 어느새 흙이 이곳저곳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교복 바지와 셔츠도 땅에 누워있거나 앉아있었으며, 산을 오르는 중간중간 체력이 부족해 발을 헛딛는 등의 실수로 흙투성이가 된 지 오래였다.
진동룡은 곧 저의 꼴이 거지꼴과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중간에 계곡이나 물웅덩이라도 있나 보고 오는 건데.
하지만 지금 후회해봤자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없었다. 진동룡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망했다. 이거 진짜로 망했다. 어떻게든 될 것이란 막무가내로 이 높은 산을 올라온 진동룡은 만약 실패했을 때를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순간 머릿속에 그러니까 네가 안 된다는 거다, 진동룡. 이라는 재수 없는 큰형의 목소리와 그래도 잘될 거야, 동룡아. 라는 온화한 작은형의 목소리가 울리긴 했으나 진동룡은 손으로 휘적이며 그 목소리를 날려버렸다.
실체도 없는 것이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 나갈 수 있는가였다.
진동룡이 얼마나 좌절에 빠져있었을까. 어느새 문 안쪽에선 시끌벅적한 소리가 가득 차 있었다. 진동룡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신발을 땅에 탁탁 쳐 흙덩이를 떨어트리고 흙투성이의 셔츠와 바지는 손으로 툭툭 털어내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진동룡이 그러고 있는 와중에 문이 천천히 열리며 아까 보았던 이와는 다른 이가 나왔다. 진동룡은 그 사람을 향해 다시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진동룡의 머쓱한 웃음을 본 사람은 말없이 진동룡을 쳐다보았다. 진동룡은 그 눈빛을 보며 그렇게 흙을 털어냈음에도 여전히 거지꼴인가 싶었다. 하지만 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말을 하지 않으니 진동룡이라도 먼저 말을 꺼내야 했다.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저를 쳐다보던 이가 한순간에 말도 없이 문을 닫고 들어갔다.
진동룡은 다시 닫힌 문을 보며 허무하게 뭐야? 라는 말밖에 내뱉지 못했다. 이거 혹시 트X먼쇼야? 세상이 날 두고 놀리는 그런 거야?
진동룡은 사실 이 상황이 제 큰형의 아주 스케일 큰 장난일 뿐이길 바랐으나 문 안쪽에서 우당탕탕 시끌벅적한 소리와 야 이 새꺄 내가 네 사형이다! 걔 말고 ─을 불러와! 얼른! 같은 소리와 중간중간 들리는 악! 미쳤어?! 라는 소리를 들으며 제 형이나 가족들이 이런 아수라장을 벌일 리 없음을 상기했다.
결국 진동룡은 시끌벅적한 소리를 배경 삼아 문이 다시 열리기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산등성이 넘어로 몸을 숨기며 하늘을 검붉게 물들일 즈음에야 문이 다시금 열렸다. 진동룡은 이번에도 문이 닫히면 또 언제 열릴지 모른다는, 자신이 하루 묵을 곳이 아예 사라진다는 절박함에 문이 열리고 나오는 이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다가가 말을 쏟아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이 산이 사유지라면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저도 모르는 사이 산에 쓰러져있다가 깨어나서 길 찾다가 온 것뿐이고요. 제가 아직 학생이라 지금 갖고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길도 잘 몰라서 그런데 진짜 오늘 하루만 묵고 갈 수는 없을까요? 방도 좋은 거 필요 없습니다. 그냥 잘 수 있는 공간이기만 하면 됩니다. 방이 없으면 창고도 좋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는대로 바로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은혜도 차후 다 갚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오늘 하루만 묵고 갈 수 없을까요?”
진동룡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며 앞에 있는 이를 쳐다보았고 문을 열고 나온 이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놀란 눈으로 진동룡을 쳐다보았다. 곧 진동룡은 자신이 너무 상대를 몰아붙였다는 생각이 들어 부담스럽게 다가갔던 거리를 한 발자국 물러서곤 방금 전 다급히 말을 쏟아내던 때와는 달리 점잖은 모습으로 상대에게 너무 자기 할 말만 했다며 사과의 말을 전하였다. 상대는 눈을 끔뻑이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할 말을 다 쏟아낸 진동룡은 이제야 자신 앞에 선 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이는 문득 보면 무섭다고 생각할 수 있는 투박한 얼굴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꽁지머리로 묶어서는 옷은 앞섬을 다 까고 있었다.
뭐지 이 사람? 진동룡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곧 상대도 정신을 차렸는지 진동룡을 보며 어색하게 말하였다.
“사, 아니 외인이 하루 묵고 가는 것은 장문인께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허락만 된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진동룡의 답을 들은 이가 황급히 뒤에 서 있던 이들 사이로 사제라고 부르며 한 명을 부르더니 얘기를 나누었다. 진동룡은 그제야 문 안에 모여든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진동룡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입을 연 채 다물지 않았고 누구는 놀라서 쓰러지기 직전이며 누군가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서있었다. 진동룡은 그들이 왜 그렇게 놀라서 자신을 쳐다보는지 몰랐다.
오히려 진동룡은 본인이 놀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나같이 도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라던가 박물관이나 사극 장르 영상매체에서나 볼법한 장신구를 한 이들이 한가득했다.
혹시 사유지나 문화재가 아니라 촬영지였나? 진동룡은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앞에 있는 이와 문 뒤에 있는 이들을 훑어보았다.
“저 혹시……….”
“아, 네.”
서로 신기한 것을 보는 듯 쳐다보던 진동룡과 사람들 사이로 목소리 하나가 들어왔다. 진동룡의 생각이 그대로 끊겼다. 목소리엔 살짝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진동룡은 그 목소리의 주인인 제 앞에 있는 이를 보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 그것이…….”
진동룡은 이런 질문이 썩 좋지는 않았다. 물론 사람이란 것이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상대와 어떠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에는 좋다지만 그건 이름이 아무 문제 없을 때의 일이지 저처럼 이름이 진동룡. 그것도 형제들과 나란히 하면 진금룡, 진은룡, 진동룡인 상태에서는 이름을 소개하는 일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제 이름을 불렀을 때 구수하고 친근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놀림 받기 쉬운 이름이기도 했다. 초삼이 같은 들었을 때 어떻게 사람 이름이? 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름보단 백천같이 세상에는 이쁜 이름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운雲 자, 백白 자, 청靑 자와 같은 글자가 들어간 이름이라던가, 굳이 예쁘지 않아도 명明 자, 현玄 자 같은 멋진 글자들 말이다.
진동룡은 꼭 성인이 되고 나면 제 이름을 개명하길 다시금 마음 먹으며 사회생활을 위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진동룡, 이라고 합니다.”
푸핫! 순간 문 뒤에서 웃음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동룡은 그 웃음소리 뒤에 따악! 하는 아주 묵직하고도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야 이 미친놈아!라는 일갈이 들렸다. 울려 퍼지는 비명을 무시하며 진동룡은 입꼬리를 힘껏 올려 웃었다. 진동룡이 웃어 보일수록 앞에 있는 이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진동룡의 눈치를 봤다.
진동룡은 저보다도 나이가 많은 이가 제 눈치를 보는 것이 참 묘한 느낌에 결국 앞에 있는 이에게 저는 괜찮습니다. 하고 말해주었다. 그제야 앞에 있는 이는 안심한 듯 후! 하고 짧은 숨을 내쉬곤 하하 웃어 보였다.
“아, 저는 조걸이라고 합니다.”
순간 뒤에서 뭐라 말이 들렸으나 앞에 있는 이─ 조걸이 별말 없이 손을 휘휘 흔들어 그 말을 막았다. 진동룡은 그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반갑다고 말할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 아쉬움을 표하던 조걸이었으나 진동룡은 알지 못했다.
저 먼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매우 빠른 발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누군가 다른 이를 말리는 목소리와 함께 다른 몇 명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여있던 이들이 사색이 되어선 빠르게 거리를 벌리는가 하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는 이들도 있었다.
진동룡은 이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좀 풀어져 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진동룡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고 싶어 문 뒤의 상황을 보려 했으나 그 순간 막아서라! 라는 말이 들려오며 조걸이 진동룡의 앞을 막아섰다.
“청명아, 멈춰라!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정확히 모르지 않느냐, 진정하거라!”
소란의 주인이 꽤 가까이 온 것인지 시끌벅적했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려왔다. 진동룡은 아무 말 없이 제 앞을 지키듯 서있는 조걸를 보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동룡은 이 사건의 주인공이 매우 위험한 이인가 싶었다. 곧 빠르게 걸어오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진동룡은 조걸 어깨 너머로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았다. 머리를 한데 높게 묶어 올린, 다른 이들보다 더욱 젊어 보이는 그는 무척이나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를 필사적으로 말리는 이가 있었다.
그는 앞머리 한쪽을 내리곤 반묶음을 한 채 머리에는 마치 옛날에나 사용할 법한 도관을 하고 있었다. 입은 옷의 모양새를 보았을 때나, 그 혼자 다른 옷감을 입은 것을 보았을 때, 화가 난 이─ 청명을 말리는 저 이가 이곳에서 제일 높은 이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진동룡은 다시 시선을 살짝 옮겨 청명이란 자를 보았다. 그는 뭐가 그리고 화가 나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러다 누구 한 명을 죽이던가 하겠네.
“야.”
순간 매우 날카로우며 낮은 음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청명을 말리려던 이도 주춤거리며 살짝 거리를 벌렸고 조걸은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그 사이에서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진동룡만이 조걸의 어깨 너머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청명을 바라보았다.
진동룡의 얼굴이 조걸의 어깨 너머로 빼꼼하고 나왔다. 조걸보다 진동룡의 키가 더 컸으나 덩치 차이로 잘 보이지는 않았기에 진동룡의 얼굴을 조걸을 제외한 그들에게 제대로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너.”
다시 한 번 불리는 부름에 진동룡과 청명의 시선이 얽힌다. 그리곤 이곳에 있던 이들이 왜 그렇게 그를 두려워했음을 진동룡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저에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방금 전과는 다르게 저가 서있는 이 공간의 모든 것이 차가우며 무거웠고 날카로웠다. 드문드문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은 마치 뱀이 똬리를 트는 것만 같아 진동룡은 소름이 끼쳤다. 생전 처음 느낀 감각이었다.
이 감각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진작 느끼고 있었던 건가? 그럼에도 꿋꿋이 서서 말하고 있었던 건가? 진동룡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몸을 느끼면서도 시선은 오직 청명을 향해 있었다. 시선을 떼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뭐 하는 새끼냐?”
청명이 말했고 진동룡이 읽었다. 눈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험한 산행으로 지쳐있던 몸은 처음 경험하는 감각에 마비되어 차마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으니까.
곧 진동룡의 시선이 빙글빙글 돌며 세상이 엎어졌다. 엎어진 시야를 갈무리하던 진동룡은 저를 내려다보는 이들을 보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이들 사이로 검붉게 변하다가 자줏빛으로 바뀌어 물드는 하늘을 보며 저가 쓰러졌음을 진동룡은 깨달았다. 아, 저 사람이 누구 한 명 죽일 듯이 왔더니만 그게 나였나 보다.
진동룡은 저에게 다급히 모여들어선 뭐라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입을 읽던 눈도 결국 한계에 도달했는지 모든 것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긴장감 속에 억눌려 있던 피로감이 결국 한계치를 넘자 터져 나왔다. 눈이 점점 감긴다. 그들이 분명 자신에게 뭐라 말을 걸고 있음을 진동룡은 무의식적으로 깨달았으나 그들의 말을 듣거나 답하지는 못했다. 분명 무어라 말하는 것 같은데……….
잘 자.
순간 익숙하면서도 처음 듣는 다정한 음색의 목소리가 진동룡의 머릿속에 울렸다. 진동룡은 그 목소리에 쌀쌀한 바람을 느끼며 어두운 공간에 몸을 맡겼다.
달달한 안식이 찾아왔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