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청명백천 - 배꽃나무 아래에서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합시다.”

보따리 by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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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 청명 X 인간 백천

* 사망 소재가 있습니다.

* 약 2만 자. 

*2024.02.25 일자 글 백업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합시다.”

 

즐거운 듯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 찬 이가 말했다. 청명은 지루하여 감았던 눈을 슬쩍 뜨곤 그리 말한 이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번듯하게 값비싼 하얀 옷을 입곤 단 한 점의 더러움도 용납하지 않는 이. 백천은 언제나 그 모습이었다. 백천이 지금보다도 어렸을 때. 그러니까 아직 가족에게서 진동룡이라 불리였을 때부터 말이다. 푸른 옷을 입는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백천은 언제나 하얀 옷을 입었다. 검은 옷을 입고 찾아온 적도 있긴 했으나 그것도 몇 번뿐이지 그 외엔 언제나 하얀 옷이었다. 그럼에도 별말 하지 않음은 청명이 그에 대해 뭐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요, 새하얀 옷이 그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청명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음을 눈치챈 백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모습이 청명의 눈엔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가 심통 난 것만 같아 허,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그래서 그 내기가 무엇이냐.”

 

청명의 물음에 순간 백천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백천은 곧 당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와 앞으로 서른 번만 만나주십시오. 그 안에 제가 용 님께 잊지 못할 기억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하! 청명은 순간 참지 못한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서서는 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백천을 청명은 마주 보았다. 청명은 백천의 행동을 오만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백천을 진동룡이었을 때부터 보았다고는 하지만 그래 봤자였다. 고작 스무 번 남짓한 만남이었다. 그만큼 만남을 지속해 온 존재가 몇 없긴 했다지만 그렇다고 특별하진 않았다.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면 정말 짧은 순간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추억과 기억을 가지고 건방지게 내기를 원하니 청명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오만하군.”

 

청명의 말에 백천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자신 없으십니까?”

 

백천의 도발에 청명이 눈을 크게 떠 백천을 바라보다 마지막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크게 웃는지 청명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청명과 가까이 있던 백천은 너무나도 큰 소리에 귀를 막았다. 백천은 순간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것인지 생각했으나 용 님이 이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기에 그래도 괜찮은 결과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좋다. 하자구나. 네가 말한 그 내기라는 걸 말이다.”

“그럼 서른 번입니다. 만약 제가 그 안에 용 님께 잊지 못할 기억을 드리지 못할 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목숨도?”

“예, 제 목숨까지도. 그럼 용 님께선 무엇을 거시겠습니까.”

“넌 다른 놈들처럼 금화나 지위에도 관심이 없으니…… 수준이 맞지 않으나 나 역시 원하는 모든 걸 주마.”

“좋습니다. 그때 가서 무르기 없습니다.”

“너나 그럴 생각하지 마라.”

 

백천이 조심스레 청명의 커다란 앞발 앞으로 걸어왔다. 청명은 그런 백천의 행동을 제재 없이 지켜보았다. 백천은 곧 청명의 앞발 하나를 꼭 안아보았다. 청명의 발보다 훨씬 작은 백천의 몸은 고작 발가락 하나를 채 안지 못하였으나 백천은 잠깐을 그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 보였다. 백천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청명을 올려다보았다.

 

“약속하신 겁니다! 나중에 발뺌하실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청명은 순간 백천이 그 작은 몸으로 안았던 부근에서 옅게 열감을 느꼈다. 저것이 제 주제도 모르고 멋대로, 그것도 구속을 건 본인도 모른 채 언약을 구속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이에 청명은 불만을 표현하듯 짧게 목을 긁는 소리를 내었으나 백천에겐 그 정도 소리쯤이야 별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하게 듣는 소리일 뿐이었다. 만약 정말로 화가 났다면 저 무거운 몸을 움직였겠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모를 백천은 그저 신이나 청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 만약 제가 찾아왔으나 용 님께서 계시지 않고 용 님이 계시나 제가 오지 못한 날은 제외하고 서른 번입니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백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산 밑으로 빠르게 달려 내려갔다. 곧 산 위에선 진동룡!! 하고 호통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백천은 그 소리에 빠르게 달려 나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진동룡이 아니라 백천입니다!! 하고 웃으며 크게 소리칠 뿐이었다. 청명은 그 외침을 들으며 홀로 픽 웃어 보였다. 아무리 이름을 진동룡에서 백천으로 바꾸었다 하여도 백천은 청명에게 있어서 언제나 진동룡이었다. 재수 없는 진가 네에서 그나마 재수 있는 사람이자, 막내이고, 삼남이며. 자신이 사는 산에 자주 찾아오는 이상한 아해. 청명은 해맑게 웃으며 달려가던 백천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특별할 것 없는, 언제나 같은 하루였다.


 

내기를 시작하고 첫 번째, 청명과 백천은 다른 때와같이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해가 중천을 향해갈 즈음에 백천이 산에 올라 정상을 향해갈 즈음이 되면 청명은 점점 가까이서 들리는 발소리에 천천히 졸린 눈을 떠 정신을 차렸다. 청명이 만약 계속 눈을 감고 자고 있다면 백천은 그런 청명의 앞에서 시끄럽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청명이 계속 쏟아지는 졸음을 참고 크게 하품하고 나면 저 끝에서 조그마한 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며 백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천은 깨어있는 청명을 보며 웃었고 청명도 슬쩍 웃으며 청명을 반겼다. 그리곤 백천은 대부분의 생활을 이 산에서만 하는 청명을 위해 아래 곳의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무슨 일이 크게 있었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가족들은 어떠한지, 그런 이야기를 말이다. 청명은 간간이 들려오는 얘기가 지루하기도 했으나 굳이 백천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이런 얘기라도 하지 않으면 땅과 나무, 하늘밖에 없는 이곳에서 마땅히 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꼭대기에 동물이라도 살았다면 조금은 달랐을 수도 있으나 청명의 크기가 크기이며 가만히만 있어도 흘러나오는 기운은 동물들도 쉬이 다가올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할 것 없는 둘에게 있어서 청명은 백천의 좋은 듣기 상대였고 백천은 청명에게 좋은 말 상대였다.

내기를 시작하고 두 번째, 백천은 웬일로 나무 한 그루를 들고 올라왔다. 그러곤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나무를 한 곳에 심었다. 청명이 중간에 백천에게 땅 파는 것이라도 도와줄지 물었으나 백천은 완곡히 거절할 뿐이었다. 곧 백천이 완벽히 심어진 나무에 기대앉아 휴식을 취하자, 청명은 백천에게 그 나무가 무엇인지 물었다. 백천은 말갛게 웃으며 이 나무가 꽃을 피울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백천은 청명에게 실수로라도 나무를 상처 입히지 말라고 당부를 몇 번이곤 했다. 사실 이곳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청명으로써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킬 수 있는 것이었으나 진지하게 몇 번이고 말하는 백천의 모습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론 그 당부가 열 번을 넘어가기 시작하니 청명은 백천의 머리에 꿀밤이라도 한 대 놓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백천이 깨어나지 못할 것을 알아 차마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백천이 이만 내려가고 산꼭대기에 청명만이 남았을 때, 청명은 백천이 심은 저 나무가 매화나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기를 시작하고 세 번째, 청명은 눈을 뜨고 펼쳐진 광경에 놀라 입이 크게 벌어졌다. 나무는 거의 없던 공터에 수많은 나무가 심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무들은 제각각 다른 크기도 나이도 달랐으나 그래도 좀만 더 자라난다면 꽃을 피워내기에 알맞은 아이들투성이였다. 놀란 청명의 모습을 본 백천은 성공했다는 듯 즐거이 웃었다. 청명이 또다시 백천에게 정말로 무슨 나무인지 알려주지 않을 것이라 묻자, 백천은 절대로 안 가르쳐 줄 것이라며 좀만 더 버텨보라고 말할 뿐이었다. 청명은 그렇다면 저 나무들이 매화나무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백천은 즐겁다는 듯 대답 없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내기를 시작하고 네 번째, 청명은 잠결에 맡아지는 달디달다 못해 너무 강한 향으로 코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앞을 본 청명은 저번과는 다른 이유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꽃이 피었다. 붉디붉은 홍매화가 피었다. 그 사이사이 하얗디하얀 백매화도 섞여서 찬란하게 만개하고 있음이었다. 청명의 시야가 온통 붉었고 하얬다. 청명은 하염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꽃들이 전부 져버려 사라지기 전까진 이 광경만을 볼 것만 같았다. 그 사이 산을 올라 온 백천이 청명을 불렀다. 용 님. 청명의 시선이 먼저 백천에게 와닿았고 바로 고개도 따라 움직여 백천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백천은 그리 말하며 웃어 보였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검은 비단결과 붉고 하얀 점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청명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웠다. 마치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아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아서.

 

그 이후로도 청명과 백천은 자주 만남을 가졌다. 간혹 둘의 시간이 맞지 않을 땐─대체로 백천이 그러했다─ 다음을 기약하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둘의 만남은 늘 그렇듯이 순조로웠다. 잊지 못할 기억을 주겠다던 백천의 자신만만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오히려 잔잔한 만남이라 할 수도 있었으나 청명과 백천은 서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모험적인 것보단 일상적인 한 부분이 되는 것이 제일 마음에 드는 둘이었다. 그렇기에 청명과 백천은 언제나 둘이서만 꽃을 구경하며 꽃놀이를 즐겼다. 둘은 굳이 무언가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백천이 갑작스럽게 매화나무를 심는 기행을 초반부터 벌려났기에 더욱 그러할 수도 있었으나 아무튼 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던 중 둘의 만남이 서른 번 중 절반을 좀 넘어갔을 때 백천이 청명에게 물었다.

 

“용 님, 저와 함께 저 아래에 다녀오시지 않겠습니까.”

 

백천의 말은 권유가 분명하였으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반짝였기에 그것이 권유보단 갑시다! 하는 주장임을 청명은 알았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이것은 정말로 자기주장도, 고집도, 다른 것들도 전부 멧돼지와 같았기에 쉬이 거절하기엔 힘듦을 알았다. 청명은 굳이 인간들이 바글바글한 밑에 갔다 와야 하나 싶었으나 백천은 아닌 듯했다. 생각해 보면 백천이 사는 곳이 바로 저 사람 바글바글한 곳이니 익숙 할만했다. 그러면서 늘 산에 올라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자기 가족들처럼 특별한 날에나 찾아올 것이지……. 아니다. 청명은 조금 전에 한 생각을 지워냈다. 그 특별한 날이 오지 않는 것이 백천에게 있어선 좋은 일이었을 터였다.

 

“곧 단오인데, 이번 단오절엔 크게 풍등 날리기를 한답니다.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아, 그리고 아주 비싼 백주도 다 떨어질 때까지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합니다. 풍등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청명을 보며 백천은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역시나 풍등엔 관심이 없어 보이던 청명도 오랜만에 듣는 술 소식에 살짝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백천은 그런 청명을 눈치채지 못한 척 꼬드기기 시작했다. 이번 단오절에 길거리에 나올 음식들이나 어떠한 술들이 펼쳐질지 말이다. 백천의 말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고이는 침을 한 번 삼킨 청명은 백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다는 티를 내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지. 좋다. 같이 가도록 하마”

 

청명의 수락을 즐겁게 들은 백천은 청명에게 그날은 절대 잊으면 안 된다며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강조했다. 청명은 그런 백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대충 듣는 것 같아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던 청명을 아는 백천은 그저 잊지 말라는 의미로 재차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또 서른 번의 만남 중 한 번이 또 사라져갔다.

 

 

백천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일어났다. 바깥은 이제야 해가 뜨기 시작하는 것인지 푸르스름하였다. 그렇다고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기에 백천은 빠르게 나갈 준비를 했다. 하필 오늘 마을에서 하는 단오절에 대해서 다른 마을까지 얘기가 흘러간 것인지 단오절을 즐기러 오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공짜 술을 그 누가 마다할까. 일을 끝내고 나면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는 이들이 많음을 아는 백천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까진 아니었다.

백천은 몸을 깨끗이 닦아내며 용 님을 떠올렸다. 자신의 가문 대대로 모시고 있는 용을 말이다. 백천은 용 님이 좋았다. 그의 태산과 같은 몸도, 괴팍하나 자신을 배려해 주는 점도, 그가 눈을 뜨면 한없이 깨끗하고 정순해지는 그의 기운까지도. 해서 백천은 용 님의 모든 것이 좋았다. 처음 만났던 그 어린 시절부터 계속 말이다. 백천은 용과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아직 자신이 어렸을 때 부모의 품속에 안겨 보았던 용 님은 험난한 산과도 같았다. 만약 두 눈과 앞발이 보이지 않았다면 필시 산이라고 착각했겠지. 백천은 두 눈을 감은 채 잠을 자던 용을 떠올렸다. 심상찮은 기운이 가득한 땅에 홀로 잠들어 있던 용은 정말 고서에 등장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린 진동룡이 부모의 품에서 빠져나와 겁 없이 용에게 다가가 앞발을 만지니, 용은 눈을 떴고 심상찮던 기운 역시 한순간에 변모하였다. 자신은 아마 그때부터 용 님을 마음에 두었을지 모른다.

누군가 그 마음을 눈치챘다면 필시 백천에게 미친 것이냐 물었을 것이다. 백천은 순간 익숙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호통에 몸을 살짝 떨었다. 하지만 백천은 그것 말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상대가 사람이 아니면 어떠하리, 서로의 삶이 다르면 어떠하리, 생의 끝이 다르면 어떠하리.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데 이 모든 것이 어떠하리. 자신은 그저 연정의 마음을 품었을 뿐이다. 백천은 스스로에게도 다른 이에게도 당당하였다. 자신은 주눅들 필요도 기죽을 필요도 없음은 당연하였다.

 

백천은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 머리엔 향유를 바른 뒤 머리를 빗어 내렸다. 향유를 바른 머리에선 꽃 특유의 달디단 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시중의 도움 없이 직접 옷을 갈아입고, 향낭을 차곤 따로 용 님이 입을 옷을 농에서 꺼낸 백천은 이제야 밝아오기 시작하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조용히 대문 밖을 나서기 시작했다.

백천은 이젠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산을 천천히 올랐다. 처음엔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가파른 경사로임에도 백천은 숨이 차지 않은 채 여유롭게 산을 올랐다. 걸음 속도도 느려지지 않았다. 그저 평지를 걷는 것과 같은 편안하며 여유로운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곧 백천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고서 산의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자주 찾아와 익숙해진 공간이었다. 자신이 직접 매화나무를 가지고 올라와 심어 푸름이 가득하게 만든 공간이기도 했다. 백천은 익숙하게 안개 속을 걸어나가 아직 잠들어 있는 용의 앞에 섰다. 아주 옅은 숨소리로 보았을 때 그렇게 깊은 잠을 자는 것 같지 않으니, 백천은 용 님이 제 말을 기억하고 있어 이런 것임을 알았다. 본래 성격은 말아먹었다곤 했으나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백천은 기분이 좋아졌다. 백천은 곧 조심스럽게 용의 앞으로 다가가 주둥아리 부근을 매만지며 쓰다듬었다.

 

“용 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크흥, 짧게 목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천은 이것이 용 님이 일어나기 귀찮아 내는 소리임을 알았다. 어릴 때 잠에서 깨어나며 말하는 일다경 一茶頃만 더. 와 같은 의미였다. 백천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내려가서 술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천의 말에 청명의 눈이 살짝 떨렸다. 백천은 어떻게 해야 용 님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똑같았다. 백천은 이에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다 결국 용 님의 주둥아리에 몸을 기대었다. 순간 주둥아리가 움찔, 움직였다. 백천은 그 움직임을 느꼈음에도 모르는 척 가만히 기대있었다.

 

“모르는 척하지 말고 좀 떨어지거라.”

 

백천은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 청명에게서 여유롭게 거리를 벌렸다. 그런 백천을 청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백천이 적당히 거리를 벌리자, 태산과 같은 커다란 몸뚱어리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젊은 청년의 형상만이 남았다. 안개를 헤치고 나온 이의 품에 백천이 가져온 옷을 넘겨주곤 뒤를 돌았다.

청명은 받은 옷가지를 확인하며 옷을 입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몸으로 둔갑한 것이 오래되었던 청명은 내의를 입는 순서에서부터 헷갈렸으나 차분히 입어가니 생각보다 빠르게 옷을 갖출 수 있었다. 곧 청명이 백천을 불렀다. 백천은 청명의 부름에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고 청명의 허리 부근 매듭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렇게 묶으면 쉽게 풀리십니다.”

 

백천은 자연스럽게 몸을 살짝 숙여 청명의 허리에 제대로 묶어져 있지 않은 매듭을 풀곤 다시 묶어주었다. 빠르게 매듭을 지은 백천이 청명을 보았다. 본래 모습이었다면 언제나 청명이 백천을 내려다보았을 텐데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 청명은 백천보다 작아 반대로 백천이 청명을 내려다봐야 했다.

청명이 익숙하게 앞장을 섰다. 백천은 그런 청명의 뒤를 따라가다 어느새 청명과 나란히 서서 산길을 여유롭게 내려왔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걸릴 시간이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고 하였으나 금년今年 단오절은 크게 맞이하는 만큼 저잣거리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더군다나 슬슬 축제의 놀이도 시작할 때이자, 밥을 먹어야 할 시간이니 사람은 더욱 많았다.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들, 큰 목소리로 물건을 파는 장사꾼과 가판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런 정신 없는 곳을 청명과 백천은 힘겹게 지나갔다. 다행히도 청명과 백천의 신체가 평균적인 사람보다 키와 덩치 모두 컸으며 그것에 맞게 힘도 강하였으니, 사람들에게 휩쓸리거나 사람과 부딪혀 땅에 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으로 이루어진 바다를 힘겹게 뚫고 나온 청명은 값비싼 상등품 백주가 네 병을, 백천은 쫑쯔* 여섯 개를 품고 있었다.

 

*쫑쯔粽子 : 찹쌀, 멥쌀, 쌀가루 등을 삼각형이나 원추형으로 만들어 댓잎이나 연잎, 갈대 줄기로 감싸 쪄낸 일종의 중국식 주먹밥으로 중국에선 단오절에 쫑쯔를 먹는 풍습이 있다.

 

곧 용선제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백천은 청명을 데리고 물가로 향하였다. 물가 저 멀리 용의 형태를 한 배 몇 척이 있는 것을 본 백천이 청명을 보았다.

 

“여기서 먹어요. 좀 있으면 용선제를 한다고 하니 좀 시원할 거예요.”

 

진작에 술을 홀짝이고 있던 청명은 백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철퍼덕 자리에 앉았다. 무엇이라고 땅에 깔까? 했던 백천은 이미 자리에 앉아 버린 청명을 보며 곁에 조심히 앉았다. 그러곤 품에서 쫑쯔 하나를 꺼내어 청명에게 건넸다. 청명은 자연스럽게 쫑쯔를 받아내곤 댓잎을 풀어 쫑쯔를 안주 삼아 술과 함께 먹었다. 백천은 그런 청명을 잠시 바라보다 품에서 쫑쯔 하나를 꺼내어 자신도 먹기 시작했다. 한 입, 두 입. 아무 생각 없이 쫑쯔를 먹으며 드넓게 펼쳐진 커다란 호수를 바라본 백천은 순간 입 안에 퍼지는 짭조름하면서 달콤한 맛에 정신을 차렸다.

 

“용 님, 거기엔 뭐가 들어가 있나요?”

 

백천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청명에게 묻자, 청명은 슬쩍 자신이 먹고 있던 것의 내용물을 보았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다가 알 수 없었는지 작게 한 입을 먹었다. 몇 번을 씹던 청명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팥.”

 

청명은 그렇게 말하곤 바로 술을 한 입 더 마셨다. 백천은 그런 청명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건너편에 있는 숲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머리카락이 웃음에 의해 더욱 크게 흔들렸다. 곧 백천은 청명의 손에 들린 팥이 든 쫑쯔를 가져갔다. 청명의 시선이 백천에게 향하자, 백천은 청명의 앞으로 자신이 먹다 만 쫑쯔를 건네었다.

 

“제 거는 동파육이에요. 술이랑 계속 드실 것이시니 이게 더 나으실 겁니다. 몇 입 안 먹었으니까 우리 바꿔 먹읍시다.”

 

청명은 쫑쯔와 백천을 번갈아 보다가 휙─하고 빠르게 채갔다. 청명은 백천에게서 가져온 동파육이 든 쫑쯔를 한 입 크게 베어 먹었다. 곧 몇 번을 우물거리던 청명은 전에 먹었던 것보다 지금 것이 더 마음에 든 것인지 술과 함께 먹기 시작했다.

청명과 백천이 나란히 앉아 배를 채우고 있으니 어느덧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에선 대회가 시작된 듯하였다. 대회를 시작하는 환호성이 얼마나 큰지 호수 너머에까지 크게 울려 퍼졌다.

 

“사람 죽은 날을 뭘 기념한다고….”

 

취기가 돌아 알딸딸해졌는지 얼굴이 붉게 물들인 청명이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백천은 그런 청명의 말에 그저 하하 웃어 보일 뿐이었다.

 

“성인군자를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덤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한 해를 보낼 수 있도록 하고요.”

“존경은 뭔 놈의 존경. 어차피 이미 육신은 다 썩어 사라진……”

 

백천은 다급히 청명의 입을 막으며 하하!!! 하고 억지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청명의 목소리가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게 만들었다. 백천이 청명의 입을 막으며 주변을 살펴보니 다행히 저 멀리 용선제 때문에 사람들이 전부 몰려갔는지 주변에서 청명의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백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니 청명은 읍! 으읍!!! 소리를 내며 백천의 손을 입에서 떼어냈다.

 

“푸하─! 이게 용 죽이려고 작정했네!!!”

“아니, 그걸 굳이 이런 날 말하시는, 용 님이 잘못 아니십니까!”

 

그리고 작게 말하십시오! 백천은 흥분하여 큰 소리로 용 님이라 부를 뻔했으나 한순간 정신을 차리곤 그 부분만은 작게 말하였다. 그런 백천의 모습에 청명이 어휴, 내가 인간한테 지적도 받고 살 만큼 다 살았네! 하며 구시렁거리자, 백천은 조용히 하십쇼. 라며 매정히 청명의 입에 팥이 들어간 쫑쯔를 강제로 들이밀었다. 씩씩거리며 입에 강제로 들어간 쫑쯔를 맘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씹어 삼키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어휴, 됐다. 그렇게 날 부를 거라면 그냥 청명이라 불러라.”

“청명이요?”

 

백천이 놀란 표정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간 한 번도 부를 이름을 알려주지 않던 이가 갑작스럽게 알려주니 놀랄 일이었다. 청명은 백천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으며 고개를 주억이었다.

 

“평소처럼 부르기 어려울 테니 여기선 그렇게 불러라.”

 

백천은 그런 청명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며 속으로 청명의 이름을 되뇌었다.

 

청명과 백천은 그렇게 밥과 술─청명이 신나게 다 마셨다─을 먹으며 용선제도 먼발치에서 즐기고 사람이 별로 없는 틈을 타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백천은 평소 청명이 사용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기념이라는 이유로 하얀 주머니에 붉은 꽃이 수놓아진 향낭과 강과 산을 풍경 삼아 대나무 숲이 그려진 접선 摺扇 하나를 안겨주었다. 대나무보단 매화를 원하던 청명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매화는 이미 다 팔리고 없었던지라 남은 사군자 四君子 중 대나무를 골랐다. 그리고 청명은 그런 백천에게 옥으로 잘 조각된 비녀 하나를 안겨주었다. 백천은 그 비녀를 한순간에 놓쳐 사라질까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어느덧 날이 어둑해지니 청명과 백천은 풍등을 하나 사곤 사람들이 별로 없는 호숫가로 향하였다. 사람이 한적한 호숫가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가득하였다. 사람이 모여있던 다른 곳은 이미 하나둘 풍등을 날려 보내었는지 붉은빛의 다리가 다리가 하나둘 하늘에 놓이고 있었다. 아직 날린 지 오래되지 않은 풍등엔 날린 이의 소원이나 하고 싶은 말, 그림 등 다양한 것이 쓰여있었다. 백천은 그것들을 보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청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풍등에 쓰고픈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청명은 고개를 저었다.

 

“소원이나 다른 것은요?”

 

청명은 고개를 젓다가 백천을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는 것을 쓰거라. 그것이 내 소원이라 치자.”

“제가 무얼 쓸 줄 알고 그러십니까? 그러다 큰코다칩니다.”

“넌 그런 걸 안 쓸걸 아니까 그렇지.”

 

백천이 청명의 말에 푸스스 웃어 보였다.

 

“제가 그 정도로 용 님의 믿음을 받을 줄 몰랐습니다.”

“푸른 대나무 무성하니 깎고 다듬은 듯한 군자가 바로 거기 있도다. 정중하고 굳세며, 빛나고 뛰어나니. 고아한 군자가 바로 저기 있도다.”

 

청명이 대나무 숲이 그려진 접선을 펼치며 읊으니, 백천은 청명을 의문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시경 詩經 중에서 고르고 고른 것이 무공 武公의 덕을 찬미하는 시이니 그것이 도대체 지금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동룡아, 네가 군자와 같은 성격이 되기는 글렀으나, 하는 짓은 딱 맞지 않느냐.”

 

겉은 번드르르하니 말이다. 청명이 다시 접선을 접으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백천은 그런 청명을 향해 자기 성격이 뭐 어떠냐며 용 님의 성격이 더하다며 티격태격하였으나 둘의 웃는 표정만큼은 즐거움이 한가득하였다. 둘은 티격태격했으나 백천이 글을 다 쓰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풍등의 끄트머리를 청명이 자연스럽게 잡아주었다. 곧 백천이 풍등 밑에 달린 종이에 불을 붙여내자 뜨거운 열기가 풍등 안을 가득 채워나갔다. 청명이 잡고 있던 풍등을 놓자, 풍등은 천천히 하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청명과 백천은 점점 높이 올라가 다른 풍등 무리와 어우르는 제 풍등을 한없이 지켜보았다.

 

“뭐라 적었느냐.”

 

풍등의 글을 읽지 않았던 청명이 슬며시 백천에게 물었다. 백천은 청명을 슬쩍 눈짓으로 보았다가 장난을 치기 전 개구진 얼굴로 크게 웃어 보였다.

 

“맞춰 보십시오! 용 님이라면 그 정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청명은 그런 백천의 모습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역시 군자가 되기엔 글러 먹은 동룡이다. 그 뒤로도 청명과 백천의 설왕설래는 이어졌으나 서로를 이기기 위해 다투던 것이 아니었으니, 흐지부지 끝을 내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주제로 말을 나누며 길을 걷자, 백천의 집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백천은 청명의 산까지 함께하려 했으나 청명이 백천을 막으며 집으로 들여보내니 백천은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단오절이 있고 나서도 백천과 청명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아직 내기를 끝내기 위해선 열 번 조금 남짓한 횟수가 남았으니 말이다. 그 만남이 지속될수록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백천은 나이를 먹어갔다. 검었던 백천의 머리에 어느샌가 서리가 내렸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용으로 살아가는 청명이 이 흐름을 느끼기엔 무상하였다.

문득 청명이 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된 것은 백천 외에 평소 오지 않던 이들이 찾아왔을 때였다. 찾아온 모든 이들은 표정이 어두웠으며 하나같이 똑같은 검은 상복을 입고 찾아왔다. 이는 백천도 똑같았다. 청명은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살펴보다 보이지 않는 이 한 명을 떠올렸다. 이전부터 그 녀석을 뜻하는 별이 그리 밝지 않았더니만 결국 죽은 듯했다. 하지만 나이 먹을 만큼 먹고도 더 살고 죽었으니, 호상이 아니겠는가. 청명은 음울한 표정의 인간들을 보며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그들 앞에서 저 말을 하진 않았다. 오랜 삶을 살아 쌓인 눈치였다.

청명은 백천과 단둘이 함께 있을 때와는 달리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 잘 보지 않던 하늘을 읽고 자신을 찾아온 이에게 풍수와 천기 天紀를 점쳐 미래를 살짝 알려줄 뿐이었다. 그렇게 서로 볼일이 끝나면 청명을 찾아온 이들은 가져온 짐을 정리하며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아무 미련 없이 가는 것이 참으로 정이 없어 청명은 그들은 그만 좀 찾아와 줬으면 할 뿐이었다.

시선을 살짝 내리니 제 몸에 기대앉아 있는 백천이 보였다. 백천은 평소와 달리 그리 기운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청명은 그런 백천을 놀려먹을까 했으나 지금 그런 장난을 치기엔 날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묵묵히 백천이 마음을 다스릴 때까지 엎드린 채 눈을 감고 기다려 주었다.

백천이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청명의 앞에 섰다. 청명은 그런 백천의 움직임에 맞춰 천천히 눈을 떠 백천을 보았다. 백천의 입가에 살짝 희미한 미소가 있는 것을 보니 이젠 다 괜찮아진 듯했다. 청명은 백천에게라도 그놈이 지금 죽은 건 호상이라고 할까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냥 조용히 하기로 했다. 백천은 청명에게 짧게 인사를 전하곤 그렇게 산에서 내려갔다. 청명은 그런 백천을 이해했다. 평소엔 죽자 살자하며 사이가 안 좋았던 관계라지만 가족이니 저놈도 심란할 테지. 청명은 내려가는 백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기를 점쳤을 때 보았던 것을 다음에 알려주기로 하였다.

 

 

다음 만남에서 청명은 백천에게 자신이 점쳤으나 백천의 가족에게 말해주지 않은 결과를 슬쩍 알려주었다. 청명은 백천의 반응을 살폈고 백천은 그저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얘기할 뿐이었다. 심란한 마음이라도 있으려나 하였으나 백천은 그저 그 운명을 빠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청명은 그런 백천의 모습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라도 부탁하려나 했으나 역시나 이 아이는 그런 행색이 없었다.

본래 정해놓은 운명에서 의미 없는 발버둥을 치려 하는 것이 인간이란 족속일 터인데 백천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려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백천은 이미 자신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한 번 운명을 바꿔놓기는 하였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청명은 점점 작아지는 백천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곤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를 생각했다.

 

청명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매화향 사이사이에 이유 모를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살짝 가쁜 숨을 내쉬며 땅을 파고 있는 백천의 옆엔 작은 묘목이 하나 놓여 있었다. 백천은 청명이 눈을 떴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청명은 백천이 언제쯤 눈치챌지 생각하며 천천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도록 조심히 백천 가까이 다가간 뒤 백천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백천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땅을 파고 또 팠다. 그러곤 어느 정도 깊이가 되어서야 삽을 놓고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백천은 그때까지도 청명이 잠에서 깨어났음을 알지 못했다. 그 상태로 옆에 놓인 묘목을 파놓은 땅에 심기 위해 몸을 돌리고 청명의 커다랗고 붉은 눈과 마주치고 나서야 백천은 허헙─!! 소리를 내며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은 제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며 뒷걸음치다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야 청명이 잠에서 깨어났음을 깨달았다. 청명은 그런 백천의 행동을 보여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볼 수 없던 백천의 모습에 청명은 신이 났다.

청명은 백천을 놀리기 시작했고 백천은 그런 청명을 말릴 새도 없이 너무 놀라 빠르게 뛰다 못해 아픈 제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생각해 보면 그 누가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파충류의 눈동자가 떡하니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자신이 용 님과 오랫동안 만나오고 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갑자기 본 적이 많았던 것은 또 아니었다.

이 난장판은 청명이 신나게 백천을 다 놀리고 백천은 놀란 제 가슴을 달래고 나서야 끝맺었다.

백천은 땅을 파고 거기에 엉덩방아까지 찧어서인지 평소랑 다르게 더러운 행색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나이를 먹어도 언제나 변치 않는 헌앙하디헌앙한 외모 덕에 이것 역시 그를 빛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깨끗함과 단정함을 추구하던 백천의 입장에선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하얗던 옷은 흙투성이가 되어 털어도 털어도 깨끗해지기는커녕 옷에 묻은 흙이 더욱 번져 얼룩을 낼 뿐이었다. 지금에라도 집에 가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오고 싶었으나 생각보다 빠르게 잠에서 깬 용 님 때문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백천은 결국 오늘 하루는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자기 자신에게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청명은 그런 백천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땅을 파기 시작한 거 더러워질 것은 예상해 두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자신의 짓궂은 장난으로 더욱 더러워졌을 수도 있으나 청명의 눈에 거기서 거기였다. 결국 청명의 시선은 옷이 더러워진 것에 성질이 난 백천에서 백천 곁에 있는 묘목으로 향했다.

 

“그래서 무얼 심고 있었던 거냐.”

 

옷이 안 되면 얼굴이라도 깨끗이 하자는 마음으로 통 안에 가져왔던 물로 얼굴을 씻어내던 백천이 청명의 시선 끝에 놓인 묘목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알아서 맞춰 보시지요. 오래 살아오신 용 님이라면 다 아시지 않겠습니까?”

 

청명은 백천의 말에 어쭈? 하고 쳐다보았으나 백천은 흥! 하고 청명에게서 고개를 돌려 마저 얼굴을 씻어낼 뿐이었다. 어휴, 저것을 확!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청명은 단단히 삐져버린 백천을 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매화?”

“아니요. 생김새부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청명이 질문을 하면 백천이 답은 해준다는 것이었다.

 

“생긴 것이 사군자 애들은 아닐 테고…….”

“사군자겠습니까? 완전히 틀렸습니다.”

 

물론 평소보다 더욱 날카롭게 답해준다는 게 흠은 흠이었다. 그래도 하나하나 답해준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청명은 얼굴과 손을 깨끗이 씻어내는 백천을 향해 알고 있는 나무들을 말해보았으나 전부 다 틀렸다는 말만 들려올 뿐이었다. 결국 깨끗하게 씻어낸 백천이 품에 지닌 영견 領絹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나서도 청명은 도대체 저 묘목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답을 맞히지 못하셨으니, 나중에 이 나무에서 꽃이 피면 그때 보세요. 저도 듣기만 했는데 아름드리 핀다고 하더라고요.”

 

백천은 이전에 청명에게서 받았던 비녀로 머리를 고정하곤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청명은 그런 백천의 말에 큰 흥미까지 갖진 않았으나 그래도 천천히 화가 풀려가는 듯한 백천의 모습에 살짝 호응을 해주며 백천의 작은 머리끝에 꽂힌 비녀를 슬쩍 보다 백천이 하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백천은 산 정상 위에 놓인 수십 그루의 매화나무를 직접 심어냈던 것처럼 익숙하게 이름 모를 묘목을 땅에 심었다. 백화난만한 매화나무 사이에 홀로 묘목인 채 자라날 것을 보면, 저 나무만 허전하다 생각이 들 테지만 나중에 꽃 피는 걸 보면, 그렇지 않을 거라고 백천은 자신만만하게 청명에게 말했다. 청명은 그런 백천에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신이 아는 나무도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천은 청명에게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며 다시 더러워진 두 손을 남은 물로 닦기 시작했다. 청명은 심드렁하면서도 백천의 말에 하나하나 다 답을 해주며 말을 이어나갔고 백천이 이만 하산해야 할 즈음엔 백천의 화는 이미 다 풀려 있는 채 내려보낼 수 있었다.

 


 

그 후로 둘은 문득 백천의 나이를 대충 계산한 청명이 뒤늦게서야 백천에게 혼인하였는지 묻고 백천이 웃으며 안 했다고 답하기도 하고 여태 중앙에 있는 둘째 형님을 통해 들은 정계 얘기도 나누는가 하면 그저 옆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더라, 마을에 있는 나무가 꽃을 피웠더라. 같은 별것 아닌 얘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지내었다.

그리 지내고 나니 어느덧 서리가 조금 내려앉던 백천의 머리는 점점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고 청명은 그 사실을 너무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청명은 검은 머리는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된 백천을 보았다. 어릴 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어릴 적 백천의 모습을, 진동룡의 모습이 떠올려지는 청명이었다. 하지만 백천은 이제 더 이상 너무 어릴 적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였다. 이는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흐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천이 심었던 묘목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자라났다. 백천은 청명 곁에 앉아 곧 꽃을 피울 것이라며 기대하여도 좋다고 말했다.

백천은 예전과 같은 활달함을 보이지는 못했다. 청명의 주변을 막 돌아다니지도, 매화가 피면 흩날리는 꽃을 잡으려 들지도, 꽃과 함께 춤추지도 않았다. 여전히 청명에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이전과 같이 크게 표현하는 일은 적어졌고 자주 청명의 몸에 기대앉아 있곤 했다. 어떻게 보면 이제야 점잖아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청명은 백천이 어떻든 상관없이 좋기만 했다. 오래전 활달하여 몰아치는 파도와 같은 백천도 좋았고 지금 같이 잔잔한 호숫가와 같은 백천도 좋았다. 둘 다 어찌 되었든 백천이고 진동룡이지 않은가. 아무튼 청명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내기의 마지막 날, 청명은 백천이 자주 찾아오던 시간에 잠에서 일어났다. 평소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자주 반복하니 저절로 잠에서 깨어났다. 백천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청명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화는 아름드리 피었다 졌기에 여전히 남아 익숙한 향을 풍기었고 그 사이 홀로 꽃 피지 않은 채 새순과 꽃봉오리 몇 개가 나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청명은 저것이 백천의 말대로 금년이 되어서야 드디어 피우는가 생각하였다.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 것이 살짝 된 것을 보니 춘분 春分을 지나 곧 청명 淸明일 터였다. 아마 저 나무의 꽃도 그때야 피겠지. 청명은 백천이 한 번 말해준 저의 이름을 잊지 않고 그 날짜에 맞춰 피는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과연 저 나무에선 무엇이 필련지.

청명은 멍하니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나무를 바라보며 백천을 기다렸으나 백천은 해가 질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백천이 이렇게 찾아오지 못했을 때가 몇 번 있었기에 청명은 그저 백천이 바쁜가 하였다. 주황빛으로 하늘을 물든 채 지는 해를 보며 청명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음에는 자신이 일어나는 게 아닌 백천이 깨워주길 바라며.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때, 청명은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에 익숙하게 눈을 떴다. 흐릿했던 앞을 몇 번 깜빡이니 앞에 있는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맨 앞에 있는 이는 이전에 죽었던 이의 장남이었다. 분명 오래전 그의 이름을 들은 기억은 있었으나 만남이 없으니 잊은 지 오래였다. 그냥 백천과 지겹도록 똑 닮은 얼굴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청명은 익숙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같이 찾아온 검은 무리를 보았다. 백천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 찾으셔도 없습니다.”

 

맨 앞에 서 있는 이가 말했다. 청명이 의아한 듯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이번에 찾아온 이유는 그 녀석 때문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 목소리를 들으며 청명은 그 이후로 보지 않았던 하늘을 다급히 올려다보았다. 백천을 의미하던 별은 희미했고 그의 천기는 끊어져 있었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 죽었구나. 청명은 그리 깨달았다. 인간의 삶은 자신에게 참으로 짧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전에 백천에게만 말해주었던 것이 지금이었단 사실을 상기했다.

 

“그리고 이제 이걸로 완전히 끝입니다.”

 

이유는 아실 겁니다. 그리 말하며 그들은 서신 하나를 땅에 두곤 사라졌다. 청명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해가 지기 시작할 때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땅에 놓여 있는 작은 서신에 청명은 오랜만에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였다. 크기가 작아지니 이전에 백천이 주기에 입었던 옷이 펄럭였다.

청명은 서신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예전에 자신이 주었던 옥으로 만든 비녀와 서신 한 장이 전부였다. 청명은 비녀를 품에 넣었다. 하지만 차마 서신을 읽을 용기는 없었다. 어떠한 내용이 쓰여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거짓이었습니다. 장난이었습니다. 놀랐습니까?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면 청명은 화를 내었다가 뒤늦게 찾아온 백천을 맞이할 자신이 있었으나 그 외의 것이 쓰여 있다면 청명은 자신이 없었다. 청명은 결국 야속한 운명을 탓하며 서신을 그대로 접어 숨겨버렸다. 그리곤 다시 눈을 감았다. 정말 이번엔, 다음번엔, 늘 그렇듯 새하얀 옷을 펄럭이며 백천이 찾아오길 바라며.

 

 

설렁설렁 바람이 불어온다. 매화는 져버린 지 조금 되었을 텐데 바람 사이사이에 처음 맡는 꽃 향이 나 청명은 저도 모르게 눈을 슬며시 떴다. 푸른 잎을 키워내고 있는 나무 사이에서 홀로 푸른 잎과 함께 새하얀 꽃을 피워내고 있는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청명은 저 나무가 백천이 마지막으로 심었던 이름 모를 묘목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백천의 말처럼 금년에 꽃을 피워냈음도 말이다.

매화와는 다른 달콤한 향이 계속하여 바람과 함께 흘러갔다. 청명은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처음 보는 나무 밑으로 향하였다. 새하얀 꽃에 둘러싸인 청명은 백천을 떠올렸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면서 늘 더러워지기 쉬운 새하얀 옷을 입는 그를 말이다. 간간이 그것을 가지고 그를 놀리며 놀았음을 청명은 기억했다.

청명은 나무에 기대어 백천이 보내었던 서신 안에 함께 동봉된 비녀를 품에서 꺼내었다. 다행히 비녀는 부러지거나 깨지지 않고 그저 백천이 갖고 생활하면서 생긴 흠집 말고는 고장 난 곳은 없었다.

청명은 이제는 결정해야 함을 알았다. 죽음을 회피하는 것은 답이 되지 않음을. 청명은 그 긴 세월에서 지나간 인간들과 친우와 형제를 기억했다. 그들의 죽음도 잘 이겨내었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있는 것이지 않은가. 청명은 두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청명은 결국 따로 두었던 향낭과 접선을 꺼내었다. 향낭의 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그저 주머니만 남은 것이라 봐도 무방하였다. 접선은 그때 이후로 펼쳐 볼 일이 없었으니, 새것과도 같았다. 청명은 펼친 접선에 그려진 강과 산, 대나무를 보았다. 언제 보아도 대나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화가 없어 사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야속할 뿐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때 백천에게 읊어주었던 시를 떠올렸다.

 

푸른 대나무 무성하니 깎고 다듬은 듯한 군자가 바로 거기 있도다.

정중하고 굳세며, 빛나고 뛰어나니. 고아한 군자가 바로 저기 있도다.

 

청명은 그때 백천에게 이 연의 마지막 행을 말해주지 않았으나 지금은 말해줄 수 있었다.

 

……끝내는 잊을 수 없으리라.

 

그래, 끝내는 잊을 수 없으리라. 청명은 그리 읊조렸다.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청명은 순간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것을 일찍이 알았다면 더욱 좋았을까.

청명은 따로 놓았던 백천의 서신을 다시금 꺼내었다. 받은 이후로 한 번도 살펴보지 않은 서신엔 신기하게도 먼지 한 톨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청명이 숨을 천천히 쉬었다. 바람이 선선히 불어왔다. 흩날리는 머릿결을 그저 두며 피하고 덮어두었던 서신을 드디어 펼쳐 보았다.

 

[제가 이겼습니까.]

 

정말 단조로운 문장이었다. 청명은 그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내리다 결국엔 홀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네가 이겼다. 백천아, 동룡아, 아룡아, 결국엔 네가 이겼구나. 그 웃음에 맞춰 바람이 부니 배꽃이 흩날린다. 살랑살랑 흩날린다. 그것이 마치 순백의 너와 같음을 깨달았다. 배꽃이 흩날린다. 네가 흩날린다. 네가 춤을 춘다.

아, 이화우 梨花雨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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