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백천 - 琴
미인이 금을 탄다.
홍옥루紅玉樓에는 미인이 찾아온다. 자주. 아니, 가끔일지도 모른다.
미인이 언제 찾아오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미인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왔다가 현을 한 번 튕기고는 나타났을 때와 똑같이 어느새 사라지곤 했다.
미인이 나타나는 거리인 홍옥루는 붉은 보석과 같은 지붕이 줄지어진 거리라는 뜻으로 '루樓'라는 단어 때문에 거리보단 주루나 기루에 붙여야 어울리는 이름이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의 홍옥루는 기루와 주루로 가득하다곤 하지만 과거에는 기루나 주루가 아닌 홍매화 나무가 줄지어져 있었다고 한다. 홍매화가 지붕처럼 거리를 뒤덮어 하나의 건물처럼 보이니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자연이 만들어낸 하나의 누각이란 뜻으로 홍옥루라고 불렀다. 그렇기에 매화가 피는 시기엔 매화와 매화주를 즐기러 오는 이들로 거리를 가득 채웠고 여름엔 푸르른 매실과 매실주를 즐기러 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만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매화를 볼 수 없었다. 지금의 홍옥루에 남아있는 그때의 흔적이라곤 불에 타 흔적만이 남아버린 앙상한 매화나무만이 전부였다.
아마 저 땅 밑에 묻힌 이들 중에 이것에 대해 아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죽은 이에게 그것을 물어 무엇하랴. 이미 썩어 문드러진 이들에게 답을 구해서 무엇하랴. 이젠 시간이 너무나도 흘러 기억하는 이 하나 없는 그때의 이야기였다.
아무튼 홍옥루에 줄지어져 아름드리 만개하던 매화나무는 더는 매화를 피우지 않았고 매실조차도 맺지 않으며 그저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자리를 대신하니 사람들은 하나둘 이 거리를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 이곳을 찾는 이가 아무도 없어졌을 때, 드넓은 강과 푸르른 숲의 경관이 매화가 없어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들이 하나둘 기루와 주루를 세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생겨난 건물이 매화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거리가 지금의 홍옥루였다.
사실 기루와 주루가 늘어진 거리에서 미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들은 많았다. 주루는 몰라도 기루에서만큼은 미인과 기재를 많이 데리고 있을수록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기루가 줄지어진 홍옥루였다. 홍옥루의 사람들은 언제나 아무도 모르게 나타났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길 반복했다. 이는 미인과 기재, 범부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었다. 어제까진 이 거리에서 아름답다 칭송받던 미인도, 실력이 뛰어나다 극찬받던 기재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던 범부도 다음날엔, 오늘엔, 한순간에 사라져 그 누구의 입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그런 일상이 평범함에 속해 있는 거리 말이다.
그렇기에 미인이 미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그가 홍옥루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인이 정확히 언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른 홍옥루의 사람들처럼 바람과 같이 아무도 모르게 홍옥루에 나타났고 어느 순간부터 홍옥루에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미인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미인이 처음 길거리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였다.
그는 특이하게도 기루가 아닌 주루나 볕이 잘 드는 거리에서 연주를 했다. 그는 기루가 줄지어진 거리에서 색을 탐하지 않았고 재물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흘러가는 세월과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같이 장소를 정해두고 연주하지 않았고 객들에게 관람료를 청하지도 않았다. 홍옥루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차별하지 않았으며 여자와 아이, 노인들에게 언제나 친절을 베풀었다. 간간이 홍옥루를 찾았을 때 싸움이 벌어지면 그것을 중재할 정도로 그는 홍옥루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늘 홍옥루를 찾았고 홍옥루의 사람들은 그런 미인을 원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침어낙안 沈魚落雁, 폐월수화 閉月羞花*라며 남자이긴 하나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와 나란히 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미인이라고 극찬하였다.
* 침어낙안 沈魚落雁, 폐월수화 閉月羞花 : 물고기는 연못 속에 잠기고 기러기는 하늘로부터 떨어진다 / 달이 모습을 숨기고 꽃이 부끄러워 한다. 라는 뜻으로 절세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비 여희(麗姬)의 미모를 극찬한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확실히 그가 홍옥루에서 유명해진 다양한 이유 중에는 얼굴이 한몫하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그의 금을 타는 실력이 뒤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뭇사람들과 비교해도 뒤처지기는커녕 매우 뛰어난 편에 속했다. 뛰어난 실력에 아름다운 용모가 받쳐주니 그 두 개가 잘 어우러져 그의 실력을 더욱 빛내고 있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그가 연주하는 곡에 맞춰 얼굴을 살포시 찌푸리면 미인을 보고 있던 객들도 똑같이 슬픔과 아픔을 느꼈고 흥겨운 곡을 연주하며 미소를 지으면 객들도 똑같이 즐거움을 느꼈다. 객들은 그의 얼굴과 연주로 쉬이 칠정七情*을 느낄 수 있었다.
*칠정七情 : 유학에서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을 통틀어 일컫는 말.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싫어함惡, 바람欲을 뜻한다.
그에 따라 그를 찾는 이들은 많았고 돈에 눈이 먼 이들도 그가 자신의 가게에서 한 번이라도 연주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이 거리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누구도 그의 연주를 강요할 수 없었다. 재물에 욕심이 많은 이도 아니었기에 아무리 막대한 재물을 주겠다 해도 그는 언제나 거부하였다. 그는 그저 나비가 꽃에 머물고 새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쉬어가듯 어쩌다 한 번씩 찾아와 연주하기를 바라는 사람일 뿐이었다. 언제 또다시 이 거리에 찾아와 어디서 연주를 펼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미인이 어떠한 기준으로 거리를 다시 찾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미인이 찾아오는 날에는 밤하늘에 별이 무수히 수놓아져 한 폭의 그림을 수놓을 정도로 화창하다는 것이었다.
미인이 홍옥루의 악사가 된 지 1년이 넘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이 거리에서 미인에 대해 한 톨이라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명망 높은 가문의 자제라더라, 영엄한 도문의 도사님이라더라, 선계에서 내려와 잠시 쉬어가는 신선이더라 같은 소문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이 거리에서 그는 언제나 '미인'으로 통할 뿐 어떠한 이름으로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 중 한 명이 나서서 미인이 찾아오는 날이면 언제나 화창했다는 이유로 미인을 '청명靑冥 선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참으로 단순한 이유에서 지어진 호였으나 미인은 사람들이 자신을 청명 선생이라 부르는 것이 좋은 듯 보였다. 생각해 보면 항상 제대로 된 명칭도 없이 '미인'이라고만 불렸으니 청명이란 호 號가 몹시도 달가웠을지도 모른다. 미인은 사람들이 청명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자 평소 연주하고 있을 때가 아니면 잘 보여주지 않던 자그마한 미소를 피워냈다. 언제나 무표정한 미인의 얼굴에 꽃이 만개한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달콤한 꿀을 만들어내는 꽃에 모여드는 벌과 나비처럼 그 미소를 보기 위해 하나둘 따라 미인을 청명 선생, 청명 공자라 불렀다.
그리고 그렇게 미인은 청명이 되었다.
화창한 하늘 아래에서 미인이 금을 탄다.
별빛 수놓아진 검은 비단 아래에서 청명이 줄을 탄다.
시끌벅적한 거리에 어울리는 흥겨운 음을 가지고 논다.
통통 튀던 곡조가 어느 순간 잔잔해지고 애절해지지만 또다시 빠른 곡조로 바뀌며 흥겹게 줄을 가지고 놓듯 미인의 손끝 아래에서 고금은 다양한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는 평범한 사람들에겐 아름다움을 선사했으나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이들에겐 무언가 부족함을 안겨주곤 했다. 그럼에도 미인을 찾는 이가 많은 것은 그 부족함이 그의 연주에 흠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오히려 그 부족함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미인의 작은 결점을 나타내는 것과 같아 사람들은 그 점을 더욱 열광하기도 했다.
이제 미인의 연주는 끝으로 향하기 위해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미인의 손은 현을 빠르게 내리누르고 튕기며 자신의 기교를 보여주면서도 그 기교가 난잡해 보이지 않도록 곡에 맞춰 절제하니 단아하면서도 고아하였다. 주루 안에 객들은 그런 청명의 모습에 푹 빠져 대화를 나누고 술을 마시는 것도 잊은 채 주루 중앙에 홀로 있는 검은 미인을 바라보았다.
곧 미인의 손이 현을 떠나고 금의 마지막 울림도 사라지자 주루 안에는 정적이 차올랐다. 사람들의 숨소리만이 가득 찬 주루 안은 곧 미인이 자리를 비우기 위해 금을 챙기며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객들의 박수 소리와 함성으로 가득 찼다. 객들은 청명을 향해 한 곡 더 연주해 줄 것을 원했으나 미인은 그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옆에 놓인 검은 멱리를 쓰곤 유유히 무대 위에서 내려왔다. 아무리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다지만 미인은 그 선이 너무나 칼 같아서 객들에게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무대 밑으로 내려온 그에게 오늘 처음 홍옥루를 찾은 이들이 다가가려 하였으나 미인은 어느새 주루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청명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이들이 주변 사람에게 혹, 청명 선생께선─, 하고 입을 떼어도 주변 객들은 전부 모른다 답하며 청명 선생이 원래 그런다고 할 뿐이었다. 미인이 사라진 주루 안은 다시금 떠들썩해졌다. 홍옥루의 사람들은 무작정 청명에게 다가가려 했던 이들을 향해 작게 혀를 찼다.
" 쯧쯧, 무작정 다가가려 하니 청명 선생께서 자리를 피하신게로구만. 다음 연주 때까지 옷 끝자락,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보겠군."
곧 홍옥루의 사람으로 보이는 몇몇도 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듯 글쎄 그 소식 들었는가? 운을 띄우곤 익숙하게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넘어갔다. 미인이 떠나간 주루엔 아쉬움을 오랫동안 표하는 소수의 몇 명과 이런 상황이 이제는 익숙한 듯 다른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이들로 시끄러워졌다.
홍옥루의 사람이 말한 것처럼 미인은 그 이후로 꽤 긴 시간 홍옥루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미인이 홍옥루에서 모습을 감춘 지 보름을 넘어 달포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청명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그 안위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는데, 청명의 안위 자체를 걱정하는 이들보단 그의 얼굴과 금을 타는 모습을 더는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오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리고 미인이 홍옥루에 나타나지 않는 시간 동안 홍옥루에는 잠깐이라도 비가 내리곤 했다. 사람들은 화창한 날에 주로 찾아오는 청명을 생각하며 그가 홍옥루에 찾지 않음은 장마를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렇게라도 아쉬운 마음을 달래곤 했다.
곧 길고 길었던 장마를 지나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햇볕만이 내리쬐기 시작했을 때 미인은 다시 홍옥루에 모습을 비췄다. 사람들은 달포가 넘는 기간 동안 홍옥루를 찾지 않았던 청명이 다시 홍옥루를 찾아주자 환호하였고 오늘은 그가 어디에서 연주할지 기대하였다. 날이 뜨거운 만큼 바깥이 아닌 그늘막이 있어 시원하면서도 마실 거리가 있는 주루였으면 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그런 객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 것인지 혹, 알아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그는 주루가 아닌 뙤약볕이 내리쬐는 호숫가 근처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평소 고금을 연주할 땐 멱리를 벗는 그였지먼 이번 연주에서 미인은 멱리를 벗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은 검은 천은 호숫가 넘어 숲속 나무들 사이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검은 천 사이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미인의 얼굴만이 객들이 볼 수 있는 청명의 전부였다.
미인은 자리에 앉아 연주를 위해 악기를 준비했다. 사람들이 청명을 보기 위해 모여드느라 시끄러워진 주변은 미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미인은 주변 이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이 정확했다. 미인은 그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미인은 연주 준비를 하였고 객들은 미인의 연주를 듣기위한 준비를 하였다.
곧 미인이 연주를 위한 준비를 끝낸 것인지 고금 위의 일곱현 위로 두 손을 올렸다. 시장통마냥 시끄러웠던 주변은 천천히 조용해졌다. 주변이 완전히 조용해지기도 전, 현 하나가 튕겨지며 낮은 음의 소리를 내었다. 현을 튕기는 소리가 늘어가고 쌓여질수록 아직 연주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시끄러웠던 뒤쪽도 점차 조용해졌다. 미인과 객만이 가득한 공간에는 순간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와 미인이 현을 튕기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렇게 미인은 뙤약볕 아래서 덥지도 않은지 반 시진을 넘게 연주하였다. 그의 연주를 보는 객들은 무더위에 말라가는 것만 같았음에도 오랜만에 듣는 청명의 연주라는 이유로 이제는 미지근해진 물과 술을 마시며 자리를 끝까지 지키거나 그나마 생기 넘치는 나무 밑으로 피신을 가 청명의 연주를 즐겼다.
미인은 오랫만에 찾아온 홍옥루여서 그런지 연주가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가지 않고 홍옥루의 거리를 걸었다. 홍옥루의 사람들은 청명이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건냈고 미인은 고개를 숙이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청명 공자님!"
순간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미인을 불러세웠다. 보통의 부름이라면 평소 무시했을 그였지만 그 대상의 목소리가 어리디어린 이의 목소리기에 미인은 걸음을 멈추곤 뒤돌았다. 그를 불러 세운 아이는 홍옥루의 아이는 아닌 듯 보였다. 그렇다고 잘사는 집안의 자제도 아니었고 그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의 복식과 비슷하였다. 아니. 사실 그보다 좀 더 못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아이가 입은 옷은 먼지투성이에 옷감의 물이 다 빠져선 헤져있었다. 또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는지 바지 밑단은 발목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래, 아이의 모습을 본다면 필시 열이면 열 거지라고 생각할 몰골을 하고 있었다.
보통의 어른이라면 불쌍하여 돈이나 음식을 던지거나 무시하고 자리를 피했을 터였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미인은 아이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 준 뒤 저의 허리에도 채 닿지 않은 아이를 위해 몸소 무릎과 허리를 굽혔다. 그리곤 아이의 눈과 같은 위치에서 마주하였다. 아이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났다. 미인 역시 아이를 따라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래, 무슨 일이니?"
미인이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이는 그런 미인을 향해 쭈뼛거리다 등 뒤에 감춰 두고 있던 것을 꺼내어 미인의 앞에 내놓았다. 아이의 손에 들린 것은 그 무엇도 아닌 꽃 한 송이였다. 하지만 미인은 그 꽃을 보며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곤 아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봤자 검은 멱리에 감춰져 아이에겐 얼굴이 보일 리 만무했지만 말이다.
"매화예요. 홍매화."
미인은 아이를 향해 당연히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매화가 이 거리에서 사라진 지가 벌써 몇십 해가 지났는가. 지금 이 거리에 살아가는 이들은 이 거리가 본래 매화가 만개했다는 사실도, 길거리에 흔히 놓여 있는 말라비틀어져 죽을 일만 나무들이 매화나무라는 것도 모를 일이었다. 주변 숲에 있는 나무들 중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도 없는 상황에서, 있다 해도 홀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이렇게까지 붉은 매화를, 그것도 매실이 맺힐 이 시기에 꽃을 피워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굳어있는 미인을 향해 아이는 손에 쥔 매화를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러곤 꽃을 받은 미인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가로챘다.
"다음엔 검은 옷 말고 흰옷을 입고 와줘요. 고금같이 무게 잡는 거 말고 고쟁처럼 은율이 다양한 악기나 다루고 고산유수 高山流水* 같이 장엄한 거 말고 매화삼농梅花三弄* 같이 다채로운 거나 치고요. 그게 당신에게 더 어울려요."
*고산유수 高山流水 : 높은 산과 양양한 물이라는 말로 거문고의 미묘한 가락을 뜻한다.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인 백아(伯牙)가 타는 가락을 종자기(鐘子期)가 잘 알아주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이자 여기서 유래된 곡.
*매화삼농 梅花三弄 : 곡조가 서로 다르게 세 번 반복하므로 '삼농'이라 부른다. 본래 진나라의 항이가 피리곡으로 만들었으나 후에 거문고곡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몸을 굽히지 않고 추위와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눈바람에 맞서 싸우는 완강한 성격의 매화를 빗대어 선비의 덕을 찬양하는 곡.
아이가 말을 이어갈수록 미인의 눈은 여기서 더 커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점점 더 커져갔다. 이는 오래 살지도 않은 아이의 입에서 나온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그다음엔 그리움이었으며 확신이었다. 미인은 아이가 건네준 매화를 조심스럽게 쥐곤 아이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미인이 입을 열어 말을 걸자 아이는 씩 웃으며 답했다.
"거기 너!"
순간 아이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뚫고 커다랗고 괴팍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말을 하던 아이는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을 돌려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미인은 그런 아이를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신기하게도 미인의 손에 아이는 잡히지 않았다.
개구진 웃음을 담았던 아이는 저 멀리 멀어져 사라졌고 미인의 곁으로 괴팍한 이가 다가와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희 집 일꾼이 귀찮게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미인의 표정이 평소와 같이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그는 곧 음낮이가 별로 없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혹, 저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이고, 그렇다면 정말로 다행이십니다. 그런데 저 아이의 이름은 어찌..."
순간 괴팍한 이의 표정이 오묘하면서도 날카롭게 바뀌었다. 흡사 그건 왜 묻는지 알 수가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미인은 그의 표정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별건 아니고 도움을 받은 이의 이름정도는 알아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예예.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역시 청명 선생께선 마음도 넓으십니다. 저 애의 이름은 초삼입니다."
"초삼이요?"
"예, 세 번째로 들어와 초삼이라 부릅니다."
초삼 招三. 세 번째라 부르다. 참으로 성의 없이 지어진 이름이었으나 홍옥루에선 자주 일어나는 일이자, 그보다 더한 이름도 많았기에 미인은 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미인은 괴팍한 이에게 아이의 이름을 알려주어 고맙다는 이유로 은자 하나를 건네었다. 곧 은자를 받은 이가 미인을 향해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길거리를 채울 정도로 큰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미인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아까 전 보았던 아이. 그래, 초삼이란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하였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청명보단 백천이 더 낫지 않아요?"
백천. 그래, 백천이란 이름을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았는가. 미인은 길을 나서는 내내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말하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면, 동룡이라던가? 굳이 그 말까지 했어야 했나. 다음에 만나면 한 대 쥐어박아야 하나 미인은 아이가 괘씸하면서도 이젠 잊어버려 잿가루가 되어 흩날려 사라진 기억을 다시금 모아준 아이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미인의 얼굴이 만개하더니 그 주변으로 웃음이란 벌과 나비가 내려앉았다.
미인은 그 이후로 홍옥루를 찾을 때면 검게 물들인 옷이 아닌 순백의 옷을 입고 찾아왔다. 고금이 아닌 먼지 쌓인 고쟁을 등에 지고 있었고 진중한 곡보단 변조가 많고 다채로운 곡을 골랐다.
사람들은 한순간에 변한 미인에게 놀랐으나 곧 미인에게 다시금 빠져들었다. 흑색의 옷은 간혹 보이는 미인의 얼굴을 빛내었지만 순백의 옷은 미인 자체를 높여 보이게 만들었다. 만들어진 지 오래된 고쟁에선 고금보다 더욱 깊은 감정을 느꼈고 더욱 다양한 연주법을 볼 수가 있었다. 곡의 다양함은 듣는 이에게도, 연주하는 이에게도 언제나 색다른 느낌을 주었기에 사람들은 미인이 갑작스럽게 바뀌어버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전보다 더 알맞은 자리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
미인은 초삼이 말해주었던 것처럼 대부분의 것을 바꾼 채 홍옥루에 돌아왔으나 그날 이후로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이전에 만났던 거리를 가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괴팍한 이가 나왔던 가게를 가보아도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인은 그 가게의 주인에게 초삼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그것은 이곳 홍옥루의 규칙을 어기는 것과 같았기에 초삼의 행방을 어디에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인은 그때 당시 자신이 귀신에게 홀린 것은 아닌지 고민하였으나 그때 받았던 홍매화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시들지 않은 채 여전히 아름드리 만개하고 있었기에 차마 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미인은 제 품 속에서 여전히 지지 않은 홍매화 때문에라도 소년이 말해주었던 대로 흰옷을 입었고 고쟁을 챙겼다. 곡은 그날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자유롭게 정하긴 했으나 고금을 연주할 때와는 달리 꽤나 다양한 곡을 치곤 했다. 또한 미인은 겨울을 향해가는 계절이 되었을 때 더는 주루에서 연주를 하지 않았다. 주루의 주인과 객들에겐 안타까운 소식일 수 있었으나 미인은 이제 주루가 아닌 길거리에서만 연주하기 시작했다.
미인은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것이 익숙했다. 오래전부터 호숫가를 배경 삼고 바람을 장단 삼으며, 매화나무를 친우로 두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많이 달라졌으나 미인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미인은 괜찮았다. 아니, 최근에 있었던 일로 더욱 좋았을지도 모른다.
미인은 그렇게 연주했다. 친우 삼은 매화나무가, 배경 삼은 호숫가가, 장단 삼은 바람이, 그리고 저를 보기 위해 찾아온 객들이 즐겁도록 말이다. 그래, 아주 오래전 이곳 홍옥루에서 연주했던 것처럼.
오랜만에 길거리에서만 연주하게 된 미인은 과거 옛날에 있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렇기에 미인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곤 연주를 이어 나갔다.
'아니, 그렇게 튕기면 어쩌자는 거야? 줄 하나 끊어먹으려고 작정했지?!'
'아니다, 아니야. 줄을 끊어먹으려던 게 아니라─'
'콱! 누가 말대꾸하래. 그렇게 급하게 치려고 하면 되려는 것도 안 된다니까? 예전에는 너무 느리게 쳐서 뭐 거의 걸음마더니 지금은 그냥 막 달려 나가려 하네. 이제 뭐 명성 얻었다 이거야?'
아니, 이런 기억 말고…… 미인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강렬했던 기억 중 하나를 떨쳐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기억 말고도 떠오를 수 있는 기억들은 많지 않은가.
'어떠냐, 괜찮지 않으냐?'
'응, 아니야. 처음부터 다시 해.'
이것도 아니고─ 미인은 고개를 설설 저으며 또 다른 기억을 꺼내려 노력했다. 그러던 중 제일 깊이 가라앉아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잘했어. 잘하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 아니면 아니라고 내가 바로 말해주고 있잖아. 나랑 함께한 세월이, 시간이 더 많은데 내가 아니면 누가 우리 동룡이가 잘못 연주했다고 말하겠어. 다른 놈들이 말하는 건 그냥 듣고 말하는 것만 할 줄 아는 놈들이라 잘난 듯이 말하는 거뿐이야. 왜. 못 믿겠어? 하늘의 총아여서 백천 白天이라 불리면서 이렇게 걱정이 많으면 어떡해? 정 안 되면 내가 곁에서 또 연주해 주지 뭐.'
백천은 기억 속에서 언제나 괴팍하고도 성질 더러웠던 그가 자신이 너무나 힘들어할 때마다 해주었던 말이 너무나도 다정하였기에 그 다정한 말을 계속 듣고 싶어 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호숫가를 배경 삼고 바람을 장단 삼아 매화나무를 친우 삼으니 자연이 미인을 사랑하는구나. 자연은 곧 하늘이고 하늘은 자연이니 자연의 눈길을 빼앗은 미인이 곧 하늘의 하얀 총아로다. 그렇기에 새하얀 총아를 백천 白天선생이라 부르자.
미인은 청명 靑冥이되, 청명 淸明이 아니었다. 미인은 이미 백천이었음에도 기꺼이 청명이란 호를 받아들였다. 억지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필시 미인은 청명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으나 그렇다고 청명 淸明이 되고 싶은 건 아니였다. 이미 청명은 백천의 마음속에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미인이 청명이란 호를 사랑한 것은 그저 청명이란 울림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청명이라 부르며 칭송하고 환호할 때마다 뜻은 다르지만 그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늘어날 테니까. 그렇기에 미인은 자신이 사랑했던 호인 백천을 기꺼이 버리고 미인이라 불리었다가 청명이 되었다.
백천은 추운 겨울 속에서 부는 바람으로 손이 얼기도 하는 와중에도 한번 시작한 곡이 끝나기 전까진 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호숫가는 얼고 앙상하게 마른 매화나무와 날카로운 바람 속에서도 백천은 건물 안이 아닌 길거리에서 고쟁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미인이 상할까 봐 조심스레 곁에 화로 몇 개를 놓아주었다.
따스한 주루와 기루, 미인이 있는 길거리는 따스함부터 시끌벅적함까지 아무리 화로가 몇 개 놓였다 해도 천지 차이였다. 홍옥루의 사람들은 미인이 이전처럼 안으로 들어와 연주하길 바랐으나 미인은 이를 거부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사람들은 결국 미인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고 그가 고뿔에 걸리거나 다른 병에 걸리지 않길 바랐다.
슬슬 때가 오는구나.
백천은 소한 小寒을 지나 까치가 집을 짓기 시작하며 대한 大寒으로 향하는 길목에 매화나무를 보며 생각했다.
백천은 기다렸다. 백천의 기다림은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한 번은 포기했을 법한 기나긴 기다림임에도 백천이 지칠 때면 늘 자신에게 찾아들어 오는 선물로 인해 포기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또한, 여름에 초삼에게 받았던 홍매화는 여전히 백천의 품 안에서 만개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좀 더 커졌으려나. 백천은 이 홍매화가 과연 더 커질지 아니면 이대로 져버릴지 하루하루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이는 금을 타고 고쟁을 타는 즐거움과는 다른 즐거움이었다.
금을 타는 것이 그리움으로 인해 다시 시작한 즐거움이었다면 매화는 기대로 인한 즐거움이었다.
백천은 정확히 매화가 만개하기 시작한 날에 홍옥루를 찾았다. 홍옥루의 매화나무는 더 이상 꽃을 피워내지 않음에도 백천은 다른 곳에선 매화가 피어났다는 사실을 듣곤 홍옥루에 찾아왔다.
역시나 홍옥루의 매화는 꽃을 피워내지 않았다. 죽은 듯 보이는 나무에게 꽃은 사치였다. 그럼에도 백천은 매화나무들을 훑어보았다. 무언가 이전보단 그래도 생기 넘치는 나무들이 몇몇 보이는 것만 같았다. 착각인가 싶으면서도 나무의 껍질이 다른 나무들에 비해서 더욱 단단하고 결이 달라진 것을 보니 분명히 이전과는 차이가 있었다.
나무들을 살펴보던 백천은 이대로 돌아가기 뭐하였는지 이번에도 길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연주할 준비를 하였다. 홍옥루의 사람들은 그런 미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필 오늘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윗어른의 말 때문에 더욱 그런 걸지도 모른다.
백천은 자신의 지정석과도 같은 매화나무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손과 얼굴은 이미 날카로운 바람이 훑고 지나가 퉁퉁 얼어붙고 벌겋게 일어났음에도 백천은 묵묵히 자리를 잡았다. 감사하게도 홍옥루의 사람들 몇이 미인이 자리 잡은 근처로 화로 서너 개를 두었다. 은은한 화로의 불이 얼어붙었던 그의 손을 조금이라도 녹여주었다.
손이 어느 정도 녹자 미인은 익숙하게 현을 몇 번 튕기다 현을 타기 시작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추위가 추위인지라 손이 굳어 천천히 시작한 곡은 시간이 지나 손이 풀리기 시작하니 점차 속도를 맞춰가기 시작했다. 이런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다행히도 미인이 선곡한 곡이 빠르고 흥겨운 곡이 아닌 잔잔하면서도 맑게 울리는 겨울과도 어울리는 노래였기에 빠르게 현을 튕길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의 가락을 가진 곡이라면 무리하지 않아도 되리라.
미인은 고요한 거리에서 현을 튕기며 제 은율을 호수 넘어 숲까지 널리 펼쳤다. 길을 지나가는 객들은 드문드문 들리는 미인의 가락에 호평을 하곤 했다.
순간 팅─! 하며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인은 추위를 이겨내어 연주할 만큼 손을 움직일 수 있었으나 미인의 악기는 그러지 못한 듯 매서운 추위로 인해 결국 오래되었던 현이 끊어지고 만 것이었다. 다행히 현이 끊어지면서 미인의 손을 건들지 않았기에 상처는 나지 않았으나 현이 끊어지자 미인은 순간 당황스러워졌다. 지금 당장은 끊어진 현을 튕길 필요가 없었으나 곧 나오는 부분부터는 자주 튕겨야 하는 현이었다. 현 하나를 다른 음계로 바꾸어 연주하자니 그렇게 하였다간 곡의 느낌 자체가 바뀔 수도 있는 탓에 쉬이 그러지 못하였다.
그 잠깐 백천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낮은 음의 악기 소리가 미인의 연주 소리와 어울려 울려 퍼졌다. 고쟁과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른 음색의 악기는 필시 고금이었다.
백천은 그 고금 소리를 듣자마자 몸이 익숙하게 반응하였다. 순간 머릿속을 가득 찼던 걱정은 한순간에 녹아 사라졌다. 현 하나가 끊어진 참사가 있었으나 이런 날씨에 연주하는 것이라면 혹시 모를 작은 확률로라도 예측하고 있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백천은 끊어진 현의 음이 나야 하는 부분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금의 소리로 대체하며 고금과 함께 합연을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합연은 어색하기는커녕 너무나도 잘 어우러지는 한 쌍이었기에 객들은 중간부터 들려오는 고금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였다. 또한 백천 역시 연주를 이어나가는 중간중간 눈을 흘기며 고금의 소리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찾기 시작했다.
다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금을 연주하는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금이 어디서부터인가 들려온다는 것만 알 뿐. 하지만 백천은 왠지 이 고금이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짧지만 길었고 잠깐의 사고가 있었던 합연이 끝났을 때, 백천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런 미인과 누구인지 모를 고금 연주자에게 큰 박수를 보내었다. 그간 미인의 연주에 무언가 빈틈이 보였고 부족함이 보였다면 이번 연주만큼은 부족함과 빈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미인이 누군지 모를 연주자와 함께하니 반쪽만 남아있던 것이 꼭 맞물려 하나가 된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백천은 그런 사람들의 박수를 신경 쓰지 않고 제 물건들을 전부 자리에 내버린 채 사람들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로 뛰어든 백천은 더는 들리지 않는 고금의 끝 음이 어디서부터 냉기를 타고 왔는지 짐작하며 무작정 내달렸다.
그런 순백의 끝자락을 보며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미인에게 길을 양보하였다. 몇몇 사람은 미인을 부르며 미인이 내버리고 간 악기와 짐을 얘기하였으나 그 말이 백천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백천이 얼마나 내달렸을까. 백천은 자신이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달려가는 백천의 몸짓에 맞춰 순백의 옷을 무작정 펄럭였고 길고 긴 머리카락은 정처 없이 흩날렸다. 또한 어두운 밤하늘에 새하얀 눈송이까지 소복이 내리기 시작하니 백천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백천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잠시 고르기 위해 정처 없이 내딛던 발걸음을 끊어냈을 때 자신이 더는 홍옥루의 붉은 거리에서 어두운 숲으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백천은 이 숲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자신이 거리에서 연주할 때마다 자리 잡던 곳의 건너편. 그러니까 호숫가 뒤로 드넓게 펼쳐진 울창한 숲이었다. 지금은 어느새 겨울이 되어 잎도 다 떨어져 푸릇한 한때를 보이지 않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펼치기 충분하였으나 백천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백천이 주변을 둘러보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숲속의 깊은 안쪽에서부터 고금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천은 순간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그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백천이 걸음을 한 발자국씩 옮길 때 마다 백천의 뒤로 눈이 밟히며 발자국의 형상이 남았다. 곧 그 발자국의 형상 위로 눈이 소복이 쌓이며 백천의 흔적을 없애버렸다. 마치 그 옛날 백천이 이곳 홍옥루에 매화가 만개하였을 때에도 존재하였던 유명한 악사였단 사실을 한순간에 없애버린 것처럼 깨끗하게 말이다.
소리가 나는 진원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고금의 소리를 들으며 백천은 분명 현재 걷고 있음에도 점차 무너져가는 호흡을 도저히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규칙적으로 호흡을 하려 해도 목 안에서부터 알 수 없는 것이 끝없이 차오르며 백천의 호흡을 흩트려놨다.
매화가 피는 시기에 숲 안을 울리는 고금의 매화삼농은 백천의 길고도 깊은 기억의 범람 속에서도 너무나도 강렬하였기에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백천은 정말 이 곡을 연주하는 이가 그가 맞는 것인지, 정말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인지, 이젠 괜찮은 것인지, 등등 수많은 생각들을 떠올렸다가 가라앉히길 반복했다.
백천이 몇 발자국 더 움직여 숲 안에 더 깊이 들어갔을 때 백천의 눈가에는 결국 채 떨어지지 못한 채 남아있던 슬픔이 가득했다. 백천의 눈가에 가득 찬 슬픔은 결국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가득 품었다가 내비치며 새하얀 눈밭으로 떨어져 내렸다.
봄을 기다리며 잠시 겨울을 맞이한 나무들 사이 홀로 붉은 매화를 품어내고 있는 나무 밑에서 고금을 두고 연주하고 있는 흑빛의 장삼을 입은 사내. 아니, 아이는 그 작은 손으로 고금을 유러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백천은 이제 휘청여 언제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걸음으로 천천히 그 아이의 앞에 섰다. 곧 아이의 연주가 끝마치고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그 눈 안에 담긴 홍매화가 너무나도 자신이 알고 있는 그의 것과 같자 백천은 결국 아이의 앞에 무너져 내렸다.
곧 아이는 그런 백천을 보며 기꺼이 웃어 보였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 웃어 보이던 아이는 저보다 몇 배는 큰 백천을 껴안으며 입을 열었다.
"돌아왔어."
한순간에 바스러져 사라질 빛이 아닌, 총아의 곁에 오래도록 남을 빛이 되돌아왔다.
과거, 홍옥루에는 미인이 있었다.
기루와 주루가 넘쳐나는 홍옥루에서 미인이라 불릴 수 있는 이는 분명 많았으나 홍옥루 내에서 '미인'이 되었던 이는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미인은 어느 순간 홍옥루에 나타났고 홍옥루에 쉽게 스며들었으며, 그렇게 유명한 악사가 되었다. 미인이 유명한 악사가 되었을 때, 미인은 '청명'이란 호를 얻었고 미인은 기꺼이 그 호를 받아들였다. 미인은 홍옥루의 사람이 아님에도 홍옥루를 아꼈고 홍옥루의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미인을 아꼈다.
미인은 언제나 홀로 갑작스럽게 홍옥루를 찾았다가 연주가 끝나면 갑작스럽게 사라지곤 했다. 미인은 언제나 혼자였고 미인에 대해 아는 이들은 없었다. 그저 다양한 소문이 무성할 뿐. 그런 소문이 무성해도 미인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미인이 홍옥루에서 활동한 지 몇 년이 지났을까, 미인은 어느 순간부터 검은 옷이 아닌 하얀 옷을 입기 시작했고 항상 치던 고금이 아닌 고쟁을 치기 시작했다. 미인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변화한 미인의 모습은 마치 제 것을 찾은 이의 모습과 같아 그 누구도 그런 미인에게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저 환호할 뿐.
그해 겨울. 첫눈이 무척이도 많이 내리던 날 미인은 연주를 끝내곤 물건을 전부 자리에 내버려둔 채 어디론가 뛰어나갔고 그렇게 달포가 넘는 시간 속에서 더는 홍옥루를 찾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때 들려왔던 고금 소리가 사실 미인의 종자기*가 아니냐며 얘기가 오갔다.
* 《열자》 <탕문>편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로 춘추전국 시대 초나라의 나무꾼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거문고의 명사였던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절친한 친우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종자기가 병으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백아는 거문고 줄을 전부 끊어낸 뒤 그 후로 죽을 때까지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백아절현伯牙絶絃.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나갔을까, 봄을 맞이하는 시기가 되었을 때 홍옥루에 놓여있던 죽은 나무들에서 어느 순간 하나둘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무에서 피어나는 홍매화에 사람들은 놀랐고 그 뒤에 피어난 매화는 백매화이기에 사실 이것도 미인, 청명 선생께서 이뤄낸 일이 아닌가 하고 말이 오고갔다.
봄이 찾아와 백매화와 홍매화가 홍옥루를 가득 채웠을 때, 미인은 그제야 홍옥루를 다시 찾았다. 마치 어디 먼 길을 떠날 것처럼 짐을 가지고 곁엔 검은 옷을 입은 아직 청년에 불과한 아이를 데리고 말이다. 홍옥루의 사람들은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미인을 보았으나 홍옥루의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미인은 청년과 함께 홍옥루를 한 바퀴 돌며 매화를 감상하더니 자신이 이전에 두고 간 짐들은 처분할 것을 부탁하며 그렇게 홍옥루를 떠났다.
미인과 청년이 그렇게 떠나고서 며칠, 홍옥루를 가득 매웠던 매화는 언제 꽃을 피워냈다는 듯 한순간에 떨어져 내렸고 다시는 그 정도로 홍옥루에 매화가 피는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한 번 보았던 매화의 절경을 잊지 못하고 다시 매화가 피길 기대하며 죽은 채 남아있는 매화나무를 여전히 자리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겨둔 매화나무들은 간간이 어떠한 날이 되었을 때마다 꽃봉오리를 맺기도 하고 몇몇 나무는 조금이라도 매화를 피워내기도 했다. 그리고 매화를 피워냈을 때면 늘 고금과 함께 고쟁의 아름다운 선율이 매화삼농을 연주하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마치 이때쯤이면 매화가 필 것을 아는 누군가가 때에 맞춰 연주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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