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검존동룡 - 서신

사랑이란 것이 참 신기했다.

보따리 by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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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동이지만 동룡이가 안 나오는 글.

* 4,041자.

* 2023.05.01 일자 글 백업.

추운 겨울이 가고 따스한 봄이 찾아왔다. 그에 청명은 익숙하게 술과 검 대신 붓을 들곤 손에는 검은 먹을 묻혀가며 글을 써 내려갔다. 붓을 오래도록 잡고 있었던 세월이 그리 길지 않으니 아차 하는 순간 언제나 검은 먹이 손에 묻어났다. 그렇게 손에 먹을 묻혀가며 하고픈 말을 써내려 가지만, 정작 완성된 말들은 청명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하고픈 말은 많고, 전하고 싶은 것도 많았으나 유려하게 써지지 않았다. 투박하지만 정성 들여 천천히 써 내려간 글의 마지막은 언제나 그렇듯 다시 서신을 붙이겠다는, 다음을 기약하는 말 하나와 보고 싶다는 그리움이 담긴 말 하나로 끝을 맺었다.

청명은 그렇게 완성된 서신을 봉하기 전, 받는 이가 평소 좋아하던 매화 하나를 동봉하곤 목함 안에 넣었다. 목함 안에는 수많은 서신과 함께 장신구나 꽃과 같은 선물들이 가득했다. 목함 안에 있는 장신구는 깨끗했고 오래되어 말라버린 꽃들 사이로 은은한 꽃향기가 목함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목함을 가득 채우고서도 부족한 것은 아닐까, 고민하던 청명은 닫힌 목함을 몇 번 쓰다듬곤 곧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청명이 이리 서신을 모아 둔 지도 벌써 세 번째 봄이었다.


평소 손에 쥐는 거라곤 검과 술, 간간이 사파 대가리뿐이었던 매화검존 청명이 붓을 쥐게 된 것은 그의 하나뿐인 어린 정인 때문이었다. 보고 싶을 때마다, 저가 떠올랐을 때마다, 안부를 물어보고 있었던 일들을 적어달라며, 한없이 웃으며 하는 마지막 부탁에 청명은 결국 붓을 쥘 수밖에 없었다.

처음 청명이 붓을 쥐어 서신을 쓸 땐, 붓을 자주 부러트려 붓을 다량으로 사들이기도 했었다. 서신으로 쓸 종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먹이 떨어져 버리고, 꾸겨져서 버리고, 찢어져서 버리고, 획을 잘못 써서 버리고,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리고. 참 다양한 이유로 그 비싸디비싼 종이를 쉬이 꾸겨 버리던 청명은 이 때문에 자주 청문에게 잔소리를 듣곤 했다. 청문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릴 때마다 청명은 제 어린 정인을 향해 구시렁거리곤 했다. 왜 하필 다른 것도 아닌 서신이었는가. 선물을 사달라는 것도, 맛있는 것을 달라는 것도 아닌 그저 서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느꼈는지, 하고픈 말은 무엇인지를 담은 서신 하나. 물론 청명이 처음 서신을 써달라던, 안부를 전해달라던 아해의 말을 들었을 땐 어색하긴 하나 쉬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누구인가. 매화검존이라 부르는 자가 아닌가. 검을 휘두르는 것이 누워서 술 먹는 것만큼 쉬운 사람. 붓도 어찌 보면 검처럼 휘두르고, 찌르고, 막고, 상대를 파악하듯, 붓도 그렇게 휘두르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매화검존은 서신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은 지 일다경一茶頃만에 패하고 말았다.

청명이 그간 써본 서신이라곤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글을 써 전하기보단 말로써 전하는 것이 빠르고 간편했기에 청명은 어찌 글을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붓을 만지작거리며 벼루 위로 들었다 놨다 하며 고민하던 청명은 결국 크게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곤 주변에 널려있는 구겨진 종이들을 뒤로한 채 발라당 누워버렸다. 평소의 청명이라면 이게 뭐라도 되냐며 안 하면 장땡이란 마음으로 방을 나가버렸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간 쓰질 않았으니 이번만큼은 써야만 했다. 청명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서신을 쓰기 위해 제 어린 아해를 생각하니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청명은 제 기억 속에 남아있던 추억들을 모아 제 어린 정인이 어떻게 웃었는지를 떠올렸다. 언제나 검존이라 부르며 웃던 그 아이를, 붉은 천을 벗겨내었을 때 얼굴을 붉히며 미소 짓던 그 아이를, 저가 동룡아─ 아룡아─ 하고 부르면 웃으며 대답하던 아이를. 이제는 들은지 오래되어 목소리는 잘 기억나지 않아 완벽하게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청명은 어린 정인의 웃음만큼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방문을 몇 번 두드리곤 들어온 청문은 난장판이 된 방안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난장판이구나. 그 익숙한 한숨에 청명은 감았던 눈을 떠 제 사형인 청문을 올려다보았다. 청문은 그런 청명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청명아, 청명은 그 부름이 잔소리의 시작이라 생각하며 한 귀로 듣고 흘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런 청명의 생각과는 달리 청문은 잔소리가 아닌 다른 것을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을 쓰거라.”

거창하거나 유려할 필요가 없단다. 길게 쓸 필요도 없지. 앞뒤 맥락이 이상해도 그렇구나 하고 쓰거라. 실수가 있어도 이어서 쓰렴. 공식적인 문서가 아니니 그리해도 된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쓸 수는 없어. 청명아, 검과 붓은 손에 쥐고 휘두른다는 점에선 비슷하나 문文과 무武이기에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단다. 네가 한평생 붓을 잡고 살아온 문인도 아니고, 평생 검만 들고 산 네가 어찌 쉬이 누가 보아도 완벽한 글을 만들겠니. 정말 이상해도 그 아이는 다 이해해줄 터이니 그냥 쓰거라. 평생을 검만 잡아 온 망둥이가 제 부탁 들어주겠다고 이렇게 앉아서 고민하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기꺼워할 게다. 청문은 그리 말하곤 청명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방을 나갔다. 다만 방문을 닫기 전, 청명에게 붓과 종이를 적당히 쓰지 않으면 용돈이 없을 것이라는 말은 까먹지 않았다.

쩨쩨하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말을 마음속으로 하던 청명은 좀 더 가만히 누워 있던 청명은 다시 마음을 먹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굳어버린 먹을 다시 갈며 청명은 생각했다. 청문이 말한 내용들은 청명도 분명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모하는 이를 위해 적는 서신인 만큼 잘 쓰고 싶었다. 다들 그렇지 않은가, 제 정인 앞에서만큼은 부족함이나 어색함 없이 전부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 이는 천하의 매화검존도, 환갑을 넘은 지 오래된 늙은 할배라도 똑같았다. 사랑이란 것이 참 신기했다. 청명은 한숨을 내쉬며 붓을 먹에 적셨다. 청명은 청문의 말을 여러 번 되새기며 생각했다. 거창하거나 유려하지 않으며 굳이 길게 쓸 필요도 없이 그저 하고 싶은 말. 그리 생각하니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이나,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떠올렸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화산의 제자들이나, 최근에 간 주막의 음식이 맛있다던가, 종남이 또 겁도 없이 덤볐다던가…. 그렇게 끊임없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청명은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뒤로 한 채 그중에서도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을 서신에 적어내렸다.

「보고 싶구나.」

청명은 이 다섯 글자를 끝으로 붓을 내려놓곤 먹이 마르길 기다렸다. 서신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하기만 한 정말 짧디짧은 글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이 이상 더 쓰려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쓴 그 다섯 글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내려갈 뿐. 곧 먹이 마르자 청명은 종이를 접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목함 안에 넣었다. 목함 안은 넓었고 들어간 것은 종이 하나, 청명은 이를 보곤 품 안에서 색이 바란 영웅건 하나를 꺼내었다. 영웅건을 그리운 듯 바라보며 매만지다 결국 그 영웅건까지도 목함에 넣어버렸다. 목함이 아주 조금 더 채워졌다. 청명은 목함 안을 보며 다음 서신을 넣을 때도 선물을 같이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엔 아해와 어울리는 색의 영웅건을, 어느 날엔 아해가 부끄러워할 가락지를, 어느 날엔 아해가 좋아하는 꽃을, 어느 날엔 아해가 싫어할 귀걸이를, 어느 날엔 아해가 마음에 들어 할 팔 가락지를. 그렇게 제 하나뿐인 어린 정인을 떠올리며 차곡차곡 보관해두기만 할 서신을, 더 이상 직접 받는 이 없는 연심을 모았다. 언젠가 바람에 날려 보내기 위해.


세 번째 봄이 찾아와 서신을 쓰곤 목함에 두고 방을 나온 청명은 꽃들을 바라보았다. 너 역시도 내가 널 위해 계속 서신을 쓸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청명은 당황해할, 언제까지고 저보다 어릴 제 정인을 떠올리니 기꺼워 미소 지었다. 지금은 보지 못하니 후에 보게 되면 그때엔 잔뜩 놀려줘야지. 문득 귓가에 유치합니다, 검존! 하고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으나, 청명은 그저 미소 지으며 그저 길을 나섰다.

 다음 계절이 찾아오면 그 때에 다시 붓을 들어야지. 하고픈말을 전하기 위해서, 안부를 묻기 위해서,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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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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