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청명백천 - 化心

내 꽃의 형상은, 연모 戀慕야.

보따리 by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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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1 일자 글 백업.

용이 준 꽃은 영원히 지지 않는다. 용이 준 꽃은 보석이기에 사시사철 지지 않고 피어있을,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이자,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달달한 꽃 향을 품었다. 또한 약재로서는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불치병을 낫게 하며, 늙은이를 젊게 만들고, 더 나아가 불로장생을 꿈꾸게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이 꽃을 용(龍)이 주는 꽃(花)이라 하여 단순히 용화(龍花)라 불렀다. 불로불사를 꿈꾸게 한다는 말 때문인지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용이 죽고 어연 백년이 넘어가는 세월 속에서도 사람들은 구전과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용화를 원했다. 용화가 어떻게 피어나는지도 모르면서 구전과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꽃의 겉모습과 꽃의 효능만을 탐할 뿐이었다. 그 꽃이 무엇인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사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용화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흔히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의 태로 태어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자연의 형상이라 볼 수 있는 용은 귀한 것이 맞았다. 거기에다 용은 속세가 아닌 자연에서 홀로 사는 것을 덕으로 여겼으니 용이 아닌 자가, 용의 마음을 얻은 자가 아닌 이상 용의 마음을 어찌 이해할 수나 있을까. 

두 번의 생을 사는 청명도 용이란 족속들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족속들이었다. 그 용이 본인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청명은 용의 태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고부턴 용이란 족속들에 대해 이해하기 싫어도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용은 자연의 형상이라 말하던 이가 누구였을까. 청명은 그 말이 허풍이나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정순한 기의 흐름을 느끼고 기를 제 몸에 담아 내공으로 대체하여 자유로이 쓰는 것. 자연이 곧 자신과도 같음을 느낌에 청명은 그 무엇도 필요치 않음을 느꼈다. 그렇기에 용은 자연 속에 홀로 살아가는 것인가. 하지만 청명은 그와 동시에 큰 공백을 느꼈다. 분명 누군가 함께 있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이것. 오히려 함께 있음, 혼란스러워질 뿐인 이것. 그것을 알게 된 청명은 용이 자연에 속한 채 왜 속세로 나오려 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용은 홀로 있으므로 완벽했지만, 오히려 그 완벽함으로 인해 외로웠다. 익숙하지만 결이 다른 외로움에 청명은 숨이 턱턱 막혔다. 

이 공백을 채우고 싶어 누군가와 어울리면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찾아왔다. 그 외로움을 느끼기 싫어 혼자 있으면 그로 인한 외로움이 덮쳐왔다. 알 수 없는 것에 기인한 외로움보단 원초적인 외로움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익숙하니까. 하지만 청명은 그럴 수 없었다. 청명은 용의 태를 갖고 있었으나 그 오랜 삶에선 산군인 호랑이였고, 지켜야 할 것이, 이어가야 할 것이, 나아가야 할 것이 있었다. 청명에겐 화산이 전부였기에 결국 이 알 수 없는 외로움을 짊어지기로 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고, 제게 남아있는 공백을 채우게 되는 날엔, 영원히 찬란할 꽃을 피워 낼 것을 은연중 깨달았다. 그리고 이 꽃이 바로 사람들이 부르는 용화일 것이다. 청명은 긴 시간, 긴 고민 끝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한편, 용화를 영약으로 만들면 꽤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은 자연의 형상이라더니, 용의 태 자체로도 이용할 만한 것이 꽤 많았다. 청명은 문뜩 제 귓가에 동전, 아니. 은자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반년 넘게 백천은 하루를 보낸 마지막에 운기조식 외에 꾸준히 하는 다른 일이 하나 추가됐다. 운기조식을 하기 전, 조용히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머리를 빗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맨 밑의 서랍 안, 제일 구석에 넣어둔 함을 꺼내 열어 보는 일이었다. 백천이 조심스레 여기는 함 안에는 비단이 들어있었고 그 비단을 걷어내면 붉은 매화 한 송이가 피어있었다. 하지만 백천은 과연 이 꽃을 정말 '꽃'이라고만 봐야 할지, 아님 '보석'이라고 봐야 할지 애매했다. 생긴 것은 필시 꽃이었다. 매화 특유의 달달한 향도 함께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꽃을 만져본다면 필시 이 꽃은 보석이었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깍아 만들었다 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매화. 왼손으로 턱을 괸 채 꽃을 바라보던 백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오른손 검지로 꽃잎을 조심스레 쓸었다. 은은한 매화향이 제 검지에도 스며들었으리라. 이 꽃을 받은 지도 벌써 반년이 넘어간 상황에서 꽃은 조금도 지지 않고 피어있었다. 꼭 누구를 유혹하듯 달달한 매화향과 함께. 

백천은 꽃이라며 건네주던 청명을 기억한다. 마치 길 가다 주웠다. 라는 투로 건네주던 청명은 제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괜히 아무것도 없는 옆만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괜히 붉어진 청명의 귓가를 바라보던 백천은 괜히 지금의 상황이 부끄러워 한마디 툭 던졌다.

"어디서 훔쳐 오기라도 한 거냐..?"

부끄러웠을 상황이 사라지다 못해 와장창 깨져버린 그때, 청명은 기가 찬다는 듯 백천을 쳐다봤다.

"이게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래, 내가 언제는 훔쳐 온 걸 사숙한테 주기라도 했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누가 보면 내가 기사멸조하려고 주는 줄 알겠네!!!"

"아니, 오히려 평소 네가 하는 행동이…."

뭐? 청명이 눈을 희번덕 뜨며 쳐다보기 시작하니 백천은 바로 입을 합! 닫고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청명은 몇 초를 더 백천을 쳐다보다가 백천의 두 손 위에 고이 올려져 있는 홍매화를 바라봤다. 그러곤 손을 뻗어 꽃을 가져가려는 듯, 할 때, 백천은 황급히 홍매화를 제 품 속으로 가져왔다. 어쭈, 이것 봐라? 청명이 백천과 눈을 맞추자, 백천은 분명 시원한 밤 날씨임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느꼈다.

"아까는 훔쳐 온 거라며?"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 단정 지었데! 백천은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아니라고 제 의견을 피력했다. 청명이 짝다리를 짚곤 좋은 말 할 때 다시 내놓으라는 듯 손을 까딱거리자, 백천은 홍매화를 품에 더 깊숙이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게 이미 준 것이 아니더냐. 이제 내 것이다."

청명이 그 말에 입꼬리를 쓱 올리자, 백천의 머릿속엔 경고등이 울리는 것마냥 빠르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여기서 뭘 한다 해도 청명에게 당해 빼앗기는 것은 피차일반. 백천은 괜히 무모하게 청명에게 덤빌 바엔 그냥 튀는 것이 제일 합리적이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뒤도 안 돌아보고, 제 처소를 향해 경공술을 펼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라고 경공까지 펼치며 튀는가 싶지만, 이대로 잡혔다간 받은 것도 빼앗기고, 제 머리도 빼앗고, 정신도 빼앗고, 기절 후 일어나고 나면 아침일 것이란 생각에 백천은 어쩔 수 없었다. 청명에게 받은 꽃도 꽃이었지만 제 머리도 중요했으니까. 도망치는 백천의 뒤로 거기 안 서!! 필요 없다며!!! 라고 큰소리치는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거의 혼비백산의 상태인 백천에겐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직 백천의 머릿속엔 잡히면 죽는다. 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다행히 그냥 봐준 것인지 백천은 처소로 들어오기까지 청명에게 잡히지 않았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청명이 쫓아온 것이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백천은 그저 제 품 속에 있는, 청명에게 받은 홍매화를 지키는 것이 좀 더 중요할 뿐. 백천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러곤 남은 한 손에 들려있는 붉은 매화를 보았다. 곱다. 정말 고운 꽃이었다. 매화를 품 안에 넣고 와서 그런 걸까, 백천은 제 손과 품에서 나는 은은한 매화향을 맡으며 잠시 긴장을 풀어냈다.

곧 백천의 처소 앞으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는 분명 청명이리라. 백천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장지문 앞에 선 이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래도 최소한 남의 처소에서 사고 치지는 않겠지. 사숙. 청명은 별일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로 백천을 불렀다. 백천은 그 부름에 목을 가다듬곤 답해주었다. 크흠, 큼. 왜 그러느냐. 백천의 물음에 청명은 잠시 말을 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 꽃 잘 갖고 다녀, 괜히 어디 모셔두지 말고."

사숙한테는 몇 번이고 줄 수 있으니까 애지중지하지 말고. 청명은 백천이 필시 애지중지할 것을 알았는지 그리 말하며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본 백천은 조금 전까지의 긴장감은 어디로 갔는지, 살짝 웃음소리를 흘렸다.

"걱정마라, 내 잘 갖고 있을 테니. 나중에 다시 돌려달라거나 하지 말거라."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니까 걱정마셔. …고운 것을 주어 고맙구나, 청명아.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짧은 밤 인사를 나누었다. 청명이 간 것을 확인한 백천은 탁상 위 꽃을 두곤 서랍장에서 비단 하나를 꺼내왔다. 청명은 몇 번이고 줄 수 있으니 갖고 다니라 했으나 백천은 알 수 있었다. 이 꽃. 그냥 보통 꽃이 아니다. 검을 잡는, 몸을 험하게 다루는 무인이 이 꽃을 품과 주머니에 갖고 다니기엔 쉬이 잃어버리거나 상하게 할 것만 같아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백천은 결국 몸에 지니기보단 보관하기를 택했다. 비단에 조심스럽게 꽃을 감싼 뒤, 중한 것들만 넣어둔 서랍 안에서도 제일 안쪽으로 넣었다. 화음에 내려갈 일이 생기면 매화와 어울리는 함을 사 와야지. 그렇게 두곤 잠들기 전 밤마다 항상 꺼내서 보곤 했다. 간간이 청명이 백천을 집요한 눈빛으로 볼 때도 있었으나 백천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가 꽃을 잘 갖고 있는지 확인하려 저러나보다 할 뿐. 백천은 청명이 그리 저를 쳐다볼 때면 슬쩍 눈길을 피했다. 그러면 청명은 뭐가 그리도 맘에 안 든다는 듯 뚱하니 있다 결국 슬쩍 미소를 짓곤 했다.

백천은 제 손에 들린 매화를 바라봤다. 이 꽃을 받은 지도 벌써 반년이 넘어갔다. 그럼에도 꽃은 조금도 시들지 않고 찬란히 피어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에, 그 아름다움을 갖고서. 아니. 오히려 더욱 만개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향은 다 날아갔나 싶어도 강하지 않고 은은히 풍겨오는 달달한 매화향에 백천은 머리를 짚었다. 처음 이 꽃을 보았을 때부터 평범하지 않음을 알았다. 하지만 꽃은 꽃. 더군다나 그 누구도 아닌 청명이 준 것이니 그저 두고 매일 보며, 살짝씩 매만지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꽃에 대해서 확실히 해야만 했다. 처음엔 이 꽃이 그저 청명이 매화에 기 氣를 불어넣어 생을 늘린 것인가 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꽃이 시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보석과도 같은 생김새.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향. 백천은 저가 받은 꽃이 기록과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꽃인 용화라 짐작했다. 용이 인간에게 주는, 영원히 지지 않고 찬란할 꽃. 백천은 찬란한 매화를 다시 비단에 감싸곤 품에 조심히 넣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천은 청명을 찾았다. 그냥 이곳에 있겠거니 하고 화산을 걸으면, 그 끝엔 언제나 청명이 있었다. 백천은 검을 휘두르고 있는 청명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있으려 했으나, 휘두르던 검을 멈추곤 금방 눈을 맞춰오는 청명에 글러 먹었음을 바로 깨달았다. 청명은 잠시 백천을 바라보더니, 무언갈 발견했는지 눈을 몇 번이고 크게 끔뻑이다가 갑자기 신이 나선 달려왔다. 백천의 주위를 한두 번 돌던 청명은 백천 앞에 서선 씨익 웃어 보였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꽃을 가지고 왔데?"

청명의 모습은, 그래. 마치 개 같았다. 흔히 쓰는 그 개 같다는 말이 아닌, 멍멍 개의 그 개와 닮았다. 만약 다른 이가 보았다면 청명의 태가 개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만큼 청명은 매우 즐거웠고 기쁜 상태였다. 하지만 청명이 이렇게 기쁜 것엔 이유가 분명했다. 몸에 지니고 다니라고 한 꽃을 받은 지 반년 만에 품고 왔으니 안 기쁠 리가 있겠는가. 처음 꽃을 전해주었을 때, 청명도 백천이 꽃을 품고 오는 데 오래 걸릴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반년이 흐를 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청명은 마치 지금이 깜짝 선물과도 같았다. 백천은 신이 나 있는 청명을 바라보다 물을 것이 있다며 품 안에서 매화를 감싼 비단을 꺼냈다. 그러곤 그 안에 든 매화를 보여주었다.

"이 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물어보러 왔다."

이 꽃이…. 용화가 맞느냐? 백천은 살짝 긴장한 채 청명에게 물었고 청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화. 그래, 많은 이들이 그리도 부르지. 청명은 꽃은 그저 꽃일 뿐인데, 그 꽃을 용이 주었다 하여 용화라고 거창하게 부르니 그것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숙.

청명이 백천을 부른다. 그 부름에 백천은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천천히 두 손을 뻗어 백천의 한 손을 감싸았다. 그리 춥지도 않은 밤이었건만, 그것만으로도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청명은 그 따스함에서 이미 가득 차 공백이라 부를 수 없는 공간이 흘러넘침을 느꼈다. 청명은 백천에게 당장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왜 이 꽃을 소중히 대해주었는지, 왜 잠들기 전 밤마다 만져주었는지, 왜 그렇게 마음을 써주었는지, 저와… 같은 마음인지. 하지만 그 무엇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어떠한 대답이 나올지 몰라 떨렸고, 그 대답이 무엇이든 죽을 것만 같았다.

청명은 조용히 저의 눈을 맞춰오는 백천을 보다 아무 말 없이 제 태를 부분적으로 드러냈다. 청명의 그림자가 용의 형태로 길게 늘어지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머리카락 사이로 뿔 두 개가 돋아나고 동공이 짐승의 것처럼 가늘어지며, 손톱은 짐승의 것처럼 길고 뾰족해졌다. 피부엔 비늘이 부분적으로 돋아났으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백천이 보고 놀란 것은 청명의 머리에 돋아난 뿔에서 피어나는 매화였다. 뿔에서 돋아난 매화에는 백천이 받은 홍매화뿐만이 아니라, 백매화도 피어있었다. 꽃이 그렇게 피어나니 은은하게 나던 꽃 향이 매우 짙어졌다. 다행히 꽃 향은 짙어질지언정 독해지지는 않았다. 마치 미움받길 원치 않은 것처럼. 

백천은 그 꽃에 홀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꽃에 닿기 전, 멈추었다. 남에게 자신의 태를 보여주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아무리 직접 보여주었다 해도 남이 마음대로 만지는 것은 무척이나 예민한 문제였다. 백천은 순간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다. 백천이 주춤거리다 손을 다시 뒤로 빼려 하자 청명이 그 손을 조심하지만 단단하게 막았다. 백천은 그 손에 흠칫 떨며 청명을 내려봤다. 청명의 눈은 태를 드러내어 평소와는 조금 달랐으나 그 눈 안에서 진중함을, 조용한 동의를 얻었다. 그럼에도 차마 먼저 꽃에 손을 뻗을 수 없던 백천은, 청명이 이끄는 손길을 조용히 따랐다. 곧 백천의 손에 부드러운 꽃잎이 느껴졌다. 붉은 매화와 백매화. 어여쁘게 뿔에 아름드리 피어난 매화는 백천의 손길이 닿자 더욱 만개했다. 백천은 그 풍경에 무의식적으로 입가가 올라가 미소를 띠었다.

청명은 지금, 이 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저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어떠한 것도 감내하고 행할 만큼. 청명은 차오르는 기쁨에 들떴던 마음은 백천의 미소에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청명은 어여쁜 것을 보듯 제 뿔을 바라보는 백천을 눈에 담았다. 처음 제 뿔에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청명은 참 우습게도 제 뿔에서 꽃이 언제부터 피어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 어느 때에 깨달은 것뿐이었다. 언제나 그 누구와 함께해도 채워지지 않던 공백이 천천히 차올라 메워지고, 다른 이들과 함께해도 외롭지 않게 되었을 때. 청명은 그 어느 순간부터 제 뿔에 꽃이 피었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왜 꽃이 피었는지를 알 수 없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용화라 불리는 이 꽃은 그저 한낱 꽃에 불과하단 사실을 알게 됐다. 수많은 기록 사이에서 용의 꽃은 병을 낫게 하고 늙지 않게 하며, 불로불사를 꿈꾸게 한다 했으나 그것은 진실이자 거짓이었다. 아무리 용의 꽃이어도 꽃은 꽃이었다. 그래, 용의 마음을 받은 자 외엔 말이다. 용화는 모두를 위한 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만을 위한 꽃이었다. 단 한 명만을 위한 꽃. 용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해서 아름드리 꽃을 피워 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사라지면 꽃은 먼지가 되었고 뿔은 썩어들어갔다. 마치 더 피울 꽃은 필요 없다는 듯. 청명은 이 꽃이 단순히 영약이나 값비싼 장신구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 꽃은, 마음의 형상이었다. 누군가와도 섞여 들지 못하는 용을 위한 하늘의 배려였다.

"용은… 한 생에 단 한 사람을 위해 꽃을 피워 내."

청명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피워내고, 져버리지. 그다음은 없어. 꽃을 피우는 마음은 다양해. 친구, 부모, 형제, 문파, 스승…. 모든 관계에서 용의 무언가를 채워준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해. 그리고 내 꽃의 형상은, 연모 戀慕야. 순간 백천의 눈과 청명의 눈이 부딪혔다. 백천이 놀라 꽃을 만지던 손을 빼려 하니 청명은 그 손을 붙잡곤, 제 얼굴로 이끌었다. 백천은 그 손을 빼내려 했다. 연모하고 있어, 사숙. 그 말만 아니었다면. 이 꽃은 사숙만을 위한 꽃이야. 백천은 최종 선고를 받은 것마냥 그 말에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백천은 붉게 물든 청명의 볼을 천천히 매만졌다. 

간질거리는 마음을 느낀 백천은 차마 섣불리 답할 수 없었다. 정말 자신이 이 말을 해도 괜찮은 것인가. 상황에 의해 덧칠된 마음이 아닌가. 백천은 생각했다. 저만을 위한 꽃을 피워 내는 존재. 그런 존재를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고까워할 수 있을까. 평소 하는 행동을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망둥이는 분명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 청명의 마음에 있어서, 과연 내가 그 마음에 제대로 보답해 줄 수 있는 것인가. 백천은 제게 마음을 전한 청명을, 행복해 보이는 청명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제대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청명은 그런 백천을 이해하였는지, 답이 늦어지는 백천을 독촉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려 줄 뿐이었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는 마음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많았다. 이 꽃은 백천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백천만을 위해 피어있을 터이니.

"답은 주지 않아도 돼. 나중에 줘도 좋고."

그냥, 그렇다고. 이 꽃이 무엇인지 그것만은 알아주길 바랐어. 청명은 그리 말하곤 백천의 손을 떼어냈다. 밤이 깊다. 이제 들어가야지. 청명은 그리 말하곤 평소와 같이 백천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지는 와중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백천은 조심스레 쥐고 있던 붉은 매화를 다시 비단에 싸 품에 넣었다. 그러곤 청명의 말에 따라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뒤에 남아 있을 청명이 신경 쓰였다. 해서 이번 것은 그저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리라.

"백매화도 내게 주겠느냐."

그 말에 청명이 눈을 크게 뜨고 백천을 바라봤다. 백천은 충동적인 제 행동에 이미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 꽃은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그럼, 내게 백매화도 주거라. 백천은 그럼에도 청명에게 말했다. 그 꽃이 내 것이 맞다면, 남은 색의 매화 역시 달라고. 청명은 결국 밝게 웃어 보이곤 제 머리 위 뿔로 손을 올렸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매화를 꺾어냈다. 꺾어낸 백매화는 천천히 보석과 같이 변해갔다. 백매화도 달달한 향을 품고 있었다. 청명은 그 매화를 바로 백천에게 건넸고, 백천은 그 매화를 조심히 받았다. 곱디고운 백매화를 잠시 바라보던 백천은 그 매화를 품에 넣었다. 조심히 들어가 쉬어라. 백천은 그리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백천에게서 이전보다 조금 더 짙어진 매화향을 맡으며, 청명은 드러냈던 제 태를 숨겼다. 지금 당장은 받아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가, 제 마음을 받아주었다. 청명은 간질거리며 따스해지는 제 마음을 느끼며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도 없는 장소엔 오직 매화향만이 가득했다.

화심化心 : 1. 마음을 변하게 함.  2. |불교| 신통력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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