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백천 - 別有乾坤 (2)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게 된 그립고도 그리운 얼굴.
* 2023.10.31 일자 글 백업
* 필자는 화산귀한 800화 초반까지만 읽은 상태로 설정 오류 및 미래 날조가 존재합니다.이 점 주의하여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잠결에 느껴지는 뜨거운 공기에 답답해진 진동룡은 무거워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떴다. 이번에는 높게 뚫린 푸른 하늘이 아닌, 목제 천장이 진동룡을 반기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누워있음에도 축축 처지는 몸과 뜨거운 열감에 도저히 무엇 하나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진동룡은 눈을 오래 뜨고 있지 않았음에도 금세 눈가로 몰리는 열감에 결국 눈을 다시 감을 수밖에 없었다.
쿨럭,
순간 색색거리는 거친 숨소리 뒤로 거센 기침이 튀어나왔다. 한 번 튀어나온 기침은 진동룡이 일어나길 기다렸다는 듯 진동룡의 목을 간지럽히며 쉴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나왔다.
뜨거운 몸과 붓고 간질거리는 목, 끊임없이 찾아오는 두통에 진동룡은 자신이 감기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초등학생 때도 잘 걸리지 않았고 독감과 같은 호흡기질환 질병이 유행했을 때도 단 한 번도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던 자신이 한순간에 감기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진동룡은 문득 자신이 왜 감기에 걸린 것인지 생가갛려 했지만, 열이 오른 머리와 지끈거리며 계속해서 찾아오는 두통 때문에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지금 하고 싶은 것은 제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불을 치워내고 더운 방안을 환기 하며, 심하게 부어 아프고 간질거리는 목을 진정시키기 위해 물을 마시고 싶었다.
진동룡은 무겁게 내려앉는 몸을 끙끙거리며 힘겹게 움직여 이불을 슬쩍 치웠다. 후덥지근하고 무거운 공기가 이불이 있던 자리를 대신했다. 다행히 이불만 없어도 덜 갑갑해진 터라 진동룡은 숨을 쉬기가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진동룡이 잠시 편안함을 만끽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살짝 치워낸 이불을 다시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이 때문에 다시금 찾아온 답답함에 진동룡은 얼굴을 찡그리며 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진동룡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갑갑함과 더위에 또다시 이불을 치우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으로 힘겹게 이불을 치웠지만 그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다시 목 끝까지 단단히 덮어내는 손길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저를 돌보려 하는 듯한 손길에 차마 욕을 내뱉을 수 없던 진동룡은 심하게 부어 숨만 쉬어도 아픈 목으로 힘겹게 말했다.
“………더워.”
내뱉은 목소리는 이 목소리가 정말 자신의 목소리가 맞는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처참하게 가라앉았으며 거칠었다. 만약 진동룡의 정신이 또렷했다면 목소리가 왜 이러냐고 놀랐으리라. 하지만 진동룡은 지금 독한 감기와 몸살을 앓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신경 쓸 수 없었다. 그저 한 단어를 내뱉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지 진동룡은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런 진동룡을 향해 무어라 말을 거는 목소리가 있었다. 말의 형태가 아닌 웅웅거리는 소리로 들려와 차마 상대가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진동룡은 그저 작게 웅얼거리며 덥다는 말과 물을 반복해서 말할 뿐이었다.
곧 탁, 소리와 함께 무언가 놓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동룡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물이라는 걸 알았다.
진동룡은 몸을 천천히 일으켜 자리에 앉으려 했으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로 몸을 지탱하고 앉으려 할 때마다 팔은 부들부들 떨렸고 결국엔 힘이 빠져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버리고 말았다. 이 짓도 한두 번이지 세 번, 네 번, 횟수를 늘려갈수록 그나마 있던 체력만 떨어지고 힘들기만 했기에 진동룡은 결국 물 먹길 포기하고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물도 못 마시는 거, 잠이나 자야지.
진동룡이 다시 잠에 들길 선택한 그때 누군가 진동룡의 등 뒤로 손을 넣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었다. 몸을 지탱하는 손길은 누군가를 간호하기엔 투박했지만, 조심스러웠고 단단했다.
진동룡은 자신을 돕는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곧 입에 맞닿은 차가운 감촉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물을 마시느라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간호해 주는 이가 있다고 생각할 뿐.
목을 충분히 축인 뒤 한 손을 들어 저를 지탱해 주고 있는 이의 팔을 두어 번 두드리자 곧 입 가까이 있던 물이 멀어졌다. 마치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한 행동에 진동룡은 익숙하게도 그 품속에 몸을 맡겼다. 곧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았는지 진동룡을 지탱하던 손길은 빠르게 진동룡을 다시 자리에 눕히고 굳이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진동룡은 금세 찾아온 수마에 빠져 잠드는 와중에 제 이마에 수건을 올려주고 이불 위로 저를 도닥이는 손길과 함께 아니, 고뿔 걸려서 열이 심하게 나는 환자한테 찬물을 주면 어떡해요! 라는 날카로운 소리와 와아악─!!! 하고 울려 퍼지는 비명 뒤로 시끄러워. 그래, 조용히 좀 하거라. 라는 잔잔한 두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잠에 들었다.
색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아닌 조금은 편안한 숨소리가 들려오자, 진동룡 곁에 앉아있던 윤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그맣디 자그마한 한숨 소리에 대침을 들고 의약당 안을 뛰어다니던 당소소와 대침을 피하기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니던 청명이 소란스럽게 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한순간에 조용해진 의약당 안에는 약을 달이느라 불에 올린 약탕기에서 나는 보글거리는 소리와 건물 안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꺼내둔 화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곧 당소소와 청명이 조용히 잠든 진동룡의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깨어났을 때와는 달리 아이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청명의 시선이 잠든 진동룡의 얼굴로 향하다 아이의 이마에 물에 젃신 영견을 올려주고 있던 유이설의 손에 막혔다. 가려진 얼굴에 청명의 얼굴이 살짝 불통해졌으나 손가락 사이사이로 보이는 아이의 얼굴에 금세 풀어졌다.
그 모습을 본 윤종이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지금 이 아이가 아픈 이유 중의 하나가 본인이라는 것을 벌써 망각한 것인지 원하는 것을 얻어내 기쁜 아이와 같은 표정을 짓는 청명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었다.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외관처럼 좀처럼 성숙해지지 않는 성정이었다.
아니, 성정이기에 성숙해지지 못하는 것일지도.
“정말 본인인 거 아닙니까?”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이 상황이 벌어진 이유 중 하나가 된 탓에 윤종의 눈치를 보고 있던 조걸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순간 윤종의 시선이 가볍게 조걸에게 가닿았으나 금방 떨어졌다.
순간 느껴진 차가움에 조걸은 몸을 흠칫 떨다 결국엔 더 작아질 것도 없는 몸뚱어리를 꾸깃꾸깃 구겨 최대한 작게 만들었다.
위축되었음에서 오는 행동이자 저의 눈치를 보고 있음에서 오는 행동임을 아는 윤종은 그런 조걸의 행동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윤종이 그럴수록 조걸은 더더욱 윤종의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꼭 하는 행동이 주인에게 혼이 난 개 같았다.
이번 일의 원흉은 조걸이 아닌 청명이었지만 조걸이 제 눈치를 보는 것은 청명을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고 제대로 막지도 못하여 이 사달이 났기 때문이리라.
본인 역시 이성을 놓은 청명을 말리지 못했으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그 당시의 상황을 손으로 휘휘 저어 기억 저편에 묻어버렸다.
뭐 어쩌겠는가. 청명은 자연재해와 같아 모든 걸 휩쓸어 가는 존재이니 말이다. 그 후에 뒷수습할 수만 있다면 뭐든 나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다행히도 뒷수습이 가능한 상황 중 하나였다.
해서 윤종은 순식간에 일을 벌인 청명을 다그쳤고 청명은 윤종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본래라면 참회동에 보낼 사안이었으나 차마 장로를, 그것도 청명을 참회동에 보낼 수 없었던 윤종은 대신 청명에게 금족령을 내렸다. 그리고 나머지 처분에 관해선 아이가 일어나고서 정하기로 하였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와중에도 계속 힐끔힐끔 제 눈치를 보는 조걸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던 윤종은 입을 열어 조금 전 조걸의 물음에 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먼저였다.
“장문인─! 안에 계십니까!”
아직 앳된 목소리를 채 버리지 못한 것이 운자배 아이의 것과 같아 윤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 뒤로 몇몇 아이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는 것을 보아 저들끼리 무슨 일을 벌이거나 벌어지는 중인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나눌 얘기는 많았으나 자신들의 위치가 무엇 하나만 계속 신경 쓰기엔 힘든 위치였다.
“이만 자리를 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얘기는 차후 아이가 일어나면 하도록 하죠.”
윤종은 그리 말하며 조걸의 옷깃을 붙잡곤 장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걸음걸음마다 조걸은 얼떨결에 어, 악, 자, 잠깐만요! 장문 사형!! 하며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면서도 결국엔 윤종의 걸음에 맞춰 걸어갔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윤종은 무언가 생각 난 듯 뒤돌았다.
“청명아.”
윤종이 청명을 불렀다. 이름만을 부를 뿐 그 뒤를 얘기하지 않았으나 청명은 윤종을 슬쩍 쳐다보곤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윤종은 청명을 좀 더 쳐다보다 바깥에서 다시금 저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결국 조걸을 끌고 나갔다. 곧 활기찬 아이들의 목소리와 잔잔한 목소리가 뒤섞이며 멀어졌다.
“사형은 여기 계속 계실 거죠?”
켜놓은 화로 중 하나를 끄며 당소소가 물었다. 그리 묻는 말과 다르게 눈빛은 제발 좀 나가줬으면 하였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하고 그저 물을 뿐이었다. 질문을 받은 청명은 뭐라 말하지 않았으나 조금 전까지 윤종이 앉았던 자리를 꿰차고 앉는 것이 나갈 생각이 하나도 없어 보여 당소소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사, 아니. 아이가 알아서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마세요. 영견이 말랐다 싶으면 물에 적시고서 적당히 짜내고서 올려주고요. 의약당 안은 따뜻하니까 이불 좀 치워내는 건 가만히 둬도 괜찮은데, 더워한다고 창을 열어주면 안 돼요. 그리고 또, 고뿔에 단단히 걸린 환자한테 찬물 주기만 해 봐요. 뜨거운 물은 아니어도 미지근한 물로 줘야 해요.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하러 갈 테니까 할 일 하러 가도 돼.”
“그리고 그거 아니니까 말끝까지 들어요. 말 좀 더 듣는다고 옆에 있는 아이가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잖아요.”
청명은 그런 당소소에게 뭐라 말하고 싶었으나 입을 열려 할 때 마주한 당소소의 미소 짓는 얼굴이 서늘하여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청명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제 말을 들을 자세가 되자 당소소가 입을 열어 하고 싶은 말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알아둬야 하는 점이나 당부해야 하는 점을 알려주긴 하였으나 대부분의 이야기는 거의 잔소리와 가까웠다. 그 때문에 청명은 당소소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몸이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는데, 그때 당소소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는 물건 하나에 곧바로 몸을 고쳐 앉아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런 청명의 모습을 본 당소소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끝냈다.
이곳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앉아서 잠든 아이만을 바라보고 있던 유이설은 청명과 당소소의 대화가 끝나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상 자신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 미련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난 몸과 달리 유이설의 시선은 드문드문 아이에게 가 있었다. 가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으나 청명이 아이의 곁에 있고 싶어 하니 유이설은 이번만큼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소중한 사질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이 작은 바람 정도는 잠시 뒤로 미뤄도 괜찮았다.
당소소와 함께 의약당 밖으로 나가려던 유이설은 문득 문 앞에서 멈칫하였다. 그러곤 시선을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 상태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으니 먼저 문을 나섰던 당소소가 유이설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 끄덕이며 알겠다는 듯 짧게 의사를 표현하던 유이설은 다시 청명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에 청명이 고개를 돌리자 유이설과 청명의 시선이 맞물렸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유이설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적당히 해.”
유이설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감각했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단호함에 무슨 말이냐며 너스레를 떨며 웃어넘기려던 청명은 저만을 담고 있는 검디검은 눈동자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 저를 꿰뚫어 보는 눈동자 앞에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유이설은 그렇게 청명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바깥에서 자신을 재촉하는 당소소의 목소리에 밖으로 나갔다.
끼익─ 탁.
청명과 아이만이 남은 의약당 안에는 한순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할 순간을 놓친 청명은 그저 유이설이 서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허, 순간 헛웃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마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얼 하려는지 훤히 아는 사람처럼 말하고 나간 윤종과 유이설의 모습이 겹쳐 참으로 웃음이 났다. 그냥 나이만 먹은 게 아니라 눈치도 빨라졌네.
‘청명아.’
‘적당히 해.’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계속해서 헛웃음을 뱉어내던 청명은 윤종과 유이설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귓가에 들려오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응, 알겠어. 걱정도 참 많아. 내 나이가 몇인데 그것도 모를까. 그리 읊조린 청명은 시선을 돌려 잠든 아이의 얼굴로 향했다.
처음 보는 의복에 처음 보는 물건들을 잔뜩 가진 아이였으나 참으로 똑 닮은 얼굴이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시절보다 몇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얼굴이긴 했으나 볼살이 남아있다는 것을 제외하곤 똑같이 잘난 얼굴이었다. 자라서도 잘난 얼굴은 어릴 때도 잘난 얼굴이구나. 청명은 그리 감탄하며 아이의 얼굴에 난 땀을 영견으로 닦아주었다.
아이는 펄펄 오른 열에 힘든지 중간중간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족들을 불렀다. 어머니, 작은형, 큰형. 청명은 아이가 앓는 소리를 낼 때마다 걱정스러웠으나 중간중간 불리는 이들을 들으며 아이가 어머니와 큰형, 작은형은 부름에도 끝까지 아버지는 부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너는 왜 또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못한 것인지, 아픈 와중에 하염없이 가족을 찾는 걸 보면 사랑받은 게 분명할 텐데.
그렇게 몇 번을 더 가족들을 부르던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 답에 결국 지쳤는지 아니면 더 깊게 잠든 것인지 다시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아이의 얼굴은 언뜻 보면 편안해 보이면서도 중간중간 찡그리는 미간을 보면 계속 아파하는 모습이 그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청명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닮은 얼굴이라 할지라도 동일인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음을 말이다. 저와는 다른 결로 어떤 사술에 의해 무언가가 틀어져 벌어진 일이라 한다면 동일인이 생겨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아이가 그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청명은 그 둘을 떼어놓고 보았으나 완전히 떼어놓지는 못하였다.
해서 청명은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순간에 분노로 아이에게 해악을 끼치긴 하였지만 아이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참아내려는 모습이 그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게 된 그립고도 그리운 얼굴.
청명은 아이가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쓰러진 모습에서 십 년도 더 된 그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하필 쓰러져도 둘 다 똑같은 모습으로 쓰러지는 것인지. 청명은 아이가 쓰러지고 난장판이 된 공간 속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무슨 일이 펼쳐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여든 사람 사이사이로 보이는 아이의 눈을 감은 모습 위로 눈을 감았던 그의 모습이 겹쳐져 청명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청명은 그렇게 유이설과 당소소가 쓰러진 아이를 둘러업어 달리고 윤종이 자리를 정리시키고 당소소를 찾으러 갔으나 길이 엇갈려 빈손으로 되돌아온 조걸이 말을 걸 때까지도 제자리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던 청명은 아이가 무엇이 불편한지 몸을 들썩이며 소리를 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이는 몇 번을 더 움직이다가 이불을 치우고 나서야 다시 조용해졌다. 이불을 덮어주어야 하나 싶던 청명은 문득 이불은 놔둬도 된다는 당소소의 말이 생각나 가만히 뒀다. 이불까지 치워내고서도 더운 것일까, 안에 들인 세 개의 화로 중 아까 끈 한 개의 화로를 제하면 두 개만 켜있음에도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를 보며 청명은 고민하였다.
곧 청명은 화로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당소소를 떠올리며 마저 켜있는 화로 중 한 개를 바깥에 두고 들어왔다. 바깥에 나갔다 들어와 보니 확실히 따뜻한 의약당 안에 청명은 아이가 왜 이리 더워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화로가 세 개에서 두 개로, 이제는 두 개에서 한 개로 줄은 마당에 추고마비秋高馬肥*의 계절이 찾아와 조금은 쌀쌀해진 날씨를 생각하며 청명은 남은 화로 한 개를 침상 가까이에 두었다. 아이는 조금 편안한 표정이 되었고 청명은 그런 아이의 곁을 지키며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손길로 아이를 돌봤다.
지금은 다 잊고 푹 자렴.
*추고마비秋高馬肥 : 가을 하늘은 맑아서 높으며 말은 살쪄서 기운이 좋다는 뜻. 원말은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로 당나라 초기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의 시에서 나왔다. 한국에선 천고마비天高馬肥로 더 알려져 있다.
진동룡은 내리 나흘을 앓다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진동룡은 나흘 내내 잠만 잤다는 소리였다. 물론 중간중간 누군가가 자신을 깨운 듯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금방 정신을 잃고 잠들었기에 자신이 잠깐 일어났을 때 곁에 누가 있었는지, 누가 자신을 간호했는지, 잠깐 일어났을 때 무엇을 했는지 그 무엇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진동룡은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과 윤종의 입 밖으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정보들을 받아들일 머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 누가 받아들일 수나 있을까.
감기를 앓고 일어나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서 오십시오, 여기는 중원의 화산입니다.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21세기를 살아가던 자신이 한순간에 아무런 지식도, 관계도 없는 중원의 화산이란 곳에 떨어졌다는데.
진동룡은 그 정보들을 꾸역꾸역 억지로 받아들이다 결국엔 다시 열이 올라 기절한 뻔한 작은 소동이 벌어지면서 의약당 안이 한순간에 난장판이 될 뻔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진동룡이 기절까지는 하지 않았기에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다.
진동룡이 이 혼란스러운 마음과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하고 있자 그걸 지켜보던 당소소가 차 한 잔을 진동룡에게 건넸다.
“매화차예요. 심신 안정에 좋아요.”
“아, 감사합니다.”
진동룡은 찻잔을 두 손으로 조심히 잡곤 차 안을 보았다. 찻잔 안에는 은은한 노란빛의 찻물과 새하얀 꽃 한 송이가 중앙에 활짝 피어서 진동룡을 반기고 있었다. 활짝 피어있는 백매화를 보던 진동룡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아보았다. 매화가 활짝 피었을 때 나던 매화 특유의 달달한 향기가 났다. 매화차 향을 맡으니 점점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아 갔다.
진동룡은 그렇게 천천히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며 생각이 많아진 머리와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차차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런 진동룡이 제대로 진정할 때까지 윤종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음과 머리를 진정시킨 진동룡이 찻잔을 탁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윤종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물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정말로 안 믿겨서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여기가 중원의 화산이라고요?”
“네, 중원의 화산입니다.”
윤종은 몇 번이고 되묻는 똑같은 질문에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몇 번이고 같은 답을 인내심 있게 끝까지 답해주었다. 결국 몇 번이고 질문을 한끝에 나가떨어진 것은 진동룡이었다.
화산? 용암을 분출하는 그 화산火山 말고 오악五岳 화산華山?
진동룡은 몇 번을 물어도 똑같이 되돌아오는 답변에 믿을 수가 없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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