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작

善墨

https://youtu.be/TZQCRDzyOyo?si=GoaiTkOXGQyX50bR

“스승님.” 남자는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끌어모은 손끝이 자꾸만 꿈지럭거렸다. 감히 제 스승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구할 지 언정, 조언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늘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던가. 그릇된 것이 있다면 말하거라. 내 눈은 두 개에 불과하지만, 너희는 다르지 않느냐. 라고. 남자는 그게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은 문파에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완전히 잠들지 않은 소란의 불씨가 짚을 태우며 번져나갔다. 지금, 지금이 아니면 송두리째 잃게 될 것이다.

스승 담묵선은 그 순간에도 침묵했다. 매마른 입술을 적시듯 식은 찻잔을 기울였다. 씁쓸한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총명함이 깃든 눈동자는 눈꺼풀 아래로 금방이라도 몸을 숨길듯 아슬아슬했다. 때로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법이다. 그래, 상념이 많은 날은 더더욱 그렇다.

“애지중지 키운 아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엄하게 대하셔야 합니다. 그 아이…….”

“…….”

“청선유가 저지른 일은.”

“용서받을 수 없겠지.”

“……예.”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인데도, 한 아이의 무게가 얼마나 큰 지 알아서 남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살을 도려내라는 말이었다. 다른 문하생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가족이 있었고, 가족과 자신의 뜻이 있었기에 이곳에서 예禮를 배우고, 도刀를 배웠다. 하지만 청선유라는 아이는 달랐다. 천애고아. 의지할 곳이라고는 없는, 버려진 아이. 그걸 데리고 와서 키운 게 담묵선이었다. 이름을 지어주고, 가족처럼 대하고, 애정을 나누고. 담묵선은 아주 오래토록 바랐을 거다. 그가 옳은 아이로 자라나기를. 헛바람 들지 않고, 그릇된 길을 걷지 않기를.

그런 그가 손댄 것은 흉흉한 마교의 것이었다. 파문조차도 가벼운 징벌일 것이 분명한데, 담묵선은 요 이틀 동안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드리우는 그림자가, 그가 어찌나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지 보여줄 뿐이었다. “……다 똑같은 생각이겠구나.” 담묵선은 찻잔에서 손을 뗐다. 상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떠한 결정을 내린 것은 확실했다.

“선유를 데리고 와주겠니.”

“……예!”

사람은 이름대로 살아간다. 그리 들었다. 그 아이에게 주어진 이름은……. 제 뜻이 너무 어리석었던 것인가. 담묵선은 이제 침묵을 깨고 나서야 했다. 스승이 된 자가 외면할 수 있는 제자의 현재는, 미래는 없었다. 이건 그들을 위한 일이다. 올곧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우습게 만들지 않기 위한 일. 담묵선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꽃이 지겠구나. 그래야 상한 이파리를 솎아내고.


선유야. 올 봄은 더 빨리 지는구나. 툇마루에 핀 목련이 지는 걸 보았느냐. 또 그 아래가 눈처럼 희게 물들겠지. 항상 늦장 부리다가 치우던 네 모습이 선한데. ……하지만 올해는 됐다. 청선유. 내가 이 자리에 너를 부를 이유는 다른 게 있다. 똑똑한 너라면 무엇 때문인지 알 거다. 요 며칠, 참 잡념이 길었다. 나답지 않았지. 그래. 이제는 결정을 내렸단다.

스승님.

파문이다. 이만 짐을 싸들고 나가거라. 삿된 것을 건드리는 욕심의 죄는 크나, 내 그리 엄하게 너를 대할 수가 없다. 그러니 너를 내쫓는 일만이 최선이구나. 짐이 많다면 들고 가줄 이를 붙여주마.

아뇨, 스승님. 제 말을!

아니. 더 들을 생각 없다. 경거망동하게 군 것에 대한 값이다. 이리 될 줄도 모르고 손댔느냐. 나가거라. 당장.

담묵선은 끝까지 그 일그러진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고 했다. 굳게 다물린 입이 움찔거렸다. “스승님.” 이다지도 애처롭게 들릴 수 있을까. 담묵선은 저를 부르는 말에 덜컥, 겁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더 모질게 굴어야 한다. 이곳에 아쉬움이 남지 않게끔, 미련이 생기지 않게끔 모질게! 그래야 제 옆을 벗어나도 아이는 성장할 것이고, 잘못을 뉘우치고 바른 길오 갈 것이다. 담묵선은 그리 믿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포용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마교의 것을 건드렸다고 한들 무용했고, 기이하게도 피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의 실수를 눈 감아주고, 다시 한 번 내 아래에 두면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옳은 길을 걷겠다 약속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청선유가 아니었다면 이 일을 가만 냅뒀을 건가? 그의 처우를 이틀이나 고민했을 건가? 고작 파문으로 그쳤을 건가. ……이게 최선이자, 최대였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 스스로를 그렇게 합리화해야만 담묵선은 제 결단에 힘을 실을 수 있었다.

쿵.

담묵선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발뒷꿈치를 쫓듯 문지방을 쳐다봤다. 마지막에는 어떤 표정을 짓고 나갔을까. 실망했겠지. 분명 그럴 거다. 그 실망이, 네 올곧은 초석이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못난 스승에게 안주하지 않고 비로소 나아가기를.

“잘하셨습니다. 옳은 결단을 내리신 겁니다, 스승님.”

“……하산하는 길을 챙겨주거라.”

“예.”

누가 뱀인가. 누가 똬리를 풀고 내려와 제 귓가에 속삭이는 뱀인가?

담묵선은 안경을 들썩이고는 미간을 꾹 눌렀다. 스승님도 참 너무하십니다.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미련이 남은 것은 자신이었다. 참. 허탈하게도 웃음을 흘렸다. 떠나갈 제자를, 그것도 중죄를 짓고 떠나가는 제자를 배웅 나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겠지. 분명 그 뒷모습을 보면 잡고 말 것이다. 아무렴. 그와 지낸 세월이 몇 년인가. 한 손에 잡히던 작은 손을 기억한다. 빗자루를 들고 설치던 개구진 얼굴을 여전히 기억한다. 이렇게까지 눈에 선한데…….

그래도 마당까지만.

아이에게 짐은 얼마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것이 나고 자란 문파의 것이었지, ‘그’의 것이라고 칭할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조금은 욕심을 내도 괜찮은 나이였다. 이미 떠나 보낸 아이에게 물을 수는 없을 터. 담묵선은 그저 가만히, 가만히, 아이가 걸어내려간 길목을 바라볼 뿐이었다. 쪼그만 뒷통수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는 잡지 않았다.

잡기에는 너무 늦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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