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구분

[트라이건/밧슈울프]평범한 밤

현대AU. 재벌가 차남 밧슈 x 고아원 출신 청부업자 울프우드

솔새둥지 by 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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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슈울프] 평범한 밤

by. 솔방울새

"여행 가고 싶어지네."

가까이서 들려 온 목소리에 밧슈는 맥주 캔에서 입을 떼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털썩 앉는 소리와 함께 낡은 소파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설거지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내 온 울프우드가 쿠션에 몸을 묻으며 TV를 고갯짓했다. 불필요한 조명은 모두 소등된 어두운 거실에서 TV가 홀로 빛나며 해외여행 프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스페인 좋았지-. 그 정도의 생각이나 하며 보고 있었던 밧슈는 눈을 굴렸다. 그가 알기로 울프우드는 마음 닿는 대로 자유롭게 여행을 다닌 경험이 없었다. 임무를 위해 돌아다닌 곳은 있어도 지극히 한정적이랬던가. 절친이자 룸메이트인 그가 자신의 사적인 바람을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입 밖으로 내기만 한다면 밧슈가 도와줄 수 있음에도 그랬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을 뿐, 그에게는 울프우드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다는 적극적인 의사까지 있었다. 그래봤자 요구도 허락도 받지 못한 지원은 그를 화나게 할 뿐임을 잘 알아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지만.

"그럼 가보는 건 어때?"

그래도 이번에는 그가 먼저 말한 게 아닌가. 기회일까 싶어 일단 질러보니 맥주캔을 따는 시원한 소리가 대답 대신 돌아왔다. 밧슈가 먼저 들고 있던 캔을 내밀자 울프우드가 건배를 하곤 곧장 맥주를 들이켰다. 시원스레 벌컥일 때마다 고개가 젖혀져 드러난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보는 사람의 속이 다 뚫릴 것 같았다. 설마 한 번에 비울 셈인가 싶을 즈음에야 울프우드는 고개를 바로 하고 입가를 타고 흐른 것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미처 닦지 못한 액체가 그의 목덜미를 따라 흘러 넥카라에 스며드는 걸 얼빠진 얼굴로 보고 있던 밧슈는 그제야 캔에 입을 대고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스레 뺨이 화끈거렸지만 주변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웃기지 마, 빗자루. 네 형이 널 감시하라고 보냈다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여행은 나도 가고 싶었는데 내가 가면 어차피 너도 따라와야 하잖아. 나이브스도 뭐라고 못할걸? 날씨도 슬슬 더워지는데 어디가 좋아? 특별히 가고 싶었던 곳 있어?"

날카로운 시선이 뺨에 꽂히는 걸 느끼며 밧슈는 실없이 웃었다. 보지 않아도 울프우드의 검푸른 눈이 서늘하게 노려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또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저지를 셈이냐?"

"잠깐 정돈 괜찮잖아. 

2박 3일로 짧게. 빈손으로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웃었다. 울프우드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어금니를 악물곤 으으-. 하는 소릴 흘렸다. 제정신 아닌 얼간이를 보는 듯한 표정이지만 좋은 신호다. 그는 정말 싫다면 거침없이 밧슈의 머리를 후려치는 사람이었다. 가끔은 단순히 부끄러워도 손을 무기로 휘둘렀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임마."

질렸다는 듯 흘러나온 중얼거림이 밧슈의 귀에 들어갈 때까지 결국 울프우드의 양손은 소파 팔걸이와 맥주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앗싸! 밧슈는 두 손으로 주먹을 쥐어 머리 위로 치켜 들며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눌러 참았다. 기껏 받아낸 동의를 허사로 만들고 싶진 않으니 울프우드에게 최대한 맞춰주어야겠지. 그의 어깨에는 고아원 식구들의 무게가 고스란히 얹어져 있었다. 말로는 건성인 것 같아도 속으론 나름대로 깊게 갈등한 끝에 내어놓은 답임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밧슈는 알았다.

'너의 그 점이 좋아. 말로는 포기한 듯 말하면서도 결국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잖아.'

울프우드가 들었다면 네가 할 소리냐며 성질을 부렸을 것이다. 밧슈도 그의 형 나이브스가 집안의 힘을 등에 업고 그의 주변인들을, 울프우드의 고아원을 망가뜨리려는 걸 막아야 했다. 두 사람 모두 소중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내버리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이렇게 또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 역시 닮은 것 같지. 속으로만 생각하며 리모컨을 집었다. 여행 프로가 끝나고 광고가 나오기 시작한 채널을 무작정 돌리기 시작했지만 울프우드는 제지하지 않았다. 100번대까지 빠르게 넘어간 채널은 곧 오래된 고전 서부영화를 띄워 보내는 화면에서 멈추었다.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한 사막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남자들이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자니 울프우드가 다 비운 맥주캔을 소파 아래로 떨궈 발로 납작하게 밟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격발 소리에 맞추어 들린 와그작 소리가 묘하게 경쾌했다.

"너 저런 영화 좋아하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울프우드의 시선이야말로 TV 화면에 못 박혀 있었다.

"그냥 있음 보는데, 이상해?"

"이상한 건 아닌데 좀 안 어울린다 싶어서. 아저씨 같잖아."

"?!...아저씨라니...."

이번에는 밧슈의 시선이 가늘어질 차례였다. 겉보기에는 밧슈가 동안이고 울프우드가 노안이라 훨씬 나이 들어 보이지만, 나이는 명백히 밧슈가 연상이었던 탓이다. 그것도 생각보다 더 차이 나게. 때문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이후 한참이 지나도록 밧슈는 울프우드가 연상인 줄 알았었다. 뒤늦게 알았을 때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마음에 스크래치를 입었더랬다.

"생긴 건 네가 더 아저씨 같으면서."

"뭐랬냐 지금? 나이 허투루 처먹은 게 그렇게 자랑스러워?"

그래, 이렇게. 밧슈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리모컨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맥이 끊기자 벌떡 일어난 울프우드가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더 꺼내 와선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앉았다. 아저씨 운운해놓고선 숫제 본인이 제대로 자리 잡고 영화를 볼 셈이었다. 밧슈의 입에서 칫,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 번째 장 열어보면 전자렌지 팝콘도 있을걸."

"그런 건 좀 앉기 전에 미리 말하지?"

"네가 너무 빨리 움직였단 말이야."

"아, 귀찮아. 이따 네 맥주 더 가져올 때 돌려와."

울프우드가 캔 하나를 더 따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긴 다리를 뻗어 소파 앞 낮은 탁자에 올려놓으며 그는 실없이 웃었다. 그의 시선은 스크린 속 카우보이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며 결전을 벌이는 장면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왜 웃는 것인지 밧슈는 이해할 수 없었다. 킬러로 활동하며 직접 총기로 사람을 죽이는 그에게는 영화 속 멋진 장면이 어떻게 보이는 걸까 잠시 궁금해졌다. 굳이 묻고 싶지는 않아 밧슈는 그저 잠자코 맥주를 들이켰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러닝타임이 생각보다 길었지만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특별히 재밌진 않아도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둘 다 말없이 앉아 봤을 정도. 낮부터 흐리더니 어느 새부턴가 어두운 창밖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따금 번쩍이며 낮게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습도가 높아진 탓인지 중간에 튀겨 온 전자렌지 팝콘은 완전히 눅어 버렸다. 뭐, 눅기 전에 거의 다 먹었으니 상관은 없었다. 밧슈는 마지막으로 비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려다 두어 번 헛손질을 했다. 맥주로도 모자랐는지 울프우드가 위스키까지 꺼내오는 바람에 난데없는 규모의 술판을 벌이고 말았다. 마지막 잔을 비운 건 밧슈지만, 빠르게 마시며 과음을 한 건 명백하게 울프우드였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괜찮은가?'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곁에 있던 검은 머리통이 스르륵 기울어지더니 어깨에 툭 부딪혔다. 

"울프우드?"

"...... ....."

틀렸다. 주량도 많은 주제에 얼마나 마셨으면 만취 상태였다. 완전히 꺾인 그의 고개가 어깨에서 흘러내리려 하자 밧슈는 급히 추슬러 바르게 앉고, 울프우드에게 제대로 자신의 어깨를 내어 주었다. 등 뒤로 가늘게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보니 그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조차 다 비워져 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길쭉한 손가락들 사이에 아슬아슬 감싸인 유리잔을 빼내었다. 몸이 가까이 기울어지자 의도치 않게 코끝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짙은 알코올 냄새가 담배 냄새와 섞여 풍겨 왔지만 신기할 만큼 불쾌하진 않았다.

"먼저 잠들었네...."

평소에는 늘 밧슈가 먼저 잠들었지만, 이렇게 밤늦게까지 술 마시며 같이 시간을 보낸 밤이면 드물게 울프우드가 먼저 잠들곤 했다. 동거 중이라지만 각자 침실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의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하도 곤히 잠든 모습이라 괜찮은 건가 싶어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호흡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드물게 같이 자도 새벽에 눈 떠보면 꼭 일어나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따뜻한 숨결과 고르게 오르내리는 그의 어깨를 확인하고 밧슈의 벌어진 입새로 옅은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그는 울프우드의 남은 술까지 홀랑 털어 삼키곤 취기 오르기 시작한 머리를 마주 기대었다. 그냥 괜히 못 견디게 기분이 좋았다. 잠든 친우와 머리를 맞대고 몇 번 비비적거린 끝에 밧슈는 술김의 힘을 빌려 울프우드의 넓은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덩달아 중심을 잃고 기울어진 울프우드의 몸까지 결국 밧슈의 위에 겹쳐지며 품에 안기다시피 한 자세로 눕혀졌다.

"...울프우드, 그러고 보니 바다에 놀러 간 적 없댔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 머리칼에 코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분명 그렇게 들은 기억이 있었다. 밧슈는 두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를 안으며 들리지 않을 속삭임을 이어갔다. 바다 보러 가자. 우리 바다가 있는 곳으로 여행가자. 입을 열 때마다 제게서 풍기는 술 냄새에 한층 더 현기증이 일었다. 천천히 눈이 감겼다.

다음 날 아침, 장신의 두 남자는 비좁은 소파에서 기묘하고 불편한 자세로 몸을 겹친 채 깨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마자 곳곳에서 들려오는 뚜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서로의 머리에 빈 깡통들을 집어 던지고 짜증을 부렸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울프우드가 소파에서 잠드는 장면…원작의 소파 그 장면 생각하며 쓴 게 맞음

원작에선 밧슈 어깨에 기대지도 못했지만 이번엔 편안하게 기댈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함께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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