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작

ポラリス 86AU

https://youtu.be/ahDLQbhgW5Y?si=l5o3mIh9ijk2jXY8

“……온!”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남자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고개가 포탄보다 무거웠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 위액이 꿀렁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 몇날며칠 먹은 게 하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빵 한 조각이라도 더 먹을 걸 그랬지. 물론 아까워서 안 먹은 건 아니었다. 못 먹은 거였지. 세상에는 유유자적하게 풀을 뜯어 먹는 소가 있는가 하면 목양견에게 발뒷꿈치를 깨물려 억지로 움직이는 소가 있었다. 자신은, 자신들은 딱 후자였다. 물도, 빵도 뭣 하나 제대로 먹을 수 없을 만큼 몰아치는 레기온을 상대하고, 상대하고, 상대했다. 목이 나뒹구는 것보다 아사하는게 더 빠르리라. 남자는 고통어린 신음을 흘렸다.

“셉텐트리온! 정신차려!”

“……저, 아직, 살아 있어요.”

하아. 핸들러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살아 있다는 말에 기뻐하리라 생각한 적은 없다. 그에게 자신들은, 에이티식스는 별 것도 아닌 말이었다. 망가지면 새로 갈아끼우면 되고, 또 망가지면, 또. 핸들러는 한심한 사람을 타박하듯 투명스레 말을 이었다. “빈틈이 생기면 무너진다고 몇 번을 말해.” “네 실수로, 네 동료를 몇 명이나 죽일 뻔 했는지 알아?” “지금은 운이 좋아서…….” 알아요. 안다고요. 남자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팔을 뻗었다. 이번 핸들러는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냅다 소리부터 지른단 말이지. 머리 울려.

하지만 1분. 미쳤다고 전장에서 1분이나 정신을 잃었던 거다. 이건, 소리를 지를 만 했어. 남자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인정할 건 인정했다. 그동안 레기온이 자신을 노리지 않은 건 기적이었다. 아마……콕핏을 가리듯 떨어진 레기온의 잔해 덕분일 거다. 질리도록 보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워 한 사신. 이번에는 제 목숨을 구해준 천사였다.

남자에게 생존은 천명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었다. 4년 동안 쫓고, 찾아헤맸다. 이곳에서 무너질 수도, 저들에게 머리를 넘겨줄 수도 없었다. 철컹. 조종간을 당기자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잔해가 그대로 추락했다. 땅을 울리는 거대한 소음. 이 자리를 벗어나고 고지대를 선점해야 한다. 귀신이 올 거다. 괴물이 찾아올 거다. 도망이 허락되지 않은 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겨내고, 처죽이고, 살아남는 것.

눈가가 시큰거렸다. 아니, 그보다는 더한 통증이 있었다. 물렁한 것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내려앉은 것처럼──하지만 당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후회도 늦었다.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삼일치. 남자가 한 자리에서 먹어치운 식량이 자그만히 삼일치였다. 입이 줄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싸웠을 게 분명했다. 수통에 담긴 몇 모금 되지도 않는 물로 겨우 목을 축였다.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분명, 분명 버틸 수 없을 거다. 굳어있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자조적이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긍정적이었다. 불구하고 이겨내면 된다. 그렇게 곱씹게 되었으니.

첫 소대원은 11명이었다. 소대장은 우직한 여성이었는데, 신입을 감싸다 죽고 말았다. 핸들러도 초짜였던 터라 전멸에 가까운 수준의 피해를 입었었다. 그때 살아남은 게 다섯, 그 다음에 다시 ‘보급’되어서 열. 소대원의 수는 들쭉날쭉했다. 아무리 오래 전장을 누볐다고 해도 죽을 사람을 죽었고, 처음이어도 운이 따라주면 살았다. 남자는 무난했다. 크게 다치는 일도, 죽음을 목전에 두는 일도 없었다. 굴곡 없는 실력이라는 건 이 전장 속에서 가장 도움이 됐다. 그리고 이성적인 판단력도.

하지만 이제 이 소대도 끝있다. 다섯이다. 자신을 포함해 또 다섯이 남았다. 하지만 그 중 둘은 오늘 밤이 넘기기 힘들어 보였고, 남은 둘은 전의를 상실한 얼굴이었다. 자살하겠구나. 자신은 일주일 내로 혼자 남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다. 아. 지친다.

“……먹고 좀 자둬요. 다른 소대에 합류해야 할 것 같다고 연락해둘게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두 개의 숨이 꺼진 것은 새벽녘의 일이었다. 다행인 건 울다 지친 이들은 까무룩 잠이 들어 그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오로지 밤을 지새우고 있던 남자만이 그들의 끝을 지켜봤다. 손을 잡아달라고 했었다. 마지막까지 빌어먹을 전장에서 죽는 느낌이 싫다고. 조금이라도 집에 돌아간 기분이 되고 싶다고. 부디 따뜻하게 잡아달라고. 남자는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하고 남자는 수첩을 펼쳤다. 다 닳은 펜촉을 몇 번이고 두들겼다. 마지못해 나오는 잉크로 죽은 이들의 이름을 적었다. 나이를, 성별을, 좋아했던 것을, 싫어했던 것을, 마지막에 했던 말들을 모조리.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적을 차례다.

당신을 만나면 어떤 말부터 하면 좋을까. 늘 그런 생각을 해요. 벌써 4년이나 지났어요. 그동안 수많은 전장을 누볐지만, 당신을 만나지 못했어요. 이젠 나쁜 생각이 절로 들어서 죽고힘들기도 해요. 그래도 버티고 있어요.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그런 것들에게 죽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당신이 아는 나도, 똑같겠죠. 살아있어야 해요, 리처드.

그래야 제가.

……하하. 남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는 잉크도 남지 않았다. 고작 펜 하나를 잃었을 뿐인데 밀려들어오는 실의가 너무도 컸다. 남자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래도 버티고 있어요’라고 썼잖아. 그 말을 지켜야지. 약속을 어길 순 없어. 리처드, 리처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곱씹었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제 곁에 없는 사람을, 자신을 두고 간 사람을……. “모레, 다른 소대에 합류한다. 그때까지 상태 회복에 전념하도록.”

부디 그곳에는 당신이 있기를. 핸들러의 통신이 끊어진 뒤에도 남자는 한참동안을──.


“리처드! 제 말, 제 말 좀 들어줘요!”

“……왜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듯 보는 거예요?”

“난.”

여기까지 버텼는데. 칭찬해줘도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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