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이타] 거짓말의 대가 上

지금, 뭐라고 했어?

찰나의 순간 by 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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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서, 선배…! 잠,"

유지는 애닳는 소리를 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래를 헤집는 손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유지는 힘도 제대로 들지 않는 손을 휘적였으나 절박함은 닿질 않았다. 게토에겐 일말의 동정도 들게 하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어깨를 밀어내려던 손목이 강한 힘으로 붙잡혔다. 가만 있어야지. 게토는 유지의 귓가에 목소리를 불어넣었다. 일견 다정도 한 말투완 달리 잇자국을 새기기라도 할 동 귓바퀴를 물어오는 행동엔 분노가 가득 묻어있었다. 이번엔, 네가 잘못한 거야. 유지. 안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유지는 망연히 생각했다. 부디 이이가 잠깐의 자비를 베풀어주길. 열락을 부추기는 손길이, 한 마디조차 허락지 않고 숨결을 빼앗는 입술이. 아주 잠시라도 멈추길 바라고 바랐다. 

이게 아니었는데. 유지는 후회했다. 그런 얘길 하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하고 후회한들 변하는 건 없건만. 다만 미안하단 말을 전하고 싶었으나 죄인에게 그런 사치는 주어지지 않을 듯했다. 아…! 선배의 단단한 손끝이 제가 느끼는 곳을 강하게 문질러왔다. 좀 전과는 비교도 안될 쾌감에 순간 바래지는 시야를 인지할 틈도 없었다. 허리가 달달 떨리고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주욱 빠졌다. 저런. 잘 잡고 있어야지. 흘러내리는 팔을 친히 목에 걸어준 게토는 혀를 내어 유지의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이건 벌이니까,"

기절하면 안돼? 이 행위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게토는 웃었다. 다만 가늘게 웃고 있는 눈은 어딘가 질척하고 차갑기도 해서. 항상 다정하게만 봐주던 눈이 처음으로 무서워졌다. 몇번이고 생각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런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걸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유지, 입 벌려. 아랫입술을 콱 깨물어오며 읊조리는 목소리는 전에 없이 차가웠다. 유지는 파르르 떨리는 턱을 움직여 입을 살짝 벌렸다. 명령을 거역할 재간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숨을 탐하는 이의 눈엔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른 분노와 애욕이 뒤엉켜있어 유지는 그저 눈을 꼬옥 감아내는 것뿐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헤어지자, 우리."

연못에 던져진 말의 무게는 상상한 것보다 무거웠던 모양이다.


인연의 시작이 범상치 않았으니 더욱이 특별할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러니까 게토 선배와 저는. 사형수와 집행인. 같은 고등학교의 선후배. 절대 평범할 순 없는 사이다. 그럼에도 유지는 게토가 좋았다. 다정한 웃음과 단지 절 후배로 봐준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가 좋았다. 애초에 미움받는다 해도 사람을 멀리하기엔 전 외로움을 참 많이 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이 좋았고 곁을 지켜주는 온기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선배랑 있으면 기분이 좋아. 빠듯하게 차오르는 마음을 흘리면 슬쩍 내비쳐 주는 눈동자엔 온기가 남실거렸다. 소중해 마지않는다는 양 바라보면 속이 간질거려 살 수가 없었던 게다. 까닭에 조심스레 얽어오는 손가락을 유지는 부러 밀어내지 않았다. 단정한 얼굴이 저로 인해 발갛게 물들어가는 건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일이었다. 게토는 이것을 사랑이라 했다.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래. 마주 잡은 제 손등 위로 입술을 찍어내며 그리 말했더랬다. 사랑이라고. 유지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 이외에는 저 일렁이는 애정에 잠겨 죽어도 좋다 생각하고 마는 마음을 설명할 길이 달리 없었기에.

그리 성립된 연애였다. 서로에게 스미듯이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전해 들은 고죠는 제 친구의 순정을 비웃었지만 그이는 원래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씨알도 먹히지 않았더랬다. 멍청한 유지 치고는 잘 꾀어냈는데? 타깃을 바꾸어 쪼아대면 유지는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다. 대들었다간 사지육신, 손가락을 다 삼키기도 전에 따로 놀 것이 자명했으므로.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아? 저 녀석도 마찬가지니까. 드물게 짜증이 아닌 말투였다. 그렇다고 말이 고운 건 아니었던지라. 유지는 친절한 충고를 흘러버리고 말았다. 대체 뭐가 마찬가지란 건지. 그리 묻는 말에 고죠는 육안을 빛내며 웃었다. 뭐겠어. 저 녀석도 주술사잖아. 그럼 당연히 제대로 미쳐있지 않겠어? 자기소개야? 솔직함은 때론 명을 재촉하는 법이다. 

그래도 연애는 순조로웠다. 여느 커플들처럼 밤을 새워 전화를 하기도 했고, 둘이서 영화 한 편에 팝콘을 나누는 시간들이 제 숙명을 잊게 할 만큼 달가웠으니. 순조롭다면 순조로울 사랑놀음이었다. 저이 품에 폭 안겨 감겨오는 따스함을 즐기고 있노라하면 모든 것이 행복했다. 햇살 냄새가 배인 품에서 들려오는 두근거림. 보드라이 내려앉는 입맞춤에 가슴이 설레었다. 선배가 제 행복의 전부라고 감히 생각할 만큼, 참 좋았던 나날이었다. 

"나나밍이…어떻게, 됐다고…?"

그리고 인생은 늘상 사람을 시험한다. 이 업계가 만성적인 인력난을 앓고 있는 게 화근이었다. 급작스레 변경된 난이도를 대처도 못 할 만치로. 그만큼 주술사란 귀한 존재들이었던 게다. 이러한 사실은 매 순간 저희의 목숨줄을 갉아먹으려 들었다. 그날은 간만에 맞이한 휴일이었다. 꽤 평안한 날이었을 터다. 쿠기사키는 본가에 일이 생겨 잠시 자릴 비웠고 후시구로는 안타깝게 임무가 하나 배정 되어 있던 날이기도 했다. 제 동기는 실력 좋은 주술사다. 더불어 나나밍도 함께 하는 일이었으니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녀와. 그리 배웅했던 후시구로가 반나절도 안 되어 돌아왔다.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축 처진 목소리로. 분명 2급을 제령하는 일이라고 들었건만. 명치께가 울렁거렸다. 꼭 뱃속을 긁어내는 듯한 환상통이 드는 듯도 했다. 지금…뭐라고…, 목소리가 형편없이 흔들렸다. 

"중상이야…. 이에이리 선배가 상처를 보고 있어."

전해져오는 건 비보에 한없이 가까웠다. 2급으로 분류되었던 주령이 변태를 한 것은 예상 외의 일이다.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건 곤충으로 족한 일이건만. 그것들은 끈질기게 목숨줄을 이어오며 사람을 집어삼켰다. 속이 차게 식었다. 뒷수습을 위해 고죠 선배가 달려갔다 한들 다친 사람이 마법처럼 낫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후시구로의 상처를 제대로 확인도 못한 채 달려간 의무실엔 나나미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원래도 허연 낯이건만 핏기 한 점 없는 모습이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나, 밍?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아, 왔어? 절 맞아준 건 고전이 자랑하는 반전술사였다. 주력을 꽤 소모한 건지 이에이리의 눈 밑은 검게 죽어있었다. 선배. 안심해. 안 죽었으니까. 제 불안을 읽은 양 쇼코는 선수를 쳤다. 제 아무리 알아주는 골초라도 환자 앞에서 연기를 피울 성미는 아닌지라. 어지간히 담배가 고팠는지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비를 잘근 씹고 있었다. 

"뭐 아슬아슬했지. 경동맥을 비껴서 다행이었어. 후시구로가 응급처치를 잘 해서 출혈도 금방 잡혔고. 며칠 푹 쉬면 완치 되니까 너무 걱정 하지마. 이타도리."

말은 넘쳐났으되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없었다. 다만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건 끔찍한 공포였고 갈 곳을 잃은 불안이었다. 유지는 감히 고개도 주억거리지 못했다. 문 앞에서 발등에 못이라도 박힌 듯 우물쭈물 있으려니 친절한 손이 등을 밀어왔다. 괜찮아. 가까이서 봐도. 달달 떨리는 눈을 마주한 이에이리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제 후배는 강한 주제에 정이 너무 많았다. 그런 점이 사랑스럽지. 그리 말한 제 동기 녀석은 이 애의 다정을 귀애했으나 쇼코는 이럴 때만은 이타도리가 남들의 반만큼이라도 무심하길 원했다. 그럼 조금이라도 이 친절한 것이 상처라도 덜 받을 성싶어서. 채 내지 못한 한숨을 삼키며 이에이리는 부러 웃었다. 

"내 실력을 믿으라고."

"…믿어요."

땀이 흥건한 손을 잡아끄는 손길엔 망설임 따윈 없었다. 속이 차게 식는 감각은 결코 좋은 것은 못 된다. 끝을 모르는 불안에 덜덜 떨면서도 유지는 가만, 가만히 나나미를 내려다보았다. 숨을 타고 옅게 배인 소독내와 새 거즈의 시큼한 직물냄새가 올라왔다. 가슴이 얕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인다. 살아있다. 

드륵, 소리를 내며 미닫이문이 닫혔다. 선배는 어린 앨 어르듯 사탕 하나를 쥐여주곤 절 밖으로 내보냈다. 오늘 임무 없지? 눈이라도 붙이렴. 나나밍 앞으로 절 이끈 손은 휴식을 종용했다. 달리 할 일도 없잖아. 가서 잠 좀 자. 조용히 덧붙이는 그녀의 권고를 무시할 순 없었기에 유지는 건물을 나와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그래도, 후시구로는 괜찮은 지 보러 가야 한다.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반창고가 떠올랐다. 아마 여기서 치료를 받고 제게 온 것이리라. 미안한 일이었다. 아무리 놀랐어도 한 번쯤 괜찮은 지 물었어야 했는데. 그것이 맘에 콱 걸려 도무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즉 속이 울렁거렸다.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의 파도에 이타도리는 자꾸 휘청였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동료가 다쳐오는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이미 저승길을 거닐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만한 위험을 업으로 지고 사는 인생들이었다. 때문에 유지는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올바른 죽음.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그것은 오늘이 될 수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죽음은 언제나 그의 어깨에 앉아 제 숨결을 앗아갈 것을 기대했으므로. 스스로도 속절없이 다쳐 오는 일이 흔했고 주변 사람들이 다치는 일은 좀 더 흔했다. 그랬건만. 속이 상해도 이다지 아무 생각도 안 날 만큼 무서웠던 적은 없었는데. 살아왔으면 됐지. 하며 저녁을 나누었던 일들이었건만. 그 무엇도 달라진 건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이 마치 처음인 양 숨구가 막힌 듯 무섭고 무섭다. 손끝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이해할 수 없다. 

"유지."

유지는 화뜩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 새 기숙사 복도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제 이름을 부른 이는 방문 앞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게토 선배. 폐부가 확 조여드는 느낌이 든 것도 같았다. 

"괜찮니?"

게토는 파리한 안색을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를 좁히며 게토는 제 연인의 뺨에 손을 올렸다. 본디 따듯했을 피부는 흘러내린 땀에 젖어 차갑게 식어있다. 손을 타고 잔떨림이 전해져왔다. 게토는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울음이라도 참고 있는 지 눈 밑이 발갛게 달아있었다. 안쓰러움에 엄지로 가볍게 눈가 여린 살을 문지르니 다물린 입이 울컥 떨리는 게 보인다. 나중에 쇼코에게 뭐라도 답례를 해야지. 니 애인 챙겨. 지금 기숙사 쪽으로 갔으니까. 제 앞으로 도착한 메시지는 이것이 전부였지만 게토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쇼코와 함께 있었다면, 나나미 일 때문인가. 안 그래도 그가 다쳤단 얘긴 전해 들었다. 재난이었을 거다. 2급 정도에 애먹을 이들이 아니다. 나나미나 후시구로나. 허나 변태를 하는 주령은 까다롭다. 등급을 지정해도 변태를 거듭하며 힘을 불리는 것들은 애시당초 1급이나 특급을 파견했어야 하건만. 게토는 속으로 혀를 찼다. 뺨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진한 벚꽃색 머리칼을 쓸어냈다. 유지. 게토는 다시 한번 제 연인을 불렀다. 

"나나미는 괜찮을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말렴."

"응…."

걱정이 담뿍 묻어나는 목소리가 여전히 절 다독였다. 괜찮을 거라고. 이이는 좀체 빈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지는 비스듬히 바닥을 응시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저 다정한 낯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많이 놀랐니? 커다란 손이 다시금 양 볼을 조심스럽게 쥐여 왔다. 나 좀 봐봐. 응? 숙인 고개를 살며시 끌어올리는 손길에도 유지는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있었다. 나직이 속삭여지는 목소리엔 걱정이 담뿍 묻어났으나 선배에게 뭐라 답을 돌려줘야 할지 감도 잡지 못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자신의 행동을 좀체 납득할 수 없었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건 확인했잖아. 후시구로도 괜찮을 거고. 아까는 그냥 가버려서 미안했다고, 괜찮냐고 물으면 그만 일진데. 머리가 자꾸 헛돌았다. 이렇게까지 불안할 이유가,

"열이 있구나."

톡. 이마에 닿아오는 따스함에 저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게토는 제 이마를 유지의 이마와 맞붙인 채 말을 이었다. 감긴가 보네. 호흡이 뒤섞일 정도로 가까이서 선배가 시선을 맞춰왔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던 낯이 한없이 진지해 뵀다. 

"들어가서 자자. 재워줄게. 아니면 같이 잘까?"

"…그럼 후시구로만 보고,"

"유지."

이마에 닿아오던 온기가 절 끌어 안아왔다. 평소와 같은 가벼운 포옹이 아니다. 제 머리에 뺨을 붙인 선배는 단단한 팔로 팔을, 허리를, 등을 감싸 안았다. 얼굴이 확 달았다. 틈 하나 없이 껴안긴 품이 아늑했다. 서, 선배? 놀란 목소리를 내며 목덜미에 파묻힌 고개를 들려하니 등을 가로질러 어깨를 쥐던 손이 제 목덜미를 가만 눌러왔다. 은근한 힘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차마 마주 안을 생각도 못한 유지는 어쩔 줄을 몰랐다. 심장소리를 들킬 것만 같다. 뇌리를 스친 생각에 되려 심장 고동이 더 커졌다. 어쩌지. 부끄러움을 모르고 울려대는 심장이 간질거려 죽을 것만 같았다. 쉬이. 옴싹거리는 제 움직임을 선배는 얼렀다. 꼭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낮은 음성에 전신을 내달리는 긴장이 거짓말처럼 스륵 풀려갔다. 

긴장이 풀린 뒤 남은 것은 제가 사랑하는 햇살의 냄새였다. 꼭 맞붙은 몸은 여전히 단단하고 따스하다. 게토의 애정이 그러하듯. 유지는 조심스레 팔을 움직여 게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도, 안고 싶은데."

그리 중얼거리면 귓가엔 낮은 웃음이 소복 쌓였다. 그거 기쁜데?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팔을 풀어주진 않았다. 외려 허리를 더 내리며 제 머리에 볼을 부벼왔다. 선배의 보드라운 앞머리가 살갗을 간질였다. 이런 건 반칙이잖아. 쏟아부어지는 애정엔 여전히 내성이 없다. 누가봐도 건장한 고등학생을 깨질 동 다루면 고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심장이나 머리가 멈출 것만 같았다. 더 바보가 되어버리겠어. 유지는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안아주고 싶은 걸."

"항상 안아주면서."

"그럼 잠들 때까지 안게 해줘."

"나 잠들면 갈거야?"

"아니."

장난스러운 듯 단호한 말투였다. 결국 키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알았어. 재워줘. 항복을 선언하듯 그리 말하고서야 포근한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든지.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를 서로 손을 붙든 채 걸었다. 게토는 기쁜 듯 보였다. 웃는 낯에 서리는 홍조가 유지는 좋았다. 

"선배, 거짓말이지?"

"응?"

"나 열 없잖아." 

"…들켰네."

머쓱한지 게토는 뒷목을 문질렀다. 거짓말 한 건 미안해. 담백한 사과를 건네며 그는 제 손에 붙들린 유지의 손을 끌어당겼다. 아. 또다. 게토는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유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치 그날처럼. 절 좋아한다 말해줬던 그날처럼. 겨우 가라앉았던 불길이 다시 얼굴에 번졌다. 게토는 살결을 음미하는 양 입술을 떼지 않고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조금 서운해서. 목소리가 잔떨림으로 변해 손등 위로 퍼졌다. 에? 서운하단 말에 얼빠진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뭔갈 했던가. 유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허나 제가 무얼 서운케 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바보지만 기억력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속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으려니 당혹감이 얼굴에도 드러난 모양이다. 선배는 가만 웃었다. 

"기대줬으면 하는 거야. 나는."

이런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유지는 기대주지 않으니까. 어쩔 줄 모르게 된다는 건 이런 것인가 보다. 애저녁에 달아오른 얼굴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선배가 어떤 표정으로 절 바라보는지 유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제 심장을 쥐고 놔주지 않는 나긋한 목소리만은 잘 알았다. 언젠가 뽑혀나갔던 심장이 다시금 늑골을 부술 기세로 덜컹거렸다. 유지는 그제야 이이가 괜히 고죠 사토루의 친우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사람을 들었다놨다 하는 재주는 가히 수준급이다. 유지는 이제 뇌를 잡아먹으려 드는 열기에 머리를 새차게 흔들었다. 사람을 녹여버릴 듯 구는 다정이 가슴에서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이미, 기대고 있는 걸."

속이 울렁거린다. 감정의 파도는 쉴새없이 이타도리를 흔들어댔다. 허나 제 속이 불안으로 흔들리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저이의 다정을 채 담아내지 못한 까닭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잠이 드는 것과 죽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유지는 생각하곤 했다. 물론 다쳐 죽는 것은 상처 자리가 눈물나게 아프지만서도. 잘려나갔던 손목엔 환상통이 남았고 훤히 뚫려버린 가슴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전신을 내달리는 고통은 뇌를 태울 만치 강렬도 했지만 인간의 생존본능은 예삿것이 아니었기에. 가망이 없단 걸 알아도 몸은 살고자 발버둥을 쳤다. 뿜어져나오는 아드레날린으로 고통이 희석되고 나니 그 틈새를 수마가 비집고 들어왔다. 흐릿하게 잠드는 그 감각이 안락하기까지 해 되려 소름이 돋고 마는 것이다. 눈이 감기기까지의 짧은 순간, 유지는 익숙한 병실을 떠올렸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생각해도 그리 다르지 않을 터였다. 어느 새 작아진 등은 잠에 든 듯 멎었더랬다. 그저 잠드셨다고 생각될 만큼 평온도 해서. 이변을 눈치 챈 건 다른 게 없었다. 노을이 비쳐드는 병실이, 너무 조용해져서. 한 사람의 숨결이 꺼진 것이 그리도 조용해서. 그래서 알았을 뿐이다. 숨소리도, 몸을 뒤척이는 바스락거림도. 제겐 아무것도 남지 않아 알았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날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후시구로의 귓가엔 빗소리가 들렸을 테니까. 숨이 끊겨 내려 앉은 고독한 적막을 그 녀석이 느끼지 않았을 테니. 새차게 내리던 비가 고마울 따름이다. 비어버린 심장 자리가 외롭지 않게 하늘이 울어주어서 다행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고 외친 것에 비해 죽음은 퍽 상냥하게 다가왔다. 졸리다. 안도감이 스쳐지나간 뇌리에 남은 감상은 그게 다였다. 빗방울이 살갗을 때리는 감각조차 멀어지는 그때, 그제서야 유지는 왜 할아버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죽으라 했는지 어렴풋 이해했다. 죽어 소리가 사라진 공간을 남겨주기엔 혼자는 너무 쓸쓸하단 걸. 이리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더랬다.    

"허억……!"

꺼꾸러진 몸뚱이로 찬기가 스몄다. 코끝에 고인 비냄새에 유지는 번쩍 눈을 떴다. 헛숨을 삼키며 눈을 도륵 굴려도 사위는 새까맣기만 했다. 잠에 취했던 머리가 헛돌았다. 몸을 뒤척이고 싶었으나 어째선지 몸이 무거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제대로 호흡하고 있는 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으니 다른 걸 돌이켜볼 여유 따윈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유지는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짙게 배인 어둠에 눈이 적응될 때까지 여러 번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저도 모르게 거칠어졌던 숨이 점차 안정되면서 멀어졌던 감각도 서서히 돌아왔다. 꿈, 인건가? 분명 제가 기억하는 것은 물에 젖은 지면의 차가움이었고 피어오른 비냄새였다. 허나 제 피부로 느껴지는 건 누군가에게 끌어안긴 듯한 온기다. 아직 온전히 잠에서 깨지 못한 유지는 뒤척이듯 절 끌어안아오는 팔이 누군지 흐릿하게 기억해냈다. 

"…좀 더, 자…."

게토의 목소리는 잠에 푹 젖어있었다. 유지는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지금의 상황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맞아. 선배랑 같이 잠들었었지. 저녁도 먹지 않고 좁은 침대에 낑겨 잠든 게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게토는 잠결에도 유지를 도닥였다. 저리지도 않은지 팔까지 배게 하고 자는 선배에 유지는 머리를 빼려고 했으나, 더 꽉 안아오는 통에 목에 들어간 힘을 풀어냈다. 유지는 어설프게나마 팔을 뻗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꽉 안아와서 팔이 자유롭진 않았으나 옆구리를 감쌀 정도는 된다. 그리곤 머리를 선배 가슴에 가져다 댔다. 두근. 가슴 한 켠에서 삶이 약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빠르진 않지만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울림은 그것이 꼭 목숨의 무게인 양 무겁게 느껴졌다. 

낮은 숨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선배의 숨소리. 심장의 두근거림. 이불이 몸을 스치며 내는 소리까지. 몸에 감기는 따스한 체온과 선배의 포근한 냄새는 그 당시의 감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제 명줄이 끊긴 지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감긴 눈이 떠졌다. 모든 게 몽롱했지만 몸을 뉘인 테이블은 너무 춥고 등이 배겼다. 죽었다 살아난 감상은 다를 게 없었다. 우와 홀딱 벗었잖아. 둔한 바보라고들 하지만 일단 이타도리 유지는 수치를 아는 인간이었다. 아는 얼굴들이 죄 절 쳐다만 보고 있는 상황이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물며 알몸? 멍한 머리로도 매우 창피하다 이건. 예기치 못한 부활에 이지치는 거진 졸도라도 할 동 굴었다. 고죠는 놀란 눈을 하더니 종국엔 깔깔 웃어댔더랬다. 왔냐? 어디 심부름이라도 시킨 모양새에 웃음이 절로 샜다.

"다녀왔습니다…?"

"이거 진짜 물건이네."

고죠는 자못 유쾌하게 웃으면서 제 볼을 마구잡이로 꼬집어 댔다. 아프다 우는 소릴 해도 뭐가 그리 즐거운 지 얼굴에 웃음이 만발해 있다. 고죠 선배가 그리 웃는 건 처음 봤기에 이게 진짜 살아난 건지 아니면 환상을 보고 있는 건지 분간도 가잖았다. 

"너 조금만 늦었어도 쇼코한테 분해될 뻔 했다고." 

"분해?!"

"검시라고 해줄래?"

"맘대로 헤집어도 되냐 했던 건 누구냐."

"글쎄."

떠드는 말들이 장난은 아닌 것 같아 괜스레 등골만 서늘해졌다. 하마터면 두 번 죽을 뻔 했다. 유지는 슬핏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저게 전부 두 사람 나름의 친절이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서늘한 부검실엔 말이 흘러넘쳤다. 놀라긴 저이들이 더 놀랐을 터인데. 그럼에도 혹여 제가 주눅이나 들까 답잖게 떠들어주는 마음씨가 살갗에 닿아오는 듯도 했다. 으슬으슬 몸이 추웠다. 굳었던 몸에 피가 도니 그제서야 주변 공기가 느껴지는 게다. 그때 어깨 위로 무언가가 둘러졌다. 툭 떨어지는 무게에 고개를 비스듬히 드니 이제껏 홀로 조용했던 얼굴 하나가 눈에 든다. 게토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이이도 추운 지 코끝이 발갛게 달았건만 겉옷을 제게 양보해왔다.  

"옷 가져다 줄게. 그때까지만 이걸로 참아줘. 유지."

"엇, 그럼 선배가 춥잖아."

"난 괜찮아. 잠깐만 기다려."

큰 손이 머리칼을 흐트리곤 부검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이 꼭 도망이라도 치는 것만 같아서 유지는 어깨에 둘러진 큰 자켓을 꼭 쥐었다. 따뜻했다. 도망이라니. 일본에 단 셋 뿐이라던 특급이다. 그러니까 게토 선배는. 그리 강한 사람이건만. 유지는 애저녁에 닫혀버린 문을 멍하게 응시했다. 미처 잡아내지 못한 소매부리가 왜 그리 걸리는 지 알 길이 없다. 유지는 괜스레 어깨에 걸쳐진 자켓 소매부리를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게 손가락이 시려 견딜 수 없었다. 고죠 선배와 이에이리 선배가, 이지치 씨가 무얼하고 어떤 말을 하는 지 머리에 잘 들지 않았다. 

"어이. 듣고 있어? 뭘 멍하게 있는 거야. 니가 할 일이 아주 많거든?"

"어? 나 뭐 해야해?"

"당연한 거 아냐? 그 멍청한 귤 대가리들한테 한방 먹여줘야 할 거 아냐!"

귤 대가리는 또 누구람. 맹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고죠는 혀를 찼다. 너 내 말 안 들었지. 고죠는 제 목에 팔을 걸고 뺨을 부벼왔다.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만 아니었어도 덜 무서웠을 텐데. 참 예쁜 눈이건만, 저리 희번뜩거리면 꿈에 나올까 무섭다. 죄삼다. 얼른 사과하니 흥, 하고 코로 웃는다. 

"이 사토루 선배는 친절하니까 따악! 한번만 더 말해주지."

그리 말한 고죠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감히 내 구역에서 지랄을 해? 어디 죽어보라지. 까드득, 울리는 소리가 살벌도 하여 마른 침이 절로 넘어갔다. 이이는 한다면 하는 성격인지라. 말만 들으면 고등학생인지 야쿠자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유지는 이 솔직하지 못한 선배가 그저 고마웠다. 모르긴 몰라도 걱정해줬다 생각하면 맘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이에이리 선배도 말릴 생각이 없는지 구석에서 심장을 달래고 있는 이지치 씨에게 생수병을 건네고 있었다. 

고죠는 계획 같은 무언가를 자신에 차서 피력했다. 이에이리는 부검 도구들을 정리했고, 이지치는 허옇게 질린 얼굴을 채 수습도 못하곤 자리를 떴다. 그리고, 곧 돌아오겠다던 이는 결국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제겐 크기만 한 옷가지를 가져다 준 건 금방 자리를 떴던 이지치였다. 게토 군은 야가 선생님 호출인 모양이에요. 요컨데 이지치 씨가 나간 건 게토 선배의 연락 때문이렷다. 종이 봉투에 든 옷을 걸치며 닫혀있는 문을 흘끔거렸다. 그와중에도 고죠 선배는 제가 옷을 갈아입던 말던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참 심지가 굳은 사람이다.

결국 고죠 선배의 말은 반도 머리에 남지 않았다.  들키면 몇 대 얻어맞을 거다. 그걸 알면서도 유지는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어이, 다 입었으면 가자고."

"네에."

닫힌 문 위로 어떤 등이 비쳐보였다. 도망치듯 나선 이의 등. 껴안는다면 단단할 것만 같은 그 뒷모습. 그 위태롭고도 곧은 등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유지는 선배들을 따라 부검실을 나섰다. 제가 문턱을 넘는 그 순간까지도 선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담임에게 불려갔다면 당연한 일일진데.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남는 지도 모른 채 유지는 그이가 사라졌을 길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어둑한 복도가 참 낯설기만 했다. 죽었다 깨어나서 그렇겠지. 뒤죽박죽이 된 상황처럼 머리가 곤죽이 된 것마냥 엉망이었더랬다. 죽었다 살아나서. 유지는 그냥 그리 생각하고 말았다. 머릿속에 들지 않는 말소리도, 떠나간 등도. 그리고 그 등을 붙잡지 못하고 비어버린 손가락마저도, 모두.

"……."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유지는 시선을 살짝 들어올렸다. 몽롱한 시야에 잡힌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단정하기만 했다. 추웠던 꿈의 윤곽을 더듬듯, 유지는 게토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얼굴선을 훑는 손가락엔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이 남았다. 날카로운 눈매를 더듬고 상냥한 입술을 덧그렸다. 가슴께가 아릿하게 울려온다. 사랑스럽다. 더 이상의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빠듯하게 차오르는 감정만이 남았고, 밤은 감정의 시간이었을 뿐이다. 잠든 선배의 입술을 따뜻했다. 살짝 부르튼 입술에 입을 맞추며 유지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항상 절 품어주는 온기가 그리도 기꺼워서. 지척에서 느껴지는 연인의 숨결은 유지를 다시 잠들게 했다. 안온한 온기에 잠기며 그는 게토의 등을 살며시 움키었다. 시큰한 손끝으로 움킨 등은 여전히 따뜻하기만 했다. 


"놀이공원?"

"응. 디즈니랜드."

게토는 방긋 웃었다. 유지는 작은 앞접시에 옮겨담은 국을 맛보면서 선배의 손에 들린 티켓을 응시했다. 팔랑. 음, 간이 제대로 배어있다. 역시 고기가 들어가면 국물이 깊어진다. 오늘의 저녁은 전골. 그것도 밀푀유 나베라고 불리는 녀석이다. 알배추와 고기, 더해 시소잎과 청경채를 겹쳐올려 그걸 전골 냄비 안에 꽉 채우면 된다. 육수는 간단하게 멸치와 다시마 등을 넣고 끓인 것으로 가장 무난하게 맛을 낼 수 있는 방법이다. 음. 이거면 되겠지. 설 익힌 전골의 불을 끄며 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뉴 선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쿠기사키였다. 간만에 둘이 나선 임무 후, 저녁 장을 보고 돌아온 게 일의 시작이라면 시작이다. 아직 후텁지근한 날씨지만 이제 막 구월에 접어들며 밤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국물이 먹고 싶네. 국물 하면 역시 전골이다. 웬일로 마트까지 따라온 쿠기사키는 제 말을 듣곤 이전 일을 중얼거렸다. 그 고기완자, 후시구로한테 알려준 거 너라며? 맛있었다 덧붙이는 말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칭찬 받는 건 역시 기쁘니까. 순식간에 정해진 주제에 인원이 불어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다같이 먹는 편이 좋다는 건 유지도 동의하는 바라 원래라면 한 두사람 먹을 정도의 장거리가 양손 가득 묵직할 정도로 늘어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들뜬 목소리로 연락을 돌리는 쿠기사키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그만큼 기대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조금은 기합을 넣고 만들지 않으면, 이라고 생각한다. 어라? 옆에서 선배는 살짝 놀란 목소리를 냈다.  

"…기쁘지, 않아?"

"아니, 기뻐. 놀이공원 가고 싶었고."

"음…그런 것치곤 반응이 옅은데…."

팔랑. 선배의 몸짓 하나하나에 얇은 종이가 팔랑거렸다. 설핏 당황한 얼굴이 눈에 든다. 유지는 앞치마의 끈을 끌렀다. 가스 버너를 어디에 뒀더라. 아마도 공용 부엌의 구석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건 이따 찾아도 좋겠지. 유지는 머리 위 찬장을 열어 앞접시를 꺼내들었다. 몇명이더라. 나랑 선배랑, 후시구로네도 먹겠다고 했다. 고죠 선배는 어떨런지. 그 사람은 워낙 바빠서 근래엔 얼굴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배, 고죠 선배 혹시 있…, 왜 그래?"

"아니…. 그냥, 차인 건가, 싶어서."

"에. 무슨 소리?"

"데이트…."

언제나 생글 웃는 얼굴이 잔뜩 흔들렸다. 어느 샌가 답싹 잡힌 손목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팔랑. 다시 종이가 흔들린다. 유지는 웃었다. 

"미안, 장난이었어. 좀 놀리고 싶어서. 당연히 선배와의 데이트는 두 팔 벌려 환영이라구!"

"뭐야…. 그런 장난 치지마…거절 당한 줄 알았어."

"그럴 리 없잖아. 선배 혹시 겁이 많다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네가 유일할 거야. 유지."

퍽 점잖은 말씨였지만 이미 얼굴은 불퉁하게 입이 튀어나와 있었다. 게토는 드물게 입술을 삐죽이며 유지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너 점점 사토루를 닮아가는 것 같아. 유지는 키득거렸다. 그럴 지도. 뭐야 둘이 놀지마. 그거 질투? 응 질투. 선배 귀엽네. 그 말에 또 심통이 난 게토가 유지의 허리를 간지럽혔다. 접시를 미리 싱크대에 올려둬서 다행이었다. 웃음소리가 높게 울렸다. 금세 풀어진 분위기에 유지는 반격이라도 하듯 제 눈높이에 있는 입술에 쪽 입술을 맞붙였다. 끈적거림 없이 붙었다 떨어진 살에 이끌리듯 다시 게토가 입술을 붙였으나 닿은 건 턱 와닿는 손바닥이었다.

"전골 식어버린다구?"

"치사하잖아. 너만 하고."

"아하하. 왠지 뽀뽀로는 안 끝날 것 같아서."

"알고 있다면 어울려줘."

"저녁 먹고?"

"둘만 먹을까?"

"안돼. 약속 했으니까."

"날 더 우선해줘."

"언제나 선배가 먼저인걸. 그니까 오늘은 양보해주세요~"

게토는 장난스럽게 제 입을 막은 손을 물어왔다. 그러면서도 한 발짝 물러나주는 모양새에 푸슬 행복한 웃음이 샜다. 함께 질냄비와 접시들을 나눠들고 담화실로 걸어갔다. 재밌겠다, 디즈니. 갈거야? 선배 은근히 뒷끝 길잖아. 내 순정을 가지고 논 유지가 나쁜 거야. 아하하 그런 진지한 얼굴로 말하지마. 진짠데. 

깔깔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금세 닿은 담화실 문 너머 쿠기사키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이번 스타벅스의 새 음료는 별로인 모양이다.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들을 맞이하기 전에 게토와 유지는 서로를 바라보곤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딘가 짓궂은 듯 서로 웃으며 비밀을 말하는 듯 속닥였다. 

"기대되네. 데이트."

보글보글 전골을 끓이던 날로부터 이주일이 지나갔다. 분명 선배가 말한 데이트 일자는 그 주 주말이었건만. 이리도 미뤄진 건 데이트를 신청한 장본인이 미치도록 바빴기 때문이었다. 정말 미안해. 얼굴도 보지 못하고 출장지에서 건넨 사과는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유지는 괜찮다 답했으나 아무래도 일전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게 못내 걸린 모양이다. 고죠 선배에게 임무를 미뤄서라도 가겠단 얘긴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그만 깔깔 웃어댔더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게토 선배가 그러는 건 영 상상이 안 가네~"

정말 진심이었는지 지워놓은 빚이 있다 말하는 목소리가 자못 진지했다. 그게 더 웃겨서 마구 웃어댔더니 얇은 벽이 쿵 소리를 냈다. 이크. 후시구로한테 내일 한소리 들을 것 같다. 그 소리가 전화 너머까지 들린 모양인지 선배는 불퉁한 소릴 냈다. 요즘 날 놀리는 재미에 사는 것 같아 유지. 그치만 선배가 너무 귀엽잖아. 키득거리는 대화가 오가고 대화의 끝에 선배는 주말을 비워 놓으라 했고, 전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온 일요일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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