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고죠 사토루의 봄

그애는 여전히 나의 봄이었다.

찰나의 순간 by 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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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곧 저주. 그것은 부동의 사실이었고 고죠는 똑똑했다. 독이 독인 줄 알면서 입에 대는 멍청이들과는 결을 달리하던 그였던 게다. 허나 이제는 이해한다. 스스로 멍청이가 되고플만치 애틋한 것이 사랑이란 것을. 해바라기처럼 웃는 그애를 위해서라면 고죠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그의 봄이 알려준 사실이었다. 

 때늦은 첫사랑을 시작한 건 약품 냄새가 진동하던 부검실부터였다. 천년만에 태어난 인재인재로 알아듣는 머저리들만 아니었어도 이딴 곳에서 사랑을 자각하는 일은 없었을 게다. 분명 아까까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누워있었건만. 꿈이 있다. 썩어빠진 주술계를 개혁하는 꿈이 고죠에겐 있었다. 총명하고 능력있는 동료를 내손으로 키워내서 말이다. 까닭에 전도유위한 학생이 저승길 밟지 않고 돌아온 것이 그저 기뻤어야 할진대, 잃어버린 꿈을 되찾기라도 한 동 심장이 욱신거렸다. 반기는 얼굴을 보니 나쁜 성격이 아지랑이 마냥 피어올랐다. 너 방금까지 죽었던 거 알아? 웃는 얼굴에 대고 그리 지껄이고 싶었다. 허나 또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고 싶잖아 부러 어른의 얼굴을 했다. 지끈거리는 가슴께를 내색도 않고 손을 맞부딪치면 그저 따뜻했다. 식어빠진 손을 쥔 게 금방이건만. 그 간극이 낯설다. 따듯하고 부드럽고. 분명 손을 뻗어 쥔다면 뺨도 온기로 가득할 것이다. 고죠는 생명의 흔적이 남은 손바닥을 남모르게 내려다보았다. 홀딱 벗은 제자를 껴안고 싶어지는 충동을 꼭 이 온도가 설명해줄 것만 같았다.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벚꽃빛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하네, 집도 알아서 찾아오고. 개가 아니라며 깔깔 웃는 아이의 머리칼은 살짝 뻣뻣했다. 그리고 따스했다. 입꼬리가 느슨해진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감도 안 왔다. 모든 잘했던 인생에서 처음으로 모르는 문제에 봉착한 감상이 썩 나쁘지 않아 그것조차 당황스러웠다. 

이런 걸 잘 아는 건 죽은 친구놈이었으나 죽은 이는 말이 없는 법이다. 따라서 자연히 상담역은 쇼코에게 돌아갔다. 병일지도 몰라. 간만에 우는 소리를 하면 그녀는 시큰둥하게 볼펜으로 머리를 긁었다. 영화나 보지 그래? 하며 포스트잇 하나를 받아든 고죠는 그대로 내쫓겼다. 다시 생각해도 저 녀석 피는 파란색이 분명하다. 노란 종이엔 영화 제목 몇 가지가 적혀있었고 그는 그 리스트를 유지가 봐야 할 영화 목록에 추가했다. 반쯤 심술이었지만 상관없지. 그리고 유지 옆에서 영화를 보던 고죠는 그제서야 눈치 빠른 동기가 제 진단명을 뭐라 적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상사병이라니. 여러 장르로 흩어진 영화들은 모두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받아들이기 쉬운 내용이 아니다. 고죠 사토루 인생에 누군가를 마음으로 사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하물며 제자다. 그것도 남자. 이애가 죽었을 때 본 몸은 건실한 남고생의 육체 그 자체였다. 그랬기에 처음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놀림당했거나, 다른 의미가 있거나. 허나 고죠는 최종적으로 이에이리 쇼코가 명의란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다지도 확실한 진단은 달리 없었다. 대련을 하다 가까워진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을 땐 머리가 아득해졌더랬다. 내가 이 아일 사랑하고 있다. 명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머리회전이 좋은 남자는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답을 찾아냈다. 허나 정답을 알았다 한들 납득은 다른 문제였다. 이유가 없다. 삼십 년 가까이를 살며 하필 왜. 어째서 이 아이만 그토록 특별한지 이유를 붙일 수 없었던 것이다. 

고죠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타도리 유지를 생각했다. 스쿠나의 그릇. 천 년만에 태어난 인재. 정신나간 담력과 적응력. 그만큼 미쳐있고 밝은 아이. 충분히 존재가 특별하지만 사랑을 기준점으로 둔다면 그리 각별할 것도 없다. 제가 나고 자란 세상만큼 미쳐있고 불합리하고 비일상적인 건 없었으니까. 그러니 특별한 그애도 제게는 충분히 평범한 축에 속할 터였다. 까닭에 고죠는 고죠 사토루를 생각했다. 나는 왜 저 애를, 이타도리 유지를 특별히 사랑이라 부르고 싶은 걸까. 

처음 봤을 땐 웃기다 생각했다. 주물의 가치나 위험성을 모르더라도 보통 입에 댄단 발상은 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게 사람 손가락이라면 더더욱. 본능인 걸까. 본능적으로 그 가치를 깨닫고 제게 그런 재능이 있다 여긴 걸까? 두 눈에 담긴 불온한 기척이 심히 유쾌했다. 재능있는 인간만큼 달가운 건 없었다. 게다가 죽까지 잘 맞았다. 이건 퍽 드문 일이었다. 때문에 가끔 무던한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할 땐 성취감까지 들었다. 이건 가점 요소지만 그걸로 사랑을 느낄만큼 나는 쉬운 남자가 아니란 말이다. 그럼 뭘까. 고죠는 이윽고 죽어버린 육신을 떠올렸다. 시체는 차갑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리는 것도 일순이다. 그래서 화가 났다. 이런 일, 처음이 아닌데도 화가 났다. 이지치에게 꿈이 어쩌고 떠들만큼. 쇼코는 드물게 감정적이라 일렀고 그때는 진심으로 다 쓸어버리고플 만큼 화가 났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라 여겼다. 어쩌면 여기서부터였을 지 모른다. 왜 화가 났을까. 멍청한 귤대가리들 때문에 아까운 전력을 잃었다. 내게 비견될 거라 여겼던 재능을 잠시 한눈 판 새 약탈당했다. 옷코츠 유타나 하카리 킨지. 그들만큼이나 유망한 씨앗이었는데. 거기까지 미친 생각에 고죠는 웃었다. 그래. 나는 간만에 찾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잘 키워보고자 했더랬다. 키울 재미도 가치도 있는 아이었다. 그런데 죽어버린 것이다. 꿈을 꾸는 인간에게 희망만큼 단 양분은 없다. 그런데 이주만에 그 양분을 빼앗겨버린 심정을 아는가. 사탕 뺏긴 어린애처럼 발광해줄 자신이 있었다.

“하하. 나도 단순하네.”

그런데, 살아돌아온 것이다.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양 태연하기까지 해 웃음이 났다. 와. 잃어버린 꿈이라 생각했던가. 설레었다. 동료를 키우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잃는 일이 당연해졌었다. 잃고 또 잃고. 그리 잃은 것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만이 제 사람이었으나 잃는 것이 씁쓸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특별했다. 사랑스러웠다. 다시 만진 몸이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제가 잃어버린 것 중, 죽음을 밟아 돌아온 건 오직 저애 밖에 없어서 그랬다. 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것 가운데 유일이 돌아온 아이는 그야말로 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타도리 유지는 고죠 사토루의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되돌아온 꿈을 고죠는 사랑하고 만 것이다. 

그랬기에 사랑을 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선생과 제자. 어른과 아이. 여러 이해관계를 앞에 두고도 고죠는 유지에게 손을 뻗었다. 좀비떼가 들끓는 호러영화를 틀어두고 유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흘러가듯. 조용히 속삭였다. 좋아한다고. 저보다 작은 손에 깍지를 껴가며, 일정 이상의 열을 담아 그 손등을 문지르며. 그리 속삭였다. 흘끗 시선을 끌어올리면 놀란 눈과 시선이 맞아들었다. 좀비가? 어이. 미안. 유지는 목이 타는 지 콜라를 홀짝였다. 꼭 헛걸 들은 얼굴이었다. …좀비영화 볼 때 말하는 거야? 곤란한 걸까, 실금이 간 미간에 피식 웃으며 고죠는 답했다. 내 사랑은 분위기 따위에 좌우되지 않으니까.

"내가 신경쓰이는데."

"어차피 영화따위 눈에 안 들어오잖아."

"그야 그렇지. 처음 받아본 고백을 담임선생님이 할 지는 몰랐으니까."

"응, 좋아해."

"우와."

유지는 잡혀있지 않는 손으로 화끈거리는 눈가를 덮었다. 고죠는 부러 고개를 유지의 목덜미에 부비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온몸으로 부끄럽다 외치고 있는 이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견디기 어렵다. 움찔거리는 손은 손마디가 이미 붉게 물든지 오래라. 마디마디 입을 맞추며 반응을 살피고 싶어도 이 이상은 자극이 지나치다. 공세만이 능사가 아니란 게다. 고죠는 가만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미련 없이 풀어버린 손에 외려 어쩔 줄 모르게 된 건 유지였다. 

"그런고로! 난 임무가 있어서 먼저 갈게."

"어, 어?"

"간만에 미야기 쪽으로 가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사다줄게."

"에, 어…괜찮, 을지도….”

“그래? 알았어.”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눈이 맘에 들었다. 응. 그렇게 의식하면 돼. 싱긋 웃어주면 표정을 숨길 줄 모르는 어린 것은 허둥거리기 바쁘다. 그 뒤로는 순조로웠다 말할 수 있다. 둘만 있는 지하실에서도, 세상 밖을 나와서도. 은밀히 내비쳐주는 애정에 유지는 감전된 물고기처럼 굴었다. 파닥파닥. 삐걱삐걱. 귀여운 것도 정도가 있는데. "자, 선물이야." 덤처럼 몰래 얹어주는 작은 꾸러미에 귀를 붉히며 출구를 찾는 양 다른 이들과 나누겠단 말은 확인 받고 싶단 소리와 같았다. 그건 싫어. 널 위해 준 거니까 유지가 간직해줘. 그럼 화뜩 달은 얼굴엔 차곡차곡 제 사랑이 쌓였다. 그렇게 하나하나 가르쳐나갔다. 너만을 위한 애정이 있고, 너만을 보는 관심이 있노라고. 그리 일러주었다. 차 뒷좌석에서 은밀히 손가락을 얽는 것도, 부러 고개를 가까이 붙이는 것도 모두 좋아하기 때문이라 일렀다. 허나 나는 풋내나는 사랑을 할만큼 어리숙하잖아서 주는 것에 만족할 생각은 없다. 추호도.

"서, 선생님은…나한테, 뭘…바라는 거야…?"

  달을 넘긴 고백에도 연인이 되자 청하지 않은 건 저 답잖게 덜덜 떠는 목소리를 원해서다. 방과후 임무도 없는 날. 모두 외출을 하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 있는 유지는 홀로였다. 부러 떠들썩 하게 등장해, 부러 의자를 옆에 붙여 허리를 끌어안고 손에 단 것이나 쥐여주면 화들짝 놀란 손이 제 가슴팍을 밀어냈다. 아이는 저리 물어왔다. 곤란한 동 찌푸린 미간과는 달리, 눈밑 여린 살이 복숭아처럼 달아올라 제 심장도 달게 달았다. 보드라운 저 살에 입맞추면 까무러칠까? 즐겁다. 기분 좋은 예감이 멈추질 않았고 무르디 무른 저 애 마음에 손자국을 남기고파 욕심이 났다. 

너는 너무 잘 배워서 선생님은 기뻐. 흐림없이 빛나던 눈에 일렁이는 감정. 고통에 강한 소년을 더욱 단단히 만드는 것이 제 일이나 그 굳은 심지를 파고들어 무른 감정을 심은 것도 나였다. 힐끔 눈치를 보며 도륵 굴러가는 눈동자에 나는 사랑을 심었다. 뱃속에서 들끓는 열망에 손끝이 저렸다. 차곡차곡 채웠던 사랑이 돌아오는 순간을 그토록 기다렸던 것이다. 

“바랐으면 좋겠어?”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그런 얘기야.”

“왜?”

“네가 나한테 바라는 게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바랐으면 싶잖아. 네게. 한 발자국 다가가면 경계하듯 한 발 멀어진다. 고죠는 그만치의 거리가 즐거웠다. 유지. 손을 뻗으면 닿는다. 이름을 부르면 들린다. 나를 보고, 느끼고, 흔들리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그리고 이 한 걸음의 차이는 이제 제게 확신을 줄 터였다. 고죠의 발이 우뚝 멎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하듯 유지의 걸음도 멎었다. 꿀빛 달큰한 눈동자가 머뭇머뭇 시선을 끌어올린 걸 보며 그는 웃었다. 양 팔을 벌려 품을 내어주며 웃었다. 

“사랑해줄래?” 

화르륵 눈밑이 붉어지도록 달은 얼굴이 사랑스럽다. 나는 안다. 곧 이 거리가 채워질 것이란 걸. 나는 알았다. 머뭇거리던 유지의 손이, 발이 움직인다. 한 걸음. 한 발짝.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조심스레 제 품을 파고드는 몸이 덧없이 떨리고 있어 고죠는 행복을 느꼈다. 등을 움키는 손에 사랑을 느낀다. 스스로 사랑을 채우며 다가온 아이는 여전히 따뜻한 제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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