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괴이담

살레하르트

권산군 마피아 AU


배경은 대충... 90년대 말 쯤이겠거니 해주십사...

사샤: 알렉산드르의 애칭

알료샤: 알렉세이의 애칭

시료자: 세르게이의 애칭

브라츠바 : 러시안 마피아를 부르는 호칭의 하나.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수준의 규모를 가진 조직을 일컫는다.




겨울의 살레하르트는 사람에게 잔독하리만치 시리다. 호흡 한 가닥마다 기도를 할퀴어내는 싸늘한 냉기, 피부를 찢어발기듯 날카로운 바람, 온통 하얀색 일색인 세상. 바라클라바를 뒤집어써도 호흡기 주변으로는 희부옇게 성에가 끼었고, 속눈썹에는 얼음 알갱이가 알알이 맺혀 얼어붙는다. 이 차가운 땅을 터전삼아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 이상에야 겨울의 살레하르트를 찾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시료자, 안 들어와?”

“…가.”

 

강 하구에 군데군데 흩어진 모래섬―그래봤자 지금은 눈밭에 불과한―에 시선을 두고 있던 인영이 희게 부서지는 숨을 뱉으며 몸을 돌렸다.

 

“뭐가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었어.”

 

남자, 산군은 자신의 것과 확연히 다른 새파란 눈을 마주하며 어둑한 통나무집 안으로 문을 닫고 들어섰다. 문가에서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모자와 바라클라바를 벗어내면 보온을 했음에도 냉기에 발갛게 얼어붙은 뺨과 코끝이 드러났다. 난롯가에 앉아있던 덩치 큰 남자가 그 꼴을 보고 킬킬 가래 들끓는 소리로 웃어댔다. 산군이 짐짓 이죽댔다.

 

“쳐웃지마, 사샤.”

“그러게 서리폭풍도 곧 오는데 나가길 왜 나가?”

“시료자 저놈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제 몫으로 준비된 의자로 가 엉덩이를 걸치며 산군은 두툼한 장갑을 벗어 적당한 곳에 툭 던지고 겉옷의 지퍼를 내렸다. 살레하르트엔 저처럼 검거나, 짙은 고동빛의 눈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때문에 산군은 막심이 이번 일에 뒤늦게 저를 끼워 넣은 것은 그 이유이리라 짐작했다. 와서 비슷한 생김의 이들을 보고 뭘 느끼라는 건지. 사샤는 탁한 청색의 눈을 가졌고, 알료샤는 호수처럼 새파란 눈을 가졌다. 이는 두 사람과 산군의 생김 또한 어느 정도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산군은 자신이 ‘동양계’라고 불린다는 것을 열다섯의 해에 처음 알았다. 막심이 데려온 가정교사 중 하나가 산군에게 그런 표현을 썼었다.

 

서른하나가 된 현재까지도 산군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동양계이고, 일곱 살 때 막심의 양자로 거둬졌으며, 당시 목에 권산군이라는 한국식 이름 석 자와 어느 주소가 적힌 명찰을 걸고 있었다는 것, 이름으로 미뤄보아 한국인이었을 것이라는 점 정도가 다였다. 일곱 살 적의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않았다. 양 손에 크기가 다른 손을 하나씩 붙잡고 길을 걸었고, 갑자기 연달아 아주아주 커다란 소리가 났고. 그 이후로 손을 감싸던 온기가 사라졌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대성통곡을 했던 것은 아슴푸레 기억이 났다. 그 즈음 누군가 자신을 안아 올렸는데 그것이 지금의 양부, 막심이었던 것까지.

 

막심에게 거둬진 이후로 산군은 줄곧 세르게이 막시모비치 소콜로프였다. 같은 브라츠바 내의 이들 중에서도 산군이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몇 없었다. 산군이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하던 날, 막심은 음각으로 호랑이가 장식된 권총을 선물로 건네며 일곱 살 당시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산군의 친부모가 왜 러시아에 와있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으나, 그들은 당시 벌어졌던 브라츠바 내부의 세력다툼에 휘말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도의적 책임에서 막심 본인이 산군을 거둬 키운 것이라며, 본래 이름인 ‘산군’이라는 말은 한국에서 호랑이를 뜻하는 단어로 쓰인다고. 산군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친부모의 무용한 죽음에 복수심을 불태우기엔 막심이 아버지로서 자리한 시간이 훨씬 길었으므로.

 

막심 이바노비치 소콜로프는 성씨에서 뜻하듯 매처럼 눈매가 부리부리한 남자였다. 그의 아버지 이반이 일궈낸 소콜로프 브라츠바를 계승하여 군림하는 자. 소콜로프 브라츠바는 소련이 붕괴하고 사회주의가 무너지며 국가기구의 부정부패가 판을 치던 그늘 아래에서 빠른 속도로 덩치를 키운 무수한 세력 가운데 하나로, 따지고 보면 역사가 짧은데 반해 덩치나 세력은 강한 축에 들었다. 거기엔 소콜로프 브라츠바를 일으킨 이반의 대단한 수완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산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혼란한 세태 안에서 위태롭던 국영기업들은 줄줄이 사유화 되었고 밑바닥이나 어둠 속에서 무기 및 마약 암거래, 인신매매 따위로 밥그릇을 챙기던 이들이 틈을 타 기업 인수와 경영으로 손을 뻗쳤다. 그럴 머리가 없는 놈들은 보호비를 명목으로 기업에게서 돈을 상납 받아 배를 불렸다.

 

본디 인간의 욕심은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 법이라, 기업에 손을 뻗친 이들은 자연스럽게 정치권의 고위관료와 경찰 간부, 군부에도 손을 뻗어 맞잡았다. 이반 소콜로프는 제법 이른 시기에 정치권의 한 세력과 결탁을 맺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브라츠바의 기반을 다지고 든든한 뒷배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반은 자신의 아들인 막심에게 성공적으로 브라츠바를 승계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으나, 뭐. 당시 각 브라츠바 내부에선 반역이 횡행하던 때였으니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막심이 노쇠해질 쯤, 승계는 산군에게로 이어질 터였다. 그 과정에서 막심 때보다 더 큰 잡음이 발생하리라는 건 아비인 막심도, 아들인 산군도 알았다. 그야 산군은 소콜로프의 적통이 아니었으니까.

 

하여 막심은 산군이 어렸을 적부터 효과적으로 타인의 숨통을 끊는 법, 흔적을 지우는 법, 고통을 극대화하여 고문하는 법 따위의 수단에서부터, ‘러시아 마피아는 재미를 위해 체스를 둔다.’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지식은 물론 고위 관료들을 비롯한 상류층의 이들과 모나지 않게 어울리는 규칙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가르쳤다. 덕분에 대외적으로 알려진 막심 이바노비치 소콜로프의 아들 세르게이는 두 개의 석사를 가진 품행 방정한 청년이었다. 브라츠바와는 깊은 관련이 없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긴 했으나 당연하게도 그 모든 게 거짓이었고, 산군은 이미 브라츠바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다. 스물의 생일을 맞이한 다음 날부터 조직의 일을 하나씩 배우고 도맡았으니 자연스러운 흐름이긴 했다.

 

“어, 왔다.”

 

알료샤의 중얼거림에 상념에서 깨어난 산군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제야 타닥타닥 난로 안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통나무 벽을 할퀴고 지나가는 서리폭풍의 귀곡성이 들려왔다. 창문을 마치 모래바람이 쓸고 지나가듯 싸아아, 스산한 소리가 밖에서 울리는 중이었다. 온통 뿌옇기만 한 창문에 잠시 시선을 두었던 산군이 지나가듯 툭 물었다.

 

“약속까지는?”

“이제 20분. 폭풍은 그 전에 지나갈 거라고 하던데.”

“그럼 다행이네.”

 

산군의 옆에서 사샤가 뭐가 됐든 빨리 돌아가기나 하고 싶다며 걸죽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반대쪽 옆에서 알료샤가 눈으로 욕하는 것을 보며 산군은 피식 웃었다. 사샤는 원래 투덜거림이 많은 편이긴 했으나, 이번의 투덜거림은 어느 정도 납득될 만 한 구석도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살레하르트로 오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고도 약 세 시간이 걸린다. 거리도 거리지만, 인프라 등에서의 격차도 상당히 컸다. 그러니 모스크바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이 살레하르트에서의 하릴없는 시간 죽이기를 달가워 할 리가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모스크바에서 아르칸젤스크까지만 이동해도 문제없는 일이었다. 소콜로프 브라츠바가 단단히 붙잡고 있는 밥그릇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들이 수작질만 부리지 않았어도 말이다. 소콜로프 브라츠바는 다양한 분야에 손을 뻗고 있긴 했으나 개중에서 가장 돈이 많이 되는 사업을 꼽으라면 단연 가짜 주류를 판매로, 해외로부터 질이 나쁘거나, 식용이 아닌 에탄올에 색소를 타 국내로 들여온다. 세척액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들어온 에탄올에 또 다시 색소를 타고, 약간의 싸구려 양주와 꿀 같은 당류를 섞어 위스키나 브랜디 따위로 속여 파는 일이 기본 골자였다. 현재 정부에서 주류 수입에 대해 붙이는 세금은 어마어마했다. 그 이면으로는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주류세를 큰 폭으로 올려 술 소비량을 감소시키고 나아가 국민의 건강을 증진토록 하기 위함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을 달고 있었으니. 요사이 국내로 들어오는 에탄올에 대한 감시의 눈길이 제법 날카로울 수밖에 없는 와중에 타 조직에서 제보를 넣은 것이다.

 

정부의 입장에서야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는 일이라 해도, 직접적으로 누군가의 입을 통한 제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흐린 눈으로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리 하야 아르칸젤스크에서는 예정되어있던 시간에 다른 물건을 들이고, 동시간대에 살레하르트에서는 가짜 주류로 판매할 에탄올을 받게 되었다. 아마 지금쯤 모스크바에서는 막심이 직접 손을 써 문제의 조직을 들쑤시고 있을 터였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것은 산군으로서도 마찬가지긴 했다. 살레하르트는 너무, 지나치게 삭막하여 그 공허가 전염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시료자, 그거 아냐?”

 

무언가에 골몰하는 표정을 짓던 사샤가 불쑥 내뱉었다. 알료샤는 저 새끼가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고 하냐는 듯 눈을 홉떴으나 산군은 선뜻 뭘? 하고 대꾸해주었다.

 

“살레하르트의 땅에 뭘 묻으면 여름에 눈이 녹잖아? 그리고 다시 겨울이 되서 얼어. 그걸 몇 번 반복하면 그 묻은 게 영구동토층 안에 갇힌다더라.”

“그래서?”

“그럼 이제 영영 아무도 모르게 증거인멸이 되는 거지.”

 

사샤의 목소리가 말을 끝맺는 것과 작은 통나무집을 뒤흔드는 총성이 들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한쪽 귓가가 화끈거리며 뜨끈한 것이 흘렀다. 강한 힘에 바닥으로 떠밀린 산군은 제 위로 덮쳐든 알료샤의 몸이 긴장으로 굳은 것을 느꼈다. 혹은 두려움이거나. 능청스럽게 총을 발사한 사샤는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서서 이쪽으로 다시 총을 겨누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총을 꺼내 맞대응을 하기엔 자세가 좋지 않았다. 산군이 방법을 강구하는 찰나 간 또 한 번의 총성이 공기를 찢었다. 알료샤의 몸이 들썩였다. 그리고 또, 또, 또……. 여덟 발의 탄창을 모두 알료샤의 몸에 박아 넣은 다음에야 사샤는 입을 찢어 웃었다. 더는 호흡하지 않는 알료샤의 몸이 산군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마샬로프지? 알렉산드르 네 뒤에 선 새끼.”

 

산군이 여상한 어조로 질문했다. 기실 이번 일을 이렇게 귀찮게 만든 것도 마샬로프 브라츠바의 소행이었다. 사샤와 마샬로프의 간부가 한 가게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보고가 올라온 게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당시 사샤가 도맡아 진행 중인 거래가 있었기에 약간의 말미를 더 주기로 결정지었던 것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사샤가 이 시점에서 총을 빼들었다는 건 제가 오지 않았어도 알료샤는 결국 죽었을 것이고, 넘겨받기로 약속되어 있던 에탄올들 역시 마샬로프의 손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단 의미가 된다. 산군은 문득 깨달았다.

 

“아버지가 이래서 뒤늦게 날 보내신 건가.”

“아버지는 지랄, 진짜 적통도 아닌 새끼가.”

 

목 안에서 들끓는 가래를 알료샤의 몸 위로 탁 뱉어낸 사샤가 느릿느릿 새 탄창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난 니 새끼가 마음에 안 들었어. 그 시커먼 눈구멍을 마주보면 기분이 더러웠다고. 그런 주제에 저 혼자 얼마나 고고한 척을 하는지….”

 

정말 고고한 척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어이가 없진 않았으리라. 산군은 알료샤의 몸 아래에서 손을 움직여 늘어진 멱살을 틀어쥐었다. 알료샤는 사샤만큼 덩치가 크지는 않았으나, 기골이 장대한 것은 사실이라. 산군이 하고자 하는 계획은 단발성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에 기회를 잡지 못하면 죽는다. 짧게 숨을 들이쉰 산군이 묵직한 알료샤의 몸을 사샤에게로 던지듯 밀쳤다. 주의가 흐트러진 순간을 틈타 사샤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총성이 통나무집의 천장을 울리고, 넘어진 사샤의 몸 위로 올라탄 산군은 제 품의 권총을 꺼내 벌어진 입안에 거칠게 쑤셔 박음과 동시에 안전장치를 풀었다. 헛짓거리를 할 틈을 줄 생각은 없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퍽 친절하게 하나의 단어를 읊었다.

 

“Придурок.”

 

퍽, 골과 육으로 이루어진 머리통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산군을 올려다보던 탁한 청색눈의 동공이 힘을 잃고 스르륵 열린다. 그제야 왼손을 들어 제 귓바퀴를 한 번 훔쳐낸 산군이 혀를 차고 일어섰다. 사샤의 머리를 중심으로 핏물이 후광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퍽 모독적인 광경을 잠시 내려다보던 까만 눈이 제멋대로 널브러진 알료샤의 몸을 일별한다. 알고 지낸 시간이 십년에 가까웠으나 달리 애도는 하지 않았다. 어제의 산 사람이 오늘은 고깃덩이가 되곤 하는 것이 이 세계의 생리였으니까. 다만 이제 홀로 남은 일을 다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성가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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