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괴이담

Freak

권산군 F1 au (w.한신)

*고증...어쩌구는 적당히 흐린 눈으로 봐주시면...(^^) 

디지님의 [사제의 정]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역시 기본은 영어, 말풍선 안 이탤릭 표기는 한국어입니다. 

https://youtu.be/tMrXyjGM-NY?si=dZcEWECfjfuV_DQ_



수를 셀 수 없는 뭇 관중들의 소란, 팀 크루들의 함성, 레이싱 수트 위로 흩뿌려지는 샴페인의 달큰한 술 냄새, 번쩍이는 트로피 따위가 가져다주는 폭발적인 기쁨이 휘황찬란한 빛을 잃은 것은 조금 되었다. 보일 듯 말듯 띄는 웃음을 팀 크루들은 레이싱의 열기와 긴장이 덜 식은 것이라 생각하곤 넘기는 듯 했지만, 언제부턴가 콕핏 안에서 컨트롤하는 섬세하고 예민한 밸런스 조정이 지루해졌다. 일곱 살, 카트의 핸들을 처음 붙잡은 이후 산군의 인생은 레이싱을 제외하면 말할 수 있는 것이 몇 되지 않을 정도로 레이싱에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살아왔다. F4를 거치고, F3, 이어서 F2, F1, 이윽고 포디움의 자리까지. 길다면 길 그 시간동안 산군은 자신이 신체적 한계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시트에 오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최근의 권태는 산군에게도 상당히 낯선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를 때까지 산군은 가슴 한 구석에서 싹틔운 권태를 한참 생각했다. 어렸을 적 카트를 탈 때 느꼈던 희열에 대해서도 곱씹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 자신의 의도가 곧장 반영되는 탈것. 산군이 처음 매료되었던 것은 그런 지점들이었다. 시트에 오르면 차체는 오롯이 자신의 통제 하에 놓였다. 미세한 차이로도 레이싱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걸 그 어릴 적에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세밀한 지점까지 자신의 감각으로 다루었을 때 뽑아낼 수 있는 결과가 궁금했다. 그런 욕심을 든든히 뒷받침해줄 수 있었던 집안의 재력은 어찌 보면 산군에겐 행운이자 운명이었다.

 

그렇게 레이싱에 인생을 꼴아박으며 매진해온지가 어느덧 이십년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건 말이 안 됐다.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시즌 오프, 언제나 그랬듯이 곧장 다음 시즌 준비에 돌입하며 산군은 몸도 머리도 쉬지 않은 채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그거라고.”

“어. 이제 서킷 직접 도는 데는 흥미 잃은 것 같다고.”

“그래서 은퇴를 하시겠다? 권, 이 미친 또라이야. 이러지 말자. 응? 너 아직 기량 한창이잖아.”

 

드라이버가 차체를 컨트롤한다곤 하나 결국 드라이버는 피트에서의 오더를 받는다. 드라이버가 하나의 나무만을 보고 있다면 레이스 엔지니어처럼 피트 월에 있는 이들은 숲을 보는 셈이다. 산군은 이제 숲을 보고 싶었다. 산군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몇 안 남은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뜯을듯 움켜쥐는 로저를 그저 가만 주시할 따름이었다.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는 그 까만 눈을 바라보는 레이스 엔지니어 로저 맷브런은 물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엔지니어링 쪽으로 전향하려고.”

“아니? 아니, 안 돼. 그거 아니야. 산군, 잘 생각해. 너 후회한다?”

 

심드렁한 눈으로 산군은 새끼손가락을 들어 제 귀나 한번 가벼이 후비고 훅 불었다.

 

“알잖아. 나 이런 거 고민 충분히 해보고 결정 내리면 이야기하는 거.”

“이런 씨― 그러니까 그걸 왜! 너 혼자 결정 내려서 말하냐고!”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을 보며 산군은 태평하게 백인이 아니라 홍인이네, 따위의 생각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망하게 올려다보는 둥그런 얼굴에게 어쩔 거냐는 듯 어깨도 으쓱여주고.

 

“의욕 잃은 선수 붙잡고 있어봐야 다음 시즌에서 기록이 잘 나오겠어? 닉이 이제 퍼스트하면 되겠네. 세컨드 드라이버로 앉힐 사람도 눈여겨본 사람 있을 거 아냐.”

“……그래서 그만두면?”

“두 달쯤 쉬고 그 뒤엔 좀 더 공부해야지. 엔지니어링.”

 

제 할 말을 마친 산군은 이만 가겠다는 뜻으로 손이나 한 번 슥 들어주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사무실 안에서 마치 짐승의 것 같은 괴성이 들려와,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으나 뻔뻔한 얼굴로 자기도 영문을 모르겠다 대꾸한 산군은 느긋한 걸음으로 폭탄을 투하한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후 약 이 주간 산군을 설득하겠답시고 레이스 엔지니어인 로저 맷브런을 필두로 마케팅 감독이며 총감독 같은 이들이 부지런히 산군의 집을 들락였지만 은퇴하겠다는 말이 번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창 전성기를 달릴 때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것도 벌써 과거의 일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산군은 여전히 페라리에 잔류했다. 선수 생활은 은퇴할 것이지만, 코칭이나 엔지니어링 쪽으로 전향하고자 하는 뜻을 결국 존중하기로 결정한 사측에서 먼저 엔지니어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산군으로서는 스폰서십을 맺은 이후로 줄곧 몸담았던 곳에 머무를 수 있다면 그것만큼 편한 일이 없었으므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여 엔지니어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산군은 최근 소소한 취미생활을 시작했다. 모터쇼나 F1경기를 모니터링하고 분석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어린 세대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직은 여물지 못한 그들의 드라이빙을 보는 것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에도 아직 미숙한 아이들이 카트를 컨트롤하려 노력하는 것이 글쎄, 아주 조금은 귀여워보였을지도. 아이들의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드문드문 앉은 자리에 섞여 앉아 산군은 제법 날카로운 눈으로 각 카트의 움직임을 버릇처럼 분석하고 개선점을 찾아내곤 했다.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서킷을 도는 카트들 사이에서 오늘따라 조금 눈에 띄는 카트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조금 불안정하고 사납긴 했어도 코너링을 할 때의 움직임이라던가 밸런스를 유지하는 게 타고난 것 같았다. 산군이 묘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저건 좀 갈고 닦으면 곧잘 하겠는데. 이후 산군의 시선은 줄곧 흰색과 녹색이 뒤섞인 헬멧을 쓴 머리통에 가 닿아있었다. 레이싱도 결국은 감각이었고, 타고나는 부분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야 했다. 물론 그저 좋은 스폰서를 물고 돈으로 밀고 들어오는 페이 드라이버가 아주 없진 않지만 말이다.

 

줄곧 예의 헬멧에 시선을 한참 고정하고 있던 산군은 카트가 속도를 줄이며 피트로드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움직였다.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보호자와 이야기라도 나누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레이싱 스타일이 제법 사나운 듯 해 누르려면 고생깨나 할 것 같긴 했다만서도,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원석을 알아본 것 같은 묘한 기분이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산군이 아래로 내려갔을 때 십대 중반에 들어선 듯 보이는 아이들 몇이 모여 서있었다. 저들끼리 이야기라도 하는 건가. 산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들이 손에 쥔 헬멧을 눈으로 확인했다.

 

“코칭해줄 사람도 없는 게 왜 자꾸 나와서 서킷에서 알짱거려?”

“너 때문에 연습하는데 방해된다고.”

“이 자식 돈밖에 없어서 나중에 시트 사서 경기 뛰는 거 아냐?”

 

정확하게 귀를 파고드는 원색적인 비난에 산군은 가볍게 혀를 찼다. 어린놈들이 벌써부터 까져가지고. 저런 인성으로 퍽이나 롱런을 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산군이 흰색과 녹색 뒤섞인 헬멧을 발견함과 동시에 익숙한 인종차별적 욕설이 한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제야 산군은 자신이 찾은 헬멧 주인공의 얼굴을 확인했는데, 붉은 머리칼 아래에 자리한 것은 저와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이었다. 산군의 고개가 설핏 기울었다. 동양계?

 

이민자 3세대인 산군의 학창시절엔 심심찮게 인종차별적 발언이 수군거림으로 따라붙곤 했다. 물론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에 비하면 인종차별적 상황을 훨씬 덜 겪은 편이긴 했다만. 학교를 다닐 적에도 동양계 자식이 본인보다 훨씬 좋은 가정형편에 많은 걸 누리고 사는 걸 아니꼽게 보는 놈들이 더러 있었다. 물론 산군으로선 그들이 저를 어떻게 보든 아무래도 좋았으니 무시하고 다니는 편에 가깝긴 했다만.

 

“다시 지껄여 봐. 뭐?”

 

이 붉은 머리의 어린 친구는 참아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문제의 발언을 내뱉은 머리통을 후려치려는 듯 들어 올린 헬멧의 기세가 퍽 살벌했다. 산군은 뒤로 다가가 그 손목을 가벼이 잡아 내리며 백인 아이들의 낯을 예의주시하듯 한 번씩 쳐다보았다.

 

“내가 선택지를 줄게. 얌전히 사과하고 곱게 간다, 다시는 이 카트장에 발을 못 붙이게 된다. 어쩔래?”

“누구세요?”

“말 한마디면 너넬 이 바닥 블랙리스트에 올릴 수 있는 사람?”

 

아이들의 기세가 주춤하는 게 보였다. 물론 산군은 그런 권한 따위 갖고 있지 않지만, 뭐. 방법을 찾자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했으므로. 선택을 종용하듯 친절히, 그러나 퍽 위협적으로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미안했다, 장.”

“…미안.”

“…뭐, 미안하다.”

“이제 가 봐.”

 

산군의 턱짓에 아이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 사라졌다. 그제야 붙들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자, 돌아선 얼굴이 불퉁함과 경계를 담아 곱지 않은 빛으로 이쪽을 보기 시작했다.

 

“누구신데요?”

“너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지 않아?”

“그쪽이 뭔데 날 도와줄 수 있다고 해요?”

“페라리 엔지니어 정도면 되지 않나.”

“페라리 엔지니어요? 사기 아냐?”

 

산군은 드물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아무 증거도 없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내일…은 내가 안 되겠고, 목요일에 시간 돼? 너, 아니. 이름은?”

 

여전히 의심이 덕지덕지 붙은 눈이 한참 가늠하듯 산군을 살폈다. 딱히 무해하게 보이는 재주는 없는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마주하길 얼마간. 뚱하게 닫혀있던 입술이 슬쩍 열렸다.

 

“한신, 장.”

너 한국계였어?

그쪽 한국 사람이에요?

 

산군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한국계이긴 하지만 제 국적은 한국이 아니었으니, 한국인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냥 한국계인거지. 정확히 말하면.

그게 뭔데요. 입양이라도 됐나?

“이민자 가족? 아무튼, 목요일에 뭐해.”

“목요일은 왜요.”

“네가 못 믿는 것 같으니까 증거라도 보여줄까 해서. 그날 다시 여기 나와. 가볍게 코칭해줄게.”

 

 

 

 


 

 

 

 

산군은 전형적인 로얄로드를 밟아 F1으로 입성한 케이스였다. 가장 정석적인 반면 가장 힘들기도 하다는 루트를 밟아 F1 챔피언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집안에서의 무리 없는 지원이 있었고, 전반적으로 운이 좋았고. 스폰서십을 맺은 것도 유러피언 F3 챔피언십 경기를 치르기도 전이었으니 이르다면 이른 스폰서 계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산군은 제 유일의 제자라 부를 수 있을 주인공에게 제가 걸어온 것과 비슷한 왕도를 닦아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최근 들어 자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자신이 십대의 끄트머리에 출전했던 유러피언 F3 챔피언십을,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한신이 같은 나이에 출전한다는 사실은 감수성이 메말랐다 평가를 듣는 산군에게도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연습주행도, 예선도 잘 마쳤다. 당장 내일이면 본게임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분명 내재되어있는 자질이 빛을 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게 조금은 아쉬워서. 그래서 가볍게 갈고 닦아주는 정도로만 가르쳐보고 싶었다. 산군도 안일했던 것이다. 쉽게 붙였다 떼는 자석처럼, 별 계기 없이 시작된 인연이었으니 쉽게 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고.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행위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신은 산군의 가르침을 곧잘 이해했고, 제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 솔직하게. 한신은 가르치는 맛이 있었다. 산군은 한신을 가르치며 자신이 알려준 것을 반영해 달라지는 모습에서 과거의 희열을 한 조각 찾아냈다. 카트라는 것이 자신의 컨트롤에 따라 천차만별의 기량을 낸다는 사실을 정식으로 배웠을 때 느꼈던 것과 흡사한 감정. 그 작은 한 조각이 산군과 한신의 인연을 오 년 가까이 이어오게 했다. 카트 레이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게 만들었고, F4에서도 무리 없이 상위권의 기록을 가질 수 있게 가르쳤다. 기실 확정적으로 딱 언급한 적이 없다 뿐이지 산군과 한신의 관계는 이미 스승과 제자였다. 한신은 언제부턴가 산군을 코치라고 부르며 따랐고, 산군은 언제부턴가 한신의 기량을 키우는데 제법 매진했으므로.

 

이번 레이싱을 상위권에서 마칠 수 있다면 스폰서 계약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을 터였다. 사실 한신은 이미 페라리에서 점찍어둔 슈퍼루키나 다름없긴 했다. 산군의 소속이 페라리였으니, 산군이 가르친 유일한 제자인 한신의 소속도 자연스레 정해진 셈이다. 물론 한신이 모르는 자리에서 산군의 입김이 약간 작용하긴 했다. 원래 페라리에서는 좀 더 이르게 스폰서 계약을 맺으려 했다. 어차피 산군이 가르치는 중이기도 하거니와, 팀에서도 한신의 가능성을 높이 샀으므로 계약을 서둘러서 나쁠 것이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군은 단호하게 아직은 이르다, 딱 잘라 물렸다. 과거 산군의 레이스 엔지니어였던 로저 맷브런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다른 스폰서랑 계약을 맺으려는 거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산군은 코웃음으로 대응할 따름이었다.

 

-내가 그렇게 뒤가 구린 놈으로 보였어?

-아주 아니라고 할 수는…?

-어이없네. 진짜 그렇게 해 줘?

-그럼 대체 아직은 안 된다는 이유가 뭔데. 미리 해서 나쁠 것 없잖아.

-애 버릇 나빠져.

-뭐?

-장한신 성깔을 봐. 일찍부터 스폰서 뒤에 세우면 저 콧대 저거 F1 가기도 전에 부러져.

 

어쨌든, 그렇고 그런 사정으로. 한신은 페라리에서 이미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한 채 유러피언 F3 본경기의 날이 밝았다. 그리고 모두가 혼돈에 빠졌다. 해는 쨍하게 도로를 달구었고, 하늘은 지나치게 새파랬다. 연습주행부터 예선을 치른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부슬비가 땅을 적시고 있었다. 레이싱에 참여하는 모든 팀이 젖은 노면을 기준으로 한 셋업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건 재난상황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거 하늘한테 엿먹는거지, 코치?”

 

피트 입구에 서서 한 손으로 차양을 만든 채 서킷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던 산군의 옆으로 한신이 다가와 툭 말을 붙였다. 아니라고 대꾸해주기엔 상황이 썩. 산군은 말없이 흘긋 시선만 던졌다.

 

“데이터랑 셋업은 있어. 이 서킷에 최적화된 게 아니라는 건 조금 문제지만.”

“그 정도만 있으면 어떻게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할 수 있겠어?”

 

한신의 시선이 산군의 것과 마주쳤다. 진심이야? 산군에게 되물은 한신이 씩 웃었다.

 

“못하면 억울하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인대로, 체커기를 가장 먼저 올린 것은 한신이었다. 본인에게 완벽히 최적화되지 않은 데이터와 셋업을 가지고도 챔피언의 자리를 거머쥔 것은 확실히 한신이 가진 잠재능력이 뛰어나다는 방증이었다. 한신이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의 기록을 확인한 산군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정신을 고양시키는 짜릿한 전율은 마치 처음으로 F1 시트에 앉아 포디움에 올랐을 때와 닮아있었다. 피트로 복귀한 한신이 차체에서 완전히 내려섰을 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로 달렸다. 피트 크루들이 우르르 따라 나와 한데 뒤엉켰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환호와 함성으로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지만, 산군은 뜨끈한 열기로 달아오른 레이싱 수트를 꽉 마주 안으며 등을 투덕였다.

 

경기를 마친 당일 저녁은 산군도 모처럼 조금은 풀어지곤 했다. 포디움에 오른 이들과 그 팀 일부를 위한 조촐한 파티가 열리는 듯 했으나 산군은 한신만 보냈다. 그런 자리에 참석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굳이 저까지 꼭 가야할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한신에게 전달할 말이 있으니 적당히 놀고먹다 제게 들리라 전하긴 했다. 제 숙소로 돌아온 산군은 뒤늦게 몰려드는 피로감에 두어 시간쯤 눈을 붙였고, 간단히 식사를 만들어 먹은 다음 경기 영상을 보며 가볍게 분석과 다음 훈련의 지향점 따위를 조율했다.

 

한신이 산군의 숙소를 찾은 것은 자정까지 약 삼십 분을 남겨두었을 때였다. 현관문을 열자 보이는 얼굴이 한껏 들뜬 듯 보여 산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주 끝내주는 파티를 즐기고 온 모양이지. 한신에게 소파에 앉으라 권한 산군은 두 개의 머그잔에 따뜻한 물을 붓고 루이보스 티백을 띄워 한 잔은 한신에게 건넨 다음에야 자리에 앉았다. 주홍빛으로 우러나는 찻물의 향을 킁 맡은 한신이 머그잔을 얌전히 내려놓고 있었다.

 

“전달할 말이라는 게 뭔데?”

“스폰서 계약.”

“드디어?”

 

반색하는 한신을 보며 산군은 피식 웃었다. 이제쯤 스폰서 계약을 맺어야 앞으로 이리저리 활동하는 것이 편하긴 할 터였으니 자연스러운 수순이긴 했다. 티백을 몇 번 움직여 우러난 찻물이 골고루 퍼지도록 만든 산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여상한 투로 말을 이었다. 이 제안은 산군에게도 앞으로의 행보가 결정되는, 나름 중요한 질문이었다.

 

“하나 더 있어.”

“뭔데?”

“갈래? F1.”

“……”

“……”

“아니. 그럼 나 말고 누구랑 가시려고요, 코치?”

“새 코치 필요 없어?”

있겠냐?

냐?

“아니이, 코치가 이상한 소릴 하니까…”

앞으로 잘 해,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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