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괴이담

달과 바다와 그늘 上

윤슬 청춘 au

https://youtu.be/jq22qz7DmlE?si=_UeaBMblaxBsLNkZ (들으시며 읽으면 더 좋…을지도?)

랑해님의 썰을 기반으로 하여 쪼작쪼작 써본 윤슬 청춘 au 로그입니다… 청춘 마싯다 냠냠.


달과 바다와 그늘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산군은 아주 드물게 조모의 앙상한 무릎을 베고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곤 했다. 당신의 고향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전설과 같은 것일 때도 있었고 요즈음 동네에서 화제가 되곤 하는 일에 대한 것이라든지, 여타 소소한 것들이 조모의 세월 묻은 음성에 담겨 산군의 위로 가만 내려앉았더랬다. 조모의 음성에서는 주로 따뜻한 온기가 묻어났는데 산군은 그것이 늘 묘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따뜻함’은 피부로 감각하는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산군은 이해하고 싶었다. 어떠한 기전으로 사람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묻어날 수 있는지. 그러나 조모의 시간은 산군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꼭 맞게 짜인 나무 관째로 땅 아래에 묻히는 조모의 마지막을 배웅하며 불현듯 깨달았다. 부모님의 목소리에서는 조모에게서 느낀 것과 같은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는 걸 말이다. 산군이 떠올릴 수 있는 ‘첫 기억’에서부터 그들의 음성과 조모의 것은 같지 않았다. 당시엔 어려 무엇이 다른지 명확히 가려내지 못했으나, 이제는 안다.

 

부모님의 시선과 목소리에는 온기가 없다.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에 당혹감, 거부감, 두려움, 부정, 불안 따위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걸 차근차근 깨우쳤다. 그들이 자신을 꺼림칙하게 느낀다는 것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명확히 알았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저를 꺼리게 하는지도 안다. 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 산군이 부모님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그건 잘못된 거야.’ 그 한 문장이었으므로.

 

그러니까 조모의 무릎을 베고 누웠던 때보다 조금 더 어렸을 적, 그즈음부터 산군은 종종 이질적인 것을 보곤 했다. 아니, 보았다기보다 그것들이 자신의 시야에 나타났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그것들은 거리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무수한 사람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그래서 산군은 알고 싶었다. 저들은 무엇이 다르기에 저렇게 우두커니 서 있고, 어째서 하나같이 검거나 희거나 붉어진 옷을 입고 있는지, 뭘 위해 저런 행동을 하는지, 왜 사람들을 모두가 저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듯 보이는지.

 

궁금하여 소리 내 물었다. 목소리로 또박또박 빚어 발화했다. 그러자 이내 딱딱하게 굳어버리던 손마디의 감촉을 기억한다. 애써 웃는 입과 떨리는 눈가와 한참 만에 되돌아온 물음,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느냔 꾸중과 질타 또한 여전히 기억한다. 산군은 그 기억들에서 하나씩 배웠다. 자신이 보는 것을 적어도 부모님은 볼 수 없으며 아마 대다수의 사람 또한 보지 못할 것이고, 그런 존재들에 대한 말을 입 밖으로 뱉는 행위가 제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우습게도 부모님은 그들의 자식인 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아버지가 빛 한 점 들지 않을 땅 아래에 묻혔다. 조모의 기일과는 꼭 3년의 차이였다. 기실 산군은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이렇다 할 기억이 없었다. 그는 일이 바쁘다는 이유—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르는—로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제대로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고 봐야 했다. 아버지의 관이 흙 아래에 조금씩 묻혀갈 때 검은 상복을 입은 어머니의 낯 위로 깊은 슬픔과 함께 두려움이 번져 있었다. 산군은 그녀의 두려움을 오래도록, 가만히 바라보며 본능적으로 감각했다. 두려움의 뿌리가 제 발밑에서 뻗어가고 있음을.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산군에겐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어머니 단 한 사람뿐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산군은 어렸을 적 보았던 이상한 것들을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서서히 자연스럽게 시야에서 사라져 갔던 것 같다고 기억할 따름이다. 그래서 그것이 아쉬운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았고,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과 한 걸음쯤 더 가까워진 셈이니 호재라고 보는 게 맞았다. 열아홉 산군의 목표는 뭇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질적인 티가 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키가 크고 머리가 자랄수록 산군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자연스레 깨달아 갔다. 남들이 자연스레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 제게는 그리도 어려웠다. 왜 웃어야 하는지, 왜 화내거나 슬퍼야 하는지 그 맥락을 짚어낼 수가 없었다. 때문에 산군은 늘 관찰했다. 부모를, 동급생들을, 거리의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고 듣고 읽고 배웠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웃고 울며 화내고 동정하는지 등을 익혔다. 무수한 계산과 반복으로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까지 스스로의 껍데기를 빚어냈다.

 

하여 열아홉의 산군은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 퍽 자연스럽고 익숙해졌으나 본디 타고난 것이 아닌고로 종종 짙은 피로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찾는 이라곤 거의 없는 학교의 도서관을 지키는 도서부가 된 것은 그 탓이었다. 오래된 책과 나무로 짜인 책장의 냄새가 건조하게 풍기는 고요한 도서관은 산군의 작은 요새나 다름없었다. 도서관을 담당하는 사서 선생님은 방과 후면 늘 도서관 일을 도맡는 산군에게 모종의 책임감과 미안함을 느끼는 듯했지만, 산군은 평이한 낯으로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선생님.’ 하며 그와 자리를 교대하곤 했다.

 

사서 선생님마저 떠나간 도서관은 오롯한 정적에 잠겨 들었다. 소음을 빚어내는 존재가 저 하나뿐인 도서관은 극히 세밀하게 빚어진 공예품처럼 느껴지곤 했다. 창문을 통해 들이친 오후의 햇볕이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와 부딪혀 비산하고, 으레 ‘따뜻하다’일컬어지는 색채의 빛이 차가운 돌바닥을 물들인다. 모든 것이 잘 짜 맞춘 듯 정돈된 공간에 가만 앉아 낮게 호흡하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쯤엔 저 역시도 이 공간에 놓인 무생물인 양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리고 산군은 그 순간을, 어쩌면 ‘가장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가끔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 평화란 것은 깨지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므로. 산군의 평화도 영원토록 견고하진 못했다. 어느 날 저 말고는 드나드는 이 없던 도서관의 문이 드르륵 열리며 정적은 깨진다. 새카만 머리칼로 눈을 다 가린 학생이 그 주범이다. 서로 간에 오가는 말은 없다. 그저 조용히 들어와, 대출하길 원하는 책을 가져온다. 그러면 산군은 도서 대출증을 확인하고, 책의 바코드를 찍어 전산에 기록한다. 대출이 완료된 책을 슥 내밀어 돌려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공위환, 2학년 3반. 산군이 그에 대해 아는 정보는 그게 다다. 기실 더 알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야 도서부 권산군과 꾸준히 책을 읽는 공위환이 그들 관계의 전부였으니까.

 

“……찾는 책이 제자리에 없는데.”

 

기묘하게 유지되던 산군의 평화가 한 번 더 깨진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서였다. 당연히 빌리려는 책을 가져왔으리라 생각했던 위환의 손은 비어있었고, 그 대신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산군이 읽고 있던 책 위로 내려앉았다.

 

“…책 제목 알려줘.”

“오가와 요코의 은밀한 결정.”

“……대출증 줘.”

 

잠시간 말없이 위환을 올려다보던 산군이 위환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책은 찾아주지도 않고 대출증부터 달란 소리에 위환은 어쩐지 의아해 하는 듯했으나 (물론 눈을 가린 검은 머리칼 때문에 그저 그간 뭇사람들에게서 쌓은 데이터로 짐작했을 뿐이지만) 별말 없이 대출증을 산군의 손에 올려주었고, 읽고 있던 책을 덮은 산군은 대출증의 바코드와 읽던 책의 바코드를 차례로 찍은 다음 둘 다 위환에게 내밀었다.

 

“읽고 있던 거 아니었어?”

“다음에 다시 읽으면 돼.”

“……. 빨리 읽고 반납할게.”

“상관없어. 편하게 보고 반납해.”

 

말을 마친 산군이 작은 포스트잇에 제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페이지 숫자를 적어 접수대의 안쪽 벽면에 붙여두었다. 그때까지도 받아 든 것을 가만히 들고 서 있기만 하던 위환은 산군이 고갤 들어 빛 한 점 들지 않은 까만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제야 말없이 도서관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읽고 있던 책을 선뜻 내어준 것에는 딱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반납 기간을 잘 지켜왔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꾸준하게 책을 빌려 가기 때문이었다.

 

금세 소리 사라진 도서관의 공기가 빠르게 적막에 물든다. 그러나 산군은 어딘지 모르게 지금의 고요가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미미할 뿐이지만, 도서관의 공기에 어떠한 색이 섞여 든 것 같단 느낌. 무색이기만 하던 공간에 낯섦이 맴돈다. 산군은 오래도록 가만히 앉아 그 낯섦을 하나하나 헤아려 겹겹이 쌓았다. 위환이 책을 반납하고자 돌아올 즈음 이 설익은 정체불명의 것은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 테지만.

 

“뭐 찾는데?”

 

그러나 산군의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대출해 갔던 책을 반납하면 금세 다음 책을 빌려 사라지던 위환이 한참 서가만 빙빙 돌고 있었다. 위환은 발소리가 그리 또렷하거나 크진 않았다. 요란하지 않았으나 그것이 차분하거나 편해 보인다는 말과는 동의어일 수는 없어서, 산군은 접수대를 벗어나 한창 800번 대 책장 사이에서 서성이던 위환의 뒤를 따라잡았다.

 

“아니…”

 

책 한 권을 손에 든 채 서성이던 위환은 묘하게 편치 않아 보이는 얼굴로 비스듬히 돌아서선 무어라 말이라도 할 것처럼 운을 떼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꾹 닫고 산군을 지나쳐 도서관 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단호한 탁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을 쳐다보며 산군은 위환이 보인 행동의 이유를 제가 쌓아온 데이터들로 파악하고자 했으나 그 어떤 식에 대입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위환이 덜렁 들고 간 책을 대출처리하고,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도서관 문을 잠근 다음 교문을 벗어날 때까지도.

 

 

 


 

“도서 반납함은 지금 막혀있는데.”

“………왜?”

 

이왕 들고 나간 것이니 책을 읽은 뒤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던 산군은 다음날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에서 서성이는 그림자를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설핏 기울였다가, 이내 도서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말을 붙였다. 한참 만에 돌아오는 되물음에 당연한 일이라는 듯 답을 되돌려 주었다.

 

“쓰는 사람이 없어서.”

 

위환은 한 주에 도서관을 찾는 사람이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걸 알까. 그러니 도서 반납함이 있어도 굳이 쓰지 않는 것이다. 산군의 새카만 눈이 흘긋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위환의 손에 들린 것은 예상한 대로 어제 들고 간 책이다. 매끄러이 시선을 들어 올린 산군은 한참 동안 말이 없는 위환의 반쯤 가려진 얼굴을 가만 쳐다보았다.

 

“안 들어올 거야?”

“들어가도… 되나?”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왜 안 된다고 생각하지? 어제까지 잘만 들락거린 도서관이 아닌가. 잠시간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지를 기억 속에서 더듬던 산군이 짤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도서 대출 처리라면 내가 했어.”

“…어… 그러냐…? 고맙다….”

“블랙리스트에라도 올라갈 줄 알았어?”

“……”

 

돌아오는 말은 없었지만 산군은 묘하게 위환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경우 붙일 수 있는 표현은 순진하다 일까, 순수하다 일까 따위의 시시껄렁한 생각을 흘려보내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덤덤한 낯을 내비치던 산군이 돌아서며 도서관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누가 봐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거냐 묻는 태였으므로 구태여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결국 도서관 안으로 발을 들인 위환이 책을 든 채 익숙하게 800번 대 책장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 책을 먼저 골라 대출과 반납을 한 번에 하려는 걸까. 산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도서관을 찾는 이는 달리 더 없었다. 산군으로선 그편이 더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평화 속에서 고요히 숨을 돌렸다. 한껏 길어진 여름의 해가 보다 짙은 주홍빛으로 스스로를 불사르기 시작할 무렵 산군은 읽고 있던 책의 뒤표지를 덮었다.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책장 사이를 가로지르던 중 팔랑,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조그맣게 귓가를 울렸다. 뚝 멈춰 선 산군이 두어 차례 눈을 깜빡였다. 이 도서관에 저 말고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그제야 떠올린 탓이다.

 

위환이 빨려들듯 사라졌던 800번 대 책장을 향해 소리 없는 걸음을 옮긴다. 그러고 보면 금세 새 책을 빌려 나갈 줄 알았는데, 뭘 하느라 감감무소식이었던 거지.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서가 구석,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위환은 독서에 여념이 없었다. 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머리칼 틈으로 눈매가 얼핏 드러나 보였다. 산군은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위환을 가만 관찰했다. 머리카락으로 반은 가려진 얼굴에서 희미하게 묻어나는 감정이 과연 즐거움과 흥미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를 가늠하는 사이, 위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친다.

 

“…….”

“…야, 이거… 재밌다….”

 

조금쯤 얼빠진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군의 새카만 눈이 위환이 들고 있는 책 표지를 훑는다. 일전에 이미 읽은 책이다. 머릿속으로 책의 내용을 가벼이 되새기며 산군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가가 글을 흡입력 있게 잘 써. …그거 재미있게 읽었으면 이것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읽어봤어?”

 

마치 다음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양 꼼짝 않고 계속 앉아있는 모습에 꼭 말을 덧붙여 주어야 할 것 같아 다른 책을 입에 올렸다. 허리를 굽혀 책장 아랫단의 무수한 책 가운데서 한 권을 뽑아 내밀자, 느릿한 손길로 책을 받아 드는 위환은 어딘지 모르게 얼떨떨해 보이는 듯했다. 산군은 대수롭지 않게 숙였던 허리를 바로 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이제 도서관 닫을 시간이야. 그거 읽을 거면 대출처리 해줄 테니까 가져 와.”

 

그제야 바닥에서 일어서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온다. 산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을 대출처리한 다음 위환에게 건넸다.

 

“닫을 시간이라면서. 넌 안 가?”

“……. 뒷정리까지 하고 가야 해서.”

 

질문에 답을 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위환을 보며 산군의 고개가 설핏 기울어졌다. 뭔가 더 바라는 대답이 있는 건가. 그러나 산군이 다시 입을 열어 묻기도 전, 위환은 아무 말 없이 도서관 밖으로 곧장 사라졌으므로. 산군은 그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제가 잘못 읽어낸 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괜히 캐물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차례 책을 추천한 이후로 둘 사이엔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대화’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의사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위환은 다 읽은 책을 반납하며 열에 일곱 정도는 산군에게 책 추천을 부탁했다. 도서관을 홀로 지키며 늘 책을 쥐고 살았으니 책을 추천하는 일은 어려운 축에도 들지 않았다. 그동안 위환이 대출해 간 책들의 제목을 훑으면, 대략적으로나마 어떠한 책 취향을 갖고 있는지 파악이 가능했으니까.

 

“넌 무슨 기계 같다. 책 추천해달라고 해도 말문 한 번 안 막히네.”

“네가 그동안 빌려 간 책 제목들 훑으면 파악할 수 있어. 네 독서 취향.”

“내 말은 그게 기계 같다는 거다, 권로봇.”

 

위환의 교복 가슴팍에 달린 명찰에는 녹색 띠가 있다. 녹색은 2학년의 색이다. 산군의 명찰엔 3학년임을 알리는 파란색 띠가 있다. 딱히 위환에게 존대를 들어야겠다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조금 신기한 건 사실이었다. 으레 1, 2학년 학생들은 명찰 상단의 띠를 확인하면 존대를 하곤 했기 때문이다.

 

“너 1년 꿇었어?”

“아니?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냐?”

“말 편하게 하길래.”

“설마 선배 취급 꼬박꼬박 받고 싶냐?”

“아니.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어.”

“그럼 왜?”

“그냥. 다른 애들이랑 다르니까. 신기해서.”

 

그래. 산군이 본 위환은 학교의 다른 학생들과 사뭇 다른 구석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는 점도 그랬지만, 저와 대화하는 일을 전혀 꺼림칙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 산군은 학생들 사이에서 ‘권산군에겐 어딘지 모르게 묘한 구석이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고 있음을 알았다.

 

어려서부터 줄곧 자라온 동네고, 인구 이동이 그리 잦은 대도시도 아니었으니 학생 대부분이 두어 다리만 건너도 서로의 친구거나 하다못해 얼굴 정도는 알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 탓에 모두가 어렸을 적의 일이라 해도 쉬쉬하며 아는 것이다. 한때 산군이 기묘한 말을 하곤 했단 걸. 물론 고등학생이 된 산군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이 학우들과 적당한 교우관계를 유지했고, 대다수가 암묵적으로 산군의 연극 아닌 연극에 동조했다.

 

그리하는 편이 서로가 피로하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 테지만, 십 대란 본디 많은 부분에서 미숙한 점이 두드러지는 때이기도 했으므로 산군과 같은 반이 되었던 급우들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되도록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하여 저와는 가능한 대화하지 않으려 하는 또래 사이에서 공위환이란 존재는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턱은 그렇게 걸터앉는 곳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어디 앉던, 책만 잘 읽히면 그만 아니냐. 꼬우면 너도 올라와라? 권로봇.”

 

대화의 빈도와 비례하여 늘어난 게 있다면 바로 위환이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일 터였다. 변화를 맞이하는 사이 공기는 점점 후덥지근한 열기를 품어가고 있었고, 학교 매점에선 얼음컵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이즈음 산군은 위환이 저와 비슷하게 학교의 울타리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는 아웃사이더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좀처럼 찾는 이가 드문 도서관을 밥 먹듯 드나들 이유가 없으니까.

 

빨리 옆자리로 올라오라는 듯 창턱을 탁탁 두드리는 손짓에 작게 한숨을 내쉰 산군이 읽으려던 책을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때마침 열어둔 창에서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 든다. 제아무리 책이 가득한 도서관이라 할지라도 환기 정도는 해주어야 했으니 종종 창문을 활짝 열어 바깥의 공기를 들이곤 했다. 바람결을 따라 앞머리가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산군은 개의치 않고 위환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다음엔 의자에 앉아서 읽어.”

“……”

 

산군은 책을 펼쳐 들며 무심한 투로 내뱉었으나 위환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 거리에서 안 들렸을 리가 없을 텐데. 의아한 빛으로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산군이 옆으로 고갤 돌렸다. 호기심 스민 붉은 눈이 고작 한 뼘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했던 걸까. 그 시선의 끝이 펼쳐진 책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과 위환이 후다닥 멀어진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또, 뭐 이상한 거 읽고 있나 싶어서.”

“근대 유럽의 해부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려주는 책이야.”

“진짜 이상한 거 읽고 있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동안 산군의 시선은 위환의 손끝에 가 닿아있었다. 보려고 펼쳐두었을 페이지 위에서 조금쯤 꼼지락대고 있는 모습이, 산군이 쌓아온 데이터에 의하면 머쓱해하는 반응과 꼭 맞아들었다. 궁금했다. 무엇에 머쓱해하는 중인지. 그러나 산군은 구태여 질문하지 않았고 위환도 굳이 자신의 머쓱함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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