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point
뷔넨 드라마(2020), 레나트
귀환은 당당하지 않았다. 적어도, 레나트의 귀환은 그러했다. 마음속에 조그맣게 지펴진 의혹의 불씨가. 일말의 양심이 외쳐대는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소리가. 낙숫물을 맞은 수면처럼 파동을 일으키며 번져나갔다. 5구역의 방벽 그 경계에 존재했던 진실에서는 부패한 시취가 진하게 묻어났다. 단백질이 분해되며 내뿜는 그 지독하고 끔찍한 냄새가 귀환하는 내내 그림자를 따라와, 발목을 휘감고 족쇄처럼 걸음에 무게를 더했다. 매키의 실체와 그 아래로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연합정부를 향한 끈이, 군인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살아왔고 군인으로서 살아온 레나트라는 존재의 기반을 흔들었다. 문득 미약한 멀미가 일어 레나트는 깊은 숨을 내뱉었다. 희부옇게 형상화 된 숨결이 녹아내리듯 흩어진다.
보우먼 가문은 바벨 이전의 때부터 이어져 온 뼈대가 굵은 군인 집안이었다. 보우먼의 성을 가진 많은 이들이 군부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다. 부모님의 부모님, 조부의 아버지, 그 윗대의 위 역시도 군인이었노라 어릴 적 지겹게 들어 온 이야기였다. 레나트가 세상을 향한 첫 소리를 토해내기 전부터 그의 앞에는 군인의 길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너도 자라면 쉘터를 지키는 군인이 될 거란다.’ 부모님은 어린 레나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시때때로 조곤 거렸다. 마치 마법을 거는 주문처럼 느껴지는 그 한마디를 들으면 레나트는 기저를 알 수 없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스스로 걷고, 뛰고, 매달려 버틸 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레나트는 부모님이 오로지 저만을 위해 짜놓은 훈련 프로그램을 소화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것을 무조건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소유라고 교육받았으므로. 시키는 대로 프로그래밍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열세 살, 열네 살, 이윽고 열다섯이 되었을 쯤 레나트는 개미지옥 같은 무력감의 뿌리가 박탈당한 자유에 닿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가져본 적 없는 것을 ‘박탈당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옳은 표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던 확신은 기어이 자유는 제게 허락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 닿았다. 그러자 어느 책에서 읽은 한 문장이 강렬한 계시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든 인간은 자유로울 권리가 있으며, 저마다의 삶을 결정할 자유의지를 가진다.]
자유로울 권리와 삶을 결정할 자유의지. 레나트가 갖지 못한 것들. 모든 인간이 가진다는 것을 자신은 왜 가지지 못 했는가?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수십의 낮과 밤을 소모한 끝에 레나트는 어렴풋하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열다섯의 레나트는 자신이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무언가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또한 알았다. 앞선 시간을 살았던 보우먼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자신이 누리고 있었다. 그러니 자유는 그 대가인 셈이다. 저울의 이쪽과 저쪽에 각각 놓인 자신의 삶과 자유. 더 무거운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했다. 애초에 갖지 않을 수는 있어도, 가진 것을 내려놓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한 저울질 끝에 레나트는 군인이 되어야 할 운명을 받아들인다. 선대가 일궈놓은 것을 누리며 그 대가로 자유의 박탈을 납득한다. 수용의 결과로 레나트에게는 또 하나의 형구가 지워진다. 누려온 만큼 다시 쌓아올려 보우먼의 이름을 후대로 이어야 할 의무가.
그리하여 한 명의 군인으로 완성되어진 레나트는 5구역에서 마주한 진실에 의해 흔들리는 기반의 진동이 버겁다. 수십의 목숨 값으로 이루어진 진실을 앞에 두고 눈과 귀를 막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면 자신의 윤택한 삶은 순항할 것이다. 그러나 코를 덮어 가려도 진동하는 시취만은 지독하리만큼 선연해서, 진실을 품고 귀환한 레나트는 두어 밤의 불면 끝에 외면하지 못하고 수화기를 든다. 자신이 지금껏 따라온 군부를 향한 실낱같은 한 줄기 믿음을 쥐고. 단조로운 연결음을 들으며 레나트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행위는 감정을 배제하지 못한 어리석은 판단이다. 이미 아는 진실을 확인 사살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보세요.]
“……아버지.”
[무사 귀환 했다는 것은 들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
또 한 번 미약한 멀미가 일었다. 둔하게 일렁이는 시야에 레나트는 차라리 눈을 내려감는다.
“……프로젝트 뷔넨 드라마. 알고 계셨습니까.”
[……. 알아선 안 될 걸 알고 있구나.]
의심이 확신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그 무게에 비해 지나치게 무미건조했다. 부모님은, 적어도 아버지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싸늘하기만 하던 위험지대 바깥의 냉기가 발 아래로 스미는 듯 했다. 눈꺼풀 안쪽의 어둠과 연구소의 별관에서 맞닥뜨렸던 어둠이 치환되어 펼쳐진다. 총성과 누구의 것인지 분간되지 않는 고함, 요위스 소위의 음성이 한데 엉망으로 뒤섞여 귓가에서 쟁쟁 우는 것 같았다. 억지로 움켜쥐고 있던 실낱같은 믿음이 결국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황녹색 눈이 어둠을 걷고 드러나 번뜩인다.
[그걸 누가 또 알고 있지?]
“단독행동으로 알아낸 사실입니다. 진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차마 어디에도 말할 수 없더군요. …안타레스의 일도 알고 계셨습니까.”
[……. 네가 알 필요 없는 것들이다. 잊어라.]
레나트는 싸늘히 조소했다. 그동안 제게 있어 상부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심심찮게 떠도는 소문처럼 명령이라면 가족의 등에도 칼을 꽂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무겁디무거운 진실을 은폐하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많은 시체를 밟고는 도저히 모른 척 나아갈 수 없었다.
"알면서도…묵인하신 거군요."
[…….]
“저는 지금부터 제 앞에 놓인 길을 따르지 않을 겁니다.”
[레나트 보우먼 중사.]
“제가 가진 의무를 버리는 대가로 생사여탈권을 드리겠습니다. 직접 저를 고발하고 총살하시든, 지금껏 해왔듯이 절 묵인하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레나ㅌ…]
거칠게 내려 놓인 수화기가 제자리에서 튕겨 나와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어느 틈엔가 싸늘하게 식은 손으로 눈을 덮어 가린 레나트가 가만히 숨을 골랐다. 차가운 분노가 머리를 식혔다. 어떠한 의무감, 혹은 부채감 같은 것이 점차로 선명해졌다. 당장 군인으로서의 신분을 벗어 던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직에 남아 진실을 파헤쳐야 했다. 이 일련의 일들이 정확히 누구에게까지 닿아있는지 파악해야 했다. 아니,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연합정부라는 이름으로 묶인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 안에서 썩은 부위를 얼마나 도려낼 수 있으며, 또 어디까지 도려내야 하는지가 과연 중요하긴 할까. 곰팡이가 피어난 것은 그 부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체가 완전히 장악된 후에야 비로소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더 깊고 지독한 진실이 잔류해있으리라. 그러니 레나트가 해야 할 것은 단 두 가지였다. 끊임없이 파헤치고 되새기는 것.
하여 레나트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실에 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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