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훌라바바
♪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라 이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사유가 있으나 개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동족과의 감정적 유대를 감각하고 꾸준히 증명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알게 된 지 고작 십여 분밖에 되지 않은 상대에게도 그럴 수 있고, 본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상대에게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한 개인을 구성하는
사고하는 존재라면 누구든 꿈을 꾼다. 어느 대학 강의에서 교수가 칠판에 정갈히 쓴 문장을, 카림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그 때가 정확히 천팔백 몇 년도 즈음이었는지, 어느 대학의 어떤 교수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 문장이 유난히 기억에 남은 이유를 꼽으라면 글쎄. 당시엔 신선한 말이었기 때문일까. 칠판에 그 한 문장을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낯선 타국의 냄새가 밴 공기를 처음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뱉어냈을 때. 괜한 구박을 들으면서도 부득불 챙겨온 필름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순간을 가둘 때. 페리 갑판 아래로 시선을 내려 누런 흙빛의 강물조차 포말은 희게 부서진다는 걸 알았을 때. 평소라면 서지 않았을 긴 대기줄을 따라 종종종 움직여 근방의 명물이라는 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묻지 마. 나 지금 숨 쉬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 “대답이 부정이라면 그냥 잘 가라고 인사해줘, 핀. 그거면 돼.” “……나는 그 어떤 대답도 되돌려줄 수 없어, 닐. 하지만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해. 죽지 마.” 어떤 다정은 마음을 죽이는 맹독이 된다. 그 다정한 선고가 닐의 마음을 깊이 후벼팠
소실점을 처음 발견한 것은 미술가였다. 그의 이론은 건축가를 만나 더욱 발전되었고, 여러 화가의 손을 거쳐 보급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화가나 건축가에게 원근법과 소실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소실점을 확인하게 되면 공간의 입체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닐은 소실점의 정의를 떠올릴 때면 종종 모순을 느끼곤 했다. 평행으로 된 두 선이 멀리 가서
경고. 비행 모듈 다운. 비상착륙에 대비하세요. 함체 하단에 다량의 액체가 감지됩니다. 해상 운항 모드를 전개합니다. 아득한 정신과 섬뜩한 고통 사이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멀어지려는 의식을 간신히 현실로 붙들어 맨다. 몸이 들썩이도록 터진 기침을 뱉어내면 복부에서 뜨거운 것이 꿀럭 넘쳐 흘렀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시야는 검었고, 널을 뛰듯 어
모든 사고하는 존재는 감정을 가진다. 감정의 크기는 각각 다를지라도 희노애락에 뿌리를 둔 다양한 갈래의 감정을 갖는다. 물론 드물게 감정을 갖지 못한, 혹은 잃어버린 경우가 있긴 했으나 어쨌든 진리에 가까운 한 문장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카림 또한 빗겨가지 못하는 명제였다. 지구를 담은 듯한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되면서, 카림은 제 안에서 피어
*[슬픔에 대하여]에서 이어집니다. 목숨을 다할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을 거라고 단언한 이래, 카림은 천 년의 시간을 보냈다. 단언은 확언이 되어갔고 그어놓은 선은 견고한 벽이 되었다. 그사이 카림의 옆자리엔 여섯 명의 부인이 차례로 머물렀다 떠나갔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었고, 사탄의 계약자이거나 그가 악마라는 것을 알고도 스스로가 원해 유희에
디디가 자취를 감추고 한 달을 조금 넘겼을 때, 카림은 더 참지 못하고 추적에 나섰다. 이정도면 많이 참아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햇수가 천 년을 넘어가며 분노의 임계점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는데, 모처럼 뚜껑이 열릴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그가 한국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거리에 선 채 카림은 저를 흘긋거리며 지나는 인간들을 무심한
대화를 주고받지 않는 날이 늘었다. 주고받는 대화라 해 봐야 아주 간단하고 일상적인 것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딱히 서로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사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가 서로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은 삼가자 말했지만, 카림은 밖으로 나도는 일이 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차오르는 그에 대한
귀환은 당당하지 않았다. 적어도, 레나트의 귀환은 그러했다. 마음속에 조그맣게 지펴진 의혹의 불씨가. 일말의 양심이 외쳐대는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소리가. 낙숫물을 맞은 수면처럼 파동을 일으키며 번져나갔다. 5구역의 방벽 그 경계에 존재했던 진실에서는 부패한 시취가 진하게 묻어났다. 단백질이 분해되며 내뿜는 그 지독하고 끔찍한 냄새가 귀환하는 내내
단편으로 조각조각 끊어져 간신히 남아있는 삶의 가장 앞에 선 기억은 그랬다. 손가락이 가느란 손, 조금은 성급하게 이끄는 힘, 처음 맡아보는 지독한 비린내. 감각으로만 남아 어렴풋한 기억의 조각을 곱씹어보면 그것은 버려지던 날의 기억일 것이다. 아마도 생선을 깔아둔 좌판이 근처에 있었을 테고, 죄를 짓는다는 느낌에 조급했던 건지도 몰랐다. 가느란 손은
“2박 3일 예약 확인되셨고, 저희 측의 착오로 원래 예정되어 있던 방이 준비가 덜 되어서 룸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드렸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아… 감사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식에 나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다 카드키를 받아 챙기곤 짧은 인사를 남긴 뒤 돌아섰다. 처음으로 혼자 해 보는 여행인지라 친구들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숙
隱刪. 수수께끼와 같이 숨은 것을 깎아내어 세상에 드러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은 기자가 되었다면 대성할 운명이 아닌가 하고, 은산은 시시때때로 생각했다. 은산이라는 이름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 조부께서 직접 옥편을 찾아가며 지어준 이름이라 들었다. 그러나 조부의 직업 아닌 직업을 생각하면 집안에서 기자가 나오길 바랐을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은산은 더더욱 미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