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훌라바바
경고. 비행 모듈 다운. 비상착륙에 대비하세요. 함체 하단에 다량의 액체가 감지됩니다. 해상 운항 모드를 전개합니다. 아득한 정신과 섬뜩한 고통 사이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멀어지려는 의식을 간신히 현실로 붙들어 맨다. 몸이 들썩이도록 터진 기침을 뱉어내면 복부에서 뜨거운 것이 꿀럭 넘쳐 흘렀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시야는 검었고, 널을 뛰듯 어
모든 사고하는 존재는 감정을 가진다. 감정의 크기는 각각 다를지라도 희노애락에 뿌리를 둔 다양한 갈래의 감정을 갖는다. 물론 드물게 감정을 갖지 못한, 혹은 잃어버린 경우가 있긴 했으나 어쨌든 진리에 가까운 한 문장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카림 또한 빗겨가지 못하는 명제였다. 지구를 담은 듯한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되면서, 카림은 제 안에서 피어
*[슬픔에 대하여]에서 이어집니다. 목숨을 다할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을 거라고 단언한 이래, 카림은 천 년의 시간을 보냈다. 단언은 확언이 되어갔고 그어놓은 선은 견고한 벽이 되었다. 그사이 카림의 옆자리엔 여섯 명의 부인이 차례로 머물렀다 떠나갔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었고, 사탄의 계약자이거나 그가 악마라는 것을 알고도 스스로가 원해 유희에
디디가 자취를 감추고 한 달을 조금 넘겼을 때, 카림은 더 참지 못하고 추적에 나섰다. 이정도면 많이 참아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햇수가 천 년을 넘어가며 분노의 임계점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는데, 모처럼 뚜껑이 열릴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그가 한국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거리에 선 채 카림은 저를 흘긋거리며 지나는 인간들을 무심한
대화를 주고받지 않는 날이 늘었다. 주고받는 대화라 해 봐야 아주 간단하고 일상적인 것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딱히 서로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사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가 서로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은 삼가자 말했지만, 카림은 밖으로 나도는 일이 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차오르는 그에 대한
귀환은 당당하지 않았다. 적어도, 레나트의 귀환은 그러했다. 마음속에 조그맣게 지펴진 의혹의 불씨가. 일말의 양심이 외쳐대는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소리가. 낙숫물을 맞은 수면처럼 파동을 일으키며 번져나갔다. 5구역의 방벽 그 경계에 존재했던 진실에서는 부패한 시취가 진하게 묻어났다. 단백질이 분해되며 내뿜는 그 지독하고 끔찍한 냄새가 귀환하는 내내
단편으로 조각조각 끊어져 간신히 남아있는 삶의 가장 앞에 선 기억은 그랬다. 손가락이 가느란 손, 조금은 성급하게 이끄는 힘, 처음 맡아보는 지독한 비린내. 감각으로만 남아 어렴풋한 기억의 조각을 곱씹어보면 그것은 버려지던 날의 기억일 것이다. 아마도 생선을 깔아둔 좌판이 근처에 있었을 테고, 죄를 짓는다는 느낌에 조급했던 건지도 몰랐다. 가느란 손은
“2박 3일 예약 확인되셨고, 저희 측의 착오로 원래 예정되어 있던 방이 준비가 덜 되어서 룸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드렸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아… 감사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식에 나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다 카드키를 받아 챙기곤 짧은 인사를 남긴 뒤 돌아섰다. 처음으로 혼자 해 보는 여행인지라 친구들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숙
隱刪. 수수께끼와 같이 숨은 것을 깎아내어 세상에 드러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은 기자가 되었다면 대성할 운명이 아닌가 하고, 은산은 시시때때로 생각했다. 은산이라는 이름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 조부께서 직접 옥편을 찾아가며 지어준 이름이라 들었다. 그러나 조부의 직업 아닌 직업을 생각하면 집안에서 기자가 나오길 바랐을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은산은 더더욱 미궁